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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와 중동 Mesopotamia and the Middle East

洪性敏의 中東地域   The Middl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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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Ancient Arabia)

아라비아(고대 페르시아어, Arabâya): 메소포타미아의 서부 및 남부에 있는 나라 이름. 세 개의 주된 지대(zone)로 구분 된다: 인도양 경계지역의 도시들(오늘날 예멘과 오만), 내륙의 유목지역(사우디아라비아) 및 북서부지역(요르단). 이들 세 지대의 라틴명은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 아라비아 사막(Arabia Deserta) 및 아라비아 페트라(페트라 통치의 아라비아, Arabia Petrae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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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연대기

메소포타미아 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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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지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오늘날 이라크로 알려진 고대 국가의 이름. 옛날에는 이 지역의 5개 지역(본래 메소포타미아,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서부사막지역, 산악지역)을 일반적으로 하나의 통일국가(unity)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리스어로 (유프라테스티그리스) "두 강사이의 땅(land between rivers)"을 의미하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원정을 기록한 역사학자 니코메디아의 아르리안(Arrian)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아르리안은 오래전 자료를 사용하여 오늘날 반도(Jezira)로 불려지는 지역 - 시리아 동부와 이라크 북부지역 - 의 표현에 사용했다. 또한 이라크 남부지역을 가르키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플리니(Pliny)였다. 고고학적으로는 아르리안의 표현이 보다 일반적이었다. 로마인들이, 비록 남부지역을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유프라테스 동부지역을 정복했을 때, 그들은 이 땅을 로마의 새로운 주(province) 메소포타미아로 불렀다. 


 

 

인류문명의 시원(始原):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 the Origin of Human Civilization 

실크로드(Silk Road)는 이제 단순한 교역의 차원을 넘어 현대문명을 실어나르는 <문명길(Civilization Road)>로 불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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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hanzhee,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고대도시, www.encyber.com 

메소포타미아Ancient World Net: 메소포타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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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 Korea Institute of the Mideast Economies (KIME). Editor: Dr. Seong Min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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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길>의 시원(始原):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 the Origin of Civilization Road

 

 

1. 문명의 길(The Origin of Civilization Road)을 찾아서

고대의 인간들이 미지의 세계에 족적(足跡)을 기록으로 남기며 간 길은 후에 통상로(通商路)가 되었고 그 길에서는 서로 다른 종교와 신(神), 문화와 전통 등이 서로 융화·충돌하고 또 문명을 교류하며 교역(trade)을 발전 시켜왔다. 우리는 그 길을 보통 '실크로드(Silk Road)' 혹은 '비단 길'이라 부른다. 세계의 지배자들은 그 길에서 부(富)를 축적하기 위해 다른 민족들을 정벌하기도 했다. 알렉산더가 그랬을 것이고 징기스칸도 그랬을 것이다. 오늘도 그 과정은 계속 진행되고 있고 그 목표는 '세계화(Globalization)'이고 세계무역기구(WTO)가 그 소임을 책임지고 있다. 이제 그 길은 단순한 교역의 차원을 넘어 "문명을 실어나르는 <문명길(Civilization Road)>로 불려져야" 한다.

실크로드의 중심에는 물(水)이 있었고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두개의 강(江)이 만나서 문명(文明)을 낳았다. 우리는 이 문명을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 (Mesopotamian Civilization)'이라 부른다. 바람과 낙타 등에 실려온 동과 서의 서로다른 문화(文化)는 수메르인(Sumerian)들이 이룩한  '오리엔트 문명 (Oriental Civilization)'의 차원을 넘어 동서양문명으로 구분되었다.  문명의 중심이 지중해 유역으로 옮겨짐에 따라 역사의 기억에서 사라진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21세기에 다시 기지개를 펴며 꿈틀대고 있다. 그 중심에 로마제국(Roman Empire)과 페르시아제국(Persian Empire)이 아닌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종종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로 불려지기도 한다.

실로 2000년만의 일이다. 그 중간에 몽골제국(Mongol Empire)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하며 '문명의 지배'를 시도했지만 문화적 배경이 취약한 몽골의 시도는 세계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명하는 일장춘몽의 역사를 기록하며 사라졌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재조명은 사라진 오리엔트 문명의 르네상스로 기록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부상은 중동(中東)이 문명의 완충지가 아닌 문명의 고향(故鄕)으로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다. 종교적으로 이슬람(Islam)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 지역의 부상은 세계화의 과정에서 더 많은 종교문화의 영향력을 가미시켜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문명의 시원(始原)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수메르인들의 역사적 족적(足跡)을 더듬는 일이란 쉽지 않은 충격(衝擊)을 인류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2. 문명길의 뿌리: 메소포타미아

이라크는 수많은 인류의 문명이 꽃피었던 땅이다. 그리스사람들은 이라크를 “두 강(江) 사이의 땅 (the land between the rivers)”이라는 의미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로 불렀다. 이라크는 이 지역의 비옥한 충적토(沖積土)와 풍부한 물(水)이 초창기 농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수많은 거대문명(巨大文明)의 본거지가 되었다.

구약(舊約)에서 노아(Noah)와 홍수, 바벨탑(Tower of Babel), 에덴동산(Garden of Eden; 창세기 2장: 4~25 에덴 동산)과 같은 이야기들은 고고학 연구자들로 하여금 이 지역을 추적하게 만든다. 수세기를 지나는 동안 수메르(Sumer), 바빌론(Babylon) 그리고 페르시아(Persia)와 같은 다양한 사회로 뿌리를 내리거나 아니면 침략자들이 이 땅을 점령함으로써 거대문명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이런 점에서 티그리스(Tigris)와 유프라테스(Euphrates) 강 근처의 땅을 지배해왔던 초창기 제국들은 인류에게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성경(인명이스라엘)|  유대교의 역사|

메소포타미아의 땅, 수메르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과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제 수메르의 베일은 신화 (神話)의 틀을 깨고 그리스-로마 문명과 히브리 경전의 창세기를 현존의 역사로 대체시키고 있다. 100년전에 시작된 수메르학은 쐐기문자(설형문자)의 해득 차원을 넘어 인류문명의 진화과정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이라크 지역에 속해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단순히 지리적 개념인 중동지역(The Middle East) 문명의 일부분이 아닌 인류 전체의 문명발상지로서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고대세계에 <동서문명>을 연결하는 중계지로서 인식되던 이 지역에 대한 연구는 방법론을 다시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로마문명과 중국문명을 연결하던  '실크로드(Silk Road)' 중심의 고류사를 초월하여 인류문명의 발상지로 찾아가는 범위로 그 연구가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세계의 4대문명 발상지 가운데 역사가 전하는 가장 문명화 된 지역은 오늘날 중동지역이라 볼 수 있으며, 세계의 언어, 종교, 산업 및 문화의 발상지로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보다 세밀히 말하면 수메르에 관한 연구는 '인류문명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최상의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라크의 키르쿠크의 동부에 위치한 깔라트 자르모(Qalat Jarmo)는 매우 중요한 유사이전의 유적지이다. 이 지역은 BC 7000년경 세계 최초의 농가촌락 공동체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의 ‘영원한 불’(Eternal Fire)로 알진 오늘날의 <석유>는 중요한 자원인 에너지자원으로서 아직까지 전세계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커다란 매력은 이라크에겐 '시달림의 역사'로 점철되고 있으며, <문명국가>의 후예로서의 역할을 가로막는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가 <인류 문명의 최초 발상지>로 재조명될 때, 동서문명의 뿌리로서 중요성은 배가될 것이다.

21세기에 경쟁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초고층 빌딩 '마천루(skyscraper)'는 바벨탑을 연상케하며, 친환경빌딩의 접근은 고대 7대 불가사이중 하나로 알련진 '공중정원(The Hanging Gardens of Babylon)의 건축술에 대한 연구에 까지 이르고 있다. 동서문명을 연결하던 실크로드도 오늘날 신 실크로드(New Silk Road)라는 개념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고 있다. 이제 그 길은 단순한 교역의 차원을 넘어 "문명을 실어나르는 <문명길(Civilization Road)>로 불려져야" 한다. (2010/09/07)


 

메소포타미아 연대기

메소포타미아는 초기 인간사회의 중요한 본거지였다.

 

고대 중동 (Ancient Middl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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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왕   국

신석기 시대

하섹(Hassex), 사쿠라(Saqurra), 할라프(Halaf) 문화

금석병용시대

우바이드기(Ubaid period) (기원전 5900년~기원전 4000년)

우루크기(Uruk period) (기원전 4000년~기원전 3100년)

초기 청동기시대

옘뎃 나섹기(Jemdet Nasex Period) (기원전 3100년~기원전 2900년)

초기 왕조 도시기(Early Dynastic city states) (기원전 2900년~기원전 2350년)

아카드 제국 (기원전 2350년~기원전 2193년).

우르 제3 왕조 ("수메르 르네쌍스" 또는 "신수메르기") (기원전 2119년~기원전 2004년)

중기 청동기시대

초기 앗시리아 왕국 (기원전 2000년~기원전 1800년)

고대 바빌로니아 (기원전 1800년~기원전 1700년)

후기 청동기시대

카사이트 왕조, 앗시리아 중기 (기원전 1600년~기원전 1200년)

철기시대 

신히타이트 (기원전 1100년~기원전 700년)

신앗시리아 제국 (기원전 1000년~기원전 700년)

신 바빌로니아 제국 (기원전 700년~기원전 600년)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왕조 (기원전 600년~기원전 400년)

Source: http://www.artlex.com/ArtLex/m/mesopotamia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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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c. 3100-c. 2000 BCE)

길가메시 서사시 (수메르어 작품)

인도와 접촉

아카디아 (c.2350-2200 BCE)

함무라비법전

도시

신화창조

종교

바빌론 (c.2000-1600 BCE)

 

카사이트와 히타이트 (c.1600-717 BCE)

카사이트

히타이트

히타이트 텍스트

물질문명

앗시리아 (c.1350- 612 BCE)

 

칼데아/신-바빌론 (612-539 BCE)

 

리아 도시들: 에블라, 우가리트, 에마르

 

페니키아 950 BCE

 

카르타고: 푼 제국

 

고대 중동의 예술과 건축

 

고대 중동의 수학과 천문학

 

성(性)과 성행위

 

메소포타미아에 관한 현대적 조망

 

공통의 관심사: 메소포타미아/이집트/유대/그리스역사

암흑기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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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Μεσοποταμία)에서 '두강 사이의 땅(Lands between rivers)'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대 이래로 역사, 지리학 및 고고학적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지리적으로 중동의 유프라테스 강티그리스 강의 주변 지역(현재의 이라크)을 일컫는다. 메소포타미아라는 지명은 터키 산악지대에서 걸프만(The Gulf)에 걸친 지역으로, 터키 남동부의 평원과 이라크 전역이 포함한다. 넓은 의미에서 메소포타미아는 북쪽은 터키의 산악지대, 남동쪽은 걸프만, 동쪽은 티그리스 강을 건너 이란과의 경계인 자그로스 산맥, 서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시리아 사막에까지 이른다. 로마인들은 두 강의 유역만을 메소포타미아라 불렀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이 자연적으로 가져다 주는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기원전 약 6000년 구석기 시대에 인간이 정착하여 주거하기 시작한 이래 점차 인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 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강의 범람이 불규칙적이고 잦아서 치수와 관개 등 대규모 사업이 필요하였다. 도시가 발달함으로써 교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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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기원전 4000년경, 이라크 남부의 지방 군소 도시들의 출현에서부터, 기원전 400년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까지 이어진다. 기원전 5000년경부터 기원전 600년경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시작될 무렵까지를 고대 메소포타미아라고 분류한다.

메소포타미아는 우루크, 니푸르, 니네베, 바빌론 등의 도시와, 아카드 왕국, 우르 제3 왕조, 아시리아 제국등 중요한 영토국가를 포함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로는 우르(우르의 왕), 사르곤(아카드 왕국을 창건한 인물), 함무라비(고대 바빌로니아 왕국 건설),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Tiglath-Pileser I)(아시리아 제국 창건) 등이 있다.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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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토대가 되었고 아카드, 아무르인들의 문명도 가미되었다. 이 시기에 화폐는 쓰이지 않았고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종교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현세적 다신교 믿었으며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점성술도 발전하였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불규칙적이고 잦은 범람은 참혹한 재앙을 가져왔고, 개방적인 지형은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을 불렀다. 이러한 자연 환경은 메소포타미아 인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자연의 혜택보다는 재앙을 극복하는 데 힘써야 했던 수메르 인들은 삶도 지극히 현세적인 삶을 꾸려 나갔고,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희망을 갖지 않았다.

문화적으로도 암울하고, 비관주의적인 특징이 강하였다. 그들이 갖고 있는 신에 대한 생각과 현세적인 가치관은 홍수 설화와 '길가메시 서사시'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근년에 와서 고대사에 관한 많은 새로운 지식이 더해짐에 따라, 인류의 가장 오랜 문명을 쌓아올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이미 BC 4000년에 놀랄 만한 고도의 기술이나 물질문명이 결실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미술·종교 면에 있어서도 그 소박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의 깊은 이해를 나타내는 걸작, 또는 제신(諸神)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갖가지 유품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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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의한 비옥한 퇴적평야로서 수메르(Sumer)인은 역사의 시초에 이미 남부에 정주하여, 각지에 소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수메르인의 왕은 주신(主神)의 하나인 엔릴의 아들이라 칭하여 신으로서 숭배받았으나, 그들의 뒤를 계승한 셈(Shem)인의 왕은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지 않았다. 예컨대 바빌론 제1왕조의 함무라비왕(BC 2000년 전반)은 신 에아와 엔릴에 의해 왕으로 지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주요한 3주(三柱)의 제신을 한 쌍으로 해서 숭앙하는 습관이 있었다. 수메르인 사이에서는 아누(Anu:天神)·엔릴(Enlil:地神)·엔키(Enki:水神) 등이 숭앙받았다. 최고신 아누는 이미 형식적 존재가 되어 있었으며, 수메르 판테온의 실권은 엔릴에 돌아와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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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의 신장과 함께 주신(主神)은 국가신의 성격을 강화했다. 셈 판테온에서는 셈인의 주신 마르두크가 함무라비왕 시대에 엔릴의 기능을 계승하여 최고신이 되었으며, 샤마쉬(Shamash:太陽神)·신(Sin:月神)과 함께 한 쌍을 이루었다. 기원전 2000년 말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아시리아 제국에서는 주신 아슈르(Ashur)가 최고신이 되었다.

고급관리가 되는 지름길은 신전 부속의 서기(書記)학교에서 점토판에 설형문자(楔形文字)를 배우는 일이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류가 소유하는 가장 오랜 이야기의 하나이다. 몸의 3분의 2가 신, 3분의 1이 인간이라고 했던 영웅 우루크의 왕 길가메쉬가 영원의 생명을 구하여, 일찍이 대홍수에서 살아난 제신의 하나가 된 지우도라(아시리아판의 우트나피슈팀)를 찾아간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길가메쉬는 일단 영원의 생명을 얻기는 하나 도중에 이를 잃고 헛되이 우루크로 돌아간다.

새해에는 천지창조의 성극(聖劇)이 제사(祭司)들에 의해 상연되고, 신전은 토지나 양의 무리를 소유, 소작이나 목축자에게 빌려 주어 연공(年貢)을 바치게 하거나,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 주거나, 물가의 기준이 되는 은의 정제가공이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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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의 경내에는 자주 지구라트(Ziggurat:산을 뜻한다)라고 불리는 벽돌을 쌓아올린 높이 수십 미터나 되는 인공의 산이 구축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른바 '바빌론의 탑'으로 불리는 에산길라 신전의 지구라트가 유명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는 어떤 종류의 형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두무지(Dumuzi:후의 탐무즈, 아도니스) 신앙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것이었다. 훗날 탐무즈는 해마다 시들고 봄이 오면 다시금 싹이 돋는 식물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고 했다. 원래 수메르에서는, 두무지가 사후 이 지상에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저승의 주민이 되었음에 불과한 듯싶다.

아무튼 그의 아내인 여신 이난나(Inana:후의 이쉬타르, 아티스)와 함께 농산물의 풍요나 가축의 다산을 기원하는 신앙 대상으로서 극히 광범하게 고대 오리엔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뒤로 점술은 매우 융성해졌다. 1년의 반 이상이나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이 지방에서는 별의 관찰이 용이하여 규칙적인 천체의 운행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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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수메르 인은 설형문자(쐐기 문자)를 사용하였다.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뾰족한 갈대 펜으로 글씨를 새기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자인데 표음 문자로 발전했다. 한편 페니키아 인들이 사용한 문자는 오늘날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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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mythology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문헌은 주로 석판이나 진흙판에 기록되어 있다. 유명한 신화로는 길가메시 서사시가 있는데, 12개의 판으로 된 이 서사시는 길가메시가 세운 도시 우루크의 성벽들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길가메시와 그 친구 엥키두의 공적에 대한 이야기로, 이들의 모험 가운데 압권은 케다르 산을 지키는 거인 훔바바를 무찌른 일이다. 엥키두가 죽은 뒤 길가메시는 영생을 얻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다 대홍수 때 살아 남아 영생을 얻은 우트나피시팀 같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길가메시는 3번이나 목표를 달성할 뻔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다. 몇몇 메소포타미아 설화들은 영생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아다파 신화에서 아다파는 남풍신의 날개를 부러뜨려 신들에게 불려갔다. 그의 아버지 에아 신의 경고 때문에 아다파는 먹거나 마셨다면 영생을 얻을 수도 있었던 신의 음식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영생에 대한 다른 이야기로는 자식이 없는 키시의 왕 에타나 이야기가 있다. 에타나는 자식을 얻기 위해 출산의 나무로 가려고 독수리를 풀어 그 등에 올라타 하늘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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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신화로는 살아 남으려면 배를 만들라는 어떤 신의 경고를 듣고 홍수에서 살아 남은 현명한 사람 아트라하시스 이야기가 있다.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돌아온 이시타르의 신화는 분명히 다산의 순환과 관련되어 있다. 네르갈과 에레시키갈 이야기는 어떻게 네르갈이 지하세계의 통치자가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이라의 서사시는 바빌론의 신 마르두크가 어떻게 해서 바빌론을 다른 신들에게 맡겨 멸망하게 내버려두었는가를 설명했다. 이 서사시는 마르두크가 돌아와 이 도시를 다시 번영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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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법

수메르 인은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하여 1년을 12달로 하는 태음력을 만들고, 다시 하루를 24시간, 한 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하는 60진법을 만들었다. 원을 360°로 나누는 것도 그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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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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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품

토우(土偶)는 가장 오래된 사마라 시대부터 끊임없이 만들어온 조각으로서 대부분 비대한 여성의 나상(裸像)이었으나, 사마라·하수나·할라프·우바이드 시대를 거쳐 날씬한 여성 입상으로 변천한다. 뱀 모양의 얼굴과 모신상이 특징이다. 여러 신전에 있는 입체 석상들은 제2, 3 초기 왕조시대부터 나타나는데 10~90㎝의 다양한 크기로 특색있는 복장을 한 남녀상, 부인의 머리 형태를 강조한 여성의 두상 등에서 그 특징이 나타난다. 특히 봉헌물로 바친 석상들인 ‘식물신의 대좌 위에 서 있는 남녀신상’ 등을 통해 그들의 신에 대한 경배심을 느낄 수 있다. 그밖에 아카드 시대에 나타난 터번 두른 두상·동제두상, 라드사 시대의 등신대입상·석조두상 등이 있다. 원문자시대에 왕성하게 제작된 각종 동물형(들짐승·물고기·전갈·사슴·개구리·비둘기 등) 조각과 호신구에서 뛰어난 석재 가공술을 볼 수 있다. 또한 개구리·멧돼지 모양의 저울추는 역사시대의 특징적 조각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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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

부조로는 전시대를 걸쳐 봉납판과 경계석·전승비 등의 형태가 중심이 되어 발달되었으며, 제사·예물을 바치는 인물상과 왕의 업적 등을 기리는 주제를 가진 종교와 일상용도의 부조물이 많이 제작되었다. 초기 왕조시대에 나타난 〈3단 정4각형 봉납판〉에는 향연과 봉물을 나르는 행렬 등이 묘사되었고, 그외에 예물을 바치는 나체상, 신전을 거니는 왕, 제사드리는 사람들도 다른 봉납판(카파제 출토)에서 볼 수 있다. 이신·라르사 시대에 주형을 떠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 점토제 봉납판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남녀신상, 맹수와 싸우는 영웅, 야수 등의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했다. 카시트 시대에 선보인 경계석은 전체의 각 부분을 새긴 벽돌을 쌓아 하나의 장식이나 인물상을 만들어내는 기법으로 제작되고 대량생산되었다. 왕의 근황, 업적, 극적인 승리, 신을 향한 경건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이 묘사된 왕비(王碑) 및 전승비는 라가시의 〈에 안나 톰 전승비〉에 이어 아카드 시대의 〈나람 신의 전승비〉로 이어지는데, 특히 이 전승비는 높은 산을 향해 서 있는 거대한 모습의 왕과 빈사상태에서 자비를 구하는 적병을 대조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왕의 극적인 승리의 순간을 강렬하게 나타낸 것이 특징적이다. 신을 향한 왕의 경건심을 묘사한 〈시조 우르 남무의 비〉(우르 제3왕조 시대)도 있다.

이밖에 아시리아의 복장·무기·가옥·도시 등을 묘사한 3대 궁전(니네베·카라프·코르사바드) 벽의 부조 장식은 그 시대 양식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준다. 시유된 채식벽돌의 대량생산 등 위대한 문예부흥이 일어난 신바빌로니아 시대는 신을 상징하는 동물들과 함께 기하학무늬가 절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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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선사시대부터 있었던 기하학무늬의 석도장(石圖章)은 주로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되었으며 원문자시대가 되면서 원통도장이 남부에서 나타난다. 3,000년에 걸쳐 사용된 원통도장의 제작술은 매우 뛰어나며 후대 도장양식의 모체를 이룬다. 대체로 종교적·일상적인 용도로 제작된 이 동상은 짐승과 사람의 투쟁, 봉헌, 향연, 전쟁, 괴물 등과 신·왕의 모습도 조각되어 있다. 각문(刻文)을 중심으로 한 문장(紋章)이나 신화를 주제로 만든 도장(아카드 시대), 용, 짐승, 여성의 나체 등이 있는 호신구의 의미를 갖는 도장(구데아 시대), 신과 신도들, 기도문만으로 줄어든 원통도장(카시트 시대), 신상 대신 신의 표장(標章)과 점성술의 상징으로 나타난 도장(중기 아시리아 시대) 등이 전시대를 거쳐 변천해왔으며 점차 더욱 단단한 재질을 사용했고 세공술도 많이 발전했다.

 


벽화

주로 궁전에 그려진 벽화는 텔 우카일 신전(원문자시대)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여기에는 기하학무늬와 제단 옆의 사람과 동물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크리갈즈의 '채색궁전'(카시트 시대)은 식물, 이집트 여신, 소의 머리 등을 구사하는데 이는 서방의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아시리아 벽화도 서방에서 유래된 좌우대칭의 생명의 나무를 다색으로 그려넣었음을 볼 수 있다. 코르사바드 왕궁에서 발견된 벽화는 획일적인 화면 구성으로서, 왕과 재상이 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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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공예

금·은·조개껍질·납 등의 다양한 재료와 야금술·납형법의 기술로 발달된 메소포타미아 금속공예는 전시대를 통해 많은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사시대의 구리장식구슬·핀·바늘, 야금술이 보여주는 고도의 기술, 초기 왕조시대의 납형법의 석조 조각과 사자 머리에 새의 몸을 갖는 동제부조, 걸작 〈엔테메나의 은항아리〉(라가시 출토) 등은 아카드 시대의 걸작 〈사르곤상〉에서 절정을 이룬다. 또 제3기 초기 왕조에 나타난 여러 동물상과 하반신 막대 모양의 인물상은 우르 제3왕조까지 이어지는데, 이들은 건축물의 기초를 메우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옷자락을 물결 모양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특징적이다. 금속 조각이 점점 줄어들며(우르 왕조 이후) 새로운 재료인 청동·운철(BC 3000년대)·철(BC 2000년대)이 널리 보급되면서 BC 1000년대에는 대량의 철제품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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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과 상아제품

원문자시대에 만들어진 돌항아리에 입혀진 상감은 꽃무늬·기하학무늬 등이 장식되었으며 때로 건물 벽·기둥에 원추형 테라코타를 넣은 모자이크무늬나 건물 외곽의 원추를 그린 타일이 제작되었다. 상아의 사용은 초기 작품에는 드물었고 신아시리아 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상아는 지중해지역에서 수입되었으며 그 제품은 서방의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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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품


도구와 무기

석기와 함께 흑요석으로 만든 칼이 초기 메소포타미아 시대부터 제작되면서 활·창·도끼·화살촉 등 의식용구나 무기가 전시대에 걸쳐 만들어졌다. 또 야금술의 발달에 따라 방패·투구·갑옷도 고도의 기술로 제작되었음을 부조상의 묘사를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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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

전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돌·조개껍질로 된 구슬장식, 팔찌·귀걸이·빗·머리핀 및 화장도구가 초기 왕묘나 분묘에서 출토되어 성별·연령·신분에 따른 당시의 의복 및 의례를 보여준다. 방적기술이 알려져 있었던 선사시대를 거쳐 원문자시대에 들어 수염과 리본으로 묶은 긴 머리가 높은 신분을 상징하면서 남성은 치마를 입고, 여성은 왼쪽 어깨를 드러내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카드 시대 이전까지는 신발이 없었으며 이신·라르사 시대에 비로소 옷의 가장자리 장식, 주름이 있거나 어깨를 감싸는 옷이 나타났다. 왕은 긴 옷을, 병사는 짧은 옷을 입는 아시리아의 전통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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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

형태로써 연대를 결정할 수 있는 부문으로서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형태·장식·무늬 등에서 상당한 분화가 이루어졌다.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장식과 기하학 무늬를 갖는 토기들이 점차 우바이드 시대에 들어 서부 이남, 지중해에 걸쳐 분포되면서 모양·도안이 다양해지고 단색 토기가 다채식 토기로 변형된다. 식물·동물·사람 등이 묘사된 '스카렛 토기'(초기 왕조시대)에 이어 전차·악사·향연 등의 장면을 묘사한 초기 왕조 제3기 토기가 나타난다. 유약을 쓰게 되면서(BC 1000년대) 무채색의 토기에 변혁이 오고 아시리아의 '하불토기'와 서방에서 유래한 미탄니의 흰 도자기 등 희귀한 도기들이 이신·라르사 시대에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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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피리는 뿔피리(우바이드 시대)가 현재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남아 있으며 관현악단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시리아의 부조를 보면, 사치스러운 장식(상감, 금·은·보석 장식)이 붙여진 하프, 여러 악기(리라·하프·류트·심벌즈)를 연주하는 이국풍의 복장을 한 악사들 등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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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

'7개의 입구가 있는 항아리' 등 점토·금속·조개껍질 등을 이용해 만들어진 램프는 신발·조개 모양을 띠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유약이 발라진 램프도 등장했다.


배와 전차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을 드나드는 교통·운송 수단의 배로서 이미 선사시대부터 범선이 쓰여왔던 것 같다. 또한 시대를 거쳐 선체가 긴 유형(역사시대), 노와 차양까지 갖춘 유형(우르 왕조) 등이 있었고, 배와 항해선이 구별되어 사용되었다. 또다른 교수단이었던 전차는 소가 끄는 짐차, 포장마차형의 테페가우라, 2륜·4륜 전차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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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묘와 매장

분묘와 매장은 초기 단수매장부터 화려한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매장에는 반드시 껴묻거리[副葬品 : 토기·일상용품·음식물]가 따랐다. 공동묘지, 주거지 밑에 만든 묘지, 신성구역묘지 등 다양한 형태의 분묘도 각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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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백과, 한국브리태니커, 1999-2002)

* 여기에 사용된 사진은 사용을 원할 경우에는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연락처: hong@hopia.net

 

 

 

 


메소포타미아 관련 용어 정의

 

 

1. 문명과 문화

 

문명(civilization):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사회적 발전, 즉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사회와 문화를 말한다. 문명(civilization)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키비스(civis:시민)나 키빌리타스(civilitas:도시)에서 유래하였다. '미개'와 대응하는 진보된 인간생활의 총체를 말하는 경우에 많이 사용되며, 라틴어의 ‘시민’과 ‘도시’에서 유래한 바와 같이 특별히 ‘도시문화’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Source: 브리태니커, 위키백과, Britannica, Naver, Wilpedia)


문화(culture): 사회 구성원에 의해 공유되는 지식, 신념, 행위의 총체를 말한다. 인류의 도구의 사용과 함께 인류의 고유한 특성으로 간주된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주요한 행동 양식이나 상징체계를 말한다.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언어, 관념, 신앙, 관습, 규범, 제도, 기술, 예술 및 의례 등이 있다. 문화의 존재와 활용은 인간 고유의 능력, 즉 상징적 사고(언어의 상징화)의 능력에서 기인한다. 문화는 음악, 미술, 문학, 연극, 영화와 같은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Source: 브리태니커, 위키백과, Britannica, Naver, Wikipedia)


cf. 문명과 문화: 19세기말 '문화'를 최초로 정의한 타일러(1832~1917)는, '문명'과 '문화'를 동일시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T. 홉스 등은 '문명과 사회'를 동일시하고 문명이전을 무질서상태(자연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연상태라고 부를 만한 무질서한 세계는 미개사회까지 포함하여 인간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져 이 개념은 무너졌다. 서양에서는 18-19세기에 이르러 형성된 유럽의 문화를 일반적인 문화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문화를 문명과 동일시하는 동시에 서구문명을 문화의 전범으로 파악하려는 서구우월주의에 의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Source: 브리태니커, 위키백과)


문명과 도시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 도시가 수행한 역할은 크다. V. G. 차일드는 “도시가 문명의 기본적 요소”임을 역설하고 신석기시대의 농경문화에서 문명에로의 추이를 '도시혁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도시는 문명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문명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그러므로 문명과 '도시성'(urbanism)을 동일시할 수는 없으나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문명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기술문명을 생각하게 된다. 이 경우의 문명개념에는 2가지가 합류되어 있다. 하나는 독일계의 문화사회학자, 특히 M. 베버(1868~1958)가 제시한 문화에 대한 문명개념으로서, 문명이란 무한히 진보한다고 생각되었던 기술적인 여러 수단의 총체를 의미한다. 또 하나는 민족문화에 대한 세계문화화로서, 문화가 대개의 경우 민족·언어·전통과 결합되어 있어서 국경을 넘어가는 일이 없는 데 비해 문명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해 보급되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국경을 넘어 퍼져가는 것을 M. 모스는 '문명현상'(fait de civilization)이라고 불렀다.

현대문명은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기계, 컴퓨터 시스템이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고 거기에 광범하고 조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기술환경'이라는 새로운 인간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과거의 문명과는 구별된다.

기술문명은 '문명현상'을 집적해감으로써 인류의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이미 만들어냈다. 그러나 베르그송 이래 많은 사상가들이 논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현대문명은 인간의 신체를 인공적으로 확장해 나간 것이며 영혼이 결여된 존재인 것같이 보인다. 문명의 개념은 프랑스의 백과전서파와 볼테르(1694~1778) 등이 진보의 관념에 입각한 정신적·인간적 자각을 내포한 것으로 제기한 것이므로, 현대문명의 문제를 생각하는 경우, 기술적 수단의 총체로서의 문명과 국경을 넘는 '문명현상'에 대해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Source: 브리태니커, 메소포타미아(google)


세계 4대 문명(世界 四大 文明)

세계 4대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명을 발달시킨 4개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이 지역들에는 모두 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 이집트 문명을 말한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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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사전에 나타난 인명, 지명 정리 

출처: C3TV 온라인 성경


동산: garden

작은 산 혹은 큰 집 안에 만든 언덕이나 숲을 말한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담으로 둘러싸인 땅’이라는 뜻이며 헬라어로는 ‘케포스’(kepos)이다.

동산은 보통 주위를 벽이나 울타리로 둘러싸서(아 4:12) 외인의 출입을 제한했고, 동산 안에는 물이 대어 있거나(사 58:11) 샘이 있었다(아 4:15). 따라서 귀한 식물이나 향품, 꽃, 채소 등을 재배할 수 있었다(아 4:14; 6:2). 또 동산 안에 무덤을 만들기도 했으며(왕하 21:18; 요 19:41), 이방신에게 제사하는 장소로 사용된 예도 있다(사 1:29; 65:3; 66:17).

성경 속에는 여러 가지 동산들이 나온다.


에덴 동산 :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되는 동산은 에덴 동산이다(창 2:8). 이곳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비옥하고도 풍요로움을 내포하고 있는 동산이었다(창 13:10; 사 51:3).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에덴 동산에서 살았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결국엔 추방당했다(창 2:8-3:24).

선지자들이 언급한 동산 :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동산에 비유하며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임을 예언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물이 끊어지지 않는 동산과 같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사 58:11), 예레미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곡식과 포도주, 기름, 양과 소떼가 풍부한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있는 동산과 같을 것이라고 말했다(렘 31:12).

솔로몬이 만든 동산 : 솔로몬은 실제로 여러 동산을 만들었으며(전 2:5),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동산에 비유하여 시적으로 묘사했다(아 4:12-16).

예수님과 관련된 동산 :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마 26:36-46; 요 18:1, 26; 19:41). 이곳에서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통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동산에 있는 무덤에서 일어났다(요 19:41).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무덤을 빌려 주었던 사람은 동산 안에 자신의 무덤을 마련해 두었던 아리마대 요셉이었다(마 27:57-60).

동산의 상징적 의미 : 동산은 아름다움, 평화, 안식 등을 상징했다(창 13:10). 또한 종말론적으로도 사용되어 하나님의 하늘 왕국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계 22:1-6). 요한이 묘사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이미 잃어버린 에덴 동산을 배경으로 한다(창 2:8-13; 겔 47장). 인간의 죄로 인해 과거의 에덴 동산을 잃어버렸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새 에덴 동산은 영원한 평화와 안식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바벨: Babel

시날 평지에 있는 곳으로 함의 손자 니므롯의 나라가 시작된 곳이며(창 10:10), 하나님께서 성과 대를 쌓은 건축자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던 곳이다(창 11:9). 하나님은 노아의 후손들에게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지만(창 9:1) 그들은 시날(바빌로니아)에서 도시를 세우려고 결심하였다(창 11:3-4). 그들은 또한 자신들을 위해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 연합하기 위해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수 있는 대로 쌓기로 계획하였다(창 11:4).

바벨에 세운 대는 아마도 벽돌과 흙의 계단식의 탑이었을 것이며, 지구라트(ziggurats)로 알려진 후대의 수메르인들과 바벨론인들의 신전 건축물들과 같았을 것이다.


바벨, ‘혼돈’이라는 뜻

바벨이란 말은 원래 아카드어 ‘바빌루’(Babilu)로 ‘신의 문’이라는 뜻이었으나 히브리식으로 ‘바벨’(Balbel), 즉 혼란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바벨에서의 도시와 대의 건설은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의미하고 있다.


바벨론: 

http://bible.c3tv.com/bible/dic/dic_view.asp?Page=7&Word01=&Word02=&OrAnd=&GWord=ㅂ&MenuCd=4&BiDicCd=4183


사람: Man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진 피조물로(창 1:26)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존재이다(창 1:28).

구약의 표현들: 구약에서 히브리어 ‘아담’(Adam)은 최초의 인간 이름인 동시에 ‘인간 존재’ 또는 ‘인류’(mankind)를 가리킨다.

남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이쉬’(Ish)와 여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이솨’(Ishah)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의 개개인을 이르는 말이다. ‘에노쉬’(Enosh)는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로,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지으셨을 때와는 대조되는 인간의 상태(시 103:13-16)를 말한다. ‘네페쉬’(nepesh)는 구약에서 사람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 ‘인간의 내적 존재’, ‘살아있는 존재’, ‘인간 그 자체’, ‘욕망과 감정의 좌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혼’(soul)으로 번역되었다. ‘움직이는 공기, 숨, 호흡’의 의미를 가진 ‘루아흐’(ruach)는 ‘바람’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보통 ‘영’(spirit)으로 번역된다. 구약에서 흔히 육체를 가리킬 때 사용된 ‘바사르’(basar)는 연약한 인간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시 73:26; 렘 17:5).

신약의 표현들: 신약에 사용된 대부분의 헬라어들은 히브리어에 대응되는 것들이다. 히브리어 ‘네페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psyche)는 대부분 ‘혼’으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루아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pneuma)는 ‘영’으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바사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소마’(soma)와 ‘사르크스’(sarx)가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대부분 헬라 문화와 철학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에서는 일반 헬라어의 의미와 구별되어 사용된다. 성경은 사람이 육체적인 면과 비육체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 둘을 독립적으로 다루지 않고 전체로서의 한 인격체로 보고 있다. 즉 사람은 이 두 측면으로 창조되어 존재하는(창 2:7) 하나의 인성이다.

피조된 인격체로서의 사람: 사람은 하나님의 전적인 다스림 아래 있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느 9:6)들처럼 ‘피조물’에 불과하다(창 1:1, 27; 행 17:25, 28 참고).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일에 대해 결단하고, 목적을 세우고 그것을 위해 선택하고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의지를 가진 독립된 ‘인격체’이다. 즉 사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 있으며 상대적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피조물로서의 사람은 토기장이에 의해 빚어지는 진흙과 같지만(롬 9:21) 인격체로서의 사람은 자신의 결단을 통해 삶을 설계해 나가는 존재이다(갈 6:7-8).


사람에 대하여

기원-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 행위에 의해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정체성-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위치- 피조물 가운데 천사와 동물 사이에 위치한다.

성향- 각 사람은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 및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구성 요소- 몸, 혼, 영, 지성, 도덕적 의지 등 여러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성경은 각각을 독립된 것으로 말하지 않고 전체를 한 인격체(全人)로 말하고 있다.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과 이웃, 나아가 자연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역량이 있다.

타락-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은 죄로 인하여 부패되었다는 것이다.

자율성-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들을 알고 있으며, 그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책임성 있는 존재이다.

구속-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회복된 상태를 말한다.

목적-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영원히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 목적이다.


아담: Adam

인명: 천지창조 여섯째날에 하나님이 흙을 빚어 만든 인간을 말한다. 히브리어 ‘아담’(?dam)이라는 말은 ‘인간’이나 ‘인류’라는 의미로 성경에서 500회 이상 사용되었다(창 2:19; 5:3; 대상 1:1; 호 6:7; 눅 3:38; 롬 5:14; 고전 15:45 등).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인간에 대한 고유 명사이자 본래적인 의미의 인류라는 집단 대표성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용어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전혀 구분이나 차별 없이 전적으로 하나의 모습 곧 아담과 동일시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아담의 어원적 의미는 히브리어의 ‘흙’을 의미하는 ‘아다마’(Adamah)와 연관된 것으로 본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은 인간의 삶이 땅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과 인간의 연약성과 하나님의 절대성을 동시에 보여 주는 것이다.

아담이라는 단어가 고유명사로 사용된 것은 창세기 1-5장과 역대상 1:1이다.

어떤 이들은 창세기의 창조 기록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신화로 여기고 아담을 신화적 인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러셨듯(마 19:4-6) 성경은 아담을 분명히 역사적인 인물로 본다. 실제로 아담은 가인과 아벨, 셋과 그 외 다수의 자녀를 낳았으며(창 4:1-2, 25), 930세에 죽었다(창 5:5).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창 2:7), 그가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아담은 물질적이면서도 영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로 지음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이며 심미적이고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존재였다(엡 4:24-32; 골 3:8-17). 이런 측면은 실제로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거닐며 에덴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모습으로 드러났다(창 2:20). 또한 이 과정에서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반응하기도 했다(창 3장). 이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특별히 여기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지상적 대리자로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었다(창 1:26). 이는 인간에게 위탁된 자연을 마음대로 정복하고 파괴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에 따라 창조의 질서들을 세워 나가는 방향에서의 지배권이었다. 따라서 이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사용하는 권리가 아닌 돌보아야 하는 책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아래, 물질적인 세상보다는 위에 존재하면서 세상을 다스릴 책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아담에게는 사역을 위한 동역자로서의 배필이 필요했다(창 2:21-23). 개역성경에 ‘배필’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게드’(neged)라는 말은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은’이라는 의미이고, ‘돕는’이라는 히브리어 ‘에제르’( ?zer)는 상대방의 부족이나 곤경을 향한 적극적인 도움을 의미한다. 따라서 돕는 배필은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독립된 인격을 기본으로 하며 이보다 차원높은 사랑의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담: 아담은 하와가 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받아 먹어(창 3:6; 딤전 2:13-14)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금하셨던 약속을 어기는 죄를 짓고 말았다. 이 열매를 먹지 않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보존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일을 범함으로써 아담은 물론 아담이 책임지고 있었던 모든 자연의 질서가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결국 원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보다 자신에게 초점을 두게 되며, 이기적이고 무관심하며 죄악된 행동으로 자신을 표현하게 되는, 왜곡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아담과 범죄한 이후의 아담, 즉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아담, 둘로 구분되어 졌다. 전자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위치와 사명, 축복과 책임 등을 보여 준다면, 후자는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를 보여 주는 성경적 출발로서의 인간 모습이다. 하지만 이렇게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아담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분으로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그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기도 하셨지만(창 3:11)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주셨고(창 3:15), 그런 때가 되기까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적극성을 보여 주셨다(창 3:24).

따라서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지막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찾아오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가 되었다.

지명: 요단 강 동쪽에 있던 사르단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성읍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요단 강을 건너려 할 때, 여리고 앞에서부터 이곳까지 물이 역류했다. 이곳은 여리고에서 북쪽으로 25km 부근에 있었으며, 백성들은 요단 강을 건널 때 물이 흐르지 않는 땅을 걸어서 건넜다(수 3:16).


아담과 그리스도

신약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두 가지로 연관시키고 있다.

첫째, 누가복음 3장에 소개된 족보는 예수님의 계보를 아담까지 연결시켰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참된 인간이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둘째, 바울은 아담을 첫 아담으로 보고,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소개한다(롬 5:12-21; 고전 15:20-49). 이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셈이다. 개인의 내적인 성품이 타락한 사람으로서 아담과의 관계 가운데 있든지 영적인 소생을 가져오는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담은 타락한 인류를, 예수님은 구속받은 인류를 대표하는 표본으로 쓰였다. 결론적으로 아담은 사망을, 예수님은 생명을 가져왔다(롬 5:18).


아담의 죄가 어떻게 내 죄가 돼나?

성경은 아담이 최초로 죄를 세상에 들어오게 했고, 그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다고 말한다(롬 5:12). 한 사람의 죄가 어떻게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것일까?

아담이란 이름은 ‘사람’이란 뜻으로, 그는 온 인류의 대표자였다. 따라서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아담과 함께 죄를 짓는 데 동참한 것이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은 죄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 것이다. 즉 아담이 인간 생명의 강물을 오염시켰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강물을 마신 자는 동일한 병(죄)에 오염되어 버린 것이다. 이 병은 죽음,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는데 이것을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었다. 이 병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벧전 2:21-23).


앗수르: Assyria

지금의 이라크 북쪽인 티그리스 강 상류를 따라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BC 2000년경에 형성된 국가이다. 성경에서 앗수르는 함의 손자인 니므롯이 앗수르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한 때부터 등장한다(창 10:12).

앗수르 제국의 중심 도시는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니느웨, 아서 및 갈라 등이었으며, 이스라엘이 국가로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고 이 지역의 주민들은 주변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 앗수르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시기는 약 300년 동안(BC 911-609)으로 신(新)앗수르 시대였다.


앗수르와 이스라엘과의 관계 :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아닷 니라리 2세, 앗수바니팔 2세, 살만에셀 3세가 통치하던 시기(BC 911-824)에 앗수르는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이스라엘을 위협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왕이었던 아합은 다메섹의 하닷에셀에게 병거 2천 승과 군사 1만 명을 지원하여 살만에셀 3세와 전투를 했으며, 이스라엘 왕 예후는 살만에셀에게 예물을 바쳐야 했다.

앗수르가 수리아(아람)를 공격하자 이스라엘은 잠시 앗수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BC 824-744). 유다 왕 요아스는 이전에 아람에게 빼앗겼던 북쪽 성읍들을 되찾았고(왕하 13:25),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왕하 14:25)와 유다의 웃시야는 그들의 영토를 확장했다.

앗수르 제국은 내분으로 인해 약해진 시기를 넘기고 강력한 왕들에 의해 통치되었다(BC 744-627). 디글랏 빌레셀 3세는 다메섹을 함락시켰으며,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수많은 포로들을 잡아갔다(왕하 15:29-30). 므나헴 시대에 이스라엘의 부유층들은 디글랏 빌레셀에게 은 50세겔씩을 바쳤다(왕하 15:20). 유다의 아하스는 복종의 표시로 이방 신전을 건립했으며(왕하 16:10), 이스라엘 왕 호세아가 앗수르 제국에 매년 바쳤던 조공을 중단하자, 살만에셀 5세는 사마리아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왕하 17:3-4).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사르곤 2세는 무려 2만 7천 명 이상을 사마리아로부터 강제 이주시켰다.

사르곤에 이어 왕이 된 산헤립의 통치 때(BC 704-681) 앗수르 제국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애굽을 공격했으며, 유다의 히스기야에게 조공을 강요하였다(왕하 18:14 이하).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지만 갑자기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왕하 19:35). 유다 정복에 실패하고 돌아간 산헤립은 아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왕하 19:37). 에살핫돈은 속국들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들과 조약을 맺어 앗수르 제국의 신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토록 했으며 속국들 중에는 므낫세 치하의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다(왕하 21:1-9). 이후에 앗수르는 급속히 쇠퇴해 갔다.

앗수르가 내분으로 약화되자 주변 국가들은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BC 627-609). 유다의 요시야는 이러한 시기에 개혁을 단행했으며 갈대아인들(바벨론)이 일어나 앗수르를 몰아냈다. 요시야는 앗수르를 도우려던 애굽의 군대들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왕하 23:29-30). 나훔과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대로 니느웨가 함락당해 앗수르 제국은 무너지고 바벨론이 새로운 패권을 잡았다(나 1:1; 2:10; 습 2:13).


진노의 막대기, 앗수르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앗수르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도구였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를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고 하셨다(사 10:5). 하나님은 앗수르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한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셨던 것이다(사 10:5-6). 하지만 앗수르 역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교만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심판을 받았다(사 10:12-16; 14:24-25).

수백년 동안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국가였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은 범죄한 나라를 다른 나라를 통하여 심판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징계는 하나님의 원래 뜻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지만 위로와 소망을 남겨 두셨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찌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 내가 불구에 네게는 분을 그치고 노를 옮겨 그들을 멸하리라”(사 10:24-25).


에덴 : Eden

인명 : 히스기야 시대에 살았던 게르손 자손이며 성전을 정화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대하 29:12).

지명 : 앗수르인이 정복한 성읍(왕하 19:12; 사 37:12)으로 다메섹 근처일 것으로 추정된다(암 1:5).

(창세기 2장: 4~25에덴 동산)


여호와 : Jehovah/ Yahweh

구약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대표적인 이름으로, 오늘날은 ‘야웨’, ‘야훼’, ‘여호와’ 등 조금씩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아주 뛰어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본질을 묘사하는 이름, 하나님의 고유명사, 또는 4자음의 이름 즉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4자음 YHWH를 말한다) 등으로 불려졌다. 오늘날 개역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호와’(yehowah)라는 발음 표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혼합된 이름이다.

히브리 구약성경을 전수한 유대 맛소라 학자들은 성경을 베껴 쓸 때에 이 거룩하고 신성한 이름을 나타내는 네 자음도 그대로 쓰기는 했지만 그것을 발음하지는 않았다. 단지 이 네 글자의 하나님 이름(hwhy)이 나올 때마다 그냥 ‘주’ 또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모음 부호인 ‘아도나이’(adonay)를 발음했을 뿐이다. 이것이 ‘여호와’ 또는 ‘야웨’로 불리게 된 것은 ‘여호와’라는 이름 본래의 네 자음 hwhy에 ynda의 모음을 붙이게 되면서부터이다. 즉 본래의 자음들과 대체하여 사용하는 자음들을 그 모음들과 함께 발음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본래의 자음들과 대체모음들의 혼합물인 것이다. 이 이름이 관습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대체명(代替名)으로 사용될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것은 대체명일 뿐이다. 70인경은 모세오경을 번역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그대로 발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주’(主)라는 뜻의 ‘퀴리오스’(kurios)로 번역했다.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여호와 :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모세에게 ‘여호와’라고 소개하시며 그 이름의 뜻을 출애굽기 3:13-15에서 보여 주셨다. 즉 지금 모세를 부르시는,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는 그가 조상들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 동사 ‘하야’(hayah) 동사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과거부터 시작해서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즉 과거 언젠가 다른 신으로부터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며 결코 창조된 적이 없는 하나님을 의미한다(출 3:14). 이 이름을 이사야서에는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고 했으며, 신약성경에서도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자”로 소개하고 있다(계 1:8).

하나님께서 이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은 바로 조상들이 믿었던 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을 뿐 아니라 참 신이 아니면서 스스로 신인 것처럼 군림하고 있는 애굽의 여러 신들을 심판하셨던 것이다.


‘여호와’에 대한 번역들 : 개역성경은 ‘여호와’로, 표준새번역은 ‘주 하나님’으로, 공동번역은 ‘야훼’로, 대부분의 영어번역본들(NIV, NASB, RSV, KJV)은 ‘The Lord’로 번역하고 있다.


여호와’, 부르면 안되었던 이유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그것은 레위기 24:16의 말씀에 대한 이해 때문이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이 말씀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그대로 읽거나 부르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나아가 그 이름을 그대로 발음해서도 안 되거나 언급할 수 없는 이름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나중에는 그 이름을 어떻게 읽거나 발음하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모세 이전에는 ‘여호와’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출애굽기 6:3에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모세 이전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다는 말인가? 이것은 모세 이전에 그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함축하고 있는 풍성한 내용이 아직 충분히 계시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실 이 이름은 이미 이전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졌으며(창 14:22; 15:2, 8; 24:3; 28:16; 32:9), 하나님께서도 친히 이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셨다(창 15:7; 28:13). 그리고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이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면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기 6:3은 하나님께서 이 이름의 의미와 취지를 모세에게 알려 주신 것을 뜻한다. 이제부터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 은혜와 신실하심에 있어서 불변하신다는 것을 함축하는 동시에 이것을 보증하게 되었다.


유브라데: Euphrates

티그리스 강과 함께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중요한 강이다.

성경에는 때로 ‘그 강, 하수’로 불리기도 했다(신 11:24). 바벨론, 우르와 같은 폐허가 된 많은 도시들이 이라크 내의 이 강을 따라 위치한다. 유브라데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허락한 동편 경계선이다(창 15:18). 르우벤 지파의 동편 경계선이며(대상 5:9), 다윗은 영토를 이곳까지 확장하려고 시도하였다(삼하 8:3).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탈취하고(왕하 24:7), 예레미야는 허리띠를 이 강변에 감추었다(렘 13:4-5). 요한계시록에는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는 내용이 나온다(계 9:14).


이스라엘: Israel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긴 후에 새로 불려진 야곱의 이름이다(창 32:28).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으로 야곱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민족을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출 12:37; 민 1:45). 또 이것은 솔로몬 사후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열 지파의 반란으로 이루어진 북왕국을 이르는 이름이었다(왕상 5:13; 12:16; 14:19, 29; 호 1:1; 4:15; 암 1:1; 3:14). 북왕국이 멸망한 후에는 남유다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였고(사 5:7; 렘 10:1; 겔 13:2; 미 3:1)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회복된 공동체를 이르는 말로도 쓰였다(스 2:2).

신약에서는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을 이르는 상징적인 의미로 쓰였다(마 8:10; 갈 6:15-16).


이스라엘 역사

통일왕국 시대: 사사시대는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부재로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약세를 면치 못했다. 블레셋과 같은 주변 민족의 위협이 강해지자 이스라엘은 왕정을 원하게 되었다(삼상 8:19-20). BC 1050년경 초대 왕이 된 사울은 암몬, 블레셋, 모압, 에돔 족속과 전쟁을 치르며 이스라엘을 방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사장만이 수행할 수 있는 제사를 자신이 직접 드리는 등 점차 교만해 지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다(삼상 15:11-23).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삼상 31:7-13) 왕권은 사울의 후손이 아닌 다윗에게 넘어갔다(삼하 5:3-5).

다윗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므로 예루살렘을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어 나갔다(삼하 6:12-15). 다윗은 정복 사업을 활발히 수행하여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통치를 위한 행정 조직도 갖추었다(삼하 8:15-18).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다윗이 마련한 토대 위에 무역을 발달시켜 국가 수입원을 늘리고 이스라엘의 부흥을 꾀하였다(왕상 4:20-34; 10:14-29) 성전 건축과 같은 중요한 업적을 이루기는 했으나(왕상 6:1-38) 그의 절대군주적인 행동은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왕상 12:1-5).

솔로몬의 사후 그에게 불만을 품었던 여로보암이 북쪽의 세력을 규합하자 이스라엘은 곧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분열되었다(왕상 12:16-24).

분열왕국 시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통치 때에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 부담으로 불만을 느꼈다. 북쪽 지파는 남쪽의 유다 지파보다 인구도 많고 영토도 넓지만 왕정으로 얻는 이익보다는 불이익이 크다고 판단하여 다윗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다(왕상 12:20). 남북 왕조의 분열은 약화되었던 주변국가가 다시 세력을 얻어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에 타격을 주는 요인이 되었다(왕상 14:25-28 등). 남북간의 종교적 분열은 두 세력이 다시 하나로 연합될 수 없게 하였다(왕상 12:28-33).

남왕국 유다는 다윗 왕조를 계속 유지해 갔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부터 마지막 왕인 호세아까지 9왕조 19명의 왕이 통치하였다. 북이스라엘 왕들 중에 8명은 암살되었다.


1. 북왕국 이스라엘(BC 931-722)

여로보암 왕조(BC 931-909) :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여로보암은 세겜에 수도를 정하고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왕상 12:25-30). 또한 레위인을 몰아내고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고 절기도 마음대로 정하였다(왕상 12:31-33).

바아사 왕조(BC 909-885) :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왕상 15:28-29). 바아사는 남 유다를 침공하여 괴롭혔다(왕상 15:32). 바아사 왕조는 시므리의 쿠데타에 의해 끝을 맺었다(왕상 16:11-13).

오므리 왕조(BC 885-874) : 오므리에 의해 창건된 왕조로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 등 4대에 걸쳐 약 44년 간 북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오므리는 반란을 일으켜 엘라를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시므리를 7일만에 무너뜨리고(왕상 16:9-20) 이스라엘의 왕권을 얻었다(왕상 16:15-22). 그는 왕이 되어 수도를 디르사로 정하고 6년 동안 치리하다가(왕상 16:23) 사마리아로 옮겼으며(왕상 16:24) 모압을 정복하고 다메섹과 유다와 동맹을 맺는 등 군사적으로 강력한 이스라엘을 이루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시돈 출신의 이세벨을 아내로 맞고 바알을 섬겼다(왕상 16:29-33). 아합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으나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왕상 20장; 22장).

예후 왕조(BC 841-752) : 오므리 왕조의 타락이 심해지자 예후는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운 왕조를 일으켰다(왕하 9:14-10:36). 예후는 바알 신앙을 근절하려 했으나 정치적 혼란은 그치지 않았다.

북 이스라엘의 말기(BC 752-722) : 앗수르의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북이스라엘은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호세아 왕은 애굽을 의지하고 앗수르에 대한 반역을 일으켰다. 그러나 앗수르의 군대는 사마리아를 3년이나 포위하였고 마침내 사마리아는 앗수르에 의해 점령되어 백성들은 유배되고(왕하 17:23) 앗수르에 점령당한 타민족들이 사마리아에 정착했다(왕하 17:24-33). 앗수르의 혼합 정책은 사마리아에 북이스라엘 백성과 타민족을 혼합시켜 외부의 지배층에 대한 반발을 야기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고 순수한 남왕국의 유대인은 그들을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2. 남왕국 유다 → 유다 왕국을 보라.

바벨론 포로이후 시대 : BC 586년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대하 36:11-21). 그 후 바벨론을 정복한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스 1:1-11).


헬레니즘 시대 : 느헤미야 이후부터 마케도니야의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자료는 거의 없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점령으로 서방과 동방이 만나 하나의 헬레니즘을 형성하게 되었다.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은 죽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제국을 3개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헬레니즘을 꽃피웠다. 애굽에는 프톨레미 왕조가 세워졌고 시리아에는 셀류쿠스 왕조가 세워졌는데 지리적으로 애굽과 시리아의 중간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BC 200년까지는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가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은 곧 셀류쿠스 왕조에게로 넘어갔다.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은 헬레니즘의 신봉자였다. 이스라엘의 지도층 중 일부는 이미 헬레니즘의 추종자가 되었다. BC 168년 안티오쿠스는 안식일 준수와 할례의 금지, 돼지를 잡아서 희생 제사를 드릴 것 등 유대인의 종교를 무시하는 법령을 선포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마카비 반란을 일으켰다.


하스몬 왕조 시대 : 마티티야후 제사장이 죽자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가 지도력을 발휘했다. BC 164년 이방인에게 더렵혀졌던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고 마카비 가문은 급부상하게 되었다. 마카비의 뒤를 이은 요나단은 BC 152년 셀류쿠스 왕조의 내분을 틈타 스스로 대제사장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요나단의 뒤를 이은 시몬은 유대인의 대제사장이며 사령관, 지도자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셀류쿠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권을 회복하게 되지만 평범한 모디인의 제사장 가족이 대제사장직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이들은 대제사장직에만 만족하지 않고 왕권을 함께 누리며 하스몬 왕조가 되었다. 요한 힐카누스, 알렉산더 야나이, 샬롬 찌온으로 이어지는 왕권은 형제간인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힐카누스 2세의 왕권 다툼으로 내리막길을 가게 되었다. 형제의 왕위 다툼은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구실을 마련해 주었고(BC 63) 100여 년간의 짧은 유대인 자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로마 시대 : 하스몬 왕조가 몰락하면서 새로 등장한 세력은 이두매 출신의 헤롯이었다. 헤롯은 BC 40년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의 왕으로 임명받자 그를 반대하는 무리를 처단하고 BC 37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하스몬 왕조의 잔존 세력을 차례차례 숙청했다. 헤롯은 로마를 등에 업고 백성들에게 강압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지중해 연안의 패권을 잡은 로마의 보호 아래 헤롯은 영토를 넓혔고 경제 부흥을 꾀했다. 헤롯의 사후 왕국은 아켈라오, 빌립, 안티파스가 나누어 통치를 하게 되었다. 유대를 맡은 아켈라오가 AD 6년 로마에 의해 해임되고 유대는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헤롯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통치 기간 중(AD 41-44) 총독이 물러가고 자치가 회복되는 듯 싶었으나 그가 죽자 다시 총독이 유대에 파견되었다. AD 66년 가이사랴에서 시작된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반란은 점차 갈릴리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은 예루살렘 성전을 함락시켰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흩어져서 2000년 방랑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성전 파괴 이후

미쉬나, 탈무드 시대 : 성전을 상실한 유대인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제사 중심에서 율법 중심으로 유대교의 성격을 바꾸어야만 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구전 율법도 함께 받았다고 믿었다. 구전 율법이 방대해지자 AD 220년 랍비 예후다는 이것을 집대성하여 ‘미쉬나’(반복, 연구하다의 의미)를 만들었다. 성문 율법을 설명하고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전 율법 미쉬나는 랍비들의 해설이 추가되어 탈무드로 완성되었다. 티베리야를 중심으로 AD 4세기 말 예루살렘 탈무드(또는 팔레스타인 탈무드)가 편찬되었고 한 세기 후에 바벨론에서 바벨론 탈무드가 편찬되어 유대인의 구전 율법이 완성되었다.


비잔틴 시대(AD 325-640) : 로마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이스라엘은 기독교 문화를 꽃피웠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정치적 탄압을 가해 왔다. 이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밖으로 흩어졌지만 국내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의 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성지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곳곳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모슬렘 시대(AD 640-1091) : 중동 지역을 장악한 모하마드 알리의 영향력은 이스라엘에까지 미쳤다. 모슬렘 교도는 비잔틴 제국을 물리쳤고, 이스라엘은 기독교인이 물러가고 모슬렘이 차지했다. 교회는 파괴되거나 모슬렘의 모스크로 변경되었다. 모슬렘이 이스라엘을 정복하면서 유대인들은 더 이상 그 땅에 거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밖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모슬렘이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인과 유대교를 박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슬람 제국 내에서 유대인의 철학, 문학, 종교를 꽃피울 수 있었다.


십자군 시대(AD 1091-1291) : 성지 이스라엘을 이교도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명목하에 교황 우르반 2세는 십자군을 소집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십자군은 많은 유대인과 모슬렘 교도들을 학살하였다. 유럽에서도 십자군은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다. 세속적인 야망과 종교적인 야망이 결합하여 일어난 십자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목적을 상실했고 모슬렘이 십자군의 최후 요새인 악고를 점령하자 막을 내렸다.


맘룩 시대(AD 1291-1517) : 십자군을 몰아낸 맘룩은 이집트의 모슬렘이었다. 십자군이 세운 많은 건축물과 교회들을 파괴했고 남아 있던 유대인 공동체를 해체시켰다. 많은 지역이 파괴되면서 이스라엘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황폐한 시기를 지내게 된다.

오스만 터키 시대(AD1517-1917) : 오스만 터키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의 새 주인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4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통치되었다. 슐레만 대제는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주민들은 다시 늘어났다. 이스라엘 밖에 있던 유대인들의 이스라엘로의 이주가 증가했다. 갈릴리의 사페드를 중심으로 유대교의 신비주의가 발전했다.


영국 위임통치 시대(AD 1917-1948) :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1917년 발포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영국의 정책은 유대인에게 호의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영국군에 가담하여 전쟁에 참여했던 유대인들은 반(反)영국 투쟁으로 나섰다. 이미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아랍인들의 반발도 거세어져 갔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복잡해지자 1947년 UN에 이스라엘 안을 상정하였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독립 : 19세기 말 시온주의에 자극받은 유대인들은 조직적으로 이스라엘 재건을 꿈꾸기 시작했다.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불모의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터키나 영국 모두 이스라엘 개척자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정착하여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유대인의 이주에 반대했다. 유대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에 의하여 600만 명이 학살을 당하는 비극을 맛보았다. 1947년 UN은 팔레스타인을 두 개의 국가로 분할하여 독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1948년 5월14일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고 주변의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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