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학 Yemeni Studies

한국예멘교류센타  Korea-Yemen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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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

홍성민 (RIES 원장, Korea-Yemen Center 회장)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 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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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바여왕의 나라

아라비아 서남부에 위치한 '예멘'(Yemen)이라는 나라는 한국인에게는 '통일'과 관련하여 매우 낯익은 이름이지만, 예멘의 신비로움과 성장잠재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진 편이 아니다.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1990년 5월 22일 예멘의 통일이 이루어지기전까지도 나는 예멘을 그저 통일을 갈망(渴望)하는 아랍국가 정도로 생각했고, 국민소득이 매우 낮은 미개한 나라로 간과(看過)했던 점 부인할 수 없다.  수많은 예멘인들을 만나 교류를 해 오면서 그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는 커다란 오류를 인정하지 안을 수 없었다. 그 후 예멘인을 이해하고 그들의 역사적 전통에 관한 이해가 없이는 아라비아 반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작은 결론에 이르게 됐다. 다시 말하면 중동국가중 유일하게 아랍인의 독특한 기질과 문화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민족이 예멘인이라는 점이다. 1991년 통일부의 '예멘통일조사단'의 일원으로 예멘을 방문하게된 이후 1994년 한국예멘교류센터(Korea-Yemen Center)를 설립하고 예멘을 연구한지도 어언 10년 세월이 넘었지만, 아직 예멘에 관한 연구는 초보적인 단계에 이르고 있음을 자인(自認)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도 부지런한 비즈니스맨들은 예멘을 알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예멘에 관한 상식이 한국사회에 두루 알려지게 된 점은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분명한 사실은 아랍을 알기 위해서는 예멘을 먼저 이해해야하고 예멘에 관한 이해 없이는 아랍이 속한 중동(Middle East)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예멘은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 동남부지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예멘은 음식에 소금이 필요하듯이 아라비아에서는 소금관 같은 존재로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역이다. 예멘 없는 아라비아가 그의 진수와 향취를 가질 수 없듯이 아라비아로부터 예멘을 분리하여서는 그의 정수를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예멘은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작은 나라이긴 하였지만, 반도를 횡단하여 이주하는 사람들의 근원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예멘 혈통을 주장하는 요르단,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 및 걸프만 지역국가들에 거주하는 예멘인들이 많이 있다. '야마니'(Yamani)나 '함다니'(Hamdani)같은 인명은 예멘에 기반을 둔 사람들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예멘(Yemen)의 어원은 대개 두 가지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첫째는 '축복이나 행복'을 의미하는 아랍어의 'yumn'에서 유래됐다는 설이며, 둘째는 '오른쪽'을 의미하는 'yamin'에서 유래됐다는 설이다. 실제로 멕카의 카바신전에서 보면 예멘은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예멘은 우리에게 흔히 '솔로몬과 시바'의 나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쉬바왕국'(Sheba Kingdom)은 BC 950년부터 BC 115년까지 존속되었다. 쉬바왕국이후 예멘은 AD 6세기까지 힘야르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AD 525년 이디오피아에 의해 정복당했고, 다시 AD 575년 페르시아가 이 지역을 정복하여 통치하였다. 예멘은 7세기에 정식으로 이슬람(Islam)을 받아 들였으며, 9세기에 자이디(Zaidis)파 이맘인 야흐야 알-하디 일랄-하끄가 라쉬드왕조를 수립하였다. 라쉬드朝의 예멘은 1517년 오스만 터키에 의해 점령되어 1918년까지 오스만 터어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예멘이 '행운의 아라비아'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연원도 고대 세계에서는 '향료'의 나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에 위치한 예멘의 향료(香料)는 홍해 연안을 따라 요르단의 페트라(Petra) 로 교역되었고, 그중 일부는 이집트로 교역되고 나머지는 그리스나 시리아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수출되었다. 예멘의 향료는 해로(海路)를 통해 중국과도 교역을 해 왔기에 고대 세계에서 동서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행운의 아라비아로 알려진 예멘의 향료는 그후 포루투갈이나 스페인 등 유럽지역에 광범위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2. 커피의 원산지, 잠비아의 자존심

신비의 나라 예멘에 도착하는 순간, 이방인들이 마주치는 독특한 예멘인 특유의 복장과 모습은 일종의 환상을 자아내기도 한다. 마치 우리의 버선 모양을 한 그들의 전통적인 칼, '잠비아'(Jambia)를 차고 한쪽빰에는 볼록하게 '까트'(Qat)를 물고 있는 예멘인의 모습은 마치 이스탄불 돌마바치 궁전 앞의 '터키 병정'을 연상시키듯 일종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더욱이 커피의 원산지가 이곳의 항구 '모카'(Mocha)에서 유래됐다는 사실과 예멘이 '쉬바여왕'의 나라라는 자존심은 아직도 그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돼 있다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월을 잊고 사는 '아름다운 인간 삶'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쉬바 여왕'(Queen of Sheba)이 실제로 오늘날의 마립(Ma'rib) 지역으로부터 왔는지에 관계없이 여왕은 신비롭고 형용할 수 없는 부와 사치스런 생활을 누렸다. 이러한 부(富)는 홍해에 위치한 향로의 무역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무역을 통해서 이루어진 부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의 특징적인 유리한 기후, 즉 '녹색 예멘'(Green Yemen) 때문에 에멘은 고대 세계에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수세기가 지난 후 커피는 '부(富)의 원천'이 되었고, 심지어 오늘날 커피라는 명칭도 예멘의 모카항구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되었다. 더욱이 '백인의 무덤'(white man's grave)으로 불려지던 아덴(Aden)은 인도로 가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수세기 동안 탐험가나 모험가들은 금단(禁斷)의 나라, 예멘에 들어가기를 열망해 왔다. 경탄할 만한 아름다움과 어둠침침한 상점 그리고 베일에 쌓여진 여자가 있는 '싸나'(Sana'a)는 아랍의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며, 여행자들을 매료시킨다. 빈틈없는 무장을 한 부족 병사들의 자랑스런 아랍 전통 의상은 매우 인상적이다. 단순한 호텔이나 여관, 채색 유리로 장식한 창문, 남자들의 볼록한 두뺨 그리고 '까트'를 즐기는 예멘인들의 충만함은 예멘의 특징적인 단면들이다.

1990년 5월 22일 남, 북이 통일된 예멘은 고원지대와 홍해를 따라 발달한 해안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라비아 반도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예멘은 사우디 아라비아 및 오만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원유 매장지대를 둘러싸고 국경 충돌의 가능성을 항상 안고있는 지역이다. 예멘의 정식 국명은 '예멘공화국'(Republic of Yemen)이며, 국토의 총면적은 약555,000 평방 km로서 한반도의 약 2.5배에 달하는 크기이다. 언어는 아랍어가 공용어이며, 공공기관이나 상업적 거래에서는 영어가 통용되지만 여타 아랍 국가들에 비하여 영어의 사용이 광범위하지 못한 국가이다. 종교는 이슬람이 국교이며, 아직도 부족제도가 잔존하고 있어 정치에 커다란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예멘의 일반개황은 <표 1>과 같다.

<표 1> 예멘의 일반개황

    국 명: 예멘 공화국 (Republic of Yemen)

    국가원수: President Ali Abdullah Saleh

    면 적: 527,968㎢

    정부형태: 대통령 중심제

    수 도: 싸나(Sana'a)

    국 경 일: 남북 예멘 통일 기념일(5.22)

    인 구: 2,003만명(2004)  

    GDP성장율 : 2.8%(2003)

    언 어: 아랍어 93%

    1인당GDP: 800달러(2003)

    도시화율: 25.0%

    GNP중 국방비율: 12.4%

    회계 연도: 7.1 ~ 6.31

    종 교: 이슬람(순니 56%, 쉬아 44%)

    인 종: 아랍인 86%, 아프로-아랍, 남아시아인 및 유럽인

    인구증가율: 3.44% (2004 추정)

    산 업: 농업 15.2%, 공업 45%, 서비스업 39.7%

    인구밀도: 11명/㎢

    통 화: 리알(YR)=100fils  US$1=YRI 181.10  (변동환율제, 2005. 04)

    평균수명: 남자 59.53세, 여자 63.29세(2004)

    문 맹 율: 49.8% (15세이상, 남자: 29.5%,  여자: 70%)

자료: 한국예멘교류센터, 2005. http://hopia.net/kime/nation/nat_yem.htm.


커피는 15세기 말경 포루투갈 선원들을 통해 최초로 유럽으로 전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오늘날 전세계인의 애호를 받는 기호품중 하나가 되었다. 예멘 커피의 특성은 뭐니 해도 그들 특유의 '
향기(香氣)'에 있다. 예멘의 커피는 고산지대에서 경작이 되며, 까트 재배 면적의 증대와 세계 수요의 감퇴에 기인하여 매우 한정된 양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멘의 커피는 유럽에서는 매우 인기 있는 커피로 알려지고 있다.

까트(Qat)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예멘인들만이 즐기는 독특한 기호품이다. 하지만 환각성문제 때문에 세계적으로 마약성 식물로 분류되어 교역이 금지된 품목이다. 그러나 예멘인을 이해하는데 까트를 빼놓고 그 정수를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오후 2시경 대부분의 근무시간이 끝나는 예멘에서는 오후 5시까지 까트파티를 즐긴다. 까트타임에는 마치 벤자민의 잎사귀와 비슷한 까트의 잎을 씹으며 중앙에 '쉬샤'(물담대)를 놓아두고 서로 피워 가면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로 한담(閑談)을 나누거나 비즈니스나 정치적 회합을 같는 공동체 형태의 모임을 갖는다. 매일 습관처럼 이루어지는 미팅형태의 까트모임으로 예멘인들의 정치의식은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되며 이 같은 까트모임를 통해서 공동체 의식이 돈독해진다고 볼 수 있다. 예멘정부는 고소득 작물 간주된 까트재배 면적의 증가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지만, 까트 전통은 너무나도 그들의 삶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에 까트모임을 인위적으로 해결하기람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다른 특유한 전통중 하나는 예멘의 전통적인 장식용 칼, 잠비아(Jambia)의 착용이다. 잠비아의 전통은 오늘날 오만과 예멘에서 유일하게 목격할 수 있는 아랍의 전통이다. 예멘인들이 칼을 차고 다니기에 언뜻 보면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만 예멘인들의 전통은 칼에 손을 대는 것을 금기시하기 때문에 잠비아로 인한 사고는 거의 없는 편이다. 예멘인들은 함부로 칼을 뽑지 않는다. 잠비아에 손을 댈 경우 이는 살인 의도로 간주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소한 흥분이나 싸움에 손에 쥔 무기를 아무때나 휘두르지 않는다는 일종의 '절제된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이기도 하다. 1988년 한국의 올림픽 입장식 때도 선수단의 잠비아 착용문제로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칼은 빼고 칼집만 차고 입장하는 수준에서 참가가 허락된 적이 있다. 한국인들이 지금은 잃어버린 '바지 저고리'를 생각할 때 연민의 정(情)이 가는 것이 잠비아이기도 하다.

3. 분단의 아픔과 통일

사막의 베일에 가리워져있던 예멘이 한국에 알려지게 된 원인도 탈냉전의 해빙 무드에 편승한 북방외교가 활기를 띠던 지난 199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통일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전세계 분석가들의 예상을 깨고 1990년 5월 22일 남예멘의 수도, 아덴(Aden)에서 통합이 전격적으로 선포되고 남북 예멘이 하나의 통일국가를 형성했을 때 한국인의 관심은 중동의 낯선 아랍국가, 예멘으로 관심이 쏠렸다. 더욱이 강대국의 지배와 분단의 아픔을 공유한 예멘에 일종의 연민(憐愍)의 정을 느끼기도 하였다. 사실 1989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학자나 전문가들은 20여년에 걸친 정치, 군사적 대결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변화와 상호 불신, 적대감, 두려움 등으로 예멘의 통일이 20세기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실로 믿고 있었다. 예멘이 통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 동구 및 소련의 개방화, 2) 주변아랍국들의 중재와 압력, 3) 아랍민족주의, 4) 종족, 언어, 종교를 포함한 민족적 동질성, 5) 상호 경제협력의 필요성 증대, 6) 정부차원의 지속적인 통일대화 추진 등이 중요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예멘이 사회주의 통제경제의 실패를 자인하고, 북예멘과의 협력을 모색하였다는 점이다. 주요 지하자원이 주로 남예멘에 편중되어 있고 북예멘도 농업 이외에는 확실한 소득원이 없었기에 양국 모두가 경제협력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198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양국 국경선 주변, 즉 북예멘의 마리브와 남예멘의 샤브와 유전 등 부존자원의 공동개발 필요성이 고조되고 있었다. 통일이후 그들은 남예멘의 석유와 아덴항의 개발에 큰 기대를 걸고 있으나, 자본부족과 기술수준의 낙후 등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72년과 1979년 소규모 전쟁을 치르기도 한 남,북예멘은 한반도의 경우와는 다르게, 양국의 충돌이 협상과 대화의 창구를 마련하여 1990년 통일을 이루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또한 예멘의 통일은 독일의 '흡수통일'과는 다르게 거의 대등한 관계에서 [선통합-후조정]이라는 '합의통일' 방식을 취하고 있다. 1993년 4월 27일 실시된 총선거로 현정부의 합법성이 인정되긴 하였으나, 남예멘의 바이드 부통령은 이에 불복하여 1994년 또다시 전면전(全面戰)을 치르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물론 북예멘의 승리로 내전(內戰)이 종식되긴 하였지만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문제로 예멘은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 합의통일' 형태로 이루어진 통일은 또 다른 구조조정, 즉 후조정을 거친다는 역사적 경험은 한반도의 통일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예멘은 막대한 매장량의 원유와 천연개스를 보유하고 있기에 비산유국인 한국에서는 중요한 교역대상국이 될 수 있고,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에게는 커다란 연구대상의 국가이기도 하다.

4. '자유무역지대' 건설과 유전개발에 큰 기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과 걸프전(The Gulf War)의 영향으로 통일이후 예멘은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기도 하였다. 예멘의 경제는 외국원조, 특히 이라크의 원조와 교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사우디와 쿠웨이트 원조에도 커다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더욱이 걸프전 당시 예멘이 공식적으로 다국적군의 파견에 반대하고 이라크를 지원함으로써 사우디에서 100만명에 달하는 예멘인 노동자들이 추방당하여 예멘경제에 실업문제를 포함한 외환부족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예멘의 경제는 이라크의 무역과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에 통일이후 커다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쿠웨이트와의 무역과 쿠웨이트 개발기금으로 부터의 원조 또한 예멘 경제에는 매우 중요하다.

1990년 10월 기준으로 예멘정부는 이라크의 경제제재조치에 따른 해외부문의 손실이 16억8,400만 달러에 달하였다. 이러한 계산은 아덴 정유공장에 대한 이라크의 원유공급 30,000 b/d와 쿠웨이트 원유공급 20,000b/d의 손실, 이라크의 재정원조 감소, 해외 노동자의 송금 및 쿠웨이트 개발기금으로 부터의 원조감소 등이 고려된 것이다.

경제발전에서 인간자원(human resources)의 역할이 지대함을 고려할 때, 예멘의 경제성장은 매우 긍정적 요인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기술수준은 낮다손 치더라도 높은 교육열과 손재주를 겸비한 예멘인 특유의 장인정신(匠人(精神)을 감안하면, 아라비아 반도에서 커다란 인구 잠재력(2,500만명)을 갖는 예멘의 성장 잠재력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통일이후 예멘정부의 주된 경제목적은 인프라부문의 개발을 통한 공업기반을 확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계획의 주안점도 신규투자(新規投資)를 유인하기에 충분한 아덴항의 '자유무역지대'(free trade zone)의 창설에 두고 있다. 예멘은 경제활동의 자유와 민간부분의 활성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외화의 부족이 걸림돌이다. 이런한 연유로 관광산업에도 적극적인 투자를 하고 있으며, 아덴의 자유무역지대와 관광을 연계한 투자가 1995년이후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예멘경제는 광물자원, 특히 하드라마우트(Hadhramaut)의 금과 남예멘의 석유자원의 개발에도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지역은 하드라마우트 주(州)의 수도인 '무칼라(Mukalla'이다. 2005년 5월 현재 이곳엔 국제공항(International Airport)이 오픈되었고, 정부에서도 유전, 상업 및 관광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예멘통일 15주년 기념식이 무칼라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고, 이 지역 주민들의 경제개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점을 보면 분명 예멘은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예멘이 통일이후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중 하나는 유전 개발이다. 예멘의 석유산업은 중동의 여타 산유국들의 석유개발이 1910년대에서 1950년대의 기간에 집중적으로 개발되었던 사실과는 다르게 비교적 늦게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 1970년대의 조사를 통하여 1980년대 중반 이후 상업적 규모의 유전이 개발되기 시작한 예멘의 석유산업은 통일이전 정치, 경제, 사회적인 어려움 등으로 개발이 지연되다가 1990년 통일이후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석유부문은 예멘 경제의 성장에 있어서 여전히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5. 낙관도 비관도 않는 예멘인

예멘의 신비(神秘)침묵(沈默)에서 찾을 수 있다. 대부분 아랍인들이 서두르지 않는 미덕(美德)을 가지고 있지만 예멘의 경우는 더욱 돋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 좋은 예는 통일이후 외환시장의 동향에서도 잘 살펴 볼 수 있었다. 1991년 8월 공식 환율이 1달러당 18리얄이었고, 외환 부족으로 암시장에서는 100리얄을 상회하고 하루, 하루 5-10리얄 정도의 인플레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사재기도 볼 수 없었고 그저 체념하는 듯 시장은 활기 띠며 회전목마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 그 속셈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한쪽 구석에선 일자리 달라는 소요(騷擾)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별다른 충돌 없이 마치 민주주의(民主主義)가 성숙한 나라처럼 그 어려움은 하나의 파노라마로 스쳐지나 갔다. 더욱이 통일이후 남북간에 재산권 문제와 화폐 통합을 위한 현안이 대두되고 있었지만, 커다란 무리 없이 이를 소화하고 있었다. 일부 소비재의 급격한 인상이나 단 하루만의 단수(斷水)조치가 이루어져도 사재기로 혼란을 빚는 우리 현실을 보면서 그들에게 일종의 매력을 느끼기도 하였다.

아무튼 통일이후 예멘 정부는 그들의 장래는 두 가지, 즉 "시간과 석유가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시간개념은 이웃 아랍국가와 기타 비우호적인 서방 선진국과의 문제를 의미하며, 결국 시간이 흐르면 이들과의 관계가 호전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경제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한데 이는 유전개발, 특히 정유 시설과 연관된 아덴 자유무역 지대의 개발을 통해서 가능하리라 믿고 있다. 따라서 예멘 정부는 아덴항 개발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으며, 특히 자본 조달을 위해 유전의 광구 분양과 관광산업 육성에 정책의 커다란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에 대한 이해와 정보의 부족으로 예멘이 아직도 우리에겐 미지(未知)의 땅으로 남고 있다. 예멘인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특이한 상술(商術)이다. 아랍인 가운데서도 예멘인은 오랜 교역의 전통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전통은 아직도 면면히 유지되고 있다. 그 한 예로 한국의 중동시장 진출 교두보가 '두바이(Dubai)'인데 이곳에서 활약하는 상인들 가운데 유능한 상인이 바로 예멘인이라고 한다. 우리 중소기업들이 중동진출에 실패하는 요인도 그 근원(根源)을 살펴보면 가장 큰 문제점이 '이해부족과 서두름' 이다.

우리 속담에 "털도 안 뽑고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물론 한국인의 진취적인 기상이 커다란 장점을 발휘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랍인의 경우에는 잘 통하지 않는다. 털을 안 뽑고 먹을 경우 체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자꾸만 이런 우(愚)를 범하고 있다. 예멘인이 '아라비아 상인의 후예(後裔)'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더욱 그렇다. 비록 현재는 시장이 협소(狹小)하여 우리에겐 가치가 없는 나라 정도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들의 잠재력을 인정한다면 우리에게 매우 좋은 파트너가 되리라 생각된다. 현재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순한 상품의 교역이 아니고 장기적인 경제협력(經濟協力)을 원하고 있다. 이러한 시장에 단지 상품이나 팔아 보겠다는 근시안적인 접근은 성과가 없을 것이다. 상품교역에 관한 한, 이미 선진국들이 교두보(橋頭堡)를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면밀한 시장분석과 진출을 위한 다각적인 전략이 마련되지 않는 한 쉽게 진출할 수 없는 나라가 예멘이다. 예를 들어 예멘 상인들은 그들의 구미(口味)에 맞는 온갖 상품들을 전세계에서 가장 저렴하게 구입하여 예멘시장에서 인기(人氣)를 누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가히 그들의 상술(商術)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은 밝다. 이곳에선 아직 한국인과 상품의 이미지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단지 예멘인들은 대규모 교역보다는 다품종 소량의 교역을 원하고 있다는 점에 유념한다면 분명히 한국과 예멘은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에서 행운(幸運)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6. 예멘학의 필요성

고대 그리스시대에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 동남부지역을 형성하였던 예멘은 한국에서는 '시바왕국'(Sheba Kingdom : BC 950-BC 115)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 역사적으로 예멘은 아라비아 남단에 위치하여 반도를 횡단하는 이주민들의 근원지 역할을 하였하였다. 이러한 근원으로 예멘은 아라비아 역사와 아랍어의 본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1973년 석유위기이후 중동을 커다란 관심지역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 지역에 대한 진출 및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어 이제 한국에서 중동지역은 낯선 지역이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중동, 특히 아랍지역에 대한 한국인의 진출 및 연구는 산유부국이나 이스라엘과의 전쟁당사국에 국한된 면이 적지 않다.

예멘은 이러한 이유로 한국인에게는 소외된 지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1990년 예멘의 통일이후 한반도 통일문제와 결부되어 많은 관심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 대한 자료 및 연구활동의 부진 그리고 1994년 내전 등으로 우리에겐 아직 거리가 먼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더욱이 한국과의 정상외교 관계가 1985년 8월22일 수립되긴 하였지만 괄목할만한 교류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랍의 역사, 언어, 문화 등 본질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예멘에 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한다. 분단의 아픔을 공유한 한국은 예멘과 인적 및 물적교류의 증진을 위해서도 본질적인 연구가 필요하게된다. 따라서 예멘에의 이해 및 교류증대는 물론 상호이익과 발전을 위해 일종의 예멘학(Yemeni Studies)이 하나의 대상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에 본 연구소에서는 예멘학의 정착과 한국-예멘간의 교류증진을 위해 1994년 12월 29일 「종합경제사회연구원」부설로 「한국예멘교류센타」 (韓國也門交流센타, Korea-Yemen Center)를 개설하게 되었다. <끝>

인용: 홍성민, 2005, www.hopia.net/kyc, 한국예멘교류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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