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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의 중동연구는 1970년대 사막의 황무지에서 시작되었다. 1973년 제1차 석유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아랍은 한국의 적이었다. 석유위기가 발생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이스라엘은 우리의 친구, 아랍은 우리의 적()”이라고 배웠다. 뮌헨 올림픽에서 검은 구월단(Black Septemberist)의 테러가 있었기에 아랍인들은 테러리스트로 알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서방세계에서는 지금도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석유위기이후 금수조치가 취해지자 한국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아랍 국가들에게 우호적으로 다가갔다. 한국의 전책변화로 한국인들은 석유위기 이후 열사의 사막에서 중동 붐의 신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시기에 시작된 중동연구는 정보도 없었고 자료도 없었다. 모든 것은 석유와 중동건설에 집중되었다. 중동은 미지의 세계였기에 그저 사막으로 황량한 땅 정도만 알고 지도책이나 보며 낡은 책을 뒤적이며 시작된 것이 나의 중동연구다.

아랍어를 배우며 “I date a date.”라는 영문판 책에서 해석을 할 수 없어 밤을 꼬박 새운 기억이 난다. “date가 대추야자이고 동사로는 먹다라는 뜻이었기에 그랬다. 지금이야 큰 사전도 많고 자료도 많고 인터넷이 발달한 했기에 정말 어이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크게 놀래 킨 단어는 참새와 눈()”라는 단어였다. 아니 사막에 웬 참새가 있고 눈이 온다는 말인가! 이 호기심은 나의 중동연구에 불을 지폈다. 이러한 환상은 그 후로도 10년 이상 계속됐다. 현지를 직접 가보기 전에는 현지에서 우리가 먹는 마늘을 보고 놀랐고, 동양에만 있는 줄 알았던 도자기를 보고 신기했고, 소나무와 푸른 초원도 보고 참새도 보고 산위의 쌓인 눈도 보았다.

그 후 사람 사는 세상은 똑 같구나 하는 생각으로 사람도 만났고 소중한 친구들과 우정을 쌓았다. 나에게 더 이상 아랍사람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고 다정한 이웃이 되었다. 이렇게 지나온 세월이 어언 40년이 되었다. 지금의 연구자들이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고 답답한 연구였다고 웃음이 나오겠지만, 황무지에서 시작한 연구도 훗날 하나의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지나온 삶을 허심탄회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지역학 연구의 선두주자 한국중동학회

중동경제이야기

 

 

 목 차

I date a date.

카메라와 예메니아

이집트 공항의 박시시

다마스커스의 알리

젯다 공항의 양주

수웨즈운하의 공포

칼라타 타워의 밸리댄스

셀레임의 트리폴리 공황

이라크의 아이들

아카바 여객선의 VIP

한복과 예멘대통령의 자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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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 Korea Institute of the Mideast Economies (KIME). Editor: Dr. Seong Min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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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학 연구의 선두주자 한국중동학회

홍성민(중동경제연구소장)

한국중동학회 창립 40주년 기념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돌이켜보니 중동학회의 창립은 한국에서 학회발전, 특히 지역학 연구에 큰 기여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동학회가 창립된 1970년대 국내에는 정치학회나 경제학회를 제외하고는 학회활동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에 학회의 등록이나 활동은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동학회가 창립되던 1979년은 제2석유위기(oil crisis)로 한국경제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호메이니(Khomeini) 혁명의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봉쇄라는 초유의 국제적 안보상황이 발생하였고, 국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인 이른바 ‘1026 사태로 대내외적인 긴장이 초래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격랑의 시기에 창립된 학회가 중동연구의 불모지에서 지역학 연구의 싹을 틔운 한국중동학회입니다.

다행히 중동학회가 창립되던 시기에 한국외국어대학교에는 국제사정연구소를 계승한 중동문제연구소가 있었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필자는 중동문제연구소의 간사로 한국중동학회의 창립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40여년의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학회의 창립과정은 형극의 길 이었기에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비록 IT시대의 4차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후학들은 과거 이야기가 진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학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하나의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불모지에 싹틔운 한국중동학회

1979년 이른 봄, 한국외대의 중동문제연구소에서는 소장님이시던 유정렬 박사와 아랍어과 과장님이시던 김용선 교수님 간에는 잦은 만남과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 토론의 시발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부터의 재정지원이었습니다. 대화의 핵심내용은 아랍어대학의 설립이냐 학회의 설립이냐의 문제였습니다.

결국 학회창립으로 의견이 수렴되어 오늘날 한국중동학회가 탄생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중동학회의 탄생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문적 연구가 선행되었던 일본에서 조차 학회는 없었고, 중국 또한 일본에 이어 학회를 설립했습니다.

적지 않은 준비과정을 거쳐 1979615일 아랍문화회관에서 창립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지금은 흔한 현수막조차 드물던 시기에 경비절약차원에서 창립총회도 손으로 직접 쓴 한국중동학회 창립문구로 학회출범을 세상에 알리며 학회가 탄생되었습니다.

19731차 석유위기이후 한국의 중동진출이 본격화되었지만, 이때까지 중동을 학술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불모지로의 진출이라는 말이 그 상황을 대변합니다. 그 어려운 여건에서도 중동을 외롭게 연구하시던 교수님들이 힘을 모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립총회를 성사시킨 학자 분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중동학 연구의 선구자였습니다.

창립총회 당시 구성된 상임이사회 구성은 회장 유정렬(외대), 부회장 김용선(외대), 총무이사 서재만(외대), 연구이사 김용기(고대), 섭외이사 홍순호(이대), 출판이사 심의섭(명지대)이었으며, 간사에는 필자가 임명되었습니다. 위 학자 분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헌신이 한국중동학회의 초석이 되었음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입니다.

창립총회 이후 학회의 활동도 녹록치는 않았습니다. 학회탄생 소식을 외부에 알리는 일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발품을 팔아야 하던 시기였기에 알리기(PR)’ 위한 노력도 발품을 팔아야 했습니다. 신문의 단신(短信)에라도 학회탄생소식을 알리기 위해 무더운 여름 광화문에서 땀 흘리며 직접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부탁하신 서재만 교수님의 헌신도 잊을 수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학회창립이후 10.26 사태가 발생하자 학회활동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학회활동을 위해서는 신군부의 허가가 필요했기에 청와대까지 방문해서 허가증을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학회활동은 활발했습니다. 창립당해 연도에 7월과 11월 두 차례의 상임위원회 개최는 물론 12“1980년대의 한국과 중동이라는 제하의 첫 번째 연구발표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창간호 논총이 해를 걸러 19812월 발간되었다는 점입니다.

 

1979615일 한국중동학회 창립총회에서 신임 회장으로 추대된 한국외대 유정렬(가운데) 박사님 매직으로 쓴 경축 현수막 앞에서 축하인사를 하는 모습.

 

19796월 한국중동학회 창립총회에서 선임된 상임이사의 기념촬영: 좌로부터 총무 서재만(외대), 출판 심의섭(명지대), 섭외 홍순호(이대), 회장 유정렬(외대), 연구 김용기(고대), 이사님과 부회장 김용선(외대), 간사 홍성민(외대)

 

불사조의 화신으로 태어난 창간호 논총

창립 이듬해인 1980년에도 2차례에 걸친 월례발표회와 5회에 걸친 학회소식지 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논총발간에는 가슴 아픈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컴퓨터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시기였기에 원고지에 자필로 쓴 원고를 직접 전달받아 인쇄소에 넘기고 교정지가 나오면 다시 같은 과정을 밟아야만 논총이 발간될 수 있었습니다. 전문학자도 부족한 상황에서도 기고자분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10편의 원고가 모아져 198012월 인쇄소에 넘겨졌습니다.

당시에는 활판인쇄인 옵셋 인쇄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습니다. 생소한 용어이기는 하지만 식자(植字)로 인쇄하는 활판인쇄가 통상적이었지만, 중동학회 논총은 마스터 인쇄라는 새로운 기법을 택했습니다. 논총도 작품이라 생각하고 규격, 색상, 디자인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서재만 교수님의 제안에 따라 표지에는 국선에 입상한 터키과 출신 이완우 님의 붓글씨를 한국중동학회 논총의 제자로 선택했습니다.

이 과정에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아랍어 편집이었습니다. 마스터 인쇄 덕분에 배혜경(한국외대) 님의 원고편집도 잘 해결되었습니다. 컴퓨터가 상용화 된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하찮은 일 같지만, 당시에는 아랍어를 편집하여 인쇄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밤새워 모든 출판과정을 마치고 OK 사인을 한 뒤 한 잔의 술로 잠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른 새벽 인쇄소의 화재소식을 접했습니다. 설친 잠으로 뛰어간 인쇄소에서 발견한 것은 불에 타다 만 검게 그을리고 물에 젖은 원판! 허탈감에 하늘이 무너지는 상실감도 있었습니다.

좌절을 딛고 복원 못한 원고를 다시 받아 편집 작업을 하다 보니 논총발간이 해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금년에 작고하신 한재찬 사장님도 긴 인쇄사업 중 가장 힘들고 의미가 있었던 작품이 중동학회 창간호 논총이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불사조의 화신이라는 말로 중동학회의 앞날 또한 영원히 빛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한국중동학회 논총 창간호 전후면: 창간호는 미국중동학회의 The Middle East Journal의 규격을 기초로 전면은 한문, 후면은 영문으로 연갈색 고급 양장지로 제작되었다.

 

지역학 연구의 선두마차

1990년대 문민시대가 도래하자 지역학이 글로벌 시대의 학문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중동학회의 명성은 2011‘911사태로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이슬람(Islam)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혀지면서 한국연구재단에서 학회사상 처음으로 억대의 프로젝트도 수주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 간의 지나친 경쟁과 전공을 초월한 무리한 연구는 아직도 해결해야할 과제입니다. 석유와 낙타로 대변되면 아랍중동연구도 글로벌화 하여 우주시대로 향하는 시대입니다. 이에 따라 중동 지역학 연구도 보다 정치화(精緻化) 한 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집트 벽화에 나타난 개똥벌레 한 마리로 과거와 미래를 논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역학 연구의 선두주자인 중동학회가 갈길 또한 아직 멀다고 봅니다.

지역학에서 해당 언어(言語)는 기본입니다. 요즘은 중동학이 지역사정에 관계없이 영어가 보편적 수단이 되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해당지역 언어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현지어의 구사와 오랜 거주기간이 전문 학술분야를 초월할 수는 없습니다. 2000년대 들어 한국에서 이슬람은행(Islamic banking)이 금융 분야연구에서 각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자(利子)가 아닌 리바(riba)’가 코란의 언어로 개념이 정착되는데 아랍어가 핵심역할을 한 사례가 이를 증명합니다.

선두주자를 넘어 학계의 거목으로 우뚝 설 한국중동학회

 

한국중동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한국중동학회는 창립이후 2차례의 국제학술회를 거쳐 1989년 호텔 롯데에서 외국인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명실상부한 국제회의를 개최하며 해외학회와의 교류에도 선두주자역할 함.

 

주말이면 손수 싹틔워 키운 나무들이 거목(巨木)이 된 농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나무는 수종에 관계없이 나이가 들수록 중후하고 아름답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명성에 관계없이 나이가 들수록 대부분 수척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세월을 생각을 해 봅니다. 인간도 저 거목처럼 나이가 들수록 품위 있고 멋있게 늙어갈 수는 없을까! 우아하고 곱게 늙어 존경받는 사람의 삶은 무엇일까? 젊은 날의 명예는 허상이며 남긴 족적(足跡), 즉 자신이 하는 일에 즐거움으로 열심히 산 사람들이 장수하고 존경받는 다는 사실을 자연에서 깨닫곤 합니다.

학문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연구기간이 길다는 점은 자랑이 아닙니다. 훌륭한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위대한 선학(先學)을 만나서 자신만의 학문영역을 묵묵히 개척해야 하는 것처럼 학회의 명성도 마찬가지 여정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동언어로 된 원문(原文)을 뒤적이며 연구된 차별화된 논문이 보편화된다면 세월과 함께 그 명성도 빛날 것입니다.

한국중동학회가 가야할 길이 바로 그 길입니다. 비록 40년의 역사로 선두주자임을 자처하지만, 그 사실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갈 길 또한 멉니다. 40년 동안 회원학자 분들의 큰 노력과 헌신이 오늘을 이룬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더하여 한국중동학회가 오랜 명성을 계승발전하기 위해서는 후학들의 노력이 보다 더 요구됩니다.

요즘은 이해조차 안 되는 인쇄술까지 언급하며 지난 40년을 회고한 것은 선학들의 뜨거운 열정과 땀 흘린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다고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선학들의 밀알은 분명 향후 후학들의 노력과 함께 알찬 열매를 맺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세월이 흘러 100주년 후에도 한국중동학회가 학계에서 값진 명성과 함께 거목으로 우뚝 서기를 기원합니다(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