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 웨 이 트   State of Kuwait

이라크 침공에 의한 경제적 타격은 이제 성공적으로 치유되고 경제도 본 궤도에 올라 쿠웨이트는 매우 부러운 위치에 있다. 세계 원유 매장량의 10%를 보유하고 세계에서 1인당 GNP 수치 중 가장 높은 국가중 하나라는 것을 자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지를 맞추기 위해서는 향후 몇 년간 다소 어려운 정책의 변화를 견디어 내야 할 것이다.

지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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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개황

쿠웨이트는 아라비아 반도의 동북부, 즉 걸프만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산유 부국(富國)으로 북으로는 이락, 남으로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걸프만에 접해 있다. '작은 요새'(little fortress)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쿠웨이트의 정식 국명은 State of Kuwait이다. 쿠웨이트는 걸프만 내륙으로부터 이락에 이르는 진입로를 제공하는 약간 경사진 단단한 땅을 가지고 있고, 가까운 모래 언덕과 산호초로 둘러싸인 양호한 항구를 가지고 있기에 성장에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지리적 위치는 북위 29도, 동경 48도에 위치해 있으며, 지형은 동부의 해안 지대를 제외하고는 국토의 대부분이 해발 10-80m의 평탄한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준시는 그리니치 표준시보다 3시간 빠르며 한국보다는 6시간이 늦다. 외교통산부

쿠웨이트의 총면적은 17,818 sq km로 한국의 경상북도 크기와 비슷하며, 동서의 폭은 150 km, 남북의 길이는 195km이다. 총면적중 2,590 km는 1966년 사우디와 쿠웨이트간에 분할된 '중립지대'(Neutral Zone)이며, '부비얀'(Bubiyan), '와르바'(Warba), '훼일라카'(Failaka)로 구성되는 10개의 근해 섬(offshore island)과 쿠웨이트만(灣)에 형성돼 있는 199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국토는 약간의 오아시스(oasis)를 포함하는 거의 평평한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11월과 4월에 집중되는 쿠웨이트의 연간 강우량 1-37cm를 기록하며, 이때 초원의 홍조(flush)가 나타난다. 가장 추운 달인 1월에는 가끔 얼음이 어는 -2.8도에서 28도의 분포를 보이지만 여름철에는 49도에 달하는 무더운 날씨를 기록하고 있다. 쿠웨이트 기후의 특성은 사막 기후와 지중해 기후의 혼합 형태로서 4계절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6월부터 9월까지는 기온이 28도에서 45도까지 올라가며 매우 덥고 습기가 많다. 12월부터 2월까지의 온화한 겨울은 밤에는 약간의 얼음도 얼며, 평균 8도에서 18.5도의 기온 분포를 보이고 있다. 겨울비는 3.5-6cm의 평균 강수량을 기록하면서 산발적으로 내리며 12월은 가장 습기가 많은 달이다. 여름에는 모래 바람이 자주 불어오며 매우 무덥다. 쿠웨이트는 국내에 식수(食水)가 거의 없으며, 이의 공급은 주로 걸프만이 합류하는 '샤트 알 아랍' 수로로부터 파이프 라인을 통하여 바닷물을 증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쿠웨이트의 특징중 하나는 높은 인구 증가율과 비쿠웨이트인 분포에서 찾을 수 있다. 쿠웨이트는 최근 매우 높은 인구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비공식적 집계에 의하면 1950년 152,000명이던 쿠웨이트의 인구가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1957년 2월 206,473명에서 1980년 4월 1,357,952명에서 1985년 4월에는 1,697,301명으로 증가하였다. 쿠웨이트는 세계에서 인구 증가율이 가장 높은 나라중 하나이지만, 인구 성장의 대부분은 이주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1957년과 1983년간에 걸쳐 비쿠웨이트 인구는 93,000명(전체의 45%)에 다소 밑도는 수준에서 870,000명(전체의 57.4%)으로 증가하였으며 이들 대부분은 여타 아랍 국가들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이다. 1989년 중반 비쿠웨이트인 인구는 1,252,033명으로 추계 되고 있다. 1970-1980년대 쿠웨이트의 평균 인구 증가율은 6.3%를 기록하였다. 이같이 높은 인구 증가는 이주자들 가운데 남성 우세 때문에 발생하는 성비의 불공평한 분포도에 기인하고 있다. 1985년 여성 인구는 비쿠웨이트인을 포함하는 전체 인구의 43%를 구성하고 있다.

쿠웨이트 국민은 6개의 그룹으로 이루어지며, 쿠웨이트 사회의 부족 기반을 반영하고 있다. 첫 번째 이주 부족인 '싸바家'(Sabah family)에 의해 주도되는 '아나이자'(Anaiza) 부족과 그 다음 이주한 중앙 아라비아의 네즈드(Nejd)에 기반을 둔 '바하르'(Bahar), '하마드'(Hamad), '밥타인'(Babtain)을 포함하는 부족들이 있다. 또다른 부족으로는 '무타와家'(Mutawa family)와 그의 분파인 '쌀레'(Saleh) 부족을 포함하는 '케나트'(Kenaat) 부족이 있으며, 이들은 이락으로부터 쿠웨이트로 왔으며 네즈드 부족과는 다른 특성을 갖는 부족이다. 쿠웨이트에는 '베흐바니족'(Behbanis)을 포함하는 소수의 이란계 대가족도 있다. 거주민들은 '신쿠웨이트인'들로 불려지며, 비록 2등 국민의 대접을 받기는 하지만 대다수가 베두윈인 과거 팔레스타인인들도 소수 있다.

지도층을 포함하는 쿠웨이트인의 주류는 순니파 무슬림들이다. 하지만 페르시아계 부족의 대부분은 쉬아파 무슬림들이다. 총인구중 30% 정도는 쉬아파로 추정된다.

1994년도 쿠웨이트의 총인구는 1.83백만 명이며, 연평균 인구 증가율은 3.6%이다. 1992년 현재 도시화율이 94.0%이며, 평균 수명은 남자가 72세, 여자가 76세로 매우 높은 편이다. 언어는 아랍어가 공용어이며, 종교는 이슬람이 국교이며 순니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쿠웨이트인은 이주 부족으로 형성된 국가이기에 비교적 인구의 분포가 다양하며 비쿠웨이트인들의 이주가 많은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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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치약사

쿠웨이트는 비록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에 의해 관개가 된 평원의 정착민이라기보다는 항상 아라비아의 유목민 사막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바그다드의 '압바스'(Abbasid) 칼리프(750-1258), 몽고(1258-1546) 및 오스만 제국(1546-1918)을 포함하는 외세의 지속적인 통치가 쿠웨이트를 둘러싼 주변 지역에서는 거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현재 쿠웨이트 도시의 기원은 '아나이자'(Anaiza) 부족이 내륙으로부터 걸프만의 아라비아 해변으로 이주했을 때인 18세기초에 형성된다. 현 '싸바'(Sabah) 왕조의 기원은 쿠웨이트의 이주자들이 그들의 문제를 관리하기 위하여 '쉐이크'(Sheikh)를 임명하고, 안보권과 오스만 제국에 대한 대표권을 제공했을 때인 17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싸바왕조'의 통치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웨이트는 비록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에 의해 관개가 된 평원의 정착민이라기보다는 항상 아라비아의 유목민 사막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바그다드의 '압바스'(Abbasid) 칼리프(750-1258), 몽고(1258-1546) 및 오스만 제국(1546-1918)을 포함하는 외세의 지속적인 통치가 쿠웨이트를 둘러싼 주변 지역에서는 거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현재 쿠웨이트 도시의 기원은 '아나이자'(Anaiza) 부족이 내륙으로부터 걸프만의 아라비아 해변으로 이주했을 때인 18세기초에 형성된다. 현 '싸바'(Sabah) 왕조의 기원은 쿠웨이트의 이주자들이 그들의 문제를 관리하기 위하여 '쉐이크'(Sheikh)를 임명하고, 안보권과 오스만 제국에 대한 대표권을 제공했을 때인 17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쿠웨이트 시는 번성하였고, 1765년 800척의 선박을 보유한 인구 1만명이 상업, 어업 및 진주 채취로 생활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페르시아가 바스라(Basra)를 점령한 1776-1779년 기간에 동인도회사는 알렙포(Aleppo)로 가기 위한 육상 우편로의 남부 터미널을 바스라에서 쿠웨이트로 이동시켰고, 상당수의 바스라 교역은 쿠웨이트로 이관되었다.

쿠웨이트 왕가는 오늘날 쿠웨이트市가 된 지역으로 17세기 동안 이주한 중앙 아라비아의 '네즈드' 부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소수의 이주자들은 바스라 지역과 남서부 이란 지역으로부터 내륙으로 이주한 어업, 상업 및 진주 채취에 기반을 둔 부족들로 형성돼 있다. 하지만 도시의 경제적 생존력은 샤트 알 아랍의 신선한 물 공급의 의존 때문에 항상 불안정하였고, 쿠웨이트에 대한 통치권은 바스라의 오스만 주지사에 의해 권리가 주장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쿠웨이트의 통치자들은 오스만의 군사 및 경제력이 쇠퇴함으로써 사실상 상당한 자치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말 쿠웨이트는 영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말에 쿠웨이트는 과거 오스만의 주로서 유럽 강대국들에 의해 다뤄지지 않았다.

영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쿠웨이트는 1920년대초 사우디 왕국으로 확대되는 영토의 약40%를 잃었다. 쿠웨이트는 또한 1932년 이락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간헐적으로 주장했던 영토의 주권 문제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석유는 1938년에 발견되었지만, Anglo-American 콘소시움에 의한 대규모 생산은 1950년대가 될 때까지 시작되지 못했다. 1961년 영국으로부터 쿠웨이트의 독립은 쿠웨이트를 보호하기 위해 영국군의 파견을 요청한 이락의 군사적 위협에 의해 이의 제기되었다. 다음해 쿠웨이트의 독립은 '아랍연맹'과 UN의 허가에 의해 효과적으로 재인정되었다. 1990년 쿠웨이트는 이락의 침공으로 점령되었고, 미국 주도하의 다국적군이 점령 7개월후인 1991년 2월에 쿠웨이트로부터 이락을 몰아냄으로써 현재의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1756년 '싸바왕국'으로 창건된 쿠웨이트는 19세기말까지는 자치권을 유지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종주권 형태로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맺어 왔으며, 1899년 영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 1938년 발견된 유전은 1946년 생산을 개시하였으며, 석유수입의 증가로 쿠웨이트의 경제구조는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석유수입을 배경으로 각종 사회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근대화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각종 공공건물, 상가 등을 건설하였고 슈와이크(Shuwaikh)에 근대적인 상업항을 건설하였다.

1961년에는 영국과 보호조약을 폐지하여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고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1962년 11월에는 신헌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쿠웨이트의 정치제도는 입헌군주국이며, 국왕(Emir; 부족장, 편의상 왕으로 부르기로 함)은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로 수상을 임명하며, 수상의 추천으로 각료를 임명한다. 국회는 임기 4년의 50명으로 구성되는 단원제이다. 현재의 국회는 1963년 설립되어 1976년 국왕이 해산한 이후, 1981년 2월 재개되었다. 차기 국회의원 선거는 1996년 10월로 예정돼 있다.

각료는 수상의 추천에 의해 국왕이 임명하고, 각료는 임기중 국회의원 신분을 가지며 상행위를 할 수 없다. 사법제도는 이집트의 제도를 기본으로 하며, 범죄의 경중에 따라 Magistrates Court와 Criminal Assize Court에서 각각 담당한다. 외교노선은 비동맹 중립노선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친서방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1981년 창설된 GCC의 정책에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으며, 현재의 국왕은 1977년 왕위를 계승한 '싸바국왕'(Sheikh Jaber al-Ahmed al-Sabah)이다. 쿠웨이트의 정치약사는 <표>와 같다.

쿠웨이트의 정치약사

■ 18세기 : '싸바왕조'(Al-Sabah dynasty) 성립

■ 1756년 : '싸바왕조'(Al-Sabah dynasty)의 '싸바'(Al-Sabah) 국왕 즉위

■ 1899년 : 영국과 보호조약 체결

■ 1922년 : 사우디 및 이라크와 국경조약 체결

■ 1938년 : Anglo-Persian Oil Co. 쿠웨이트 남쪽 40 km지점 '부르간'(Burgan) 유전에서 최초로 석유 발견

■ 1946년 : 석유 생산 및 수출; 관세를 제외한 무상 보건, 교육 및 사회보장제도에 석유수입 면세로 제공

■ 1961년 : 영국과 보호조약 파기하고, 독립 선포(6/19)

■ 1963년 : 신헌법의 제정 및 초대 국회 의장 선출(1/23)

■ 1976년 : 국왕 의회 해산 및 헌법 효력 일부 정지

■ 1977년 : 현 '싸바국왕'(Sheikh Jabir al-Ahmad al-Jabir al-Sabah) 13대 에미르(Emir)로 집권(12/31)

■ 1981년 : 국회 재개원, '걸프협력위원회'(GCC; Gulf Cooperation Council) 가입

■ 1986년 : 국회 해산

■ 1990년 : 국회 재개원, 이라크에 의한 침공으로 점령(8/2), 이라크, 쿠웨이트 합병 발표(8/8), UN 안전보장이사회 대이라크 무력사용 결의(11/29)

■ 1991년 :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의 대이라크 공격(1/17), 이라크의 무조건 항복으로 점령 6개월만에 쿠웨이트 해방(2/25)

■ 1992년 : UN, 이라크와 국경선 결정(7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총50석중 31석 확보(10/5)

■ 1994년 : 이라크군의 국경집결로 서방의 다국적군 재배치(10월)

■ 1996년 : 요르단과 관계 정상화(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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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업 경제

1) 투자환경

2) 주요경제지표

3) 산업활동

4) 석유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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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한국과의 관계

■ 공식 수교 : 1979년 6월 11일

■ 주 쿠웨이트 한국 대사관 : 1979년 7월 17일 설치

주한 쿠웨이트 대사관 : 1992년 10월 5일 설치, 1992년 11월 25일 Al-Essa대사 신임장제정

■ 주 쿠웨이트 진출 업체 : 현대건설, 선경건설, 대림엔지니어링, 삼성

5. 북한과의 관계

■ 외교관계 없음

6. 쿠웨이트의 주요 수출입품

■ 주요 수출품 : 석유관련제품(96.9%)

■ 주요 수입품 : 기계류(36.8%), 식료품(21.2%)

7. 쿠웨이트의 주요 수출입국

■ 주요 수출국 : 일본(23.5%), 미국(18.2%), 네덜란드(17.2%), 인도(11.1%), 한국(9.6%), 싱가포르(8.8%), 파키스탄(6.0%), 필리핀(4.3%)

■ 주요 수입국 : 미국(16.6%), 일본(12.1%), 독일(8.0%), 영국(7.1%), 프랑스(6.6%), 이태리(5.6%), 사우디(5.6%), UAE(2.8%)

8. 한국과의 교역 관계

■교역량(1999년, 단위: 1000달러) : 수출 153,993  수입 1,416,413  무역수지 -1,262,420

■ 한국의 대 쿠웨이트 주요 수출품 : 섬유, 자동차, 전기, 전자

■ 한국의 대 쿠웨이트 주요 수입품 : 원유, 유류, 알미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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