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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의 상생. 공영 대북정책 적용: 예멘 통일사례 연구

 

예멘의 사회적, 경제적 통합과정과 시사점

홍성민(Korea-Yemen Center 회장)

목 차

1. 815 평화통일 3단계 방안의 의의

2. 민족공동체의 개념과 예멘의 민족

3. 예멘 통합의 배경과 특성

4. 남북 예멘의 통합과정과 통일

5. 예멘의 사회, 경제적 통합

6. 예멘통일의 시사점

 

<요 약>

1989년 남예멘의 개혁과정은 우리 한반도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까지 체제전환이나 개혁-개방에 대해 커다란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는 북한이 개혁을 서두를 시점은 <대내적인 경제적 어려움>이 극에 달해 돌파구를 찾을 수 없을 경우에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러한 상황이 전개된다면, 북한도 예멘과 같이 통일이라는 수단을 염두에 두고 개혁 프로그램을 전개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전제조건은 외세, 특히 <중국과 미국>의 태도변화와 협력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그러나 예멘의 경우처럼, <경제적 혼란>이 통일과 연계되어 ‘개혁-개방’에 관한 사전준비없이 급속히 통일이 진행되고 남한이 이를 무조건 수용한다면, 남북한은 통일이후 또다시 무력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항구적인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며, ‘한민족공동체’를 정점으로 하는 자주적 평화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통일은 상대방의 지위를 서로 인정할 때 대등한 위치에서 달성되는 것이다. 한민족 자주통일의 전제는 <통일 역사 및 국어교과서>의 편찬, 보급 및 교육이 필수조건이다. 민간부문에서의 자유로운 상호방문 또한 민간협력을 확대하는 지름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자대신 주민증’만으로 남북한 상호방문이 자유롭게 이뤄져야 하며, 민간기업들의 자유로운 합작회사 설립도 이뤄져야한다. 민족공동체의 동질성 회복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를 서로 인정하고 남북간 TV 공동시청, 드라마의 공동제작 및 방영 등이 하루속히 이뤄져야 한다. 중동지역에서 한국의 드라마, 특히 <사극(史劇)>의 열풍이 한류(韓流)를 몰고 온 점을 상기하면, 민족공동체의 동질성 회복도 매스미디어나 휴대전화 및 IT분야의 개방에서 그 속도를 단축시킬 수 있다.

현재 진행중인 남북교류협력은 지나친 대북의존적인 측면이 있기에, 그 만큼 위험부담도 크다. 더욱이 G to G 방식으로 이뤄지는 교류협력은 남한기업들의 경제협력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북한노동자들도 자유롭게 남한의 기업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문호(門戶)가 개방되어야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같은 언어, 민족, 역사를 갖고 있는 남북한은 서로 장점을 이용할 수 있는 점이 많다. FTA가 강조되고 있는 국제적인 추세에서 볼 때, <경제협력>이 원만히 이루어져 <경제통합>이 성사된다면, 최소한 EU형태의 통합은 가능해지리라 보며, 그 같은 상황이 정착된다면, 남북한의 정치, 경제적 협력관계는 <사회통합>으로 진전되어 자주적 <민족통일>이 달성될 것이다.

 

 

1. 815 평화통일 3단계 방안의 의의

□ 의미: 통일을 대비한 실천적 준비

- 이명박 대통령은 제65주년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 경축사를 통해 집권 후반기의 국정운영 구상을 제시.

- 그 가운데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평화공동체 → 경제공동체 → 민족공동체'로 이어지는 3단계 통일방안을 언급하고, 통일세 등 현실적 준비에 나설 필요성을 강조.

- 남북관계와 관련하여, 집권이후 처음이라 할 수 있는 1994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계승한 3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 큰 의의 → 남북통일에 관한 보다 적극적인 자세

< 1> 평화통일 3단계 방안 (815 경축사, 2010)

평화공동체

(평화공존체제수립)

경제공동체

(한반도경제권)

민족공동체

(평화통일달성)

▶ 한반도 비핵화 선결

- 그랜드바겐을 통한 구체적인 한반도 비핵화 달성

-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고 군사적 긴장 해소를 통한 평화체제를 수립

▶ 남북한 경제통합 준비

- 포괄적 남북 교류협력을 통한 북한경제의 발전 유도

- ‘비핵.개방.3000’을 본격 가동하여 북한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남북간 경제격차를 줄임

▶ 한민족의 자유와 기본권보장- 민족공동체에 대한 법제도의 통합- 한민족 모두 존엄과 자유 및 삶의 기본권을 보장

- 단일 민족공동체 실현을 통한 통일 달성

출처: 청와대 브리핑룸 및 각종 언론자료.

□ 핵심: 비핵화 선결이 통일의 관건

- 이번 3단계 평화통일 방안은 1989년 노태우 정부가 제시한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 1994년 김영삼 정부의 ‘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을 계승,

- 이 대통령이 집권초기부터 고수해온 대북구상, 즉 ‘비핵, 개방, 3000'의 원칙을 견지하였기에 기존 입장의 변화는 없음.

- 다만 ‘한반도 비핵화’를 선결조건으로 민족공동체달성을 통한 실천적 통일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이 특색.

⇒ ‘평화→경제→민족공동체’ 평화통일 3단계 방안은 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인 ‘비핵, 개방, 3000’이나 ‘그랜드바겐’과 같은 맥락으로 ‘선() 비핵화’를 조건으로 하고 있음.

- “남북간의 포괄적 교류ㆍ협력을 통해 북한경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고 남북한 경제통합을 준비하는 ‘경제공동체’를 이뤄야 한다”는 점을 강조. → 일종의 FTA 같은 협정을 통한 경제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국제적 차원의 남북교류 시사.

- 더 나아가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민족간 제도적 장벽을 허물고 한민족 모두의 존엄과 자유, 삶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민족공동체'를 실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

- 청와대는 평화 및 경제공동체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화해협력단계’를, 민족공동체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남북연합단계’와 ‘통일국가단계’를 각각 상정했다고 설명.

-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실천적 준비가 필요하며, 일종의 <통일세> 같은 재원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

- 이번 경축사 내용의 핵심은 ‘자율, 공정, 책임이라고 하는 3각 기둥’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공동체사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해질 수 있는 안전 기둥을 만들자는 것이 핵심.

□ 평가: 경제협력이 통일의 지렛대

-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한 노태우 정부의 정책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현 정부의 핵심 대북공약인 ‘비핵, 개방, 3000'원칙이 가미됨.

- 1989년 노태우 정부가 발표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를 구성하는 하나의 통일국가를 목표로 하고, 과도적인 단계로 ‘1민족 2국가 2정부체제’라는 남북연합을 상정함.

- 김영삼 정부는 1994년 이를 발전시켜 ‘자주, 평화, 민주’를 기본원칙으로 하는 ‘3단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시.

- 2010년 광복절 ‘평화통일 3단계 방안’은 김영삼 정부의 ‘3단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구체화 시킨 것으로, 평화 및 경제공동체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화해협력단계>, 민족공동체는 <남북연합단계와 통일국가 단계>를 통합해 각각 상정한 것으로 풀이됨.

- 가장 큰 특징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경제논리>를 접목시켰다는 점.

- ‘평화통일 3단계 방안’은 ‘남북연합 → 연방 → 완전통일’이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통일방안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경제협력을 지렛대>로 삼음.

- 한편 노무현 정부 시절엔 김대중 정부의 통일정책을 큰 틀에서 유지하며 ‘화해협력정책’을 ‘평화번영 정책’으로 계승함.

< 2> 역대 정권별 통일방안

정 부

통일 방안

노태우 정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 남북연합(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가 목표)

김영삼 정부

교류협력, 남북연합, 통일의 3단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김대중 정부

‘남북연합→연방→통일’의 3단계 평화통일방안

노무현 정부

‘화해협력정책’+‘평화번영 정책’의 4단계 통일방안

이명박 정부

‘평화공동체→경제공동체→민족공동체' 3단계 통일방안

□ 실천적 단계: 국제사회 공조를 통한 한반도 비핵화를 구현

- 평화공동체는 남북간 대화와 교류를 통해 북한의 변화 유도 및 평화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것이 주 목적이며, 국제사회의 공조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자는 것.

- 경제공동체는 이 대통령이 제시했던 ‘현대판 대북 마셜플랜’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개성공단을 포함한 남북 교류협력의 포괄적 확대와 ‘비핵, 개방, 3000’의 본격 실천을 의미.

□ 통일비용: 2,000조원 이상

- 통일비용은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에서는 2300조원, 미국 랜드연구소 연구에서는 2006조원, 조세연구원 연구(2009)에서는 20년 동안 GDP 7-12%가 소요될 것으로 전망.

- 1990년 통일한 독일의 경우 3천조원 정도를 쏟아 부었는데 통일직후 1년 동안 소득세와 법인세에 각각 7.5%, 그 후 1995년에 각각 5.5%씩을 징수했다. 독일의 경우는 대부분 직접세로 통일비용을 충당.

- 서독의 경우 1990년 통일이 될 때까지 10년 동안 매년 100억달러를 모금한 전례가 있음. 그러나 통일자금이 부족해 통일이후 20년간 약 2조유로(3000조원)를 지출함으로써 경제적 타격.

- 피터 벡 미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센터 연구원은 한국의 통일비용을 최대 5조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

- 삼성경제연구소(2005)는 통일비용을 5458000억원으로 추정.

2. 민족공동체의 개념과 예멘의 민족

□ 민족: 문화적 특징이 바탕

- 민족(民族)이란 남들과 구별되는 몇 가지 문화적 공통사항을 지표로 하여 상호간에 전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문화적 공통사항에는 언어·종교·세계관·사회조직·경제생활, 그 밖의 생활양식 등이 포함 됨.

 

cf. 인종이 신체적 특징을 기준으로 하여 인간을 분류하는 범주라고 한다면 민족은 기본적으로 문화적 특징을 바탕으로 하여 설정된 범주.

 

- 민족이라는 관념 자체가 문화의 소산.

- 민족을 분류할 때 언어가 주된 기준으로 사용되는 것은 언어가 민족 구성원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대전제이고, 또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심성(心性)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

- 따라서 언어를 기준으로 하여 게르만 민족이니 라틴 민족이니 하는 구분을 할 수 있으며,

- 경제생활을 기준으로 하여 농경민족이니 유목민족이니 기마민족이니 하고 구분할 수가 있으며, 문화의 발전 정도에 따라 미개민족과 문화민족으로 구분할 수 있음 (브리태니카).

□ 예멘민족의 역사적 기원은 시바 왕국(Kingdom of Sheba)으로 거슬러 올라감.

< 3> 예멘의 역사와 분단

남예멘

북예멘

비고

BC 950-115 : 고대 시바 왕국(Kingdom of Sheba)

AD 6세기 : 남아라비아 왕국 융성, 힘야르 왕조 통치

525 : 이디오피아는 힘야르 왕국을 정복

575 : 페르시아의 침략에 의해 정복

628 : 이슬람을 받아들임

9세기 : 야흐야 알하디가 라시드(Rassid) 왕조 성립

고대 단일국가

1517-1918 : 오스만 터키(Othman Turkey)의 지배

식민지

1857년 영국의 아덴(Aden) 점령으로 남북예멘의 영토분단 시작

1918년 오스만 터키 세계 제1차 대전에서의 패배로 북예멘 지역에서 이맘(Imam) 왕정 성립

외세에 의한 분단의 시작

196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남예멘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South Yemen; PRSY) 성립

1962년 북예멘 쌀랄(As-Salal) 대령 쿠데타 성공, 예멘아랍공화국(Yemen Arab Republic; YAR) 성립

남북 예멘의 분단 고착

3. 예멘 통합의 배경과 특성

예멘이 통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은 1) 동구 및 소련의 개방화, 2) 주변아랍국들의 중재와 압력, 3) 아랍민족주의, 4) 종족, 언어, 종교를 포함한 민족적 동질성, 5) 상호 경제협력의 필요성 증대, 6) 정부차원의 지속적인 통일대화 추진 등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남예멘이 사회주의 통제경제의 실패를 자인하고, 북예멘과의 협력을 모색하였다는 점이다.

주요 지하자원이 주로 남예멘에 편중되어 있고 북예멘도 농업 이외에는 확실한 소득원이 없었기에 양국 모두가 경제협력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였다.

예멘의 통일은 독일의 <흡수통일>과는 다르게 거의 대등한 관계에서 <선통합-후조정>이라는 통일방식을 취했다.

 

1) 통합의 배경

① 대내적 요인

예멘통합의 대내적 요인은 첫째로 통합을 이루겠다는 양국 지도자들의 자세, 둘째로 (종족, 언어, 종교를 포함한) 민족적 동질성 유지와 아랍 민족주의(Arab Nationalism)에 기반을 둔 강력한 통합의지, 셋째로 1980년대 중반이후 개발된 석유부문에 대한 남북 예멘간 상호 경제협력의 필요성 증대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② 대외적 요인

대외적 요인으로는 첫째로 동구 및 소련의 개방화에 따른 국제질서의 변화, 둘째로 미소(美蘇)의 데탕트로 강대국 영향력 감소, 셋째로 아랍연맹(Arab League)과 리비아를 비롯한 주변 아랍국들의 중재와 역할 등을 들 수 있다.

2) 통합의 특성

예멘통합은 30개월간의 잠정적인 과도기를 둔 <선통합 · 후조정> 형태로 외세(外勢), 특히 강대국에의 의존이 비교적 적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합의통일’이라는 점이 그 특성.

< 4> 예멘 통일의 배경과 특성

통합의 배경

* 동구 및 소련의 개방화에 따른 국제 질서의 변화

* 주변아랍국들의 중재와 압력

대외적 요인

* 통합을 이루겠다는 양국 지도자들의 자세

* 종족, 언어, 종교를 포함한 민족적 동질성 유지와 아랍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아랍 통합을 위한 강력한 통합의지

* 남북 예멘간 상호 경제협력의 필요성 증대

* 정부 차원의 지속적인 통일대화 추진

대내적 요인

특성

* 30개월간의 잠정적인 과도기를 둔 <선통합후조정> 형태

* 외세, 특히 강대국에의 의존이 비교적 적은 상태에서 이루어 진 통합

* 예멘인들은 ‘통일’(unification)이라는 용어 보다는 ‘와히드’, 즉 하나(one)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통일을 당연한 ‘동질성의 회복’으로 받아들임

합의적 통합

3) 지속적인 남북 예멘의 통합노력

통합을 위한 노력으로는 첫째로 민간교류의 활성화, 둘째로 지속적인 경제협력의 추진 및 사회, 문화적 협력강화 등을 들 수 있다.

① 민간 교류의 활성화

1979 [쿠웨이트 정상회담]이후, 문화, 예술단체들의 상호 방문을 시작으로, 1980 [주민 왕래에 관한 협정]에 합의하여 1983연말부터 주민왕래가 이루어졌으며, 1988 [통행자유화협정]으로 자유로운 민간인 왕래가 이루어졌다.

② 지속적인 경제협력의 추진

1980 [아덴합의서] 채택과 동년 [예멘관광주식회사의 공동 설립에 관한 협정]에 합의하였고, 1983년 교역 활성화를 위한 [특별공동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988년에는 [남북예멘간 전력체계통합]이 이루어졌고, 1989 [예멘 석유·광물개발주식회사] 설립하여 경제협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③ 사회, 문화적 협력 강화

1980 [공보, 문화, 교육 분야 업무조정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언론 자료의 개방, 문화, 예술인들의 상호 방문 및 공동작업이 이루어졌고, 공보 출판물의 교환, 공동 전시관의 설립, 공동 문예주간의 설정 등이 이루어졌다. 1983 [단일 역사 교과서 제작 사용]에 합의함으로써 1984/85 학년도부터 모든 학교에서 남북 단일 역사 교과서를 공동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 5> 남북 예멘의 통합노력

통합 노력

민간 교류의 활성화

* 1979 [쿠웨이트 정상회담] 이후 문화, 예술단체들의 상호 방문* 1980 [주민 왕래에 관한 협정] (1983연말부터 시행)

* 1988 [통행자유화협정]

지속적인 경제협력의 추진

* 1980 [아덴합의서] 채택

1980 [예멘관광주식회사의 공동 설립에 관한 협정]

* 1983년 교역 활성화를 위한 [특별공동위원회] 설치

* 1988 [남북예멘간 전력체계통합]

* 1989 [예멘 석유광물개발주식회사] 설립

사회, 문화적 협력 강화

* 1980 [공보, 문화, 교육 분야 업무조정 에 관한 합의서]

- 언론 자료의 개방, 문화, 예술인들의 상호 방문 및 공동 작업

- 공보 출판물의 교환, 공동 전시관의 설립, 공동문예주간의 설정* 1983 [단일 역사 교과서 제작 사용]

- 1984/85 학년도부터 모든 학교에서 남북 단일 역사 교과서 사용

4. 남북 예멘의 통합과정과 통일

1) 통합의 배경

예멘의 통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 민족간 동질성의 유지, 2) 지속적인 경제협력의 추진, 3) 사회, 문화적 협력의 강화 등 세 분야에서의 협력이 통합의 주된 내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통일을 이루겠다는 예멘인의 의지’, 즉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예멘인들 간의 노력’이 커다란 변수로 작용한 점이다.

예멘은 한국의 분단과는 다르게 남북 예멘인들 간에 동질성 유지를 위한 ‘아랍인 특유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1962년 분단이 고착화되던 시점에도 남북 예멘간 주민 왕래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는 아랍인의 공동체 혹은 동질성 내지 국경 개념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교류도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지만,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단일 역사교과서]의 사용이다. 1984-85학년도부터 모든 학교에서 ‘단일 역사 교과서’를 제작하여 사용함으로써 ‘동질성’의 회복에 큰 도움을 주었고, 통합 이후의 혼란도 감축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2) 통합과정과 통일

1970년대에 들어와서도 정부를 통한 통제는 이루어졌으나, 산악이나 항구를 통한 주민간 왕래는 커다란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972년 통합 논의가 진행되고 난 이후, 특히 1979 [쿠웨이트 정상회담]이후 통합에 관한 논의는 활성화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문화, 예술 단체들의 상호 방문이 이루어졌다. 1986년 남예멘 정변 시에는 약 1만 명에 달하는 군 장교, 당원 및 공무원 등 남예멘인들이 북예멘으로 귀환하여 한때 통합 분위기가 어두워지기도 했지만, 1987년 이중 절반 정도는 남예멘으로 귀환하였다. 1980 6 10 [남북예멘간 주민 왕래에 관한 협정]이 이루어지면서, 1983년말부터 남예멘에서 북예멘으로 가는 사람은 신분증만으로 통과가 가능하였고, 남예멘에서 북예멘으로 가는 사람은 허가증을 소지하면 자유로운 방문이 가능해졌다. 1988 5 4 [남북예멘간 통행자유화협정]의 체결로 국경 검문소를 ‘공동검문소’로 통합하여 설치하였다고, 동년 7 1일부터는 신분증만으로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해졌다.

이와 같이 예멘인들은 이미 1960-70년대를 통하여 국경이나 항구에의 왕래가 자유롭게 이루어진 편이어서, 남북 예멘간의 교역도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하여 이미 진행이 되고 있었다. 경제협력 분야에서의 교류협력도 [쿠웨이트 정상회담]이후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80 5 6 [아덴합의서] 채택 이후, 산업, 광물, 교통, 금융 및 관광 등의 분야에서 합작 및 공동투자원칙이 이루어졌고, 동년 6월 공보, 문화, 교통, 산업상()들 간의 연쇄 회담으로 ‘예멘관광주식회사의 공동 설립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1983 8 18일에는 교역 활성화를 위한 조세 및 관세면제원칙에 합의하여 [특별공동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988년에는 [아랍경제사회개발기금]에서 63백만 달러의 지원을 얻어 전력 체계의 통합을 위한 [남북예멘간 전력체계통합]이 이루어졌다. 1989 1월에는 남북 예멘이 동일하게 출자하여 1천만 달러의 자본금으로 마립과 샤브와 유전을 공동 개발하기 위하여 [예멘 석유광물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교류도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지만,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단일 역사교과서]의 사용이다. 사회통합을 위한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쿠웨이트 정상회담]이 중요한 시점이 되고 있다. 그 후 1980 6 13 [공보, 문화, 교육 분야 업무조정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됨으로써 언론 자료의 개방, 문화, 예술인의 상호 방문 및 공동 작업이 가능해졌으며, 공보 출판물의 교환, 공동 전시관의 설립이 이루어졌고 공동문예주간이 설정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더욱이 1983 8 18일 최고평의회의 결정에 따라 1984-85학년도부터 모든 학교에서 ‘단일 역사 교과서’를 제작하여 사용함으로써 ‘동질성’의 회복에 큰 도움을 주었고, 통합 이후의 혼란도 감축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 6> 예멘의 통합과정

과정

통일여건

협상과정

협상기

(1972-

1978)

* 1972 9월 남 예멘간 국경분쟁이후 리비아의 까다피 대통령 등 아랍국가들의 적극적인 중재로 통일에 관한 논의 시작.

* 1977 7월 북예멘의 알하미드(Al-Hamid) 대통령 암살로 양국간 긴장고조

1972. 10 [카이로 정상회담]

1972. 11 [트리폴리 정상회담]

1973. 9 [알제리 정상회담]

1973. 11 [타이즈호데이다 정상회담]

1977. 2 [카타바 정상회담]

합의기

(1979-

1988)

* 1979 2월 남 예멘간 제2차 국경충돌이후, 3 [아랍연맹평의회]의 중재안에 따라 쿠웨이트에서 양국 정상회담이 재개된 이후

* 1986 1월 남예멘의 정변으로 통합작업이 소강상태에 들어감

1979. 3 [쿠웨이트 정상회담]

1979-80. 특사 교환 및 각료급 회담

1981. 12 [아덴정상회담]

1981. 12 통일헌법 초안 작성

1982-85. 지속적인 실무협상 계속

1988. 4 [타이즈 정상회담]

실천기(1989-

1990)

* 1986 1월 남예멘 정변이후 집권한 알아타스(Al-Attas) 정권의 광범위한 개혁, 개방정책의 추진으로 통합작업이 급속히 진행되어

* 1990 5 22일 통합이 전격적으로 선포됨

1989. 11 [아덴 정상회담]

1989. 12 [통일헌법초안] 발표

1990.1-3 [공동각료회담]

1990. 4 [싸나 정상회담]

1990. 5 [남북예멘 통합]

< 7> 통합이후 통일과정

통 합 이 후 통 일 과 정

비고

1990. 5/22 예멘공화국’(Republic of Yemen) 통합 국가 선포 (북예멘 출신 쌀레가 대통령, 남예멘 출신 바이드는 부통령이 됨)

통합

1990. 5/22 남북예멘을 통합 5인의 최고의사결정기관인 대통령위원회(Presidential Council)를 구성하여 집단지도체제 유지

1991. 5/15 신 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하여 통일헌법 확정 공포, 아덴에 자유지역 선포

1992. 11. 대통령위원회 총선을 ‘93 4월로 연기, -바이드 부통령 수개월간 예멘공화국의 연정참여를 보이코트함으로써 과도기후 하반기부터 분열상을 드러냄

1993. 4/27 통일헌법 복수정당제에 의한 총선 실시로 현 쌀레 대통령 당선, 국민회의당 40%, 사회당과 이슬람당은 각각 20%, 나머지는 무소속이 차지

5. GPC YSP 합병 합의

10/11 의회에서 5인의 대통령위원 재선출

과도기

1994. 5/4 남북 예멘간 내전 발발

5/21 바이드(Al-Baidh) 부통령 분리 독립선언

7/7 북예멘의 승리로 인한 내전의 종결 및 완전한 통일국가 수립

남북전쟁

1994. 9. 국회 헌법안 승인

10. 쌀레 대통령에 재선출, 하디(Hadi) 부통령에 임명됨

10/6 신내각 구성

1995. 6/13 내각 개편

1997. 4/27 통일이후 최초의 총선 국민의회당 압승(국민의회당 187, 예멘개혁당 53, 나세르당 3, 바스당 3, 무소속 54), 28명의 각료 중 무소속 4명을 제외한 전원을 국민회의당 인물로 기용

2000. 5/22. 대내외적인 통일 10주년 기념행사

2010. 5/22. 예멘통일 20주년 기념행사

완전통일

 

5. 예멘의 사회, 경제적 통합

1) 사회적 통합

① 사회적 통합의 배경

북예멘의 정치체제는 이슬람(Islam) 원리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입헌공화국 정치체제를 택하고 있었지만, 남예멘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예멘의 경우 정치이념과 정치체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국가운영은 권력이 소수의 집권층에 편중되었고 부족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남북 예멘간에 이질감이 존재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공통의 아랍어를 사용하며, 아랍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함으로써 양 국민 간에 커다란 문제를 노출시키지는 않았다.

경제체제에 있어서도 북예멘은 자유 시장경제를 남예멘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추구하였지만, 양국 모두 재정자립도가 낮아 해외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남북예멘 모두 아랍권의 원조(援助)와 해외근로자들의 송금(送金)이 그들 경제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북예멘의 경우 약 100만 명에 달하는 해외근로자들로부터 GNP의 약 40%에 달하는 약 17억 달러의 송금이 있었으며, 남예멘의 경우도 약 85천명의 해외근로자들로부터 GNP의 약 70%에 달하는 송금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남북 예멘간에 이질감이 존재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공통의 아랍어를 사용하며, 아랍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함으로써 양 국민 간에 커다란 문제를 노출시키지는 않았다.

국력 면에서도 북예멘은 인구(남예멘의 4배정도)와 군사적 측면에서 남예멘보다 우세하였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양국의 격차(1인당 GNP 1988년 기준, 682달러, 420 달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남북 예멘의 사회적 통합에는 인구(1986년 기준, 북예멘 927만 명, 남예멘 235만 명)와 군사적 측면(1989 6월 기준, 북예멘 총병력 36,500, 남예멘 27,500)에서는 북예멘이 유리하였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 양국 모두 경제적으로 후진국의 상황 하에서 별로 큰 차이 없는 경제적 기반(1988년 기준 GNP; 42.2억 달러, 13.9억 달러)과 아랍-이슬람의 문화와 전통을 공유한 민족의 동질성 유지는 사회적 통합에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② 사회, 문화적 이질감

북예멘은 1970년대 이후 근대적 교육과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봉건적 사회가 해체되고는 있었지만, 부족제도에 의한 전통적 신분제도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남예멘은 영국 통치의 영향으로 도시 지역은 근대화가 이루어진 반면, 내륙지역은 전통적인 부족제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결혼, 직업 등은 아직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70% 정도의 높은 문맹률을 유지하고 있었고, 전통적 아랍-이슬람 관습이 상존하여 가부장적 전통이 유지되고 있었다. 여성이 공무원, 은행원, 판매원, 교사 등의 직업에 종사할 수 있었기에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는 다른 특성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잠비아의 착용과 까트(Qat)의 상용은 사회, 경제적 발전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고 있었다.

남예멘은 영국 통치의 영향으로 도시 지역은 근대화가 이루어진 반면, 내륙지역은 전통적인 부족제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산업시설의 국유화와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에 전통적 지배계층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기도 하였지만, 보수성이 강한 주민들의 반발 때문에 이슬람을 국교로 다시 인정하였다. 종교단체의 재산은 국유화하고 승려들의 생활비는 국고에서 보조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막시즘은 남예멘 사회에 깊이 침투되지 못하였다. 까트는 법으로 금지되었고, 일부지역에서 술과 유흥장은 허가되었다. 1974년 일부다처제를 금지한 가족법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의원직 6, 지방인민위원회 위원직 10%를 여성으로 임명하도록 의무화하였으며, 교육에 대한 강조로 문맹률이 1967 97%에서 1985 59%로 감소하게 되었다.

③ 사회적 통합과정

예멘의 사회통합은 남북간 주민 왕래를 출발점으로 하여 1979 11 19일 ‘남북예멘 내무장관 합의서’에서 “남북예멘 국민들의 이익에 기여하고 남북예멘 관계당국이 정하는 규칙내에서 국민들의 남북간 왕래를 용이하게 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1980 6 12일 ‘남북예멘 국민의 상호 자유왕래에 관한 남북예멘 내무장관 합의서’에서 자유로운 통행에 합의(북예멘 신분증 제시, 남예멘 허가증 제시만으로 자유 왕래보장)하였으며, 같은 날 ‘공보, 문화, 교육 분야 업무조정에 관한 합의서’에서는 “쌍방은 예멘 국민들이 조국의 발전상과 생활상을 서로 알 수 있도록 허용함과 동시에 라디오 및 텔레비전의 자료와 프로그램의 교환을 장려하고 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13개 사항의 내용에 합의하였다.

남북예멘은 1972 10월 ‘카이로 회담’부터 아랍공동체를 강조하고 있으며, 협정 서문에 “--- 양국 정부는 예멘국민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 양국정부는 아랍중재위원회가 기울인 진정한 노력과 남북예멘간의 이견을 해소하기 위한 1972 9 13일자 아랍연맹 의회 결의안 2961호 결정에 따르며, 이 노력은 예멘 국민의 현실과 그 미래에 대한 아랍공동체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라는데 동의한다. ---”고 함으로써 회담 초부터 예멘국민은 하나이며, 또한 아랍공동체의 일원임을 강조하고 있다.

1981 11 30-12 2일 북예멘 쌀레 대통령의 역사적인 남예멘 방문으로 양국간 협상에는 획기적인 진전이 이루어졌으며, ‘남북예멘간 조정 및 상호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조인되었고, 그 가운데 교육, 문화, 공보분야의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접경지대에 공동학교 건설에 관하여 동의한다.

2. 남북예멘 양국출신 학생들에게 북예멘이나 남예멘 어느 쪽이든지 거주지역에서 더 가까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3. 교과과정 단일화 및 사회과목 명칭 결정을 위한 조정임무를 문화, 교육, 공보위원회가 남북예멘 양국 교육장관에게 제시한다.

4. 고등교육 및 기술교육 개발 분야를 상호조정하고 그 전문성을 강구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고, 이와 관련된 특별 절차를 수립, 이 분야의 경험교환 및 깊이 있는 회의를 한다.

5. 남북예멘의 공보기구가 싸나와 아덴으로부터 동일한 시간에 방송되는 라디오, 텔레비전 공동프로그램 업무를 맡는다. 이 프로그램은 예멘 통일의 역사적 기초, 통일협정, 공동사업 등을 다루며, 또한 이맘통치와 식민통치에 대항한 예멘 국민의 영웅적, 역사적, 투쟁적 입장을 소개하고, 또한 예멘 전통과 대중예술을 소개하고 설명하며 국민들에게 조국 예멘을 소개한다.

또한 1982 11 29-12 1일 까지 아덴에서 개최된 ‘공동각료회의 제1차 회의’ 에서는 “공동위원회는 교육, 문화, 공보위원회가 1981 11 9일부터 11일까지 싸나 회의에서 결정한 바에 따라 교육행정, 역사, 문학, 지리분야의 각 분과위원회를 감독하도록 지시한다. 동 위원회는 1983년 상반기 중에 업무달성에 관한 보고서를 공동각료위원회에 제출하여야 한다.”는 내용에 합의를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1983년 ‘예멘최고평의회가 구성한 특별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는 “모든 학과 과목에 대한 초등, 중등과정의 단일 교과서안의 작성안을 개시하여야 하며, 양국 장관은 6개월 이내에 교과과정 단일화안을 제출하여야 한다. 또한 남북예멘 교육장관은 1984/85학년도부터 이미 남북예멘 학교의 하나의 교육과정으로서 승인되어 확정된 역사교과서를 출판하여야 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1985 12 10-12일 싸나에서 개최된 ‘공동각료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는 “공동각료위원회는 남북예멘 양국 교육장관에게 모든 교과과목과 각 과정의 교과서 및 교육과정의 단일화 작업이 계속해서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을 촉구하며, 남북예멘 현행 법률과 제도에 의거 남북 예멘간 서적, 신문, 예멘 문화회보 등의 운송에 장애가 되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데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양국 문화장관에게 지시할 것을 촉구한다.”는 점에 합의를 보았다.

사회통합은 1972년 첫 정상회담에서 남북예멘공동위원회(YAR-PDRY Joint Committee for a Unified Political Organization)를 설치하기로 합의한 이후 17년만인, 1989 10월말 처음으로 위원회가 소집되어 상호방문이 이루어지고 빈번한 회의 개최로 통일이 임박했다는 징후를 보여주고 있었다. 1989 11 30일 ‘아덴정상회담 합의서’에 조인이 이루어지고 1990 4 22일 ‘예멘공화국 선포 및 과도기 조직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예멘통일은 완성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④ 사회통합

정치적 일괄타결방식으로 성립된 사회, 문화 분야의 통합은 근본적으로 동질성을 유지해온 단일민족과 단일 언어인 아랍어)라는 변수 때문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지 않았지만, 세부적인 분야에서는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이질적인 생활방식 때문에 통일 후유증은 가지고 있다.

예멘의 사회통합에 관한 내용은 1991년 헌법에서는 제18-21조에 명시되어 있었으나, 1994년 개정 헌법에서는 제3장 사회, 문화 기조(28-34)의 내용에 언급되어 있다. 그 주요 내용은 모든 봉사행위는 신성한 일로서 사회적 통합과 규율의 원칙 하에서 수행되어야 한다(28). 국가는 사회적 공동협력을 토대로 자연재해 및 공동의 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33). 국가와 사회 구성원은 고대 유산을 보호해야 한다(34)는 것 등이다.

또한 국민의 기본권과 의무는 제40-59조에 명시되고 있으며, 모든 국민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영역에서의 참정권을 가진다. 정부는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하며(41), 특히 예배장소나 과학연구장소는 신성시되어야 하며, 그 신성함은 법률에 의해 저촉되지 않는 한 모독되어서는 안 되며(51), 첫째로 모든 국민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정치적, 직업상 또는 노동조합에서의 협력 권리를 지니며, 헌법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과학, 문화, 사회 분야에서의 단체를 결성할 권리도 지니며, 둘째로 정부는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고 국민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하고 각종 연구소 및 정치, 과학, 문화 사회기관 등에 대해서도 전적인 자유를 부여하여야 한다(57)데에 합의하였다.

통일이후 북예멘 지역에서 성행하는 까트(Qat)의 이용은 계속 정치, 사회적인 해악요인(가계수입의 30-40%를 지출)이 되고 있다. 까트가 고소득 작물인 점을 감안하여 까트의 경작면적이 점차 증가하여 농업분야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예멘정부는 이러한 해악을 줄이기 위해 금년 공무원들의 까트 이용을 전면 금지하였다.

통일이후 수도 싸나 지역으로 모여든 정부기관과 해외 취업자, 특히 100만 명에 달하는 사우디 근로자들의 귀국 등으로 인구가 급증하여 전력, 식수 및 주택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부족제도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사법권을 갖고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는 부족장들은 권력안배에도 커다란 영향력 행사하고 있다. 예멘통일이 이슬람을 기조로 이루어졌기에, 남예멘의 지식인과 높은 교육수준의 여성들은 노동조합의 결성과 부의 합리적 분배를 요구하고 있다.

2) 경제적 통합

① 경제적 통합의 배경

예멘통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경제적 요인’이 통일을 앞당기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남예멘의 사회주의 경제제도 실패 또한 양국 통일을 앞당기는 인화제 역할을 하였다.

소련경제의 붕괴 또한 예멘통일을 앞당기는데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예멘통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경제적 요인’이 통일을 앞당기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통일 이전에 이미 남북 예멘간에는 경제협력의 필요성이 고조되고 있었다. 지하자원이 주로 남예멘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고, 북예멘도 농업이외에 확실한 소득원이 없었기에 남북 모두 경제협력의 필요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예멘 경제통합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석유를 포함한 광물자원의 공동개발과 아덴(Aden)항의 개발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양국 국경선 부근 (북 마립, 남 샤브와) 유전의 공동개발에 대한 필요성은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남북예멘 양국 모두의 현안문제이었다.

남예멘의 사회주의 경제제도 실패 또한 양국 통일을 앞당기는 인화제 역할을 하였다. 남예멘은 소련경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소련으로부터의 군사 및 경제 분야에 대한 원조가 거의 중단되자, 남예멘은 자구책으로서 유전개발과 아덴항의 공동개발을 목표로 통일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

소련경제의 붕괴 또한 예멘통일을 앞당기는데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개방, 개혁정책으로 서구사회와 화해함으로써 남예멘에 대한 간섭이 배제되었고, 이 지역의 이권경쟁에 나설 수 있는 여력을 잃었다. 북예멘은 이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였다.

② 경제적 통합의 과정

1979 11 17-19일 싸나에서 이루어진 ‘남북예멘 내무장관 합의서’에서는 “남북예멘 주민 왕래에 편의를 제공하고, 남북간 교역증대를 위하여 승객과 상품의 운송수단에 대하여 최종목적지까지 모든 편의시설을 제공한다.”는 내용에 합의를 보았다. 또한 1980 5 6일 아덴합의서는, --- 남북 예멘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경제 분야 활성화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 있어서 남북 예멘간의 접촉을 강화하고 조정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루어졌다:

1 산업분야: 남북예멘에 부탄가스를 조달할 공장건설, 아덴정유소 석유 생산품 중 북예멘 수요분 계속 생산, 석유화학 및 정제분야의 공동사업추진,

2. 광물자원: 남북예멘의 광물자원 탐사, 탐사지도 작성, 경제적 효용가치가 있는 광물 채굴을 위한 조사준비 관련 업무조정,

3. 교통분야: 예멘공동육상운송회사 및 예멘공동해상운송회사 설립,

4. 금융분야: 남북예멘간 교역 및 서비스 업무를 위한 금융기관 역할증대 및 중앙은행들의 업무감독, 통화단위 기초자료, 금융제도 및 관련 집행기구 조사를 위한 위원회 구성,

5. 통계 및 발전계획 분야: 각종 통계자료 및 기초 산출자료의 단일화를 위하여 남북예멘 담당기구 및 발전계획의 상호 업무조정,

6. 관광분야: 예멘관광사업을 담당하는 예멘공동회사 구성, 관광분야 활성화를 위한 아랍 및 해외 관광회사의 활용, 예멘공동호텔사업 추진 및 사업자금 조성을 위한 제3자의 공동참여,

7. 전시장: 예멘원산지의 생산품을 전시하는 공동전시장을 남북예멘에 정기적으로 설치하기 위한 노력,

8. 통일의 길을 집행하기 위한 리비아의 감독, 남북예멘 법률에 의거한 활발한 경제사업을 위한 민족자본, 아랍자본, 아랍기금 등의 참여를 장려하기 위한 노력 등이다.1980 6 12일 지분 50: 50의 예멘관광주식회사 및 예멘해상운송회사 설립협정, 그리고 천연자원 공동사업에 관한 양국 정부간 협정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러한 진전으로 1982 1 23일 천연자원 공동사업계획은 실행단계에 돌입하여 첫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1981 11 30-12 2일 ‘남북예멘간 조정 및 상호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내용 중 경제분야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남북예멘의 경제, 사회 개발계획의 상호조정,

2. 지질 및 수자원 분야의 공동지도 작성, 접경지역의 모든 광물, 수자원에 관한 연구 및 탐사작업 수행, 남북예멘 공동기관의 광물 및 수자원 이용,

3. 남북예멘간 공동 공업 및 농업사업의 경제적 이익을 연구하는 공동기구 창설,

4. 수자원 연구 및 공동 농경지의 이용에 관한 경제 연구 보고서 작성,

5. 남북예멘 전문 농업기관의 연구, 검토 및 계획 단일화,

6. 남북예멘 농업 계몽방법 및 기구의 단일화,

7. 남북예멘 양국 상호간의 농산물 판매를 위한 공동기구 설립에 관한 검토,

8. 이브-까으따바-다킴 통일로 건설사업의 지속적인 집행,

9. 남북예멘을 결속시키는 기타 방법들의 집행에 관한 검토,

10. 접경지대에 공동 진료소 설치 및 남북예멘 담당 위원회가 진료소 부지(敷地) 결정,

11. 전염병 및 풍토병 퇴치를 위한 공동계획 수립, 기본적인 보건 후생문제에 관하여 계속 노력하고 상호경험 교환한다는 것 등이다.

또한 1982 11 29-12 1일 까지 아덴에서 개최된 ‘공동각료회의 제1차 회의’ 에서는 1981 12 2일 조인된 ‘조정과 상호협력 협정’에 의거한, 1) 주민의 왕래, 2) 예멘주식회사, 3) 교역, 4) 통일로 사업, 5) 농업분야 등에 관한 경제분야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후 연이은 협상을 통해 조정과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1988 5 4일 ‘남북예멘 공동합의서’에 따라 “남북예멘 경제통합(經濟統合)의 중요성을 고려하고, --- 천연자원 공동개발사업에 관한 조치들을 마무리 지은 뒤”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하여 합의가 이루어졌다:

첫째, 2,200km2로 추산되는 마립과 샤으바 양주(兩州)간 공동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둘째, 공동 지지(地誌)위원회는 공동 투자 사업지역을 선정하고 이의 홍보를 담당한다.

셋째, 공동개발지역은 남북예멘의 군사지역에서 제외되며, 1985 1 19일 양국 참모총장 회의 의사록 규정의 적용대상이 되지 않는다.

넷째, 남북예멘 석유장관은 개발, 기술, 재정, 운영절차와 그 밖의 경제적 투자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비롯하여 이 사업 진행에 관련된 모든 조치를 취한다.

다섯째, --- 이 합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남북간 경계선의 설정이나 남북간 국경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

경제통합에 관한 합의는 1988 11 19일 ‘남북예멘간 공동지역개발에 관한 합의’를 거쳐, 1989 11 30일 ‘아덴정상회담 합의’ 및 1990 4 22일 ‘예멘공화국 선포 및 과도기 조직에 관한 합의서’를 통해서 통일에 이르게 된다.

③ 경제적 통합

경제통합에 관한 내용은 1990 5 1-4일 싸나에서 개최된 ‘남북예멘 양국 각료회의 의장 공동회의’ 합의문에 언급되어 있다.

- 통화

통화는 국가의 민족적 주권(主權)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멘공화국의 국민경제를 보호하고 --- 폭넓은 민족적 기초원리에 입각하여 통일국 통화체계에 대한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리얄()과 디나르()는 통일된 날로부터 남북예멘 양국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예멘 통화로 간주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이 두 통화는 1디나르 당 26리얄에 해당하는 환율로 모든 예멘에서 공식 지불 수단이 된다.

- 예산

남북예멘 재무장관은 통일국수립 선포이후 연말까지의 통일국 예산에 관하여 논의하고 준비하여야 한다. 이는 금년(1990) 5 20일까지 완료하여야 한다.

- 운송과 통신

양국 항공회사와 통신기구에 관하여 양국 교통, 운송, 노동장관 사이에 조인된 두 건의 회의 의사록을 승인한다. 이 두건의 의사록은 양국 항공회사와 통신기구 합병의 근거 규정이 된다.

- 민원과 노동

민원 및 노동 장관은 1990 5 15일까지 조직체계와 규정에 의거 직원 관계 법률적 적용에 관한 논의와 그에 따른 직제 구성을 완료한다(기존 기구의 모든 근로자들을 수용함을 원칙으로 한다). 양국 민원 및 재무장관은 1990 5 15일 이내에 월급여 및 보수체계의 세부적 내용을 완성하여야 한다. 통일국 수도로 옮겨질 본부의 모든 업무 분야의 비밀문서 및 일반 서류는 붉은 양초로 봉인되어 보관된다. 그 후 필요에 따라 통일국 각료회의 결의안에 의해서만 개봉이 가능하다.

경제통합에 관한 내용은 통일헌법 제2(6-17)에 보다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중요한 내용으로는:

- 국가경제는 이슬람의 사회정의 원칙에 따르며, 공공의 이익과 법률에 따른 공정한 보상을 제외하고는 침해받지 않는 사유권(私有權)의 보호한다(6).

- 지하 또는 지상, 영해, 대륙붕 혹은 모든 관()경제지역의 파생물을 포함하는 자연자원 및 동력자원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며, 국가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 이들의 개발을 보장한다(7).

- 국가의 경제정책은 공공의 이익과 국가경제 발전을 위한 정부 개발계획의 테두리 내에서 일반 및 자연자원의 개발과 투자 그리고 모든 경제 및 사회분야의 공공, 민간 및 혼합부문에서 능력과 기회의 확대와 개발에 임하는 일반법인의 설립을 장려하는 방향에서 과학적인 기획에 의거한다(8).

- 의회의 승인 없이 행정당국은 차관(借款) 계약을 체결하거나 차관을 보증하거나 공공자금으로부터 지불을 요하는 사업에 임할 수 없다(15).

- 자연자원 및 공공 사업개발권의 부여는 법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17)는 등의 내용이다.

한편 1994년 개정헌법은 구 헌법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경제에 관한 내용을 2(7-27)에 포함하고 있다. 보다 세부적으로 광범위하게 명시된 경제기조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법에 따라 독점행위는 금지되며, 모든 경제 및 공공 개발 분야에 대한 개인자본의 투자는 장려된다(10).

- 행정당국은 계약을 체결하거나 이를 지원해서는 안 된다(16).

- 천연자원 및 공공사업 개발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18).

- 상속은 이슬람 교리에 의거, 보호되어야하며, 이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23)는 등의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6. 예멘통일의 시사점

예멘통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경제적 요인’이 통일을 앞당기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남예멘의 사회주의 경제제도 실패 또한 남북통일을 앞당기는 인화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 일괄타결방식으로 성립된 사회, 문화 분야의 통합은 근본적으로 동질성을 유지해온 단일민족과 단일 언어인 아랍어라는 변수 때문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지 않았지만, 세부적인 분야에서는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이질적인 생활방식 때문에 통일 후유증은 다소 존재했다.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남북 예멘간에 이질감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공통의 아랍어를 사용하며, 아랍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함으로써 양 국민 간에 커다란 문제를 노출시키지는 않았다.

예멘의 사회통합은 남북간 자유로운 <주민 왕래>를 출발점으로 하여 남북예멘 국민들이 조국의 발전상과 생활상을 서로 알 수 있도록 허용함과 동시에 라디오 및 텔레비전(TV)의 자료와 프로그램의 교환을 장려한 점은 동질성 회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1984/85학년도부터 이미 남북예멘의 모든 학교에서 동일한 교육과정으로서 통일된 [역사교과서] 교과서의 활용과 교육은 <예멘민족의 이질감 해소>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89년 남예멘의 개혁-개방 노력은 대내적인 개혁정책이라기보다는 대외적인 변화의 물결을 잘 이용했다는 점이 특색이다. 다시 말하면 철저하게 준비된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전환 노력이라기보다는 1986년 발생한 113 내란을 수습하는 과정에 소련의 개혁-개방정책, 특히 헝가리 경제의 변화가 남예멘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소련의 붕괴로 인한 원조중단은 남예멘 개혁을 서두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제한적인 남예멘의 경제개방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소련은 샤브와 지역의 석유탐사를 거의 중단한 상태로 방치해두면서 소련-남예멘 협정에 따라 샤브와 광구의 개발권에 대한 보상없이 서방측 입찰사들에게 선뜻 내놓으려 들지 않았다. 샤브와에서 해안까지 송유 파이프 공사도 계속 연기되었다. 아덴정부의 시책 향방이 뚜렷해질 때까지 업계가 관망하고 있는 한 민간 투자유치는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용의주도한 계획이 사전에 이루어지지 못하였기에, 개혁을 시작하자마자 실업, 물가, 인플레이션 등 경제의 각 부문에 문제점이 곧바로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아덴 정부의 갑작스러운 각종 통제의 해제조치는 물가를 자극하여 인플레이션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미증유의 파업 등 예상밖의 부작용을 유발하였다. 아덴 정유소에서 시작된 파업은 발전소, 은행, 섬유 및 수산업분야로 확산되었다. 근로자들의 생활비 30% 인상요구에 대하여 정부는 타협함으로써 파업을 일단 수습하였다.

다행스러운 점은 남예멘은 개혁의 어려움을 곧바로 남북예멘의 통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보아 곧바로 통일로 연결하였다. 국내의 정치적 안정이 어느 정도 해소되자 알-바이드 대통령은 1989 11 28일 아덴에서 북예멘의 쌀레 대통령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예멘의 정상들은 1972년이래 가장 핵심사항이었던 권력안배 문제와 일정한 과도기와 총선거를 거쳐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통일원칙에 대타협을 이뤘다. 드디어 남북 예멘은 1990 4 19-22일 싸나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10개항으로 이루어진 ‘예멘공화국 선포 및 과도기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실질적인 통일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남예멘의 개혁은 체제전환을 위한 시도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정국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남예멘 정부는 1989년 개혁 프로그램에 착수한후 곧바로 남북정상회담에 임하여 그 다음해 통일에 이름으로써 난국을 타개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남예멘의 개혁은 난국수습을 남북통일에 의한 권력 재창출의 수단으로 연결하기 위해 급조된 개혁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면면은 통일이후 1994년 알-바이드에 의한 권력장악 의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급기야 이러한 상황은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10/08/23)

 

* 인용은 홍성민, 2010, “예멘의 사회적, 경제적 통합과정과 시사점,”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의 상생. 공영 대북정책 적용: 예멘 통일사례 연구>, 세미나 자료집, 국가안보전략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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