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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어제와 오늘: 문명과 역사 Culture & History

중동경제연구소   Korea Institute of the Mideast Econom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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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의 발자취

1. 메소포타미아문명

2. 나일문명

3. 인도문명

4. 황하문명

 

뉴 실크로드

문명의 요람:이라크

Arabia Felix, Yemen

몽골과 Silk Road

중앙아시아 경제 

한-중동경제교류

□ 중동지역이란?

 

중동의 어제와 오늘: 문명과 역사 Culture & History

 

1. 고대 - 메소포타미아, 나일 문명

2. 중세 - 이슬람과 오스만제국

3. 근대 - 유럽열강의 등장과 석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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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형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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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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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즈칼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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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


 

 

1. 고대 - 메소포타미아, 나일 문명

1. 인류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 2.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문명| 3. 세계 최대의 대국 페르시아| 4. 로마제국의 지배와 기독교

 

1. 인류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최초로 살았다고 알려진 곳이 메소포타미아다. ≪구약성서≫에 “타락한 인간에 대해 신이 분노하여 대홍수를 일으켜 노아가족만이 방주를 만들어 홍수를 피해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대홍수의 흔적을 발견하여 그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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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인명이스라엘)|  유대교의 역사|

수메르인(← 자신들이 스스로를 '검은 머리 사람들'이라 불렀다는 어원을 갖는)들은 점토판에 글씨를 새겨 기록을 남겼는데, 세계 최초의 설화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에 우트나피시팀 가족이 대홍수를 피했다는 내용이 나오며, “흙으로 빚어 남자를 만들었다”는 내용도 있다. 다신교를 믿었던 수메르인들의 설화에 따르면 노동을 싫어하는 신들을 위해 노예로 부릴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메소포타미아는 그리스어로 ‘두강 사이의 땅’을 말하며, 여기서 두강이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늘날 인류문명이 최초로 발생한 지역하면, 이라크, 시리아 북동부, 터키 남동부, 이란 남서부지역을 포함하는 과거의 메소포타미아지역이고, 우리는 이 지역에서 발생한 문명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 부르고 있다. (위의 지도 참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수메르인, 아카드인, 바빌론인, 아시리아인들이 정착생활을 하며 왕국 이루며 살고 있었다. 수메르인들은 체계적인 관개농업과 특수한 농업기술을 이용하여 일 년 내내 농업생산이 가능한 풍요로운 정착생활을 하였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청동기를 이용하며 세계 최초로 위대한 인류문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문명의 요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시대

왕조

시기

비고

신석기

하섹(Hassex), 사쿠라(Saqurra), 할라프(Halaf) 문화

 

금석병용기

우바이드(Ubaid)

BC 5900년~BC 4000년

 - 세계최초 도시 탄생

 - 인류 최초 문자기록 

우루크(Uruk)

BC 4000년~BC 3100년

초기 청동기

옘뎃 나섹기

BC 3100~BC 2900

 - ≪길가메시 서사시≫

 - 우르 제3왕조 멸망

초기왕조 도시기

BC 2900~BC 2350

아카드제국

BC 2350~BC 2193

우르 제3왕조

BC 2119~BC 2004

중기 청동기

초기 아시리아왕국

BC 2000~BC 1800

 - ≪함무라비 법전≫

고대 바빌로니아

BC 1800~BC 1700

후기 청동기

카사이트왕조, 아시리아중기

BC 1600~BC 1200

 - <카테시아전쟁>

철기 시대

신 히타이트

BC 1100~BC 700

 - 신바빌로니아 성 건설

 - 알렉산더 바빌론 점령

 - 페르시아제국에 점령

아시리아제국

BC 1000~BC 700

신 바빌로니아제국

BC 700~BC 600

페르시아제국 아케메네스 왕조

BC 600~BC 400

주)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BC 4000년경 도시국가 출현부터 BC 400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점령까지를 말한다.


 

수메르인들이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농경생활이 발달하여 안정된 정착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지형은 메마르고 건조한 지형으로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대홍수가 발생하여 애초에는 농업을 하기에는 자연환경이 좋지 못한 지역이었다. 강에서 가까운 땅은 비옥하고 농작물 생산에는 유리하였지만, 토지가 물로부터 먼 지역은 메마르고 사람들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관개사업을 일으켜 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댐과 배수관도 만들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다.

식량생산이 증가하고 생활도 윤택하자 수메르인들은 문명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문명 발달에 빼놓을 수 없는 물의 사용이 가능해지자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 뿐만 아니라 그 지류를 따라 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관개사업과 하수시설도 필요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문화의 대부분이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현대인의 주식인 보리나 밀, 사과, 포도, 무화과, 석류 같은 과일도 대부분 이 지역에서 유래된 것이고, '술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맥주나 와인>도 이 문명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비옥한 땅에 정착했던 초기 정착민들은 나무쟁기를 사용하여 보리, 양파, 포도, 채소, 사과와 같은 농작물을 경작하며 살았다. 관개사업으로 농업이 발달하고 생활이 풍요로워지자 그들은 세계 최초로 맥주와 와인을 만들어 마시는 등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되었다. 사실 포도주는 신들에게 제사지내기 위해 필요한 신성한 것이었는데, 후에 인간들이 만들어 마시며 신들의 쾌락에 빠져 들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지형은 정치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광활하게 펼쳐진 사막이나 유목민들이 방랑하는 습지지역에도 관개수로를 만들어 세계 최초로 도시를 건설했다. 하지만 거리가 먼 고립된 도시들간에 통신은 매우 어려웠고 때때로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안정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수메르의 모든 도시들은 다른 지역과는 독립적인 형태를 띠게 됐고 그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도시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종종 한 도시가 다른 지역을 정복하고 통일하기 위해 전쟁도 벌였지만, 그런 노력은 항상 이민족들의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고 수세기동안 통일은 수포로 돌아갔다. 끊임없는 전쟁속에서 수메르가 통일되기도 했지만, 통일 그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다.아무튼 아카드인들은 기원전 2331년 수메르를 정복하여 최초로 성공한 아카드제국을 만들게 되었다. 비로소 왕들 간에 평화적인 정권이양이 이루어졌지만, 아카드제국도 바빌론인들에게 점령당하여 바빌론제국에 흡수당하고 말았다.

 


◇ <연대기>

 - BC 5000년경, 수메르인 세계최초 도시건설: 에리두(Eridu) 탄생 ⇒ 수메르인, 아카드인, 바빌론인, 아시리아인들이 정착생활을 하며 왕국형성
 - BC 4500년경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수메르인 청동기를 사용하면서 <메소포타미아문명> 탄생
 - BC 3500년경, 우루크 도시국가 탄생, 점토판에 인류 최초 문자기록  ⇒ 세계 최초 상형문자인 설형문자(쐐기문자) 발명
 - BC 3000년 우루크 제1왕조 ≪길가메시 서사시≫: 문학의 원류
 - BC 2331년 아카드인은 수메르를 정복하여 최초로 성공한 제국인 <아카디아제국> 건설
 - BC 2006년 우르 제3왕조 멸망, 이신, 라르사, 에슈눈나 등 6개 나라로 분열
 - BC 1780년경 함무라비 왕, ≪함무라비 법전≫ 편찬
 - BC 1300년경 이집트 람세스2세와 <카테시아전쟁>: 세계 최초의 국제조약
 - BC 15세기말 BC ~ 13세기초, 히타이트 최고의 전성기: 독특한 철제 전차 제작
 - BC 605~BC 562년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신 바빌로니아 성 건설'
 - BC 331년 알렉산더 대왕 바빌론 점령
 - BC 150년경 페르시아제국의 일원 이었던 파르티아인의 통제하에서 로마인과의 전쟁터로 변함
 - AD 226년 페르시아의 사산조를 거쳐 7세기 아랍에 의해 이슬람화가 되었다.

지구라트


함무라비(기원전 1696-1654) 왕은 아카드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강력한 메소포타미아 중남부에 바빌로니아제국을 건설했고, 당시 수도였던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바빌로니아는 돌이 부족하고 진흙이 풍부하였기에 진흙으로 만든 벽돌이 건축물에 주로 사용되었다. 바빌론의 사원들은 대부분 흙벽돌로 지어졌고 빗물은 갈대로 만든 배수관에 의해 운반되었다. 건물의 벽들은 휘황찬란한 아름다운 색깔로 칠해졌고, 타일과 함께 금이나 아연으로 도금되었고 불을 지피기 위한 화덕은 회반죽을 칠하여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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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문명이 각광받는 이유 중 하나는 문자를 고안하여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수메르인들은 세계 최초로 상형문자를 발명했다. 갈대가지로 만든 끝이 뾰족한 철필을 사용하여 점토판에 기록한 것이 마치 쐐기같은 모양이라 하여 ‘쐐기문자’라 불리기도 하는 ‘설형문자’를 사용하였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수메르인과 아카드인들간에 매우 친근한 문화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서 처음에는 아카드어가 실용언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지만, 문자의 발명 후에는 수메르어가 성스러운 의식이나 문학작품, 수학, 과학 등의 언어로 1세기까지 사용되었다.

바빌론제국시대에는 “도시와 사원에 많은 도서관들이 있었고 모든 남녀가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바빌론의 문학작품들이 수메르어로 번역되었고, 그 가운데 ≪길가메시 서사시≫세계 최고의 설화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설화의 내용은 히브리 성경에서도 발견되는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 이야기와 노아와 홍수”에 관한 내용이 신들의 이야기들과 함께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성경(인명이스라엘)|  유대교의 역사|

수메르인들은 일주일이 7일인 달력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셈법에서 60진법을 사용하였고, 60진법의 사용으로 1시간이 60분, 하루가 24시간, 원은 360도라는 단위 측정의 기본공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곱셈법, 원주율 계산법, 거리계산법, 25/8로서의 파이(3.125) 등도 사용하였다.

수학의 발달과 함께 천문학과 과학도 발달하여 태양의 주기도 계산하였다. 바빌론의 천문학자들은 수학에 능숙하여 일식과 월식도 예측하였다. 천문학의 발달은 종교나 예언과 관련이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달의 주기를 기반으로 1년이 여름과 겨울, 두 계절인 12개월로 이뤄진 ‘태음력’ 달력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니 천문학과 점성학의 기원도 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7-8세기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특성을 다루는 철학분야 까지도 연구했기에 일부 과학자들은 최초의 과학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최초로 기록된 종교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지구가 크고, 빈 공간으로 둘러싸인 평평한 원반으로 생각했고, 그 위에 천국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물은 어느 곳에나 있으며, 우주는 거대한 바다로부터 탄생되었다고 믿었다. 종교는 다신교였으며 우주는 ‘안-키’라 불렀다. 남신인 ‘안’과 여신인 ‘키’ 사이의 아들인 ‘엔릴’이 공기의 신으로 가장 강력한 신으로 불려졌다. 그래서 엔릴은 '신들을 모신 신전인' - 판테온에서 - 우두머리 신으로 숭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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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인들은 왕과 여왕들이 ‘신들의 도시’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과는 다르게 왕이 실제적인 신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대부분의 왕들은 그들 자신을 “우주의 왕(king of the universe)” 또는 “위대한 왕(great king)”으로 불렀고 왕은 그의 백성들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종종 “양치는 사람(shepherd)으로도 불렸다.

그들은 철을 다루는데도 능숙하였다. 최초의 청동기시대를 살아간 그들은 구리, 청동, 금에서 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금속들을 발명하여 사용했다. 그 이외에도 금속, 구리, 유리, 램프, 직조, 홍수조절, 물 부족과 관개 등과 관련된 많은 기술들을 발명하여 인류문명의 발달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바빌론제국 시대에는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잘 알려진 기원전 1780년경 함무라비 왕이 편찬한 《함무라비법전(Code of Hammurabi; ca. 1780 BC)이 있다. 현무암 돌기둥에 쐐기문자로 새겨진 전문과 282조의 법률이 비교적 잘 보관된 바빌론 법전을 말한다. 당시 바빌론제국에는 귀족, 자유인, 노예 등 3계급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 간에 엄격한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는 판결을 명시한 법전이다. 이법은 후에 유대인의 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법전의 거의 절반은 소몰이꾼이나 의사에게 지급하는 임금의 예를 명시하는 계약문제를 다룬다. 다른 법령들은 붕괴된 가옥의 건축주나 타인에게 남겨져 피해를 본 자산에 대한 책임을 설정하는 거래조건을 정하였다. 법령의 1/3은 상속, 이혼, 부권 및 성적인 행위와 같은 가계나 가족관계와 관련한 문제들을 다룬다. 관공서 관리에 의무가 부과된 단 한가지 법령이 나타나는데 이는 부적절한 판결에 이르는 판사는 정화되며 영원히 그 판사직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그 밖의 법령들은 병역에 관한 문제들을 다룬다.

내세보다는 현세를 중시했던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생활이 풍요로워지자 사치와 방탕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바빌로니아의 수도였던 바빌론은 과욕과 방탕한 권력의 상징으로 묘사되었고 바빌로니아의 ‘공중정원’과 ‘바벨탑’은 오늘날까지도 사치와 오만함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함무라비왕이 죽고 나자 바빌론제국은 급속히 분열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전신인 아케메네스제국(Achaemenid Empire)이 정복할 때까지 수메르인들이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였다. 키루스다리우스 왕으로 이어지는 아케메네스 왕조시절 바빌론은 페르시아제국의 행정중심지로 이 시기가 바빌론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다. 따라서 고대세계에서 바빌론은 페르시아제국의 교육과 과학의 중심지로서 수학과 천문학이 발달한 가장 번영된 위대한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페르세폴리스

한편 기원전 331년 바빌론을 점령한 알렉산더 왕은 바빌론의 상업적, 종교적인 특별한 위치를 인정하고 신전의 복구와 무역을 육성을 위한 부두를 건설하였다. 그는 바빌론을 위대한 제국의 수도로 삼을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궁전에서 죽었다.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그의 부하 장군들의 내분으로 바빌론은 기원전 312년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넘어갔다. 기원전 275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새로운 수도인 셀레우키아가 티그리스 강에 건설되고 바빌론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자 바빌론의 지위는 많이 약화되어 갔다.

기원전 150년경 메소포타미아는 페르시아제국의 일원이었던 파르티아인들(Parthians) 통제하로 들어가고 메소포타미아는 로마인과 파르티아인들간의 전장터로 변했다. 메소포타미아는 서기 226년 페르시아의 사산조(Sassanid)의 지배를 거쳐 7세기 아랍이슬람이 사산조를 정복할 때까지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았다.

           


 2.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문명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하류에서 번성한 문명으로 최전성기 BC 15세기에는 나일 강 삼각주에서 제벨 바르카 (Jebel Barkal)까지 세력을 뻗쳤다. 기원전 3200년 부터 기원전 343년까지 3000년 가까이 존재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점령으로 역사 속에 묻혔다. 헬에니즘의 문명을 이어오던 이집트는 7세기 이슬람화 되었다.

기원전 3000년 메네스(Menes)가 이집트를 통일하고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Macedonia) 왕국이 알렉산더(Alexander the Great)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이집트는 31개 왕조를 겪었다. 그 가운데서도 제3왕조부터 제6왕조(기원전 27세기∼기원전 22세기)까지가 이집트의 고대 왕국시기이다 ⇒ 이 시기에 수학, 의학, 천문학 등 여러 분야가 꽃을 피웠다. 제3왕조 때부터 전문적으로 밤하늘을 관측하는 사제들이 출현 ⇒ 가장 중요한 신은 태양신 ⇒ 성도(星圖)를 그렸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

왕조시대

연대

특성

선왕조 시대

~ BC 31세기

왕정성립 시작

원왕조 시대 BC 31세기 ~ BC 30세기

상, 하이집트 통일, 신성문자 기록 시작

초기왕조 시대

제1왕조 ∼ 제2왕조

BC 3150년 ~ BC 2686년

고대 통일국가 출현

고왕국 시대

제3왕조 ∼ 제6왕조

BC 2686년 ~ BC 2181년

제4왕조 대피라미드 건설, 중앙집권적 전제국가, 왕의 신격화, 태양신 숭배

제1중간기

제7왕조 ∼ 제11왕조 (통일 전)

BC 2181년 BC 2040년

테베에 제11왕조 성립

중왕국 시대

제11왕조 (통일 후) ∼ 제12왕조

BC 2040년 BC 1782

제11왕조멘투호테프 2세가 상하 이집트 재통일

제2중간기

제13왕조제17왕조

BC 1782 ∼ ?

중왕국시대가 끝난 후 신왕국시대가 열릴 때까지의 혼란기
신왕국 시대

제18왕조제20왕조

BC 1570 ~ BC 1070년

고대 이집트가 가장 번성한 시기, 투트모세 3세, 투탕카멘, 람세스 2세(카디시아전쟁)

제3중간기

제21왕조제25왕조

BC 1069 ~ BC 945

신왕국 시대가 끝날 때부터 말기왕조 시대: 내부분열과 외부세력 침입, 테베의 대제사장 덕자세력 구축, 리비아, 누비아인 통치이후 26왕조 등장
말기왕조 시대

제26왕조 ∼ 제31왕조

BC 665 ~  BC 332

 제3중간기~  알렉산더 대왕의 점령이전까지

제27왕조←아케메네스왕조 1차 점령기, 제31왕조← 아케메네스 2차 점령기

그리스-로마계 왕조

제32왕조 ∼ 로마 제국령

알렉산더 점령이후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5년 ~ BC 30년), 클레오파트라


 

기원전 4000년경부터 왕국을 이루며 살던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3100년 파라오에 의해 상하이집트가 통일되자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집트를 통치하던 최고의 통치자를 ‘파라오’라 부르며, 그는 정치 및 종교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원래 파라오는 ‘위대한 집’을 의미하는 말로 ‘왕의 궁전’을 의미하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왕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게 되었어. 파라오는 인간이 아닌 신으로 숭배되었고 나중에는 호루스가 파라오의 왕권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집트 벽화에서 매의 머리를 쓰고 있는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가 고대 이집트신화에 나오는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아들인 호루스를 의미한다.

이집트문명은 나일강 하류에서 발생한 문명이라 하여 ‘나일문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집트문명은 ‘비옥한 초승달지역’과 레반트지역’을 통해 지중해의 서부 해안지대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페니키아인, 유대인과 다른 민족들이 이 지역에서 국가를 이루며 살아왔다.

이집트는 나일강에 의존하며 살아오고 있는데, 매년 정기적으로 홍수가 범람하여 사막을 비옥한 농토로 바꿔주었다. 나일강의 홍수는 오히려 이집트인들에게는 행운이었고 농업에도 안성맞춤인 비옥한 토지를 만들어 주었다. 이를 가르켜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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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들은 영혼불멸설을 믿고 있었는데, 파라오는 죽은 다음에도 영혼으로 다스린다고 믿고 파라오가 영원히 사는 궁궐을 의미하는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집트에는 현재까지 약80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기자의 피라미드’이다. 역사상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손꼽히는 이 피라미드는 10만명의 인부가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피라미드 앞에는 사자의 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스핑크스가 그 앞을 지키고 있다.

기원전 3200년경 이집트인들은 500개의 부호로 된 상형문자를 고안하여 파피루스에 기록했고 기원전 1800년경에는 셈어를 기록하는 데도 사용하였다. 시나이문자는 오늘날 알파벳을 창조했다고 하는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22개의 자음자로 처음 개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셈족의 언어인 아랍어도 이 지역 언어인 아람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전해지며 <알파벳의 원조>로 간주된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로제타 석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수메르인들과는 다르게 태양력을 쓰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2-3년에 한번씩 윤달을 끼어 넣어야 하는 불편 때문이었다. 이집트의 천문학자들은 큰 별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365.25일이 걸리므로 360일에 중요한 다섯 신의 생일 5일을 추가하여 1년을 365일로 결정하고 0.25일을 모아서 4년마다 하루를 더하는 태양력을 만들었다. 이집트의 태양력은 로마에 전파되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의 원조가 되었다.

2천년 전에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로 로마제국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긴 했지만 이집트는 헬레니즘 문화를 유지하면서 번성하다가 7세기에 이슬람의 정복으로 이슬람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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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이집트도 처음에는 다신교였다.

◇ 아몬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형상으로 묘사되었다. (→ 머리는 두 대의 깃털장식, 손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 가끔은 아몬은 청개구리 머리나 코브라 머리로도 묘사, 숫양과 암거위는 그의 신성한 동물이었다)

◇ 찬란한 신전: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

사자의 몸+양의 머리: 신왕국 시기, 숫양은 아몬의 신력(神力) ⇒ 사자의 몸은 힘, 위엄, 왕권 상징, 양의 머리는 아몬을 상징

◇ 오벨리스크(Obelisk ←방첨비): 태양 신앙의 상징탑(겉면을 금과 동, 혹은 금은의 합금으로 장식)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 2개 - 하나는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 광장

◇ 승리의 왕: 투트모세(Thutmose) 3세(← 조각성에서 특이하게 미소 짓는 모습)

고대 이집트는 제13왕조부터 제2중간기로 진입하는데 당시 서아시아에서 온 힉소스(Hyksos) 민족의 침입을 받아 심각한 분열국면을 맞이: 제17왕조 말기에 카모세(Kamose) 왕은 힉소스와의 전쟁에서 큰 승리 → 결국 아흐모세는 제18왕조를 세웠고 이집트는 새로운 독립과 통일의 시대를 맞이 ←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강대하고 번성한 시기로 기록(기원전 16세기 이집트는 신왕국 제18왕조 시기로 진입했다)

◇ 파라오의 저주: 투탕카멘의 수수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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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Tutankhamen)은 18왕조의 파라오(← 아버지 아크나톤과 외국에서 온 공주의 아들로 11세에 안케센아멘과 결혼): 아이(Ay)와 노장 호렘헤브(Horemheb)에게 권력을 빼앗김 ⇒ 10년간 재위, 19세에 세상을 떠남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파라오 람세스 2세: 기원전 1304년 람세스 2세 출현, <카데시아 전쟁>, 60여년의 재위기간 동안 100여명의 자녀를 두었다.

 

☆ 비옥한 초승달 지역(Fertile Crescent): 비옥한 초승달지역이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인근지역을 연결하면 마치 초승달같이 생겼고, 이 지역은 다른 지역이 매우 건조한데 비하여 습기가 많고 비옥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이 지역을 메소포타미아지역 이라 부르며 이라크, 이란, 터키 등의 국가들이 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비옥한 초승달지역을 말할 때는 동지중해의 레반트 해안에 있는 이스라엘,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 등의 국가들을 말한다. 물론 이집트와 나일강 주변도 넓은 의미에선 넓은 의미에선 비옥한 초승달지역으로 부를 수 있다.

☆ 레반트(Levant): 레반트란 지중해 동부의 해안지대와 섬들을 일컫는 말로 시나이반도 북동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의 북쪽과 터키의 해변을 포함하는 서쪽지역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이집트는 나일강을 따라 상하 왕국으로 형성돼 있었는데, 기원전 3100년경 두 왕국이 메네스의 세력하에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 나일계곡에서 3000년 동안 파라오의 통치가 계속 되었다. 이때까지 레반트지역은 정착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토착세력으로는 아모리인과 가나안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3. 세계 최대의 대국 페르시아제국

다리우스 1세는 인도 북부에서 오늘날의 불가리아 남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캄비세스 2세는 그리스에게 가장 위협적이 었던 '페르시아제국' 시대를 열었다. 당시에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했다고 하니 페르시아의 과학기술 또한 매우 발달해 있었음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고대 페르시아 역사

왕조시대

연대

특성

엘람

BC 2800년 ∼ 550년

원시 엘람시대는 기원전 3200년이란 고원문화에 영향을 주기 시작 - 엘람어

메디아

BC 728년 ∼550년

아시리아가 멸망한 후 기원전 11세기 전반 메디아족(族)이 세움

아케메네스 왕조

BC 550년 ∼ 330년

아케메네스를 시조로 하는 페르시아 제국으로 최대 판도였을 당시 3 대륙에 걸친 대제국 형성

셀레우코스 제국

BC 330년 ∼ 15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헬레니즘의 계승국

파르티아

BC 248  ∼ AD 226

오늘날 이란 지역의 북동쪽에 위치해있던 나라

사산왕조

AD 226 ∼ 651

아르다시르 1세가 세운 고대 이란 왕조

페르시아 제국은 오늘날 이란의 영토에 근거한 여러개의 제국을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를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부르지만 그후로 1935년까지 이지역에 일어났던 여러개의 제국들을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모두 페르시아 제국이라 불렀다. 


기원전 3200년경 고대 엘람은 수메르와 아카드(오늘날 이라크) 동쪽에 자리잡고 여러 왕국을 포함하고 있었다. 기원전 2000년 중반부터는 수사에 중심지를 둔 고대 엘람문화는 페르시아제국, 특히 엘람제국을 계승한 아케메네스 왕조때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공용어 '엘람어'를 남겼다. 엘람제국은 기원전 2700 ∼ 539년까지 존재했으며 엘람의 중심지는 오늘날 이란의 서쪽 끝과 남서쪽 및 이라크 남부에 있었다.  

한편 기원전 23∼24세기말 아카드의 사르곤 왕은 광대한 메소포타미아와 레반트지역을 정복했다. 당시 그 지역에는 히타이트, 아시리아, 그리스, 소아시아, 미케네, 트로이 등의 세력들이 군웅할거 하고 있었다.

기원전 7세기에는 아시리아의 이집트 정복이 있었고 메디아가 오늘날 이란의 서부지역에서 발흥하였다. 메디아(BC 728년 ∼550년)는 아시리아가 망한후 11세기 전반 메디아족(族)이 세운 왕국으로 기원전 6세기 흑해의 남부연안과 아란지방(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메디아는 최초의 페르시아 왕으로 간주되는 아케메네스의 키루스에 의해 기원전 550년 정복당했다. 그 후 60년 이상 키루스와 그의 후계자들인 캠비세스, 다리우스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종횡무진 누비며 바빌론을 정복하였고, 이집트, 소아시아, 그리스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여 아케메네스를 시조로 하는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하였다.

당시 아케메네스 왕국(기원전 550년~기원전 330년)의 영토는 3대륙에 걸치는 대제국을 형성하며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큰 강대국으로 군림하였다. 키루스는 주변 부족국가들을 통합해 동으로는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힌두쿠시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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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제국의 창설자로 알려진 키루스 2세는 피정복민들에게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펼쳐 그들의 관습과 신앙을 지켜줬다. 그는 정복민들사이에서 '해방자'로 추앙됐고 성경에도 그런 기록이 남아 있다.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 바빌론 유수)을 해방시켜준 것도 키루스 2세이다.

키루스 2세는 이집트마저 정복하길 원했지만 꿈을 이루진 못했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스스로 이집트 27왕조의 파라오가 되었다. 하지만 왕이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 정작 페르시아에서는 내부 혼란만 가중되었고, 에티오피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자살하고 말았다.

캄비세스 2세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다리우스 1세는 인도 북부에서 오늘날의 불가리아 남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캄비세스 2세는 그리스에게 가장 위협적이 었던 '페르시아제국' 시대를 열었다. 당시에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했다고 하니 페르시아의 과학기술 또한 매우 발달해 있었음을 쉽게 엿볼 수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다리우스 1세에 이르러 최고의 영토가 된다. 아케메네스의 영토는 인더스강에서부터 유럽에 이르렀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중국을 제외한 그 당시 알려진 대부분의 문명세계를 통일하였다.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때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가 격돌하는데 이를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으로 부른다. 잘 알려진 아테네의 마라톤 전투와 스파르타 300명이 나라를 지켜냈던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은 아케메네스 제국과의 전쟁이야기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거대한 제국을 ‘페르시아’라고 불렀는데, 이는 “파르시 말을 쓰는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아무튼 메디아를 시작으로 계속 이어진 왕국들을 모두 '페르시아'라 부르며, 메디아 왕조, 아케메네스 왕조로 부르긴 하지만 그 뿌리는 모두 페르시아로 간주된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메디아 왕조와 달리 중앙집권 체제와 사회·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실상부한 제국을 만들었다. 당시의 행정과 치안, 세금 제도 등을 담은 상세한 기록들이 전해온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촘촘한 도로망과 국가가 운영하는 역마제도이다. 전국 어느 곳에건 보름 이내에 중앙정부의 뜻이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지금의 터키 북쪽 리디아 속주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었고, 이 네트워크는 속주들의 반란을 막는 안보 시스템이기도 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는 함무라비왕이 죽고 나자 바빌로니아 제국은 급속히 분열되었고 기원전 539년 아케메네스 제국이 정복할 때까지 수메르인들이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시절의 바빌론은 페르시아제국의 행정중심지로 이 시기가 바빌론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알려지고 있다.

마케도니아 왕국알렉산더 대왕다리우스 3세를 무찌르고 아케메니아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이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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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메네스 왕국은 더 나아가 이집트, 소아시아 및 그리스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에 대한 패배 후 다리우스 왕과 크세륵세스 왕은 제국을 강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드디어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 알렉산더가 바빌론 땅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광대한 영토는 휘하 장군 4명이 나눠 가졌다. 그 가운데 이란을 지배했던 사람이 셀레우코스 1세 장군이었다. 셀레우코스와 그 후손들이 이끈 왕조를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12년 - 기원전 247년)라 부른다.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200년 파르티아인들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고 기원후 2세기부터는 사산조로 이어졌다. 그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오늘날 중동지역으로 간주되는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으며, 7세기 페르시아 이슬람 정복 때까지 중동의 나머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파르티아 왕조는 미트라다테스 2세(Mithradates II, 기원전 123년-기원전 87년) 치세 때 세력을 확장해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여 로마공화정과 상대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의 직물(페르시아 카펫)이 동서양을 오갔다. 지배층은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했지만 대중들에게까지 퍼지지는 못했다. 파르티아는 주변국들에 비하면 신분 이동의 통로가 열려있는 비교적 개방된 사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파르티아족의 출신지인 파르타브(Parthav) 지방의 언어인 파흘라비어(Pahlavi)가 공용어로 사용됐는데,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파흘라비 왕조(팔레비 왕조)는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파르티아가 500년 가까이 존속됐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사산 왕조(Sassan, 224-652)가 조직적으로 전대의 유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역사 복원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사산은 이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아르다시르 1세는 스스로를 사산의 후계자라고 칭하고 그의 왕조를 '사산조'라 불렀다다. 아르다쉬르는 집권 뒤 파르티아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방 귀족들을 통제하고 전국을 12개 주로 나눈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다. 조로아스터 신관의 아들이었던 그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지정했고 정교일치의 강력한 집권체제를 구축했다.

폭군 나르세의 시대를 지나 사산조의 10대 왕인 샤푸르 2세가 즉위한다. '샤푸르 대왕'이라고 불리는 이 왕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즉위, 상당기간 섭정의 세월을 보냈다. 70년 동안 재위하면서 주변국들을 복속시키고 승려들의 특권을 없애 왕권을 강화했다. 샤푸르 2세에서부터 바흐람 5세, 카바드 1세 등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사산조의 전성기였다. 페르시아는 정치 사회적,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해, 뒷날 아랍인들에게 멸망하기까지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한다.

사산제국은 로마제국과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계속 영토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훗날 비잔티움 제국에게 크게 패하고 새롭게 출현한 이슬람 제국에 의하여 사산제국은 멸망한다. 사산왕조의 마지막 왕 야즈데게르드 3세가 이슬람 제국에게 패하여 사산왕조는 몰락한다.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

출처: 위키백과


 

4. 로마제국의 지배와 기독교

로마지배하에 중동지역에는 기독교 사상과 문화가 널리 보급되긴 했지만, 기독교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고 페르시아에 산재하고 있던 신앙체계를 모두 흡수하여 통일하지 못한 채 매우 혼돈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보면 사막한 가운데서 홀연히 나타난 이슬람교는 하나의 시대적 요청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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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제국: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지배체제가 시작된 기원전 27년부터 몰락까지의 로마를 일컫는다. 로마 제정시대의 종식은 395년 동서 로마의 분할,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1453년 비잔티움제국 멸망 등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

 

중동지역은 기원을 전후하여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년~기원전 323년)의 마케도니아 왕국에 뒤이어 로마제국과 아케메니아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 등 몇몇 제국들에 의해 통치되었고, 그 이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왕국들이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기원전 1세기 근동지역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중해 동부지역을 병합한 로마제국의 확장으로 중동지역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과 함께 로마제국 통치하의 하나의 정치 및 경제구역으로 통합되었다.

당시 중동지역은 그리스에 직접적으로 병합되진 않았지만 수세기동안 강력한 정치와 문화적 실체로 존재했던 로마제국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라틴문화가 중동 지역으로 전파되긴 했지만, 마케도니아 왕국에 의해 사용되었던 언어는 이 지역에서 로마시대 통틀어 지배적으로 사용되었다. 중동에서 특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도시들은 로마제국의 중요한 도시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주요 농산물 생산국으로서 ‘빵 담는 바구니’라는 의미로 로마제국의 “브레드 바스켓”로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로마제국의 정복으로 중동의 도시들은 제국의 중요한 도시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로마제국에서 313년 기독교가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되고, 380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국교로 승인되어 로마제국은 물론 중동에서도 기독교가 정착하게 되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같은 로마의 행정도시들은 기독교도들에게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5세기까지 로마 기독교는 다른 신앙들과 함께 중동지역에서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동의 많은 유적지에서 그 영향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5세기경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할될 때 동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터키의 이스탄불)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자 중동국가들은 한때 가혹한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터키의 카파도키아에 가보면 당시 기독교도들이 핍박받던 생활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동지역에서 서로마제국의 직접적인 영향력은 매우 약해졌다.  성경(인명이스라엘)|  유대교의 역사|

600년경 중동은 페르시아의 사산조와 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는 비잔틴제국 등 두 열강의 틈바구니에 놓여있었다. 당시 페르시아는 기원전 1800년경 출현한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있었다. 불을 숭배한다고 하여 ‘배화교’로도 리는 조로아스터교는 세계를 선과 악의 세계로 구분하는 이원론적 교리를 갖고 있으며, 후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오늘날 비잔틴제국으로 알려진 - 발칸반도에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지배한 -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정한 교리와 중동지역 신자들 간에 종교적 갈등의 원인이 되는 기독교에 대해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다. 따라서 당시 그리스어는 히브리어와 시리아어 같은 종족적인 언어가 지속적으로 사용됐음에도 중동지역의 공용어로 탈바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유화정책과 함께 그리스-비잔틴 지배하의 레반트지역은 안정과 번영의 시대를 구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우세했지만, 아라비아반도와 그 북부지역 시리아에서 기독교가 크게 확산되지 못했다. 아라비아반도 지역은 기후가 매우 건조하여 베두윈들은 오아시스에 모여 살거나 아니면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였기에 외세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아라비아에서는 정착민이든 유목민이든 아랍인들 대부분은 부족단위로 모여 살았기에 국가보다는 부족이나 혈족이 더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철저한 보복과 복수의 개념은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무튼 당시 중동지역에 기독교 사상과 문화가 널리 보급되긴 했지만, 기독교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고 페르시아에 산재하고 있던 신앙체계를 모두 흡수하여 통일하지 못한 채 매우 혼돈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보면 사막한 가운데서 홀연히 나타난 이슬람교는 하나의 시대적 요청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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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케도니아: 기원전 8세기 또는 기원전 7세기 초 아르고스 왕조가 통치하면서 생겼다. 4세기에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의 남쪽 도시국가들의 정치에 점차 관여하게 되었지만, 마케도니아의 군주제는 남쪽의 그리스문화와 크게 대조되었다. 그리스에서는 독자적인 도시국가들이 대개 귀족정치나 민주정치 체제를 갖추었으며, 군주의 권력세습은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관습이 아니었고, 스파르타에서는 군사지휘관과 성직자로서 두 세습 군주를 두고 있었다.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은 짧은 시간에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물론이고 이집트를 비롯한 페르시아제국을 정복하고 동쪽으로는 인도접경까지 진출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당한 국가의 정치체제를 인정하면서 그리스문화를 퍼뜨렸다. 마케도니아 제국은 알렉산더가 죽자 권력이 다수의 헬레니즘 정권으로 분산되었으나, 정복의 영향은 이어졌고, 헬레니즘 시대를 연 옛 페르시아제국 서쪽 영토에 새롭게 세워진 그리스어권 도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알렉산더 제국이 후계자(디아도코이) 사이에 분할되면서, 마케도니아는 수년 뒤인 기원전 294년에 안티파트로스 왕조로 넘어갔다.

한편 필리포스 5세와 아들 페르세우스 시대에 마케도니아 왕국은 새로이 떠오르는 강국 로마와 충돌하였다. 기원전 2~1세기에 마케도니아는 로마와 일련의 전쟁을 벌였다.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197년에 필리포스 5세가, 기원전 168년에는 페르세우스가 로마에 대패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패배로 안티고노스 왕가는 폐위되고, 왕국은 분할되었다. 기원전 149년에 ‘가짜 필리포스’ 안드리스코스가 잠시 왕국을 복원하였으나, 이듬해에 로마 패배하고,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 로마 제국: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지배체제가 사실상 시작된 기원전 27년부터 몰락까지의 로마를 일컫는다. 로마 제정시대의 종식은 395년 동서 로마의 분할,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1453년 비잔티움제국 멸망 등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

로마제국은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문화권과 이집트, 유대, 서부의 옛 카르타고, 히스파니아, 갈리아 등의 기존 영토에 이어 브리타니아와 라인 강 서쪽의 게르마니아, 그리스 북쪽의 다키아까지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패권주의는 로마 제국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문화를 고대 지중해 세계에 널리 퍼뜨려, 로마 제국의 건축, 법, 정치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콘스탄틴 대제의 주도하에 로마제국은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박해를 끝내고 기독교를 로마의 합법적인 종교들 중의 하나로 만들어 사실상 기독교 신앙을 보호 또는 장려하였으며,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국교로 공인되었다.


 

2. 중세 - 이슬람과 오스만제국

1. 이슬람(Islam)의 출현| 2. 이슬람제국(Islamic Empire)| 3. 오스만제국(Othman Empire)의 등장| 터키(Turkey)

 

 이슬람은 기독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 '이슬람(Islam)'은 아랍어로 '평화'라는 뜻이다. 종교적 개념으로 이슬람교라 부를 때 '평화의 종교'라는 표현으로 쓰인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무슬림(Muslim)'이라하며, 이슬람공동체는 '움마(Umma)'라 부른다. 이슬람의 경전은 '코란 혹은 꾸란'이라 부르며, 아랍어로 '낭송하라'는 의미이다. 이슬람의 종파는 크게 순니파(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와 시아파(이란이 대표) 등 2개 종파로 나뉘며, 전체 무슬림 인구 가운데 80-90%는 순니파이다.

중세 

1. 이슬람(Islam) 출현

7세기에 이르자 아랍인들은 상상을 뒤엎고 당시 강대국이었던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을 향해 침략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7세기 초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창시한 이슬람의 영향이다. 사막 한가운데서 홀연히 발생한 이슬람, 즉 “알라(Allah) 이외에 신은 없다”는 유일신 사상으로 똘똘 뭉친 아랍인들은 '신의 계시'라는 미명하에 대제국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를 이슬람제국이라 한다.

당시 메카는 아라비아반도 중부와 홍해연안에서 가까운 골짜기에 있었던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충지로 카바신전과 북동쪽 구릉지대에는 옛날부터 유대교와 기독교도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해마다 많은 순례자들이 참아와 참배하는 장소였다. 그런 이유로 메카는 국제적인 상업도시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5세기 말경 메카의 지배계급은 꾸라이시 부족이었다.

570년경 무함마드라는 예언자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꾸라이쉬 부족에서 태어났다. 유복자로 태어나 6살에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할아버지 손에 자랐고 할아버지가 죽자 다시 숙부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 무함하드는 카라반 대상들과 함께 무역업에 종사하던 숙부를 따라 시리아까지 가서 상업활동에 종사하였다. 무함마드는 25세가 되자 자신을 고용했던 돈 많은 과부 카디자와 결혼하여 여러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2명의 아들은 사망하고 딸만 남았다. 40살이 되던 해에 무함마드는 자신이 기도하던 히라(Hira) 산의 동굴속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것이 이슬람의 탄생배경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무함마드에게, 너의 “신의 사도(使徒)”다, 그러니 “암송하라!”는 계시를 받는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받은 계시는 훗날 이슬람 경전인 ≪코란≫이 되었고, 코란이라는 말은 “암송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신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처음에는 친척과 친구들을 통해 설교를 시작했으나, 메카지역에는 다신교 사회였기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박해를 피해 622년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를 ‘성스러운 천도’, 즉 ‘히즈라(hijra: 성천)’라고 하여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는다. 메디나에서는 이슬람사상으로 뭉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이를 ‘움마(Umma)’라고 한다. 움마는 종교적 주체인 동시에 국가의 의무를 포함하기에 무함마드가 만든 움마는 나중에 국가의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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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聖遷)이후 2년이 지나자 성지회복의 필요성을 느낀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은 624년 메카의 꾸라이쉬 부족과 벌인 첫 전투인 바드르 전투를 치룬다. 바드르전투에서 승리한 무슬림들은 유대인 부족들과도 전쟁을 치렀고 630년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메카를 점령한 무슬림들은 당시 다신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메카에 카바신전을 세우고 이슬람의 성전으로 만들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최초의 유일신자는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을 추앙하며 그들을 아랍인의 조상으로 받들게 되었다.

이슬람군의 정복사업은 메카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시리아와 이라크에도 계속되었다. 아랍인들은 이라크에서 페르시아의 사산조의 패망으로 큰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시리아(639)와 이집트(642)를 정복한 이슬람군은 656년에 서아프리카에서 동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의 호라산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영토를 넓혀 나갔다. 이슬람이 출현하고 나서 아주 짧은 20년의 기간 동안에 이슬람세력이 넓은 지역까지 확대된 것은 아랍부족들이 유일신사상과 그에 따른 공동체, 즉 움마의 역할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무함마드가 거대한 정복사업의 결과를 보지 못한 채 632년 사망하게 되자, 공동체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초대 지도자로 친구이자 장인인 아부 바크르를 지도자로 뽑고 신의 대리자라는 의미로 ‘칼리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후 이슬람은 대제국을 형성하여 지중해에서 북서 아프리카, 이란, 인도 및 중앙아시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고 오스만제국의 통치기간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이슬람은 기독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로 자리잡게 되었다.

 

□ 이슬람 연표
 - 570: 메카(Mecca)의 꾸라이시 부족에서 무함마드 탄생
 - 595: 무함마드 25세때 카지자(50세)와 결혼(6명의 자녀 → 2명 죽고 딸만 4명): 히라(Hira) 산에서 묵상
 - 610: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코란 계시 (40세) → 이슬람의 출현
 - 613: 이슬르마 포교 시작, 3년후 알라(Allah)의 음성 들음
 - 622: 메카 → 메디나(Medina) ≡ 성천(Hijra)
 - 630: 이슬람군 메카정복
 - 632: 무함마드 사망
 - 632 ∼ 634: 아부 바크르(Alb-Bakr) 초대 칼리파 → 코란 편찬
 - 634 ∼ 644: 우마르(Umar) 제2대 칼리파 → 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 지역으로 세력확장
 - 644 ∼ 656: 오스만(Othman) 제3대 칼리파 →북아프리카, 키프러스, 페르시아 정복, 중앙아시아, 인도지역까지 세력확장
 - 656 ∼ 661: 알리(Ali) 제4대 칼리파 → 칼리파 계승권을 놓고 조카와 사이들 분쟁 ∈ 시아(Shiites)파 분열
 - 661 ∼ 750: 움마이야 왕조(Ummayad: 다마스쿠스) → 스페인 정복(711)후 중부 프랑스까지 세력 확장
 - 732 ∼ 프랑스와의 뚜르(Tours) 전쟁에서 패배, 759년 까지 세력확장 제약
 - 750 1258 압바스 왕조(Abbasid: 바그다드) → 알콜(Alcohol) 발견
 - 850 ∼ 실리적 확장사업(개종보다는 세금) 전개, 중국과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 확대 
 - 873 12번째 이맘(Imam) 5살 때 갑자기 사라짐 ≡ 새로운 심판 예견
 - 975 최초의 이슬람대학, 아즈하르(Azhar: 이집트 카이로) 건립
 - 970 1080: 셀죽(Seljuk)이 시리아에서 팔레스타인, 이라크를 통치하면서 기독교도 박해 ≡ 성지순례가 어려워짐
- 1058 1111: 알가잘리(Al Ghazzali) 이슬람철학 체계화
- 1096 1099: 팔레스타인 탈환을 위해 십자군 파견 →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점령
- 1171 1187: 살라딘(Saladin) 이슬람 왕국 재건 →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탈환
- 1220 몽골의 칭기스칸의 공격
- 1300 ∼ 칼리프의 아들이 스페인으로 피신 → 1031년까지 스페인 통치(← 그라나다는 1492년까지 통치)
- 1280 1480 : 몽골이 이슬람을 받아 들인 후, 인도네시아에까지 무역확대(← 수피주의(Sufism) 벵갈, 카자흐스탄까지 전파)
- 1453 오스만제국 재정복(콘스탄티노플 → 이스탄불로 개명)
- 1517 오스만 제국이 1914년까지 시리아와 이집트 지배
- 1789 나폴레옹 이집트 정복
- 1817 1892: 바하이즘(Ba'haism) 출현← 바하울라( Baha'ullah)
- 1914 1918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망함으로써 중동에서 종족 및 부족간 분쟁발생 ← 아랍의 독립운동 전개됨
- 1932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건국
- 1948 이스라엘 건국
- 1948 ∼ 1972: 4차례 중동전쟁(팔레스타인이스라엘)
- 1973 ∼ 1979: 2차례의 석유위기
- 1979 ∼ 이란에서 호메이니혁명
- 1980 ∼ 1988: 이란이라크 전쟁
- 1991 ∼ 2003: 걸프전쟁(The Gulf War)과 이라크전쟁

 


 

□ 아랍인(The Ara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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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은 중동지역에 거주하는 구별이 애매모호한 모호한 다양한 종족으로 강력한 종족적 연대를 갖는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문명권에서 살아온 셈족(Semitic)으로, 페르시아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출현한 이슬람(Islam) 종교의 영향으로 이슬람화 된 종족이다.

아랍인들은 이슬람의 정복시대(632-661)를 거쳐 움마이야(661-750), 압바스 왕조(750-1513)를 거쳐 오스만제국(1513-1922) 지배를 받았다. 세계 제1차 대전이후 오스만제국에서 독립하여 현재는 22개국(←1945년 아랍연맹(Arab League) 창설)의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으며 인구는 약3억명에 달한다.

따라서 아랍인은 셈족으로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랍인과 무슬림은 다른 개념이다.

아라비아라는 명칭은 고대 페르시아어, Arabâya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서부 및 남부에 있는 나라 이름을 말하며, 세 개의 주요지역으로 구분된다. 1) 인도양 경계지역의 도시들(오늘날 예멘과 오만), 2)내륙의 유목지역(사우디아라비아) 및 3) 북서부지역(요르단). 이들 3지역의 라틴명은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 아라비아 사막(Arabia Deserta) 및 아라비아 페트라(페트라 통치의 아라비아, Arabia Petraea) 등이다.

“아랍”이라는 단어의 최초 사용은 BC 9세기 시리아의 앗시리아 정복의 기록, 아카드어로 쓰여 진 비석의 비문에서 나타난다. “아랍인들은 앗시리아에 반대하는 군사연합체의 일부를 형성했다” Qarqar의 전투에서 앗시리아의 Shalmaneser III 왕의 군대에 의해 점령된 노획물 가운데는 아랍에 속하는 Gindibu (남자) 혹은 "Gi-in-di-bu'u the ar-ba-a-a" 의 1000마리 낙타가 있었다.

이밖에도 Arab이라는 단어는 아랍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Yarab로 불렸던 eponymous father로부터 온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2. 이슬람제국(Islamic Empire)

이슬람 제국(Islamic Empire)은 중세에 이슬람국가들이 형성했던 제국이다. '사라센 제국'으로도 물려지며, 사라센 혹은 사라센족(Saracens)은 로마제국 말기에 시나이 반도에 사는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슬람 제국(Islamic Empire)의 역사

중세 초기의 아랍 제국
라시둔 칼리파조 (632661)
우마이야 칼리파조 (661750) - 라시둔 칼리파조를 계승
알안달루스(Al-Andalus: 이슬람화 된 스페인)의 우마이야 토후국 (750929)
알안달루스(Al-Andalus: 이슬람화 된 스페인)의 우마이야 코르도바 칼리파조 (9291031)
아바스 칼리파조 (7501258) -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계승
파티마 칼리파조 (9101171)
아이유브 왕조 (11741342)
맘루크 왕조 (12501517)
 
9-11세기의 무슬림 이란 왕조(Iranian Intermezzo)
사만 왕조 (819999)
타히르 왕조(Tahirid dynasty) (821873)
사파르 왕조 (8611003)
부와이 왕조(Buyid dynasty) (9321055)
살라르 왕조(Sallarid) (942979)
 
중세 후기의 이슬람 제국
알모라비드 왕조(Almoravid dynasty) (10401147)
무와히드 왕조(Almohad dynasty) (11211269)
가즈나 왕조 (9631187)
셀주크 제국 (1037-1194)
아주란 왕국(Ajuuraan State) (1417세기)
티무르 왕조 (13701526)
로디 왕조(Lodi Dynasty) (1451-1526)
수리 왕조(Suri Dynasty) (1540-1557)
 
근대의 이슬람 제국:
무굴 제국 (15261858)
사파비 왕조 (15011736)
호타키 길자이 왕조(Hotaki Dynasty) (1709-1738)
아프샤르 왕조 (17361796)
두라니 제국(Durrani Empire) (1747-1826)
오스만 제국 (12991923)

주) 위 분류는  위키백과에 따른 것이다.

 


7세기에 들어서자 이슬람세력의 확장으로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제국과 비잔틴제국에 맞서 싸운 아랍인들의 사기는 충천했고 생활도 부유해졌다. 하지만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의 분배문제로 이슬람국가들은 다시 내전에 휩싸였다. 무함마드가 갑자기 사망하자 지도자를 잃은 이슬람교도들은 한동안 혼란한 시기를 보냈는데, 아부 바크르, 오마르, 오스만, 알리 등 4명의 칼리파가 이슬람을 이끌었으며 이 시기를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라 한다. 혼란한 시기에도 이슬람세력은 계속 확대되어 첫 번째 왕조인 움마이야 왕조 (661-750)를 거쳐 9-11세기는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연 압바스 왕조(750-1258)가 계속되었다.

정통 칼리파시대 이슬람세력은 내부적으로 심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이란 고원에서 북아프리카까지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내전을 종식시킨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는 661년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는 움마이야 왕조를 건국하였다. 움마이야 왕조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무슬림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이슬람문명의 탄생을 도왔다.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정복한 이슬람군의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711년에는 스페인을 점령하였다. 프랑스까지 진격한 이슬람군은 732년 푸아티에서 패하긴 했지만, 인도를 점령한 후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대파함으로써 중앙아시아의 대부분 지역도 장악하게 되었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술이 서역에 알려진 것도 이때로 알려지고 있다.

750년 움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함락시킬 때까지 이어진 왕조가 압바스 왕조이다. 수도를 페르시아 영역이었던 바그다드로 옮긴 압바스 왕조의 팽창은 정복과 평화적인 개종에 의해 계속되었다. 당시 이슬람권의 교역은 사하라 이남 서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볼가 강 불가리아 및 말레이 군도에까지 확대되었다. 그 후 페르시아의 사파위 왕조와 가즈나비드 왕조는 아프간-페르샤 지역을 정복하였고, 11세기에는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시대는 ‘이슬람의 황금기’라 불려진다. 당시 이슬람세계의 철학자, 과학자 및 기술자들은 과거의 전통을 보존하고 그들 자신의 발명과 혁신을 통해서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압바스 왕조는 아랍인만의 특권을 폐지하고 이슬람법체계를 완성하여 비로소 아랍왕조의 성격을 벗어나 이슬람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피정복민들에 대한 평등한 대우는 과학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오게 중요한 계기가 된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지리학과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이 탄생하기 전 메카는 아라비아에서 무역의 중심지였고 무함마드 자신도 상인이었다. 메카 순례의 전통은 아이디어와 상품의 교환을 위한 센터가 되었다. 이슬람 상인에 의한 영향력은 아프리카-아라비아 및 아라비아-아시아 교역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문명은 농업의 토지소유계층으로부터 사회를 건설한 기독교이나 인도인, 중국인과는 대조적으로 상업경제의 기반으로 성장하고 확대되었다. 이슬람 상인들은 상품을 교역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중국, 인도, 서남아시아 및 서구세계로 전파하고 새로운 발명품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슬람의 황금기에는 먼 거리의 여행이 가능해졌으며, 8세기에는 종이의 사용도 중국으로부터 무슬림세계로 확산되었고 스페인을 거쳐 10세기에는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거리가 멀어지자 화폐의 부족과 송금의 위험을 고려하여 수표나 어음의 사용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수표라는 어원이 아랍어에서 왔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해주며, 알콜, 커피, 알지브라(대수학), 설탕, 소다, 파자마 등 오늘날 우리들이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말들이 아랍어에서 왔다는 사실은 당시 이슬람세계의 과학과 상업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였고,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까지 이슬람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광범위하게 팽창한 이슬람제국은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에 의한 반란을 시작으로 여러 분파로 분열하기 시작 하였다. 시아파인 이스마일파는 930년 압바스 왕조에 대해 반기를 들고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에 고무된 셀주크 터키는 1055년 무력으로 압바스 왕조를 제거하고 칼리파의 권위는 형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마침내 1258년 몽골제국이 바그다드 전투에서 마지막 칼리파를 죽임으로써 압바스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오스만제국은 1453년 이슬람제국을 다시 정복하고 과거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개명하여 수도로 삼았다. 178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이 있긴 했지만, 이슬람국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망할 때 까지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천일야화


 

3. 오스만제국(Othman Empire)의 등장

오스만제국(Othman Empire; 1299 ∼1922)은 오스만 가문을 왕가로 하여, 현재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정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러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제국이다.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출현한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 왕조는 동로마 제국남동유럽기독교 제국, 맘루크 왕조 등의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이슬람제국을 정복하여 지중해세계의 절반을 차지하여 오스만제국으로 군림하였다. 18세기 이후 오스만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하여 1923년 터키공화국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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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역사

오스만 제국의 국가

오스만제국 성립이후

마흐무디예 (1808~1839, 황실 의례용)
메지디예 (1839~1861, 국가)
아지지예 (1861~1876, 국가)
하미디예 (1876~1909, 국가)
레사디예 (1909~1918, 국가)

오스만 1세 (1299~1326): 파디샤 (술탄)
메흐메트 6세 (1918~1922)
알라에딘 파샤 (1320~1331): 재상
아흐메트 테브픽 파샤 (1920~1922)

* 무드로스 정전 협정 이후부터 1922 제국이 해체될 때 까지는 국가가 없었다.

출처: 위키백과

오스만제국은 14세기 비잔틴제국의 쇠퇴로부터 1922년 터키공화국이 설립될 때까지 아나톨리아 지방의 투르크족이 세운 국가이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오스만제국은 투르크-몽골제국 중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국가이다. 혼란스러웠던 몽골의 후기 집권기 때 비잔틴제국의 동부 아나톨리아 국경지대에서 첫 선을 보였다.

오스만가(家)에 속했던 투르크족은 14세기 초만 하더라도 그들은 소아시아 반도 북동쪽 부르사 주변의 약탈자에 지나지 않았다. 오스만인들은 원래 몽골제국의 종속민이었거나 신하였지만 14세기 초에 몽골이 아나톨리아에서 지배력을 잃자 오스만인들이 비잔틴제국의 마을과 도시들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셀주크 투르크군이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비잔틴군을 격파한 사건을 계기로 서아시아의 이슬람화 및 투르크화가 시작되었다. 셀주크 투르크에 패한 비잔틴제국이 시작한 전쟁이 ‘십자군 전쟁’이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은 셀주크 투르크족이 보스푸러스 해협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에 시작되어 13세기 말까지 2세기 동안 계속 된 이슬람제국과 비잔틴제국과의 전쟁이다.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에서는 기독교도의 역정복이 진행되어 1493년에는 무어인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십자군 전쟁: 살라딘

이 과정에 셀주크 투르크는 10세기말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11-12세기 무슬림들은 시리아와 비잔틴 제국의 희생으로 얻은 아르메니아와 아나톨리아 땅을 쉽게 차지했다. 이슬람이 이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배경은 셀주크 투르크의 통제를 받지 않는 투르크족 전사와 모험가들 덕분이었다. 셀주크 투르크족이 이란의 심장부를 정복한 사건은 오구즈 투르크인들에게 새로운 이주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셀주크 투르크로 교체된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여 결국 비잔틴 제국(330-1453)을 멸망시켰다. 한편 인도에서 세력을 구축한 이슬람군은 인도를 기지로 삼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및 필리핀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15-16세기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가 광범위하게 펼쳐진다.

오스만제국의 황제들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비옥한 초승달지대, 이집트, 히자즈 등을 정복하여 메카와 메디나를 지배하였다. 그 후 오스만제국은 남아라비아의 예멘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모로코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술레이만 2세는 ‘에게 해’에서 기독교도들을 몰아냈고, 16세기 중반에는 서부 지중해의 입구인 몰타를 정복하기 위해 두 차례 공격을 하였다. 1571년 그들은 레판토에서 베네치아인에게 패배했지만 발칸반도에서는 놀라운 성과를 기록하였다. 오스만제국은 1521년 그들은 베오그라드를 점령했고, 1529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인 빈을 포위했다.

이슬람세계는 16-18세기에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눠졌다. 한 지역은 16세기 초 투르크-몽골세력이 네 개의 주요 국가 - 오스만제국, 사파비왕조, 무굴제국, 서 투르키스탄의 우즈베크 칸국 - 를 세운 근동과 인도 및 중앙아시아이고, 다른 지역은 북아프리카와 수단과 아프리카의 폭넓은 지역 및 동남아시아이다. 이 두 지역은 정치적, 문화적 차이가 있었지만, 이슬람 학문과 메카 순례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에 깊은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울러 운송수단이 발달함으로써 두 지역간에 무슬림들의 왕래는 빈번해질 수 있었다.

16세기가 되자 무슬림들은 중동지역에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오스만제국의 군대는 동유럽으로 쳐들어갔고, 다른 무슬림들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에 따라 전세계적으로 이슬람교는 점점 확산돼 갔다.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왕조, 무굴제국의 수도들은 저마다 정복자의 권위와 부를 과시하였고, 이슬람문명의 빛나는 예술적, 건축적 창조력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웅장한 건축물들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19세기가 도래하자 이슬람세계는 산업혁명으로 부강해진 유럽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투르크-몽골 국가들은 서서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남아시아의 독립된 무슬림국가들은 자취를 감추거나 아예 유럽국가들에게 종속되었으며, 아프리카 무슬림국가들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술레이만 2세가 사망할 당시 오스만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커다란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렇듯 강대했던 오스만제국도 산업화된 유럽열강들의 세력에 밀려 제1차 세계대전이후인 1922년 11월 화려했던 막을 내리고 1923년 9월 터키공화국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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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Turkey)

 

 

* 터키는 서남아시아의 아나톨리아와 유럽 남동부 발칸 반도의 동부 트라크야에 걸친 나라이다. 수도는 앙카라이다

- 터키는 여덟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북서쪽으로는 불가리아, 서쪽으로는 그리스, 북동쪽으로는 조지아(그루지야),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월경지인 나히체반), 이란, 남동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가 있으며, 북쪽에는 흑해가 있다.

- 아나톨리아와 동트라키아 사이로는 마르마라 해와 다르다넬스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이 있는데, 이 바다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 인식되어 터키는 두 대륙에 걸친 나라이므로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지를 차지하고 있다.

- 인종상 터키인이 국민 대다수를 이루며, 그 다음으로는 쿠르드인이 있다. 터키의 주요 종교는 이슬람이며, 공용어는 터키어이다.

 - 터키는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이다. 민주주의, 세속주의를 받아들인 입헌공화국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1923년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도로 현대의 정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 터키는 유럽 이사회, 북대서양 조약기구, OECD, WEOG, G20와 같은 국제 기구에 가입하여 서방 세계와 점차 통합하고 있다.

- 터키는 1963년에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준회원국이었으며 1995년에는 관세 동맹 협정을 맺었고, 2005년에는 유럽 연합의 정회원국 가입 협상을 시작하였다.

- 터키는 또 이슬람 회의 기구(OIC)와 경제 협력 기구(ECO)에 가입하여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위시한 동양과도 문화, 정치, 경제, 산업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 지리

- 터키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나라이다. 아시아쪽 터키 영토(주로 아나톨리아로 구성)는 국토의 97%를 차지하며,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흑해와 지중해를 이어준다.)을 끼고 있는 유럽쪽 터키 영토는 국토의 3%에 불과하다.

- 터키는 세계에서 37번째로 넓은 나라이며, 프랑스 본토와 영국 영토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 이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있는데, 서쪽에는 에게 해, 북쪽에는 흑해, 남쪽에는 지중해가 있다. 또 북서쪽으로는 마르마라 해가 있다.

- 국토 북쪽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지진 단층선 때문에 1999년에 대지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 기후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터키의 해안 지방은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여 여름에는 고온 건조하고 겨울에는 한랭 습윤하고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 역사

- 오늘날의 터키 영토 대부분을 이루는 아나톨리아 반도는 아시아와 유럽이 상호작용하는 장소로서 지구상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인류가 거주하던 땅이었다.

- 트로이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로, 철기시대까지 취락이 지속되었다. 역사 시대로 접어들면 아나톨리아 사람들은 인도-유럽어, 셈어, 카르트벨리어를 비롯하여 기원이 불확실한 여러 언어를 썼다. ⇐ 아나톨리아가 인도-유럽어를 확산시킨 중심지라는 가설도 있음.

- 최초의 제국은 히타이트로 기원전 18세기에서 13세기까지 존속하였다

- 기원전 1200년경부터 아나톨리아 해안에는 아이올리스와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였다. 이 지역은 기원전 6~5세기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에 정복되었으며, 이후 기원전 334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받게 된다.[

- 기원전 1세기 중엽에 모두 로마에 복속된다. 기원전 324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뷔잔티온을 로마제국의 새 수도로 삼아 노바 로마('새로운 로마',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이스탄불이 된다.)라고 개명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자, 이 도시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 튀르크인과 오스만제국

- 크느크(Kınık) 오우즈 튀르크족은 10세기경 무슬림 세계의 변방이었던 카스피 해와 아랄 해 북쪽인 오우즈 연맹의 얍구 칸국 살던 사람들로, 셀주크 가문은 이들의 분파였다

- 11세기에 셀주크 일파는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나 아나톨리아 동부로 이주하였으며,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말라즈기르트)에서 승리하면서 이 땅은 오우즈 튀르크족의 새 터전이 되었다. 셀주크의 승리로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술탄국이 부상하여, 중앙아시아 일부와 이란, 아나톨리아, 서남아시아를 아우르던 셀주크 제국의 개별 분파로 성장하였다.

- 1243년에 셀주크 군대는 몽골인들에게 패배하고, 제국의 패권은 점차 무너지게 된다. 이후 오스만 1세가 지배하던 일개 튀르크 공국이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발전하여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 레반트를 아우르는 오스만 제국이 되었다.

- 16~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으며, 발칸 반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남부를 통해 중부 유럽으로 점차 진출하면서 신성로마 제국과 종종 충돌하였다.

- 이후 쇠퇴기에 접어든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1914년~1918년)에서 동맹국편으로 참전하여 결국 패배하였다. 1918년 10월 30일 무드로스 정전 협정으로 승전국인 연합국은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을 분리시키려 하였다.

 

◇ 공화정시대

-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이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를 점령하면서 터키의 민족운동이 촉발되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의 주도로 세브르 조약 규정을 철회시키기 위한 터키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1922년 9월 18일, 점령군은 퇴각하였으며, 새로운 터키의 나라가 건국되었다.

-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옛 오스만의 잔재를 털어내고 새로운 세속 공화국의 건설을 목적으로 여러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 터키는 한국전쟁에서 국제연합군으로 참전하였으며, 1952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소련의 팽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한편 1980년대부터 터키경제가 자유화되어 이 나라의 경관이 바뀌게 되며, 이후 수십 년 동안 높은 성장과 위기가 잇따랐다.

 

◇ 정치

터키는 의회제도를 채택한 대의 민주주의 국가이다.

 

◇ 행정구역

-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이다. 터키 영토는 행정구역상 81개 주로 나뉜다.

- 최대 도시이자 공화국성립 이전에 수도였던 이스탄불은 터키의 경제, 금융, 문화의 중심지이다. 터키 인구의 70.5%가 도시지역에 살고 있다.

 

◇ 군사

- 터키군대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서 미국 군대 다음인 두 번째로 규모가 크며, 산하 다섯 군 조직에 복무하는 총 병력 수는 1,043,550명이다.

- 2009년 기준으로 터키는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와 더불어 북대서양 조약기구 동맹의 핵 공유정책에 참가하고 있다. 인지를리크 공군기지에 B61 핵폭탄 90기가 있으며, 이 가운데 40기는 터키 공군용으로 할당되어 있다.

- 1998년, 터키는 20년간 미화 1,600억 달러를 들여 전차, 전투기, 헬리콥터, 잠수함, 군함, 돌격소총 등 다양한 분야의 군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터키는 합동 전폭기(JSF) 계획의 3등급 기여국이다.

 

◇ 경제

- 터키는 구매력 평가대비 국내총생산 세계 15위, 명목 국내총생산 17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나라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와 G20의 창립회원국이다.

- 1923년에서 1983년까지 터키 공화정이 들어서고 60년간 터키는 국가주의적 정책을 고수하여 정부예산을 엄격하게 계획하고, 개인부문 참여, 대외 무역, 외화 유통, 외국인 직접 투자에 정부가 제약을 가하였다.

- 그러나 1983년부터 투르구트 외잘 총리가 일련의 개혁을 주도하면서 경제 정책이 국가주의에서 탈피하여 개인부문과 시장경제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바뀌었다. 자유화개혁 덕분에 터키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으나, 1994년과 1999년(그 해 지진 발생 후), 2001년에 갑작스러운 침체와 금융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1981년에서 2003년 사이에 터키의 연간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평균 4%를 나타내었다. 추가적인 재정개혁이 뒷받침되지 않은 탓에 공공 부문 적자가 커진데다 광범위한 정치 부패가 겹치면서 인플레이션이 높아지고 은행부문이 취약해졌으며, 거시경제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2001년 경제위기와 당시 재정 장관 케말 데르비쉬가 주도한 개혁 이후로 인플레이션은 한자릿수로 떨어졌으며, 투자자 신뢰도와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였고 실업률은 떨어졌다. 국제통화기금은 2008년 터키의 물가상승률을 6%로 예측하였다. 터키는 대외무역과 투자에 대한 정부통제를 줄이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여 점차 자국 시장을 개방하였는데, 여러 경제 부문을 개인과 외국인에게 넘겨 자유화하는 정책은 정치적 논란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 2002년에서 2007년까지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평균 7.4%를 나타내었는데, 덕분에 터키는 같은 기간에 세계적으로도 빠른 경제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2008년에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4.5%로 떨어졌으며, 2009년 초에 터키경제는 세계 금융위기의 영향을 받아 국제통화기금은 그 해의 침체율을 5.1%로 예측하였으며, 반면 터키 정부는 3.6%로 추산하였다.

 - 터키 경제는 더 이상 농촌지역의 전통적인 농경이 주류가 아니며, 대부분 국토 서쪽 주에 집중된 주요 도시의 산업 단지들이 급속히 발전하고 서비스 부문도 확대되면서 국가경제를 이끌고 있다. 2009년에 농업 부문은 국내 총생산의 8.8%에 머물렀으며, 산업 부문은 27.5%, 서비스 부문은 63.8%를 나타내었다.

- 유럽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터키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은 2008년 유럽 연합 평균치의 45%로 나타났다.

- 관광부문은 지난 20년 동안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터키 경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2008년에 터키를 방문한 사람은 30,929,192명으로, 터키 재정 수입에 미화 219억 달러를 기여하였다.

- 그 밖에 터키경제에서 중요한 경제부문은 은행업, 건설, 가전제품, 전기, 섬유, 석유 정제, 석유 화학 제품, 식품, 광업, 철강, 기계 산업 및 자동차를 들 수 있다. 터키의 자동차 산업은 크게 성장하고 있으며, 2008년에 1,147,110대 차량을 생산하여 유럽에서 자동차 생산국 6위(영국보다는 낮고 이탈리아보다는 높은 순위), 세계기준으로는 15위 생산국이었다. 또 터키는 조선업 선도국으로 2007년에 이 나라는 선박 수주량 기준으로 중국, 대한민국, 일본 다음으로 세계 4위를 기록하였으며, 호화 유람선 수주량 기준으로도 이탈리아, 미국, 캐나다에 이어 4위였다.

- 최근 몇 년 동안 터키의 고질적인 고물가가 통제를 받게 되어, 경제개혁의 성과를 공고히하고 불안정한 경제의 영향을 없애고자 2005년 1월 1일부터 신 터키 리라화를 발행하였다. 2009년 1월 1일부터 신 터키 리라가 본래 이름인 터키 리라로 개명되어 새 은행권과 동전이 도입되었다. 경제 개혁이 지속된 결과 2005년에 인플레이션은 8.2%로, 실업률도 10.3%로 떨어졌다. 2004년, 총 가처분소득의 46.2%가 소득 최상위 20%에 몰려 있으며, 소득 최하위 20%에게는 총 가처분소득의 6%밖에 소유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 터키는 2005년에 유럽연합과 맺은 관세동맹 덕분에 수출 예정 산업생산이 증가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유럽 연합의 대터키 외국인 투자로 이익을 보고 있다.

- 2007년에 수출액은 미화 1,1153억 달러에 이르렀다. (주요 수출상대국: 독일 11.2%, 영국 8%, 이탈리아 6.95%, 프랑스 5.6%, 에스파냐 4.3%, 미국 3.88%; 유럽연합에 대한 총 수출 56.5%) 그러나 같은 해 수입액은 1,621억 달러로 수출액보다 더 많아[68] 무역 수지를 위협하였다. (주요 수입상대국: 러시아 13.8%, 독일 10.3%, 중국 7.8%, 이탈리아 6%, 미국 4.8%, 프랑스 4.6%, 이란 3.9%, 영국 3.2%; 유럽연합 총 수입 40.4%; 아시아 총 수입 27%)

- 2008년 터키의 수출액은 1,418억 달러이며, 수입액은 2,048억 달러였다.

- 터키의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낮은 수준을 보이다가 2007년에는 219억 달러를 투자받았으며, 이후에는 투자액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민영화가 대규모로 진행되고, 터키가 유럽연합과 가입 협상을 시작하면서 안정성을 얻었으며, 강력하고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고, 은행업과 소매업 및 통신 부문에서 구조개혁을 단행하면서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 교통

- 터키에 있어서 교통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여객·화물 모두 육상의 도로교통이다. 철도는 국철(TCDD)이 존재하고 10,940km의 노선을 보유, 운영하고 있으나, 극히 편수가 적어서 불편하다. 또한, 역사・노선・기타 설비도 정비가 불충분하여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다.

- 공화국 수립 이전인 1856년에 시작된 철도건설은 거의 전적으로 외국자본에 의한 것이었으나 철도는 그후 전부 국유화되었다. 국토 전역에 미치는 철도는 물자수송의 주요수단이 되고 있다. 주요간선은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아나톨리아 고원을 횡단하여 이스탄불에 이르는 바그다드 철도이다.

- 수도 앙카라와 지중해, 에게해, 흑해 연안의 모든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는 잘 발달해 있으나 폰투스 산맥과 타우루스 산맥이 흑해와 지중해에 연해 있기 때문에 해안지방의 여러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망은 발달해 있지 않다.

- 예부터 해상 교통이 활발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터키 최대의 항구 이스탄불은 흑해와 마르마라해 중간에 위치한다는 좋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물자의 거래가 성행한다. 에게 해안의 이즈미르, 지중해안의 이스켄데룬, 흑해안의 삼순과 트라브존도 주요항구이다. 근년에는 항공기의 발달로 국내항로가 정비되었는데 이스탄불은 국제항공상의 요지가 되어 있기도 하다

 

◇ 인구

- 2008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터키 인구는 7,150만 명으로, 연간 인구성장률은 1.31%이다. 평균 인구밀도는 km²당 92명이다.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인구의 비율은 70.5%이다. 15~64세 연령 집단에 속하는 사람이 총 인구의 66.5%를 점하며, 0~14세 연령 집단은 26.4%이고, 65세 이상의 연령대는 7.1%를 차지한다

 

◇ 언어

- 터키어는 터키의 유일한 공용어이다. 터키어는 튀르크어군에 속하며 튀르크 어군의 방언 차이가 적은 관계로 다수의 튀르크어군에 속하는 다른 언어들과의 차이가 적은 편이며 특히 아제르바이잔어와 사이가 가깝다.

- 터키어는 2004년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약 1억 5000만 명이 사용하고 있으며 1928년부터 로마문자로 표기되고 있다. 과거에 존재했던 오스만 터키어는 1928년 이후 사멸되었고, 동남부 지역의 아랍계 주민을 제외하고는 아랍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 문화

- 터키는 오우즈 튀르크, 아나톨리아인, 오스만 제국(이 나라 자체도 그리스-로마문화와 이슬람문화의 연장이다), 그리고 탄지마트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서구문화와 전통이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창출하였다. 원래 이러한 문화 혼합은 터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이주할 때 여러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생겨났다.

- 터키문화는 "근대" 서구식 국가가 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 종교와 역사적 가치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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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터키는 공식 국가 종교가 없는 세속국가로, 터키헌법에서는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세계 무슬림 인구에 관한 2009년 자료에 따르면, 터키에서 7,360만 명의 주민, 즉 전체 인구의 98%가 무슬림이라고 한다. 이들 무슬림 대다수는 순니파(85~90%)이며, 그 외 주요 종파로 알레비파(10~15%), 시아파, 12이맘파의 분파가 700~1,100만 명 있다고 한다.

◇ 대외관계

터키는 전통적으로 서구 지향적인 노선을 견지하였으며, 터키 외교정책에서 대유럽 관계는 늘 중요한 사안이었다. 터키는 1949년에 유럽평의회에 창립회원국으로 가입하였으며, 1963년에 유럽 경제 공동체(EEC, 유럽 연합의 전신)의 준회원국 지위를 신청하여 1963년에 앙카라 협정으로 준회원국 지위를 얻었다. 수십 년간 정치 교섭 끝에 터키는 1987년에 유럽 경제공동체 정식회원국 지위를 신청하여, 1992년에는 서유럽 연합의 준회원국이 되었고, 1995년에는 유럽연합과 관세 동맹협정을 맺었으며 2005년 10월 3일부터 공식적으로 유럽 연합과 정식 가입 협상에 돌입하였다.

- 터키가 큰 나라인데다 특정 사안에 대한 이견이 큰 탓에 유럽연합 가입 절차는 최소 15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한 논란 가운데는 1974년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을 둘러싸고 유럽 연합 회원국인 키프로스 공화국과 겪고 있는 분쟁도 있다

- 한국의 축구 선수들이 터키에 진출하였고, 터키 현지인 셰놀 귀네슈가 FC 서울의 감독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축구 선수들 중에는 터키 리그에 진출한 선수가 없다.

 출처: 위키백과

  

3) 근대 - 유럽열강의 등장과 석유시대

1. 유럽열강의 각축과 팔레스타인 비극| 2. 석유시대의 개막과 아랍의 부흥| 3. 21세기 중동의 신세계질서

 

1. 유럽 열강의 각축과 팔레스타인의 비극

 

중동의 국경선은 구획정리가 잘된 사막의 도시계획선 처럼 직선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중동의 지도는 유럽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조감도처럼 보인다. 중동과 아프리카에 식민통치를 해온 유럽 국가들의 기본 전략은 ‘분할통치’였다. 유럽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로 죽죽 그어진 중동의 국경선, 그것이 오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비극이 되었고 아랍인들의 아픈 상처가 된 것이다.

이슬람 종주국이었던 오스만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편을 들어 동맹국으로 참전함으로써 아랍국가들은 ‘해방의 기쁨과 전쟁의 아픔’을 동시에 맛보아야 했다. 오스만제국이 전쟁에서 패전국이 되자 아랍국가들은 대부분 독립하여 기쁨을 만끽했지만, 이스라엘도 함께 팔레스타인 땅에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새로운 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전쟁기간 중 영국은 현지인들의 도움을 구하고자 아랍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독립약속을 해주었고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그 이중약속을 팽개치고 슬그머니 발을 뺀 것이다.

영국은 1915년 요르단 왕과 ‘후세인 맥마흔 서신을 통해 오스만제국에 아랍인들이 봉기를 할 경우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유대인들에게는 별도로 1917년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 영토에 독립약속을 해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국제연맹이 오스만제국의 영토 가운데 터키를 제외한 지역의 분할 통치권을 인정하자 아랍과 이스라엘 간에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런 가운데 1916년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참여하에 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어 전쟁이후 오스만제국의 통치를 논하고. 이 협정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러시아와 다른 동맹국간의 협의에 따라 관리하는 국제관리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이 협정은 ‘맥하흔 서신’도 뒤집는 내용이었고 이로 인해 중동지역은 다시 유럽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영국은 요르단 왕 압둘라와의 약속대로 1946년 아랍지역에서 물러나고 압둘라 왕의 이복형제 파이잘 왕자는 이라크의 왕이 되고 시리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의 대부분 국가들도 이 시기에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한편 유대인들은 2000년 세월 긴 유랑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의 시온동산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의 기치하에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매진하고 있었다. 시오니즘이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건설을 목표로 19세기말 시작된 민족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결실을 맺어 1948년 현대의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 건국이 되기에 이른다.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하자 폭정을 못 이긴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핍박받으며 살아오면서도 국가건설에 대한 꿈은 버리지 않았고 그 인내와 끈기가 눈물의 결실을 거둔 것이다. 기원전 63년부터 팔레스타인 땅에서 추방되어 흩어져 살아오긴 했지만, 유대인들은 그 긴 세월 동안에도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오면서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어. 유대인의 인내와 노력이 국가건설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1947년 국제연합은 제181호 결의를 통해 영국령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할안을 제시하지만 아랍측은 이를 거부한다. 그러던 차에 1948년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신탁통치가 종료되고 이스라엘은 곧바로 5월 14일 독립국가를 선포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함과 동시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은 이에 즉각 반발하여 다음날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사건이 ‘제1차 중동전쟁’이고 아랍인들은 이스라엘과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78%를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고 그 다음해 휴전을 한다. 이 과정에 약75만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발생하여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등 이웃 주변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면서 대이스라엘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후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3차례에 걸친 전쟁이 더 치러지지만 아랍국가들은 4차례에 걸친 전쟁에 모두 패하고 아랍-이스라엘간 중동전쟁은 1973년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게릴라전을 통하여 대이스라엘 투쟁을 계속해온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1964년 아랍정상회담의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하여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위해 대이스라엘 투쟁을 나섰다. 1988년 알제리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민족협의회에서 팔레스타인을 독립국가로 선포하고 야세르 아라파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으로 이집트는 높은 물가고와 실업난에 시달리게 되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집트는 1978년 캠프데이비드협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화해를 하고 중동전쟁에서 빼앗겼던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았고 그 대신 이스라엘은 건국이후 최초로 아랍국가로부터 국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을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가 실현되는 듯했으나, 2004년 아라파트의 사망과 이스라엘의 극우파의 저지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실현되지 못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과 지속적인 ‘테러와의 전쟁’은 아직도 팔레스타인 자치국가 수립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유혈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2005년 팔레스타인 국가창설을 목표로 미국, 유엔, 러시아, 유럽연합(EU)이 ‘평화로드맵’을 마련하였지만, 이들이 마련한 중동평화계획도 이스라엘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동평화는 그 불씨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 갈등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달성될 것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2011년 ‘아랍의 봄여파 또한 중동평화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어 ‘중동평화’는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2. 석유시대의 개막과 아랍의 부흥

 

1950년대 들어오면서 대부분 아랍국가들이 정치적으로는 독립을 쟁취했지만,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석유’는 그들에게 새로운 활력은 가져다주었다. 아랍인들은 석유를 ‘알라의 선물’이라 여겼고, 다시 이슬람의 깃발아래 다시 모였다. 막대한 석유자원과 그로 인한 엄청난 부의 축적은 아랍이 다시 부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인류가 최초로 석유를 사용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수메르인들이 조각상에 접착제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로 그 땅에서 펑펑 솟아난 석유는 ‘석유시대의 개막’을 알리면서 다시금 그들을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시켰다.

중동에서 석유산업은 영국인 윌리암 K. 다아시가 1901년 이란에서 최초로 채굴권을 획득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08년 이란에서 대규모 상업적 유전이 발견됨으로서 중동에서 본격적인 석유산업이 시작되었다. 서구 열강들도 앞 다투어 자본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막대한 석유 매장지역으로 각광받게 됨에 따라 이권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30년대 들어오면서 바레인을 시작으로 아라비아반도에서도 석유가 개발되기 시작하여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석유발견의 흥분도 잠시 유정은 고갈되고 다아시는 자금난으로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그를 기사회생시켜준 것은 영국해군이었어. 1911년 윈스턴 처칠이 해군장관에 취임하면서 영국 해군의 안정된 석유공급선을 이란으로 정하고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대체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나중에 세계 에너지사용에 있어서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계 에너지원의 대부분은 석탄이 차지하고 있었다. 영국해군에서 석탄대신 석유로 에너지원을 대체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열효율이 높고 비용이 저렴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후 전 세계 에너지사용은 석탄에서 석유로 혁명적인 변화를 하게 되었다.

아랍국가들에게 결정적으로 ‘알라의 선물’을 안겨준 사건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야. 전쟁에서 계속 패배한 아랍국가들은 석유자원을 무기화할 것을 결의하고 ‘석유금수조치’를 전쟁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아랍에 비우호적인 국가들에 대해서는 석유를 팔지 않겠다며, 갑자기 4배에 달하는 유가인상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제1차 석유위기가 발생했고 전 세계는 에너지자원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석유위기는 곧바로 금융위기로 이어졌어. 석유대금으로 지불된 전 세계의 달러는 중동산유국으로 모여들었고, 이때까지 막대한 자금을 관리해본 경험이 없었던 중동산유국들은 엄청난 규모의 달러를 그저 국고에 차곡차곡 쌓아 두기만 할뿐이었다. 그 바람에 전 세계는 수출대금으로 지불할 달러가 부족하게 되었고 국제금융시장은 달러의 회수에 비상이 걸리게 되었다. 이때 나온 말이 ‘오일달러’다.

석유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호메이니가 이란에서 혁명을 일으킨 1978년 ‘제2차 석유위기’가 다시 나타났다. 두 차례에 걸친 석유위기는 아랍산유국들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고 그들은 이를 계기로 활기찬 경제개발에 나서게 된 것이다. 한국의 ‘중동 붐’도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이다.

중동산유국들은 단순히 경제개발에만 만족하지 않고 ‘이슬람의 부활’에도 많은 투자를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슬람은행’이고, 현재 이슬람금융은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막대한 재원을 바탕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중동의 석유는 이제 단순한 자원의 차원을 넘어 국제적인 자본 혹은 금융자산으로 탈바꿈 하고 있다. 1970년대 초 탄생한 이슬람은행의 자산은 전 세계 금융자산의 약1% 정도이며 매년 15% 정도 성장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이슬람은행은 이슬람국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럽과 미국 그리고 아시아로 확대되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중동산유국들은 현세대에만 만족하지 않고 미래세대를 위한 기반도 마련하고 있다. 석유자원을 현세대에서 모두 써버리면 미래세대는 가난할 수밖에 없어지기에, 1970년대부터 매년 일정액의 오일머니를 후세대를 위해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금도 미래세대를 위한 안정적 분야에만 투자를 하지. 해마다 모아온 석유자금이 쌓여 새로운 기금이 되었고, 그것이 요즈음 말하는 ‘국부펀드가 된 것이다. 중동산유국들이 담수화, 풍력이나 태양열 발전, 우주항공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미래세대를 위한 배려라 볼 수 있다.

아무튼 아랍국가들은 석유의 혜택으로 다시 세계무대에 등장했으며,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가치로 다시 뭉치고 있다. 두바이의 급속한 발전은 사막에 신기루처럼 나타난 ‘아랍의 부활’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현세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세대를 위해 막대한 오일머니를 하늘에 투자하고 있다. 그것이 우주항공산업이고 그들이 바라보는 미래인 것이다.

 

3. 21세기 중동의 신세계질서

중동 특집: Mid-Special

◇ 21세기 중동의 환경변화

◇ 중동경제 이야기

◇ 중동질서의 재편과 이라크

◇ 이라크전쟁의 재조명

◇ 아랍의 봄(Arab Spring)

◇ 이란 경제제재조치와G2

◇ 뉴 실크로드

◇ 한-중동경제교류

9/11 미테러 사태| 오사마 빈 라덴| 탈레반| 중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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