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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But Rich

도장골 이야기는 내 삶의 궤적이다. 도장골 농장은 젊음을 불살랐던 공간으로 삶의 애환이 혼합된 일종의 메종(house)이다. 매실과 솔잎을 항아리에 담고 숙성을 기다리며 꽃을 사진으로 남기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 이야기를 정리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 이유로 도장골 이야기라는 공간을 할애하여 짧은 생각으로 감히 에세이라고 적어본다.

 

백년 인생, 천년의 삶

꿈속의 사랑

사랑의 삼각형

부부송

시크릿 가든의 매실수확

솔향기 그윽한 진달래 언덕의 향연(饗宴)

 

 

새벽을 알리는 알람시계, 치킨(Chicken)

희망의 나라, HOPIA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다 

명당을 바꾼 앙떼떼(Entêté)의 교훈 

범바위 홍시가 익어갈 때

한여름 중복(中伏)에 핀 목련 

 

  

Dr. Hong's Poem

Flower Story

Dr. Hong's Botanic Garden

Photo Essay

Historical  Relics of Middle East

Story of Arab & the Middl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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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의 사랑

사랑이란 애착의 표현이고, 친밀감, 열정, 개입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다. 유치원생 어린 꼬마도 양팔을 머리위에 올려 하트를 그리며 엄마아빠와 헤어지고 만난다. 하루가 멀다 않고 만나는 젊은 연인들도 전철역에서 출구에서 하트를 그리며 사랑을 확인한다. 스마트폰이나 SNS에서도 수많은 그림말, 이모티콘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의 친지동료들에게 버튼 하나 꾹 누르면 사랑이 전달되는 세상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젊은 연인들이 사랑이라는 말이 쑥스러워 러브라는 외래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 정착된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요즘 사랑은 너무 흔하고 가볍다. 사랑도 희소성의 법칙이 깨지고 대중화한 것 같다.

칠십 가까운 삶을 살았지만 여전히 사랑이라는 말은 여전히 어색하다. 손자를 껴안을 때를 빼고는 거의 사용할 때가 없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사랑에는 인색하고 정()에 매여 산 것 같다.

사랑하면 떠오르는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라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1970년대 세계적 선풍을 끌었던 러브 스토리의 명대사다. 러브 스토리는 사랑은 절대 후회하지 않는 것이라는 명대사와 함께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당대의 최고 걸작 영화다.

하버드대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제니(알리 맥그로우)는 아이스하키 선수인 올리버(라이언 오닐)와 사랑에 빠지지만, 명문가 출신인 오리버와 이태리 이민자 출신인 제니는 신상문제로 결혼은 장벽이 부딪친다. 그럼에도 제니는 꿈꾸던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올리버와 결혼한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백혈병으로 제니는 일찍이 세상을 떠난다.

어느 날 부부싸움 끝에 집 앞에서 제니를 만난 올리버가 미안해 라고 말하자, 제니가 한말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가 명대사다.

러브 스토리는 영화 자체도 유명했지만, 프란시스 레이의 주제곡 눈싸움(Snow Frolic)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눈 오는 날은 어김없이 디제이가 다방에서 이곡을 틀어주며 연인들을 불러 모았다.

러브 스토리 첫 장면에 등장하는 올리버의 저택은 성() 그 자체였다. 넓은 정원 깊숙이 자리 잡은 저택에 살고 싶었던 것이 영화를 감상한 후부터의 꿈이었다. 늦기는 했지만 결혼하던 해부터 사랑을 노래하며 꽃과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 꿈이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아직도 꿈속의 사랑을 노래하며 소중한 사랑을 간직하며 산다.

정원에 들어서면 청아한 새소리, 아름다운 꽃들이 친구 되어 반갑게 맞이한다. 이른 봄 산수유가 꽃을 피우면 그 아래 반지꽃 민들레꽃이 발아래서 반기고 늦가을 들국화가 된서리 맞고 쓰러질 때까지 다양한 꽃들이 피고 지며 맞이하고 나를 반긴다. 농장이 지방에 있는 터라 자주 찾지 못하기에 서로 만나지도 못한 채 피고 시드는 꽃들도 많다. 나의 사랑은 외로움을 달래며 기다리는 그리움의 사랑이다. 하지만 내년을 기약하기에 약속한 사랑이고 기다림이 있기에 언제나 희망의 사랑이다.

이른 봄 청순하게 핀 목련가지에 산비둘기 날아와 짝사랑 찾는 산비둘기의 외침이 좀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반갑다. 부끄러워 노란 얼굴 내밀며 살며시 피어난 수선화를 만나면 수줍어 손으로 입가리던 옛 여인이 생각나고, 상사화 꽃망울을 터뜨리면 못 이룬 사랑이 생각나고, 탐스런 함박꽃이 짙은 자주 빛으로 피어나면 옛 사랑 공주님도 떠오른다.

아내에 보이려고 맑은 이슬로 얼굴 닦고 기다리는 흰 테 두른 빨간 튜우립이 계면스레 멀지 감치서 미소로 반기지만, 함께 오지 못한 아내의 마음을 미안 섞어 전한다. 항상 피고 지는 해당화에게는 다음 주에는 함께 올 테니 계속 피어 있으라고 지킬 수 없는 약속도 한다. 스트로브 잣나무가지 찾아와 반기는 두견새에게도 더 이상 울지만 말라고 일러준다. 그래도 다음 주에는 아내와 함께 찾아 고라니 뛰노는 농장에서 사랑을 노래하겠노라고 주말이면 어김없이 농장을 찾는다.

사랑이란 생각하다에서 왔다는 옛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내 조상의 사랑은 생각에서 시작했고 생각으로 꽃을 피웠다. 이제는 자신 있게 사랑을 외친다. 꿈속의 사랑을 노래하며 정원으로 향하니 마음도 밝아지고 발걸음도 다시 가볍다. 모란이 졌으니 함박꽃이 반기리라는 가슴 뛰는 마음으로 정원을 다시 찾는다. 꿈속의 사랑은 나만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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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삼각형

푸른 솔에 두견새의 못 이룬 사랑으로 핀 진달래가 함께하니 사랑의 하모니 파노라마다.

사랑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유행가 가사도 그렇고 소설이나 영화도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플라톤은 육체적 사랑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서서히 발전해 간다한다. 젊은 연인들에게는 어울리는 말인지 모르지만 사랑은 본래 조건이 없어야 한다. 육체적 사랑 에로스가 짧은 사랑이라면 조건 없는 사랑 아가페는 긴 사랑이다. 종교적 사랑이 대표적이긴 하지만, 도덕적 정신적 사랑 스테르젠스론이 영혼의 사랑인 것 같다.

사랑에는 본래 조건이 없어야 한다. 자식부모사랑, 연인사랑, 나라사랑, 자연사랑 모두 강요된 사랑이 아닌 자발적 사랑이며 영혼의 사랑이다. 조건이 있으면 진정한 사랑이 아닌 거짓사랑으로 욕망충족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밥과 같아서 계속 충족되지 못하면 결핍장애가 나타난다고 한다. 사랑은 애착에서 출발하여 그리움으로 끝난다. 사랑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덕군자나 폭군에게도 사랑은 있고 폭력배나 간신배 심지어 도둑에게도 사랑은 있다. 사랑의 촉수는 권력이나 물욕 지향적이기에 청정수와 순수한 사랑의 대상을 찾는 일은 매우 어렵다. 사랑의 대상은 사람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의 삼라만상 모두가 사랑의 대상이다. 부모와 자식, 가난한 이웃과 돈 많은 부자, 강아지와 고양이, 아름다운 꽃과 정원, 암벽과 높은 산과 드넓은 평야, 심지어 폭력과 전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 이세상이다. 사랑이란 감정이 개입되면 밤낮으로 정열의 꽃으로 피어난다. 그렇기에 사랑도 지나치면 비극과 마주친다.

스테른 베르그는 친밀감, 열정, 개입의 세 가지 구성요소가 모두 갖추어져 있을 때 완전한 사랑이며, 이를 사랑의 삼각형 이론이라 한다. 이상적인 사랑과 현실은 크게 다르다. 이상과 현실사이에 거리가 좁을수록 사랑하는 마음의 갈등도 적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 짝지어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랑이란 애착의 표현이다. 애착 없는 사랑은 꽃가루와 꿀이 없는 벌과 나비의 일생처럼 공허할 것이다. 꿀이 없으면 벌꿀도 짧은 생에 집착하며 열심히 살지 않을 것이다. 꿀이란 대상이고 벌은 애착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사랑도 이와 같다. 누군가 무언가에 집착이나 애착이 없으면 사랑은 결코 솟아나지 않는다. 사랑이란 매우 이기적인 자아도취 행위이기에 .

사랑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고 아쉬워하는 것도 욕심이다. 그 마음 자체가 집착이고 애착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나 또한 이기적 사랑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울고 웃고 말하고 싶을 땐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 만날 정원이 있으니 부러울 것 없다는 자만도 나만의 집착과 욕심이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을 깨닫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강요된 사랑은 속박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탓하거나 탐욕을 추구하며 스스로 사랑의 족쇄를 택한다. 탐욕이 앞선 사랑은 대부분 파멸로 끝난다. 수많은 드라마나 소설 영화도 이런 대상을 주제를 다루며 사랑의 결말이 작품평가의 호불호로 인기를 좌우한다.

1960년대 세계적인 명작 사운드 오브 뮤직1990년대 타이타닉은 진정한 사랑을 잘 보여준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줄리 앤드루스는 자유분방한 마리아 역을 하며 원장 수녀님이 늘 그러셨죠.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내 삶을 찾으라고요.” 그래서 나는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열연한 타이타닉에서도 여자의 마음은 바다와 같아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라며, “인생은 축복이니 낭비하면 안 됩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까요라며 짧지만 깊은 사랑을 나눴다. 사랑의 백미는 데미 무어가 주연한 사랑과 영혼에 나타난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영혼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강요된 사랑에는 영혼이 없다는 것이다.

영혼이 없는 사랑은 단지 거울 속에 비치는 허상의 행복일 뿐이다. 순수한 사랑이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운 선택에서 이루어진다.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사랑은 돈 명예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다. 부자와 가난, 신분이나 이념, 인종의 벽을 초월한 사랑이 순수한 사랑이고 그 사랑이 지켜질 때 영혼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자연에의 사랑은 일방적이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물아일여의 혼연일체가 되어 영혼의 사랑이 될 거라는 희망으로 꽃과 나무를 가꿨다. 새순 돋아나는 봄풀들을 사랑하고 황혼에 낙엽 지는 나무들을 사랑하고 폭설 속에 늘 푸른 상록수를 키우는 마음이 영혼의 사랑으로 승화되기를 꿈꾸며 해를 거듭하며 피고 지는 사계절 꽃들과 사랑의 밀애를 나눈다.

꽃과 자연에 대한 사랑은 무한 자유이지만 속박도 없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공들여 가꾸고 사랑한 꽃과 나무지만 영원한 나만의 사랑은 아니다. 사랑이란 그 누구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자신이 평생 땀 흘려 모은 재산과 사랑한 아내도 소유물이 아니며 사랑하며 애써 키운 자식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소유할 대상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짧은 이용하고 사랑하며 순간순간 잠시 만나고 헤어지며 그 순간을 영원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소유물이 아니다. 순수한 사랑은 맑은 영혼의 자유 속에서 선택한 것이 는 하지만 그 사랑도 영원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초월해야 하는 높은 담장이 있다. 죽음도 초월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기에 영원한 사랑은 영혼까지 함께 한 사랑이어야 한다. 욕심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기에 영혼의 사랑은 대부분 꿈속이나 말뿐인 사랑으로 끝난다.

뾰족한 가시 때문에 장미를 싫어하지만 꽃 자체는 좋아하는 아내의 이중성격을 잘 알면서도 해마다 장미를 심는다. 아내도 꽃과 자연을 좋아하기에 영혼의 사랑 파트너는 만난 셈이다. 물론 아내는 자연 사랑의 개입에는 적극적이지 못하지만 친밀감, 열정은 나와 공감한다. 아내는 유난히 푸른 소나무를 좋아한다. 진달래를 좋아하는 나와 함께 어울렸으니 사랑의 삼각형은 미완성이긴 하지만 기본은 마련한 것 같다. 어차피 세상에 완성이란 없기에 사랑의 삼각형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는 있다. 농장을 가꾸며 그늘이 돼준 두 그루 소나무가 머리를 감싸 안고 그 아래 진달래가 해마다 꽃 피우며 사랑을 노래하여 부부송이 되었다. 그 부부송에 해마다 매실 따며 두견새 부르며 오뉴월 뜨거운 햇빛에 사랑을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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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송

서로 다른 생각으로 만나 긴 세월 함께 하니 한 몸으로 용트림하여 부부송이라 했다.

부부란 결혼한 남녀로 남편과 아내를 아우르는 말이다. 부부를 낮추어 말할 때는 가시버시라고 한다. “가시는 아내, 버시는 남편의 옛 사투리다. 가시는 집에 계신다는 의미의 계집’, 마주 눕는다는 뜻으로 마누라를 말하며 버시는 남편을 말하지만 에서 온 말 같다. 현대적 의미로 각시와 벗이 부부라는 표현으로 적합할 듯하다. 시집가지 않은 처녀를 가시내라고 부르는 걸 보면 혼인한 여자가 각시임에 틀림없다.

부부의 명칭도 세월 따라 많이 변했다. 요즘은 남편을 오빠또는 누구 아빠라 부르며, 아내는 와이프또는 집사람으로 많이 부른다. 반면 나이든 사람들은 아내를 집사람, 안주인, 안사람, 내자 등으로, 남편은 바깥양반, 주인양반, 주인, 그이 등으로 부른다. 집밖은 남편의 몫, 집안은 아내의 몫이었던 역할분담의 시대가 변했다는 반영이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받는 세상이니 세월을 탓할 수는 없지만 부부관계가 지나치게 현실적인 경제공동체로 변해 쉽게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현실이다. 하지만 세수할 때 쉽게 빼듯 은가락지 버리고 금가락지로 갈아 치우는 부부가 선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혼인에는 개인적인 사생활이외에도 사회적 책임도 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듯이 부부관계만큼 어려운 관계도 드물다. 혈연관계가 아니기에 부부사이는 촌이 없는 무촌(無寸)’ 관계다. 부부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후에 만나 한 핏줄 자식을 만드는 관계이니 무척 어려운 관계다.

부부관계는 동고동락하며 동심일체를 이루는 과정이 중요하다. 오랜 세월에 거쳐 동심일체가 되었을 때 남편과 아내는 비로소 뗄 수 없는 한 쌍의 부부로 거듭난다. 하루 24시간도 모자라 바삐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동락(同樂)은 원하지만 동고(同苦)는 남의 일이며 일체(一體)나 동심(同心)은 기성세대의 폐습 정도로 생각한다. 강아지와 고양이 키우며 만족하는 싱글 족은 구속 없는 행복을 자랑하지만 사회적 책임은 무시한 이기적 삶에 지나지 않는다.

 

매실농장의 부부송은 봄에는 진달래 매화향, 여름에는 매실향, 가을에 낙엽지면 몸을 드러내며 은은한 솔향기를 답례로 보답한다.

 

인간은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세상은 음양의 이치로 존재하며 자연계 모든 만물은 암수의 구별이 있다. 동물은 스스로 짝을 찾고 스스로 짝을 찾을 수 없는 식물은 동물이 도와주며 세상이 유지된다. 가족 떠난 송아지가 짝 찾기를 거부하고 벌판으로 뛰쳐나와 홀로 풀 뜯으며 만족한다고 치자! 그러나 그 행복은 잠시일 것이다. 식량을 빼앗긴 소떼들은 부랑소를 즉시 쫒아내고 풍족한 식량 터를 확보할 것이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족이 필요하다. 가족의 첫째 구성요소는 부부다. 부부는 가족의 일원으로 생존투쟁의 지휘자이고 가정이 번영할 때 행복은 스스로 나오는 것이다. 성공은 했지만 일에 묻혀 가족 없이 살아온 재산가들이 종종 모든 유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도 상실의 아픔을 베풀며 그 가운데서 얻음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일전에 100세 가까운 김동길 교수의 유튜브를 본적이 있다. 1970년대 젊은이의 우상이었던 김동길 교수가 한때 정치권에 몸담았기에 실망하여 지금까지 외면하던 차에 볼거리 읽을거리가 없어 그의 방송을 본 것이다. 김동길 교수는 방송에서 1940년대 말 남하하여 못살고 어렵던 시기에 자신이 공부하고 유학하여 대학 강단에 설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분들, 심지어 환경미화원에도 고맙다며 남은 인생을 조국을 위해 봉사하겠노라고 했다. 세상은 얻음이 있으면 잃음이 있는 음양의 조화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보여 준 진실의 언어였다.

자신만의 생활에 만족하는 싱글생활은 일종의 사회적 책임을 거부하는 삶이다. 세상 떠나 산속에서 약초 캐며 은둔하는 자연인들이 자신의 삶을 만끽한다고 자랑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옳지 않은 이기적인 삶이다. 도심의 인간과 헤어질 때 대부분 부부의 정 때문에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이 그것이다. 부부란 단순히 애정으로 맺어진 공동체가 아니다. 엄격히 말하면, 부부공동체는 생존경쟁을 위한 가족공동체이다. 먼 길 고향을 찾아와 자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는 연어의 일생은 인간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40년 가까운 나의 부부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여 맺은 부부관계였으니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오랜 갈등과정에는 인내와 희생이 필요하다. 매스컴이나 잡지에서 종종 유명인의 행복한 부부생활을 소개한다. 그 행복한 부부생활도 과정을 자세히 들어보면 오랜 아픔과 인내가 함께한 후에 얻은 열매다. 부부만의 행복을 얻기 위한 동락일체의 삶은 천사도 시샘할 일이다. 동고동심으로 이어진 부부관계가 시간이 흘러 성숙할수록 남들도 그들을 칭송한다.

2000년 초 아름다운 선산을 가꾸기 위해 벌목을 한 적이 있다. 매실이 유행하기 시작할 무렵이다. 몇 그루의 매실을 농장에 키우긴 했지만 큰 매력이나 애착은 없었다. 어느 날 집사람이 TV에서 매실농장을 보고 매력에 푹 빠졌다. 그해 여름 우리가족은 광양의 홍쌍리 여사를 찾았다. 고목의 매실나무에 걸터앉아 홍 여사로부터 매실사랑의 역사를 흥미롭게 들었다. 마당에 늘어선 수많은 항아리들도 매실 향을 뽐내며 유혹했다. 그 이듬해부터 나는 벌목한 산에 매실나무를 심고 가꾸기 시작했다.

산에서 매실나무를 키우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여름 방학을 이용해 우리 부부는 잡풀을 뒤집어 쓴 매실나무를 살리기 위해 배낭에 김밥과 음료수를 채워 종종 산을 찾았다. 잡목을 제거한 상태였기에 그늘이 거의 없었다. 그늘이란 두 그루 남겨 놓은 소나무가 유일했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음료수를 마시며 그늘을 피하던 소나무도 우리 부부와 함께 정을 쌓으며 20년 세월 함께 정을 나눴다. 그런 연유로 소나무 두 그루는 우리에게 부부송(夫婦松)이 되었다.

몇 해 전 작업하다가 포클레인이 뿌리를 건드려 소나무가 쓰러질 위기에 처했다. 우리의 깊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아저씨들은 부부송을 살려야 한다며 다른 작업을 포기하고 포대에 흙을 담아 땀을 뻘뻘 흘리며 드러난 뿌리를 덮고 보강하여 부부송을 살려주었다. 그 고마움 덕에 부부송은 여전히 자태를 뽐내며 웅장한 거목으로 함께한 부부를 기다린다. 부부송 바라보며 노래하니 지난 날 갈등으로 아파하던 세월도 묻히고 두견새도 찾아와 화음도 맞춘다.

 

 

 

 황전의 부부송

 

 

진달래 언덕의 부부송

 

매화향 벌 나비 봄소식에 부부송도 겨울잠 깨어난다.

오뉴월 무더위 엄동설한 임 그린 긴 눈물도 잦아들고

진달래 철쭉이 피어나니 강남제비 소식 멀지않더라.

 

땀 흘리던 어제가  오늘보다 행복했다.

산딸기 입에 물고 배낭메던 옛 상처 전하니 찔레가 꽃미소 짓는다.

 

서로 다른 생각으로 세월 오래 뒤엉키며 희애를 벗 삼았다.

몸마음 하나 늘 푸른 노송이 용트림으로 한몸 부부 하늘에 알린다.

 

황전 그득한 솔내음에 두루미도 짝 맞아 고향 찾는다.

강 건너 계명산 닭이 알 품고 남한강 잉어도 높이 하늘 신이 난다.

 

훗날을 기약하니 어머님 인진쑥에 발길이 절로 머문다.

뒤돌아 진달래 다시 피는 날 손모아 기약하니

진달래 언덕 부부송이 향내 짙은 솔향기로 배웅한다.

無有而混 虛粗而妙

混妙一環 軆用無歧

있고 없음이 혼재되어 조화를 이루니 미묘하다.

혼재와 미묘함은 하나의 고리니 체용 또한 갈림이 없느니라.

 

해태상.JPG

부부송 지킴이 해태상

 

우주는 변화무쌍하고 생멸은 진리니 이곳이 잠시 쉬어가는 낙원이로다.

The universe is always changing. Life and death is the truth. Hence here is the place of paradise to rest for a while.

 

해마다 만나고 정을 주는 부부송이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정감은 더 깊어진다. 부모 찾는 한식, 매실 따는 오뉴월, 가을걷이하는 한가위에 세 번은 만나지만 마음속 부부송은 한시도 우리 부부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가시버시가 아니다. 세상이 변해도 늘 푸른 부부송과 함께한 우리 마음은 부부송 함께 오래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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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다.

 

사진은 영어로 그림을 의미하는 picture 혹은 photo, photograph)빛으로 쓴 글자나 그림을 의미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카메라를 사용하여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표현해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진(photo)으로 알려진 포토그라프(光畵; photograph)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사진이라는 단어는 1839John Herschel 경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φς(phos)그리기, 쓰기를 의미하는 γραφή(graphê)의 합성어로 빛으로 그리기다는 뜻이다.

첫 번째 영구사진인 접촉노출 된 판화 사본은 1822Nicéphore Niépce가 개발 한 역청 기반의 나선 법프로세스를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하지만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여 만든 실제 장면의 첫 번째 사진은 몇 년 후 1826년 조세프 니세포르 니에프스(Joseph Nicéphore Niépce)였다. 니에프스는 유태의 비투먼(bituman, 역청)이라는 천연 아스팔트가 빛의 노출에 따라 굳는 성질을 이용해서 8시간의 오랜 노출 끝에 1826<르 그라의 집 창에서 본 조망>이라는 인류 최초의 사진을 탄생시킨다. 그는 이것을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라고 하였는데 헬리오그래피는 태양광선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노출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광원이 이동하게 되었고 상업화되지는 못했다.

1837년 최초의 카메라 발명과 사진예술

 

사진술 연구에 큰 관심이 있던 프랑스인 루이 쟈크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é Daguerre)는 니에프스의 성과를 더욱 발전시켜 은도금 동판과 요오드를 이용해 1837년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 , 다게르의 은판사진술을 완성했다. 다게레오타입은 사실상 인류 최초의 카메라라고 할 수 있으며 비교적 짧은 노출시간과 선명한 결과물을 기반으로 상업화에 성공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840년 다게르는 새로운 카메라를 개발하였는데, 20배 밝은 개량 렌즈와 감광판 도금을 통해 선명한 명암을 표현했으며, 노출시간이 1분 정도로 축소되었다. 1861년 토마스 서튼이 찍은 사진이 세계 최초의 컬러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1867년 영국에서 개발된 건판과 1880년대 코닥의 등장은 사진의 대중화 그리고 사진술을 가족 단위로 만들었다. 100장의 롤 필름이 장전된 휴대하기 편리한 카메라를 코닥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여 셔터만 누르면 현상과 인화를 해 주는 편리한 방법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1886년 사진의 예술적 접근에 대하여 최초로 예술로서의 사진을 제기한 것은 영국의 에머슨이었다.

젊은 시절 사진찍는 취미를 가진 것은 내 인생에 남다른 아름다움과 풍만을 가져다주었고 중동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컬러사진은 1960년대 이후에 대중화

 

본래 모든 사진은 단색이거나 손으로 채색했다. 컬러사진 현상방법은 1861년에야 사용가능했지만 1960년대까지는 대부분의 사진이 흑백으로 촬영되었다. 본래 모든 사진은 단색이거나 손으로 채색했다. 컬러사진 현상방법은 1861년에야 사용가능했지만 1960년대까지는 대부분의 사진이 흑백으로 촬영되었다. 1960년대 중학생 시절의 모험이 떠오른다. 흑백사진이 유행하던 시절! 하교길에 교문앞에서 컬러사진을 만드는 마법(魔法)이라며 염료를 팔았다. 호기심에 그 염료를 구입하여 앨범에서 사진을 꺼나 가슴조이며 색을 칠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생각하던 예술작품은커녕 사진을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원본을 버릴까봐 그만두었다. 지금 그 사진을 보니 그저 웃음만 나온다. 컬러사진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대학시절이 1970년대가 되어서야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 사진도 지금 다시보면 아주 조악하다.

 

추억의 기록으로서의 사진과 카메라

 

문자나 그림으로 남겨진 것이 기록이다. 글자나 그림을 동시에 기록하게 해준 것이 사진이며 사진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이 카메라다. 지금처럼 디지털카메라가 널리 보급되지 못한 시대에는 수동카메라가 주종이었다.

수동이 주종인 카메라시대에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노출과 타임을 일일이 수동으로 조절해야했고 마음에 드는 구도를 정하여 한 장의 사진으로 찍어내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그리고 완성된 사진을 보기위해서는 현상소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사진은 찍는 묘미도 있다. 자연의 아름다운 소리나 사람들의 모습을 한 장의 사진에 담기위해서는 세련된 기술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노출이다. 역광의 경우에는 공들여 찍은 사진이 헛수고가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때문에 역광을 잘 이용한 사진이 예술작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아무튼 모든 생각을 한 곳에 모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때 귓가에 들리는 철거어덕소리는 찍는이만의 유일한 자아도치다. 카메라에 취미를 갖지 않은 사람은 느끼지못하는 사진사만의 감흥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대세인 요즘은 그 짜릿한 감흥도 느낄 수 없다.

기록으로서의 사진의 중요성은 사진에 나타난 글자나 인물 또는 주변의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다는 점에 있다. 흑백사진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사진 주변에 000000기념 등의 글자를 새겨넣어 기록으로서 사진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점은 요즘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사진에는 정확하게 촬영일자가 기록된다.

가족여행을 할 때 이런 유머를 남겼다. 잘 먹고 즐겁게 노는 것이 여행이고 그것을 확실히 남기는 것이 사진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유머는 재미있는 사실인 것 같다. 요즘도 짧은 여행이라도 정리하여 ppt아니면 pdf파일로 사진으로 정리한다. 그 기록이 여행의 즐거움을 다시 기억시켜주기때문이다.

 

디지털시대의 카메라는 애물단지이고 인물촬영은 금기사항

 

파노라마 형식 이미지는 표준필름에서 Hasselblad Xpan과 같은 카메라로 촬영할 수 있다. 1990년대부터 APS (Advanced Photo System) 필름에서 파노라마 사진을 사용할 수 있었다. APS는 다양한 형식과 컴퓨터 옵션을 사용할 수 있는 필름을 제공하기 위해 여러 주요 영화 제조업체에서 개발했지만 APS 파노라마는 파노라마지원 카메라에서 마스크를 사용하여 만들어졌지만 실제 파노라마 카메라보다 바람직하지는 못했다.

마이크로컴퓨터와 디지털 사진의 출현으로 디지털 인쇄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쇄물은 JPEG, TIFF RAW와 같이 저장된 그래픽형식으로 만들어진다. (Web)1992Tim Berners-Lee에 의해 첫 번째 사진이 웹에 게시된 이후 사진을 저장하고 공유하는 데 인기 있는 매체가 되었다.

카메라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인물사진을 찍는것은 재미가 있었다. 최소한 2000년 이전만하더라도 인물사진을 찍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물론 피사체인 사람들도 사진찍히는 사실에 대해서도 크게 개의하지않았다. 오히려 피사체가 된다는 즐거움으로 다양한 포즈를 취해주는 경우도 많았다. 인물촬영이 금지된 아랍에서 희잡을 쓴 여인들도 허락만 받으면 어렵지않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한 2000년까지도 가능했다. 사진을 찍고 즉석에서 폴더로 사진을 보여주면 오히려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들기도 했다. 사진을 찍는 이나 찍히는 이 모두 함께 행복하던 시대가 멀지 않은 가까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흔해지고 사진이 범람하는 21세기에 오히려 사진은 더 귀해졌다. 인물이나 심지어 주변을 경관을 찍으려 해도 대부분 허락을 받아야한다. 자칫하면 초상권이니 정보유출이라는 이유로 법적인 제재까지도 받는다.

풍요속에 빈곤이라고나 할까 요즘은 사진이 더 귀해졌다. 대부분 핸드폰을 갖고있기에 누구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카메라 성능도 좋아 큰 기술이 없어도 훌륭한 사진들을 잘 찍어 웹에 올린다. 하지만 출력하여 사진을 보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티지털시대의 사진은 대부분 JPGTIFF 파일로 저장하여 쉽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저장방식도 크게 변했다. 수동카메라부터 출발한 내 취미사진은 보관에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귀찮아하는 자녀들을 설득하여 각자의 앨범을 정리하여 성장과정을 기록해주었다. 과거에는 이 사실을 남에게 자랑하고 다녔지만, 보관을 이유로 자녀들이 관심조차두지 않기에 이제는 애물단지가 되고 있다. 격세지감을 느끼지만 세월의 변화는 못 막는게 인간이다.

 

중동 여행과 연구에 함께 한 내 친구

 

 카메라는 내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다. 해외여행의 경우에는 카메라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한다. 여행짐이 많아지고 무게도 더 나가기에 출국심사부터 애로가 뒤따른다. 안전과 보안검색 때문에 카메라와 필름은 따로 보관해야하고 해당국 입국심사에도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일반 관광객들보다 많은 필름때문에 중동여행에서는 더 신경을 써야한다.

여행에서도 일반인들보다 많은 발품을 팔아야한다. 단체로 여행할 경우에는 동료들에게도 항상 누를 끼치게된다. 내 관심과 흥미에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앵글을 맞추다보면 항상 그룹에서 뒤쳐진다. 항상 반발짝 늦는다해서 붙은 별명이 반발짝이다. 나는 이러한 불편 때문에 단체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혼자 여행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무거운 카메라가방을 짊어지고 덥고 추운 유적지를 찾아 다는 것 또한 유쾌한 여행만이 아니다. 수동카메라의 경우 20장 정도의 촬영이면 다시 피름을 교체해야 한다. 사진을 남발하다보면 정작 중요한 1컷의 필름이 모자라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아쉬움 때문에 다시 방문하는 경우도 있지만 재방문이 어려운 경우에는 머릿속에 안타까움만 기억한다.

사진찍기에 열중하다보면 정작 유명한 유적이나 유물에 대한 의미를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다. 물론 귀국하여 사진을 정리하기는 하지만 바쁘게 생활하다보면 기록으로 남기지는 못했다. 남보다 한발짝 미리떠나 한발짝 늦게 나와야만 유명한 유적지나 박물관에서 소중한 사진을 담을 수 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하고 박스에 처박아둔 귀중한 사진이 진가(眞價)를 발휘할 날을 기대해본다.

최근에는 디지털 카메라덕분에 여행이 쉬워졌지만, 그렇다고 아름답고 중요한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박물관들은 실내촬영을 금지하고 일부 박물관은 아예 카메라 자체를 소지할 수 없다. 대표적인 곳이 이집트 카이로의 국립박물관이다. 1990년대 카이로 박물관에서 우리의 팁에 해당하는 박시시를 팁으로 주고 금지된 미이라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그때 생각을 하고 온갖 수단방법을 써보았지만 카메라소지는 절대 불가였다.

이러한 경험을 수차례 겪고 나니 무거운 카메라 어깨에 메고 땀 뻘뻘 흘리며 담아둔 사진이 새삼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땀의 기록이 진가를 발휘할 날을 기대하며 먼지 털며 오래된 사진을 하나 하나 다시 정리한다(2020.09)

 

  

 

종합경제사회연구원

중동경제연구소

한국예멘교류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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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나라 호피아, HOPIA

 

희망의 나라 호피아, HOPIA

 

 

21세기를 앞둔 세계 경제는 WTO의 출범과 함께 완전경쟁의 시대에 돌입하였다. 더 나아가 무차별 완전경쟁은 비단 경제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분야에서 전개되고 있다. 학문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가능케 해준 수단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정보화'이고, PC를 통한 인터넷의 보급은 그 속도에 채찍을 가하고 있다. 나는 감히 컴퓨터를 '()의 언어(言語)'라 부르고 싶다. 2진법, 다시 말하면 01이라는 언어수단을 통해 전 세계 모든 언어들이 모여들고, 모든 영상과 사진, 그림들이 모여들고 있다.

21세기를 앞둔 세계경제는 WTO의 출범과 함께 완전경쟁의 시대에 돌입하였다. 더 나아가 무차별 완전경쟁은 비단 경제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분야에서 전개되고 있다. 학문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가능케 해준 수단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정보화'이고, PC를 통한 인터넷의 보급은그 속도에 채찍을 가하고 있다. 나는 감히 컴퓨터를 '()의 언어(言語)'라 부르고 싶다. 2진법,다시 말하면 01이라는 언어수단을 통해 전 세계 모든 언어들이 모여들고, 모든 영상과 사진, 그림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 세계에는 번역과 통역 그리고 민족, 문화 및 종교가 무차별적으로 참여하는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파급력은 핵무기보다 무섭다. 비록 시험단계이기는 하지만 '우주(宇宙)'와의 대화(對話)도 시도하고 있다. 21세기를 불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서 우리 인간들이 새로운 바벨탑을 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원이 인간문제(人間問題)를 중심으로 지역학 연구를 시작한지 만 5년이 되는 해이다. 그 동안 괄목할만한 연구 업적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정보화를 서두른 점은 앞으로 연구에 많은 도움이되리라 기대된다. 1년 이상의 연구 끝에 순수한 연구원 내부의 기술훈련을 통해 인터넷 홈페이지가 개설되었다는 점은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국제교류에도 커다란 기여를 할 것이다. 그래서 내친김에 도메인도 새롭게 마련하였고, 그래서 얻어진 이름이 Hope+Utopia, HOPIA, '희망의 나라'이다. 이제 본원은 인터넷으로 새로운 무장을 하고 희망의 나라로 달려갈 것이다.

 

 

종합경제사회연구원RIES)은 한국과 국제경제교류에 연구의 중점을 둔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세계를 각 권역별로 세분화하여 6개 지역경제권으로 세분화하여 이들 지역연구에 필요한 역사, 철학,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어, 예술, 종교 등에 대한 전반적이고 복합적인 연구를 수행한다. 또한 각 연구실장의 책임하에 팀워크를 형성하여 관련 프로젝트를 신속, 정확하게 연구-분석함으로써 다양하고 전문적인 연구 활동을 수행한다.

 

 

 

특히 정보화시대에 발맞추어 회원들의 '개인연구실' (Home Library System)을 컴퓨터 네트워크로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연구의 신속성을 기하고 경비절감을 통한 효과적인 연구활동을 행한다. 아울러 종합경제사회연구원은 부설 연구소인 '중동경제연구소'(KIME)'한국예멘교류센타'(KYC)를 중심으로 본원이 추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지역학 연구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연구자들의 참여와 협력은 사이버 연구소 구축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협조와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19987, 종합경제사회연구원 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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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쟁이 앙떼떼(Entêté)

 

명당을 바꾼 앙떼떼(Entêté)의 교훈

 

명당은 주인이 따로 있다. 노력하면 잘 된 다는 마음속의 좋은 자리가 명당이다.

 

명당(明堂)은 문자 그대로 밝은 집이다. 사람들은 살집을 찾거나 장사가 잘되는 상가를 고를 때 우선 주변 환경을 살피며 좋은 자리를 찾는다. 그 기본이 밝은 터다.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굳이 앞이 막히거나 음울한 터는 좋아하지 않는다. 남향의 동대문 집에 살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고 한다. 남향집은 밝고 햇빛도 잘 든다. 좋은 터에 한번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남향에 동대문 집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부잣집 주인에게 관심이 많다.

가게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오랫동안 장사가 잘되거나 상호가 자주 바뀌는 가게는 모두 이유가 있다. 몫 좋은 건물이지만 주인이 자주 바뀌는 가게가 있는가하면 골목길에 작은 가게이지만 수십 년째 장사를 잘하는 사람도 있다. 골목길에 작고 허름한 터에서 돈이 벌릴까 염려하며 지켜보았으나 주인이 고급아파트나 고층빌딩이외에도 훌륭한 자식을 갖고 있는 경우도 보았다.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복()이 찾아온 것이다.

명당은 분명히 있지만 주인의 행위가 더 중요하다. 명당의 복만 믿고 놀고먹으면 그 터도 주인을 내친다. 명당이란 길인주처(吉人住處), 즉 성품이 바르고 복스러운 사람이 사는 곳이 다. 주인에게 화()를 던지고 달아난 명당을 실제로 보았다.

지방의 소도시 중심가에 장사 잘된다는 소문이 자자한 3층 상가건물이 있다. 이 건물에서 장사한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가 됐고 일부 세입자는 수년 내에 빌딩을 산 사람도 있다. 가게가 명당으로 소문났기에 빈 적이 없고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명처상가(明處商家)에 한인(閑人)이 머무는 바람에 폐허가 되었다. 명당을 활용할 줄 모르는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다.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돕는다.

이 건물에서 한때 부모의 도움으로 자식이 앙떼떼 의류점을 경영한 적이 있다. 가족이 아무리 노력해도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있는 가정은 번성하기 힘들다. 인생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 좋건 나쁘건 그 방향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명당의 기본원칙인 "산을 배경으로 앞에 흐르는 물이 있다는 '배산임수'도 알고 보면 자연의 순리를 강조한 것이다. 명당자리만 믿고 누워서 자신에게만 돈이 굴러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자에겐 물도 빠져나가 폐허가 된다. 자연은 결코 인간의 욕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요즘 천적이 사라졌다고 멧돼지가 군림하며 농사는 물론 도시까지 내려와 피해를 주는 사례가 많다. 결코 멧돼지 세상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환경파괴에 대한 보복으로 언젠가는 멧돼지도 사라질 것이다.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모두 내쫓고 혼자만이 부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반드시 그 대가를 받는다.

앙떼떼(Entêté)는 프랑스어로 고집쟁이다. 고집쟁이의 귀()는 소의 귀와 같아서 남의 말은 듣지 않는 특성이 있다. 고집쟁이에게는 아무리 좋은 말도 우이독경(牛耳讀經)이다. 부모가 자식의 고집을 꺾지 못해 명당이 폐허가 된 좋은 본보기다. 부자가 3대를 못가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자신만이 영원한 부를 누리겠다는 욕심에 기인한다. 간단히 말하면 자신은 부자라는 과대망상에 빠져서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명당도 올바른 주인을 만나면 다시 빛을 발한다.

부자가 3대 넘기기 힘들다고 한다. 좋은 스승을 만나도 학생이 공부할 의사가 없으면 가르칠 수 없듯이 아무리 명당이라 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우리가 매일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빵집 주인의 자비심(慈悲心)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고려 때문이라 했다. 돈을 벌려면 우선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 그 자비심이 서비스정신이다.

경주 최부잣집이 300년을 넘게 만석군 부자로 지켜올 수 있었던 것도 노스님으로부터 받은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금언을 지켰기 때문이라한다.

최부자집 가문이 지켜온 가훈은  첫째, 절대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세파에 휘말려 집안에 화를 당할 수 있다. 둘째, 재산은 1년에 1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일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과 사회에 환원한다. 셋째,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한 후 보내라.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값에 내 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하게 해서는 안된다. 다섯째, 가문에 며느리들이 시집 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여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 이웃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이다.

최부잣집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1884-1970)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신학문의 열망으로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며 부를 이어온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는 천리를 실천했기에 부의 세습이 이뤄진 본보기다. 결국 명당도 주인이 따로 있고 그 주인은 명당을 차지할 만한 그릇이되어야 한다는 좋은 실례다.

 

세상을 부정하며 자기 고집만을 내세우는 사람을 비유하는 청개구리는 실제로 비가오거나 비온 후에 개굴개굴하며 운다.

 

세상을 모른 채 자신만의 아집으로 자신을 망치는 사람들이 많다. 파멸은 욕심(慾心)에서 비롯된다. 청개구리는 비가 오면 부모생각에 슬피 운다지만, 자신만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청개구리만도 못하다. 세상 탓이나 하며 과대망상에 집착하며 부귀영화만 추구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다 부귀영화는 절대 스스로 찾아오지 않는다. 명당에 주인이 있듯이 부귀영화를 찾아가려면 우선 그릇(덕)부터 만들어야 한다.

동물의 제왕인 사자도 토끼나 다른 짐승이 아침마다 식사거리로 스스로 입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든 동물들은 하루하루 끼니를 위해 피나는 생존경쟁을 한다. 하늘의 무적 독수리도 자식이 날 때가 되면 새끼를 발로 밀어 나는 법을 가르친다. 치사할 정도로 몸을 숨기고 엎드리며 먹잇감을 찾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동물의 세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눈을 뜨면 먹거리를 찾아 생존경쟁을 해야 한다. 평생 부모 곁에서 무위도식하는 자식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나이 차면 떠나야 하고 자식 생기면 떠밀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가족 모두가 공멸이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섭리다.

[]의 작가로 유명한 육관도사 손석우도 욕심 없는 것이 큰 부자요, 직책에 오르지 않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다라는 글귀를 책상머리에 써 붙여 놓았다한다.

명당은 존재한다. 그러나 명당만 믿고 누워있으면 그저 돈이 굴러들어오거나 시험에 합격하여 출세하는 것이 아니다. 꿈을 키우고 피땀 흘려 노력해야만 돈, 권력, 명예도 찾아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덕()을 쌓고 노력해야한다. 명당도 화()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명당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고 노력하여 덕을 쌓은 사람이 명당을 만날 때 부귀영화도 찾아온다. 굴러온 복도 찾아 누리지 못하면 화내고 돌아선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돼지가 욕()인 것도 지저분하고 게으르기 때문이다. (202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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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바위 홍시가 익어갈 때

 

늦가을 낙엽 질 때 된서리 맞으며 홍시가 익어 가면 정() 많던 할머니 생각이 난다.

 

범바위에 홍시가 익어 가면 그리운 사람들이 보고 싶다. 단풍도 지쳐서 떨어진 늦가을 범바위는 한여름 무더위 견디고 눈 덮이는 겨울이 오기 전에 그리워 사람을 부른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정든 사람들만 초대한다. 그저 오라하기에 멋쩍어 감 따며 모과 줍자며 기다린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 있다. 소문 없는 조촐한 감 잔치지만 올해는 그마저 어려운 상황이다. 해마다 10월 말이면 축제라는 명분으로 친지들을 불러 감을 수확한다. 하지만 금년에는 아무도 부를 수 없는 처지다. 유난히 긴 여름 장마 탓도 있지만 일 년 내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이 그 이유다. 감보다 중요한 것이 건강이다. 코로나 이외에도 봄가을이면 항상 신종 바이러스에 의한 독감이 세계를 강타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국내건 해외건 여행의 길이 막혀 답답한 나날을 보낸다. 하루속히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감나무는 기후에 민감하여 관리가 매우 까다롭다. 감이 열리는 지역이 있는가하면 같은 지역이라도 열리지 않는 곳이 있다. 감나무는 입지선정이 매우 중요하다. 어린 시절 고향에는 감나무가 없었다. 그러나 외갓집 뒷마당에는 나이든 감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까치밥으로 남겨둔 홍시가 떨어지면 주워 먹던 추억이 아직도 나를 떠나지 않는다. 그 달콤한 맛과 주변의 풀 향기 때문에 . 그런 기억으로 소득도 올리고 맛있는 홍시도 먹겠다는 야심으로 산비탈을 개간하여 감나무를 심었다.

감나무는 게으른 한량이 키우는 나무라고 한다. 소독할 필요도 없이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기다리면 홍시가 떨어져 입으로 들어오는 줄 알고 감나무를 심었다. 사과과수원 손자였기에 유실수는 관리가 어렵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꽃과 나무를 심었지만 유실수 보다는 병충해가 적은 꽃나무와 조경수를 주로 심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감나무도 소독을 많이 해야 한다. 자연농법을 고집하여 소독을 거부하는 바람에 수확량이 적기는 하지만 제초제나 병충해 방제는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나무 주변의 잡초를 인력으로 제거하고 정성을 기울인 탓에 친지들이 나눠 먹을 수 있는 정도의 감은 매년 열린다.

애초에 감나무를 심을 때 모두 반대했다. 산비탈이라 바람을 많이 받아서 감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많은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묘목을 심고 우공이산의 끈기로 열심히 키웠다. 몇 해 전 인근의 감나무들이 많이 동사했는데 그래도 우리 감나무는 살아남았다. 자연농업으로 강하게 키운 탓인지 내 생각은 성공은 가져왔고 품질도 좋아 대봉감은 맛도 특출하다.

 

고목의 감나무를 범바위 산으로 옮겨 심고 아내와 감 따던 가을의 추억도 다시 보존했다.

 

어린 시절 홍시에 대한 나의 추억은 남다르다. 나는 3살부터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랐다. 중고등학교 때까지도 방학의 대부분은 외갓집에서 보냈다. 이러한 생활 때문에 고향의 할아버지 할머니보다는 외할머니와의 추억이 더 많다. 부잣집이기는 했지만 외할머님은 아들 없이 42살에 청상이 되시어 양아들과 함께 외롭게 사셨다. 외로운 집 맏손자였기에 나에 대한 할머님의 사랑은 극진했다.

부지런하시고 깔끔하신 외할머님은 우리집 가까이에 홀로 사시며 무병장수하셨다. 평생 화내는 모습을 보지 못할 정도로 인자하신 할머님은 나는 물론 내 자식들에게도 많은 애정을 베푸셨다. 외증조할머니라는 호칭이 어려워 용산동에 사셨기에 용산할머니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정을 나누던 할머님은 200912월말 100세를 3일 남기고 하늘로 가셨다.

겨울이면 이라는 작은 방에 옥수수 엿, 수정과, 식혜, 곶감, , 홍시 등이 꽉 차있었다. 그 많던 간식거리 가운데 화로에 밤 구워먹고 꽁꽁 언 홍시를 녹여 먹던 추억은 항상 마음에 남아있다. 그 맛을 못 잊어 지금도 홍시를 냉동실에 얼려 여름에 아이스크림처럼 즐긴다. 어린 시절 추억 때문에 홍시는 언제나 할머님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감을 수확하면 할머님들에게는 특별히 선물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범바위 홍시는 어린 시절 할머님의 사랑을 떠올리기에 잔치처럼 즐기며 감을 수확한다.

 

늦은 가을 홍시가 익어가는 계절이면 범바위 농장은 감 수확으로 한바탕 축제의 분위기다. 우리 농장에는 일 년에 두 번의 축제가 있다. 축제 중 하나가 매실수확이고 다른 하나는 감 수확이다. 매실수확이 초여름 녹음의 축제라면 감 수확은 늦가을 단풍의 축제. 거창하게 축제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과의 화합이고 만남이기에 몇몇 친지들을 초대하여 수확하기 때문이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잠시 시간 내어 자연 속에서 꽃도 보고 새소리도 감상하면 고급호텔의 연회장보다 격식 갖춘 가식이 없어서 자유롭고 흥겹다. 그래서 나에게 가을은 기다림의 계절이다.

여기서 범바위 홍시라고 강조한 것은 범바위와 나와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옛날 사과과수원과 접한 우리 산에는 충주의 명물인 범바위가 있다. 함께한 세월이 길기에 나는 과수원이나 산을 부를 때는 편의상 범바위라고 부른다. 그 범바위 산에 감나무가 있기에 범바위 홍시라고 부른다.

1960년대 고향에 심었던 사과나무를 이곳으로 옮겨온 후 농장의 꿈을 키우며 나는 이 산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에는 지하수가 없어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산 중턱의 조그만 물웅덩이에서 개구리들이 물장구치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님의 고생을 줄여보자는 생각에 과학시간에 배운 원리를 실험하기로 했다. 대학 학창시절에 방학을 이용해 웅덩이를 깊이 파고 파이프를 묻어 수도꼭지를 설치했다. 수돗물은 성공적이어서 과수원 관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더 나아가 관리사에 거주한 주민의 식수도 해결했다. 수차례 보수공사하며 이용하다가 최근에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용정(龍井)이라 이름 짓고 계속 사용하고 있다. 40년 이상 정든 산에 범바위가 있고 감나무가 있기에 그 정은 그 누구보다 깊다.

본래 범바위 산 아래 있던 한 필지의 커다란 땅에 사과과수원이 있었는데, 1990년대 도시계획으로 토지의 대부분이 도로에 편입되었다. 도시계획으로 농장은 산산조각으로 분할되었고 범바위 산도 5필지로 혼란스럽게 분할되었다. 농장의 조경수도 이사해야할 처지에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범바위의 조경(造景)이었다.

시청으로부터 벌목허가를 얻어 1990년대 말부터 불필요한 수목을 제거하고 조경수를 옮겨 조경이 시작됐고 2000년 이후에는 본격적인 조경수이식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산수유를 심어 봄에 꽃을 보고 모과와 감나무를 심어 가을의 운치를 더했으며 울타리는 은행나무를 심어 병충해 방제도 고려했다. 이 과정에 부부가 정들었던 집안의 감나무 고목은 아내를 위해 힘들여 특별히 이 산으로 옮겼다. 정을 뗄 레야 뗄 수도 없는 산이 범바위 산이기에 나는 통틀어 범바위라 부른다. 이른 봄 앞서 핀 생강나무의 노란 꽃과 산 중턱의 목련은 지나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할 정도로 시선을 끈다.

 

1970년대 범바위 산 아래 있었던 사과과수원이 현재는 대부분 도로로 변했다.

 

범바위는 참 기묘한 바위다. 범바위는 마고선녀가 산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금봉산(錦鳳山) 서편 끝자락에 있다. 호랑이처럼 생겼다는 이 바위는 정면에 사천마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전설과 함께 호랑바위, 범바위로 잘 알려져 있다. 범바위아래 평지에는 무명의 효자묘()도 있었는데 최근 도시개발로 흔적이 사라졌다. 범바위(虎岩)의 존재로 인근지역의 명칭도 호암동이다. 범바위에 매료된 나는 전설의 바위를 아름답게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40여년 긴 세월에 걸쳐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나의 노력을 알아주는지 범바위도 신력으로 도와준다. 어느 해인가 폐허가 되어 산사태의 우려가 있어 산에 나무를 보강하기로 했다. 인부들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묘목을 한 짐씩 짊어지고 정상으로 올라가 나무를 심었다. 가뭄이 심하던 봄철이라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뒹굴며 산을 내려오며 빈곳에 주목과 회양목을 심었다. 동행한 사람들의 불평도 대단했다. 이곳에 나무를 심어 어떻게 살리겠냐고 불평 반 핀잔 반이었다. 그때 같이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할 정도이니 무모한 대공사였음은 확실하다.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적이 나타났다. 나무심기가 끝날 무렵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심은 나무는 대부분 살아남았고 잘 성장하여 지금은 울창한 숲의 일부가 되었다.

산에 나무를 이식할 때 가장 큰 어려움은 물을 줄 수 없다는 점이다. 범바위에 엄청난 나무를 심거나 이식했지만 단 한 번도 물을 준 적이 없다. 신기하게도 범바위에 공사를 하면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 “범바위를 건드리면 비가 온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범바위에 공사를 할 때는 비 맞은 경험이 많다. 나와 함께 공사를 해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범바위가 도와준 신력으로 감나무도 잘 키울 수 있었다.

 

사과과수원이 있던 자리는 대부분 도로로 변했고 중앙에 일부 남은 것이 조경수농장이다.

 

범바위를 사랑했다는 징표로 노래비를 세우고 호랑이 상징물을 설치했다. 호랑이 상징물을 설치할 때도 범바위 신비는 비껴가지 않았다. 분명 일기예보에도 없었는데 호랑이 석상이 도착할 무렵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모두 설치공사를 걱정하던 중 호랑이 상징물이 도착하자언제 그랬나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하늘이 맑게 개이더니 비가 말끔히 그쳤다. 나는 그날의 비를 축하의 메시지라 생각한다. 호랑이 상징물 설치하며 아래와 같은 <범바위> 송시(頌詩)도 남겼다. 그 호랑이 상징물은 세월을 보태가며 신비스런 범바위와 함께 산을 지키며 전설대로 앞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범바위

 

산 오르니 호랑바우 범바위

물 흐르니 봉황의 천년 쉼터

마고선녀 화현하니 금봉호랑이

산따라 물처럼 여여히 살라하네.

 

황금빛 은행나무 단풍은 가을의 전형적인 표상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은행잎을 밟으며 감을 수학할 때 느끼는 감정은 가슴속 흥분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범바위가 아름다운 정원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동생들의 욕심이 발동됐다. 그들에게는 정원으로 꾸며진 이 산이 재물로만 보일 뿐이다. 이 산에 미술관을 짓겠다고 어머님 괴롭히던 여동생은 결국 마수의 손질을 뻗었다. 견물생심의 좋은 본보기다. 하지만 욕망은 풍선과 같아서 지나치면 파국을 초래한다. 안타깝지만 훗날이 두렵다.

속이 썩은 사과는 아무리 도래내도 먹을 수 없다. 어린 시절 사과과수원 원두막에서 일찍이 깨달은 경험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제 아무리 치장하고 돈 들여 겉모습을 화려하게 치장해도 속마음이 썩은 사람은 얼굴에 그 심성(心性)이 나타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흔히 골빈 사람이라한다. 그래서 얼굴은 남이 아닌 자신이 가꾸어야 한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밖으로 나타난다.”성중형외(誠中形外)라는 말이 있다. ≪大學≫에 나오는 성어중형어외(誠於中形於外)의 줄임말로 남이 속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으니, 홀로 있을 때 조심해야한다는 군자의 덕목이다. 속이 썩은 사과를 먹을 수 없듯이 아무리 외형이 수려해도 마음에 사기(邪氣)가 있는 사람은 피해야한다. 이 점에 있어서 범바위 산은 매우 신비하다. 나쁜 마음으로 이 산에 오른 사람들이 사고를 당하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 그래서 어떨 때는 두렵기도 하지만 경외(敬畏)의 마음으로 찾으면 항상 좋은 기운을 준다. 그런 사연 때문에 착한 이들만 초대하여 감 잔치를 벌인다. 이토록 신령스런 금봉산 호랑이는 이 산에서 천혜의 정원을 지키며 영원히 봉황을 기다릴 것이다.

 

금봉산 아래 호랑이 상징물은 신령스런 범바위와 함께 천혜의 정원을 지키고 있다.

 

신비한 범바위에 홍시가 익어갈 때 감 수확은 언제나 흥겹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10월 주렁주렁 달린 빨간 홍시는 범바위의 화룡점정이다. 범바위는 사람을 초대하고 찾아오는 사람은 즐겁다. 부지런한 사람은 새들이 먹다 남긴 산초도 따고 황금빛 낙엽위의 은행도 줍는다. 은행은 고약한 냄새와 수차례 가공과정 때문에 별로 인기가 없기는 하지만, 향기 좋은 모과는 인기다.

감은 홍시를 즐길 수 있는 색다른 묘미가 있다. 먹다 남은 홍시는 냉동실에 보관하면 여름에 맛있는 간식이 된다. 물러터진 홍시는 깨끗이 손질하여 감식초를 담근다. 딱딱한 감은 깎아 곶감을 만든다. 높은 가지위에 따지 못한 감은 까치밥으로 남겨두고 자연에 고마움을 표한다. 초봄 돋아나는 새순부터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것이 감이다.

감을 딸 때 친지를 초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구기자 산수유 빨갛게 익은 인근 도장골 농장에 모과가 지천이고 가을걷이 파 고추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트나 택배로 사먹는 것이 값도 싸고 편리할지 모르나 자연산 무공해는 마음도 정화시켜준다. 친정 왔다는 생각으로 찾아주는 친지는 가족처럼 따뜻하고 정답다. 그래서 감 익는 범바위 축제는 항상 즐겁다.

 

가까운 사람끼리 감도 따고 풍성한 이야기꽃 피우는 감 수확은 자연이 베푼 향연(饗宴)이다.

 

금년 같은 해는 없었다. 긴 장마 탓인지 감도 거의 열리지 않았다. 수확할 감도 부족하고 찾아 줄 손님도 부르기 힘들다. 10개월이나 계속된 코로나 팬더믹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된 가을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라고 한다. 충분히 공감한다. 벌써부터 내년 매실도 걱정된다. 문명시대에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니 안타깝다.

 지난해에도 감 수확이 즐거웠다. 참석하지 못한 몇몇 친지들에게는 택배로 부쳐주고 윤명 혜옥은 직접 와서 가져갔다. 도장골에서 모과 줍고 고추도 따고 파 뽑으며 늦게 핀 백일홍도 감상하며 즐거워했는데 금년에는 부를 수조차 없다. 그저 허전할 뿐이다. 막연히 내년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순리를 따르는 길 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감 축제의 기대가 사라지니 한 해가 허전하다. 정겹던 시절이 벌써 추억이다.

 

축제의 기대가 사라지니 맺은 정()이 그립다. 가을이 쓸쓸하고 단풍도 반갑지 않다. 혼자라도 찾아가 산새소리라도 들으며 감 따고 모과 줍고 산수유 따며 즐겁던 추억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아들을 채근하여 토요일 오후 늦게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하늘도 노했는지 일요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그래도 범바위는 감 수확은 도와줄 거라는 기대에 도장골에서 가을걷이하며 모과 줍고 파도 뽑고 고추, 가지도 정리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오후 2시경 되더니 비가 다소 멈췄다. 매년 오던 5촌 당숙 아줌마 내외가 왔다. 빨갛게 익은 산수유 열매를 보더니 그걸 따겠다고 농장에 남는다. 우리 가족만 범바위 산에 올랐다. 얼마 열리지 않은 감도 누군가 따갔다. 감나무 가지가 찢어진지 오래 된 것 같지 않은 걸로 보아 오늘 그런 짓을 한 것 같다. 남의 것을 탐하는 사람은 남의 것이 소중한 줄 모르는 법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물건에 조금이라도 손을 대면 성인군자처럼 더 야단법석을 부린다.

 

가을의 산수유 열매는 휘황찬란한 왕비의 드레스위에 치장한 옥구슬처럼 영롱하다.

 

 우리가족끼리 미끄러지며 산을 올라 노력한 끝에 짧은 시간에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감은 수확했다. 남은 감은 아쉽지만 남겨두는 수밖에 없었다. 늦가을에는 날이 금방 어두워지기에 일찍 하산하여 아줌마 내외게 남은 감을 수확하라고 당부하며 감 따는 기계를 넘겨주었다. 짧은 만남이 아쉬워 자주 찾던 추어탕 집에서 밀린 대화를 하며 내년을 기약했다. 아쉽긴 했지만 가족끼리의 감 수확은 그런대로 즐겁고 흡족했다. 농장에서 수확한 가을걷이 농산물과 감, 모과를 자동차 트렁크에 잔뜩 싣고 상경하는 길은 부자(富者) 부럽지 않은 풍족한 마음이었다. 화롯가 홍시를 마음에 떠올리며 초대하지 못한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며 내년의 즐거운 향연을 다시 기대해본다. (2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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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의 매실수확

 

매화의 열매가 매실이고, 매실의 종류에는 청매, 황매, 홍매 등이 있다.

 

나는 매실농장을 시크린 가든이라 부른다. 매실농장은 주로 매화꽃 필 때, 매실 딸 때, 한가위 때에 찾지만 자연농법에 의한 농장으로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닫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이 자주 드나들수록 좋을 것이 없는 곳이 매실농장이다. 이 농장에는 매화 향기로 벌 나비 불러 열매를 맺고 푸른 솔 소나무 벗되어 각종 산야초가 자란다. 인적 드문 산속의 매실농장은 항상 신비에 싸여있다. 그래서 시크릿 가든이다.

매년 6월초면 신비한 농장에는 매실축제가 열린다.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매실과 오디 따고 취나물, 고사리도 채취하며 자연과 함께 어울린다. 이밖에도 꾸지뽕, 더덕, 도라지, 두릅, 둥굴레, 산마, 산딸기, 인진쑥, 산부추도 때맞춰 가면 채취할 수 있다. 자연농법의 혜택으로 몸에 좋은 무공해 산야초가 산 전체에 자생하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을 찾는 이들을 위한 값진 보상이다.

매실 익는 6월초에는 녹음이 우거지기에 산비둘기, , 뻐꾸기, 소쩍새도 날아와 찾는 이의 흥을 돋운다. 지친 삶의 스트레스를 풀고 무념무상으로 자연에 몰입할 수 있는 좋은 시기에 매실을 딸 수 있다. 매실을 따는 날은 무척 바쁘지만 농장은 가장 행복한 축제의 장을 마련한다.

 

매화나무 열매가 매실(梅實)이다. 매화의 은은한 향기는 이른 봄 꿀벌의 최고 맛 집이다.

 

매화나무의 열매를 매실이라 한다. 매실열매는 살구와 비슷하며 녹색이고 털로 덮이지만, 67월이 되면 황색으로 익고 신맛이 난다. 이때 황색열매를 황매(黃梅)라 한다. 청매실을 익기 전에 따서 소금에 절였다가 햇볕에 말린 것은 백매(白梅), 소금에 절이지 않고 볏짚을 태워 연기를 쐬면서 말린 것은 오매(烏梅)라 하여 약용으로 쓰인다.

가시가 있는 것은 약()이 된다고 한다. 매실도 마찬가지로 나무에 가시가 있다. 민간에서 매화가 각광받기 시작한 것도 매실의 약효 때문이다. 매실에는 구연산이 많아 몸속의 노폐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여 피를 맑게 한다.

시크릿 가든의 매실은 자연농법으로 산에서 강하게 키웠기에 산속에서 열매를 수확하는 일도 무척 어렵다. 무더운 날씨에 산을 오르내리며 열매를 한 알씩 손으로 따야하고 무거운 자루를 옮기는 일 또한 힘들다. 금전으로 계산하면 어리석은 짓이다. 용자(勇者)만이 미인을 없을 수 있다 하듯이 용기 없는 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하지만 땀 흘린 대가는 반드시 보상이 뒤따른다. 우리 농장의 매실 엑기스를 경험한 사람은 그 효능을 잘 안다.

 

산에서 자연농법으로 키운 매실을 손으로 하나하나 수확하는 일이란 쉽지 않다. 매실을 자루에 짊어지고 운반하는 일 또한 힘든 작업이다.

 

자연농법(自然農法)은 일본의 후쿠오카 마사노부가 창시한 농법이다. 자연농법은 유기농법과 다른 개념으로 절대로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는다. 인위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최대한 자연에 의지하여 식물에 적합한 생태환경을 활용하여 재배하는 농업방식이다. 이 농법은 무경운(耕耘), 무제초, 무비료, 무농약에 의한 자연농법으로 4무농법(四無農法)이라고도 부른다. 그렇기에 자영농법의 최대 적()은 병충해라기보다는 인간이다.

매화는 꽃이 피는가 싶으면 곧바로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다른 과실보다 수확시기가 빠르다. 매실이 떨어지면 매실나무는 한여름부터 다시 이른 봄 매화를 준비한다. 매실나무는 추운겨울에도 뿌리내리며 새봄을 준비한다.

 

반찬이 없어도 땀 흘린 뒤 자연에서의 식사는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보다 맛있고 즐겁다.

 

매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90년대 말 매실로 유명한 홍쌍리 여사를 찾은 적이 있다. 섬진강변에 항아리가 줄지어 선 농장에서 홍 여사와 함께 고목 매실나무에 걸터앉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홍 여사는 매실의 식목부터 효능을 깨닫게 된 동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 후 매실에 매료된 나는 2000년부터 묘목을 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이른 봄이면 산 전체가 매화꽃 만발한 정원으로 변한다.

매실은 대표적인 알칼리성 열매로 3가지 독() - 음식물, 혈액, - 을 해독하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 매실은 항산화 성분이 있어 염증을 완화시켜주는 소염작용을 하고 산화 스트레스 작용을 억제하여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 또한 항균성분이 있어 식중독이나 물로 인한 감염병 예방에 효과적이며, 피로회복과 체질개선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매실청은 식재료로 매우 인기가 높다.

매실은 술을 담그거나 주스, 농축액, 잼 등으로 가공하여 식용한다. 이밖에도 간장, 식초, 정과, 차를 만들거나 장아찌로 만들어 식품으로 이용한다. 매실을 절여서 만든 우메보시는 일본인들의 기호식품으로 도시락이나 생선회를 먹을 때 주로 반찬으로 사용한다. 한방과 민간에서는 곽란, 각기, 건위, 살치, 거담, 구역질, 주독, 해열, 발한, 역리 등에 약으로 쓰인다. 매실을 약으로 쓸 때는 보통 매실엑기스, 매초(梅草), 매실주, 매실말랭이 등을 만들어 사용한다. 한방에서는 구충, 건위, 해열, 발한의 약리작용이 있다고 한다.

 

농장매실-2.JPG

깨끗하게 씻은 매실을 햇빛에 말린 후 설탕을 적절히 배합하여 항아리에서 숙성시킨다.

 

매실수확도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열매를 즉시 먹을 수도 없다. 매화꽃이 인내의 혹한 속에서 피듯 그 혜택을 보려면 인간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매실 엑기스는 오래 묵을수록 좋다. 최소한 1년은 지나야 맛이 깊다. 진정한 엑기스의 참맛을 느끼려면 3년 이상 숙성된 것이 좋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매실의 숙성작업을 하므로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계속 저어주어야 하는 불편에 더하여 자칫 온도관리가 소홀하면 맛이 시어진다. 이런 이유로 최근에는 매실수요도 많이 줄었다. 과거에는 매실의 계절이면 설탕 값이 오를 정도로 인기가 매우 좋았다.

매실의 가공에는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 농장의 경우 산에서 매실을 채취하기 때문에 다른 농장보다 더 많은 노동과 비용이 든다. 자연산이기에 수확한 매실이 단 몇 시간만 지나도 무르기에 매실의 상품성은 농약 사용하는 다른 농장에 비하면 하잘 것 없다. 그런 이유로 판매는 하지 않고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만 일부 제공한다.

농장에 깨끗한 지하수가 설치돼 있어 모든 과정이 수확과 동시에 마무리된다. 수확한 매실을 다시 선별하여 깨끗이 씻어 말린다. 이리저리 뒤적이며 매실이 마르면 다시 수거하여 설탕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항아리에 담는다. 오래 보관하기 위하여 그늘이 잘 드는 곳에 땅을 파고 항아리를 묻어 보관한다.

매실 엑기스는 3년 이상 숙성시켜야 진품(珍品)을 얻을 수 있다. 우리 농장에서는 해마다 같은 작업이 반복되기에 언제나 질 좋은 엑기스를 얻을 수 있다. 당장 엑기스가 필요하면 과거에 묻은 항아리를 개봉하면 된다. 아무튼 매실수확에는 많은 사람의 노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매실축제다.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매실도 따고 즐기는 여유가 없다면, 매실수확은 돈 먹는 괴물이 되었을 것이고 힘든 노동 때문에 피곤하기만 했을 것이다.

 

3년 이상 숙성시켜야 깊은 맛이 나기에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장기간 보관한다.

 

매실수확이 축제가 된 이후에는 노동이 운동이 되었고 땀이 피로회복제가 되었다. 세상사는 이야기하며 밥도 지어먹고 매실청을 담그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겁다.

매실 엑기스는 버릴 것이 없다. 잘 숙성된 엑기스는 독()을 제거하기 위해 큰 솥에 넣고 열을 가한 다음에 식혀서 보관한다. 완성된 엑기스는 시지도 않고 깊은 맛을 오랫동안 유지한다. 혹시 실패하여 시어진 엑기스는 식초를 만들면 매실식초가 된다.

또한 항아리에서 오래 묵은 매실주는 천하일품 약주(藥酒). 항아리에서 매실주를 오래 묵이면 독한 술기운이 빠져 나가고 순한 매실와인으로 변한다. 연하고 부드러운 매실와인은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좋은 매실청을 얻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긴 시간동안 일손이 많이 가는 노동도 있어야 하고 기다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내는 반드시 혜택으로 보답한다. 몸에 좋은 매실청과 매실식초를 주고 그윽한 향기의 매실와인도 만들어준다. 와인 한잔 마시고 콧노래 부르며 내년을 기약하는 매실축제는 일연 중 가장 즐거운 자연속의 향연(饗宴)이다.

매실나무 키우며 좋은 교훈을 얻었다. 숲을 보고 나무를 키우듯이 자식도 인내하며 강하게 키워야 한다. 크게 보고 강하게 성장해야만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다. 내 귀한 자식 잘되라고 감싸 안고 빨리 출세시키려고 부산한 부모는 꽃은 보데 열매는 보지 못하는 근시안이다.

 

뽕나무아래 비닐을 깔고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 털면 깨끗한 오디를 채취할 수 있다.

 

매실을 수확할 땐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뽕나무에서 오디를 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디는 따자마자 짓무르기에 즉석에서 가공해야 한다. 오디는 그냥 먹어도 달콤하지만 잘 정리한 오디를 냉장고에 얼려 믹서로 갈아서 주스로 마시면 오랫동안 먹을 수 있다. 당뇨에 좋다하여 오디도 인기다. 시장에서 구입하는 오디는 소독약을 너무 사용하기에 오히려 몸에 안 좋다는 소문이 있기에 우리 오디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이밖에도 부지런한 사람은 주변에 고사리, 취나물도 꺾고 산 복숭아도 채취할 있다. 금전의 가치로는 평가할 수 없는 매실수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시크릿 가든에서 경암농원 해태상 앞에서 매실 따고 항아리 씻으며 세상사는 이야기는 그 자체가 인생이다.

 

매실을 수확하면서 애들에게 겸손도 가르쳤다. 세상에는 언제나 불확실성이 존재하기에, 매실을 수확할 까지는 결코 자랑하지마라! 금년에 우리 매실이 그 진실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금년에는 이상기후 탓으로 매실의 작황이 좋지 않았다. 오디는 많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그나마도 제대로 익지도 않아 아예 채취도 포기했다. 이에 더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많은 사람을 부르지도 못했다. 매년 함께하는 친지와 농장관리를 해주시는 아저씨들만이 참가한 조촐한 축제를 벌였다. 가족으로 새롭게 인연맺은 처제가 오랜만에 강화도에서 먼 길 달려와 함께 어울렸기에 시크릿 가든의 축제는 여느 때보다 즐겁고 화목했다. (2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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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중복(中伏)에 핀 목련

 

목련은 새하얗고 청초한 아름다움으로 고결함의 상징이다.

 

목련은 이른 봄 3~4월에 잎이 돋아나기 전에 다른 꽃보다 먼저 핀다. 꽃눈이 붓을 닮았다고 하여 목필(木筆)이라고도 하며 꽃봉오리가 터질 때 북녘을 향한다고 하여 북향화로도 불린다. 신이(辛夷)라고도 불리는 이 꽃은 한국에서는 나무에 핀 연꽃이라 하여 목련(木蓮)으로 불리며 중국에서는 향기가 난과 같다하여 목란(木蘭)으로 부른다. 목련은 흰색 꽃이 피는 백목련과 붉은색 꽃이 자목련이 있다.

어머님은 유난히 목련(木蓮)을 좋아하셨다. 정원에는 일반 목련보다 늦게 피는 산목련이라 불리는 함박꽃이 있었다. 봄소식을 알려주는 새하얀 목련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꽃이 바로 떨어지기에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은 꽃구경하기도 어렵다. 산목련은 그보다 늦게 피지만 꽃망울이 단단하고 오랫동안 핀다.

목련은 백악기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가장 오래된 꽃식물 중 하나다. 목련이 출현한 시기는 벌과 나비가 출현하기 전이다. 그래서 꿀샘이 없고 그 대신 꽃가루를 먹는 딱정벌레 등을 유인한다. 목련은 향()이 무척 강하고 멀리 퍼진다.

그러나 목련은 웬지 모르게 슬픈 느낌을 준다. 박목월 시인의 사월의 노래도 그렇고 김동진 작곡의 목련꽃 그늘 아래서노래도 애달프다. 1974815일 한여름 육영수 여사님이 서거했을 때도 어느 지방에서 목련꽃이 피었다며 상서로운 징조라는 언론기사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목련을 기쁨보다는 외로움이나 고독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목련에 관해 전해오는 설화도 슬픈 사연이다. “옥황상제가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사윗감을 찾고 있었는데 공주는 옥황상제가 고른 사윗감들은 관심이 없었다. 공주는 사납다고 알려진 북쪽바다의 신()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견디다 못한 공주는 몰래 궁을 빠져나와 북쪽바다의 신()이 사는 궁으로 갔으나 그 신은 이미 결혼했기에 큰 충격을 받은 공주는 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북쪽바다의 신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살까봐 두려웠다. 그 신은 공주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신의 부인에게 독약을 먹여 살해했다. 두 여인의 장례를 성대히 치러준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 후 두 여인의 무덤에서 목련이 피어났는데 공주의 무덤에서는 백목련, 신의 부인 무덤에서는 자목련이 피어났다고 한다.”

 

어머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산목련이 하늘나라 가신지 7일후 정원에 활짝 피었다.

 

어머님 가신 뒤 우리집에는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장례 7일째 되던 날 정원에 산목련이 한 송이 피었다. 산목련은 종종 초여름에도 핀 것을 보아온 터라 크게 개의치 않고 "어머님이 사랑하시던 꽃이기에 피었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농장에 갔더니 그곳에도 자목련이 소복이 피었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727일 무척 더운 한여름이었다. 도저히 목련이 필 그런 때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목련이 핀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불교에서는 복을 많이 지은 사람은 사망 후 7일째 되는 날 하늘로 간다고 한다. 매칠일 일곱 번째 칠일인 49일까지도 영혼이 육신을 떠나지 못하면 구천을 떠돈다하여 자식들이 49재를 봉사(奉祀)한다. 아무튼 좋은 세상을 가셨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은 좋았다.

목련의 꽃말은 고귀함이다. 나무에 핀 연꽃이라 하여 자비와 은혜를 상징하기도 하며, 서양에서는 이루지 못한 사랑, 연모(戀慕)’라는 꽃말을 갖고 있다. 평생 남에게 몹쓸 짓 안하시고 베풀며 사셨으니 고귀한 목련꽃으로 좋은 세상 도착을 알려준 길조라 생각했다.

어머님 장례식 때는 연일 30도를 웃도는 중복의 무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백목련뿐만 아닌 자목련이 동시에 피었다는 사실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목련이 필 시기가 전혀 아닌 폭염의 7월말, 농장에는 자목련이 많은 꽃을 피웠다.

 

어머님 가신 뒤 3년 되던 해에 기이한 사건이 있었다. 너무 무성하여 가지치기가 바빴던 뜰 앞의 함박꽃이 영문도 모른 채 고사하고 만 것이다. 농장으로 달려가 보았더니 자목련은 무성하다. 장남인 내가 집안을 잘 돌보지 못한 탓이라 생각하고 큰 죄책감을 느꼈다. 아무튼 산목련이 고사하자 집안에도 우환이 겹쳤고 남녀 두동생 중 남동생이 느닷없이 하늘나라로 갔다.

어머님이 그토록 좋아하시던 산목련, 함박꽃을 다시 심으려니 묘목도 없었다. 오래 거래하던 농원에 부탁해 놓기는 했지만 묘목을 구하여 심을 예정이다. 못 다한 효도를 아쉬워하며, 김동진 작곡의 목련꽃 그늘 아래서를 불러드리며 영면을 다시 기도하며 다짐한다.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라고

 

오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는
새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 내사랑 목련화 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처럼 순결하게 그대처럼 강하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라

 

함박꽃 다시 피는 정원이 빨리 보고 싶다. 기쁜 소식 하루 속히 전하고 싶다.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꽃이라도 피워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2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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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기 그윽한 진달래 언덕의 향연(饗宴)

 

진달래가 솔향기 머금은 소나무와 어울리면 고상한 자태가 매혹적이다.

 

진달래는 이른 봄 앞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그렇기에 문학이나 가요에도 많이 등장하는 매우 친숙한 꽃이다.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이 유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도시화되고 서양의 꽃나무가 정원이나 공원에 많이 심겨진 요즘은 진달래꽃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

1970년대 맹인가수 이용복의 <어린 시절>이란 대중가요가 선풍적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급속한 산업화의 발달로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하던 이농집도(離農集都) 현상 때문에 그의 노래는 실향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으로 시작하는 그의 노래는 젊은이들에게 마약처럼 중독되어 길거리에서도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자주 듣곤 했다.

요즘에 그의 노래가 나왔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를 치다니 . 그러나 당시에는 이른 봄 앞산에 진달래가 피면 꽃잎을 따먹기 위해 실제로 산을 올랐다. 진달래꽃을 찾아 이리저리 산을 헤매본 사람이면 진달래 향이 얼마나 진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진달래가 꽃보다 향기가 더 아름답던 시절! 어른들은 진달래 뒤에 문둥병 환자가 숨어있으니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실제로 1970년대는 나병환자가 많았다. 그 당시 어른들의 충고는 문둥병보다도 자식들의 안전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고 잘 알려진 꽃이 진달래꽃이다. 진달래는 이른 봄 34월경 새잎이 돋아나기 전에 연분홍색 꽃이 핀다. 진달래꽃은 참꽃 또는 두견화로도 불린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어 참꽃이라 하고 철쭉은 먹을 수 없어 개꽃이라 부른다. 진달래 부꾸미는 화전(花煎)으로도 유명하다. 옛날 사람들은 진달래보다는 참꽃으로 불렀다. 우리 민족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진달래는 서양에서 'korean rhododendron'로 부른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다하여 참꽃이라하고, 철쭉은 못 먹는다하여 개꽃으로 부른다.

 

어린 시절 고향집 우물가에 큰 진달래나무가 있었다. 꽃이 귀하던 시절 해질녘 우물가의 진달래의 깊은 향기는 온 집안에 향수(香水)를 뿌린 듯 은은했다. 그런 추억이 훗날 내가 꽃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매실농장을 일구며 진달래를 정성껏 보살폈고 특히 소나무아래 진달래는 더 많이 신경을 쓰며 가꿨다. 그 덕분에 지금은 소나무와 어우러진 진달래꽃의 하모니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매화꽃 필 무렵 시크릿 가든의 진달래는 산 전체를 온통 분홍빛 물감을 쏟아 부은 듯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소나무와 함께 어울리는 진달래는 한 폭의 명화다. 솔향기 머금은 소나무와 연분홍 진달래꽃이 함께 어울리면 산 전체가 살아 숨 쉬는 거대한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진달래 필 무렵이면 항상 매실농장을 찾는다. 매화가 순식간에 피고지기에 여간해서 삼품(三品)의 정감을 느끼기는 매우 힘들다. 늘 푸른 소나무는 언제나 상긋한 솔향기를 쏟아내기에 진달래 필 무렵엔 2품의 상춘은 즐길 수 있다. 매실농장에는 부모님이 계시기에 꽃이 아니라도 찾아가야 한다. 아무튼 운 좋은 해는 매실농장에서 일석삼조의 봄을 즐길 수 있다.

 

매화꽃 필 때 진달래는 소나무와 함께 삼품(三品)의 동양화를 연출한다.

 

꽃은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꽃일수록 가슴 아픈 사연이 더 많다. 왕자와 공주의 못 이룬 사랑이 목련이고 잎과 꽃이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이 상사화다. 그리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사랑한 아도니스를 그의 남편이 죽일 때 흘린 피가 아네모네이고 그때 아프로디테의 눈물에서 핀 꽃이 장미꽃이다. 진달래도 마찬가지로 애달픈 사랑의 전설이 있다.

진달래는 마치 나비가 번데기를 벗어던지며 날개 짓 하듯 꽃을 피운다. 수줍은 처녀의 봄바람처럼 가슴을 헤치고 꽃을 피우지만 그 사랑은 선녀와 나무꾼처럼 이루지 못한 한() 맺힌 사연이 있다. 아래와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천상에서 인간세상으로 내려온 선녀가 꽃을 심던 중 실수로 벼랑에 떨어져 다리를 다친다. 그곳을 지나던 나무꾼이 선녀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가 간호하고 서로 정()이 들어 결혼까지 한다. 예쁜 딸도 하나 얻어 이름을 달래라 했다. 그러나 선녀는 하늘의 부름을 받고 눈물 흘리며 하늘로 올라간다. 그 후 마을에 새로 부임한 사또가 달래를 첩으로 요구한다. 청을 거부하자 사또는 달래를 처형한다. 나무꾼은 달래를 부둥켜안고 울다가 그 자리서 죽는다. 그러자 달레는 온데간데없이 하늘에서 붉은 꽃송이가 함박꽃처럼 내리며 꽃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 후 해마다 봄이면 붉은 꽃이 무덤에 피어났다.” 이에 사람들은 나무꾼의 성()''자와 '달래'의 이름을 따서 진달래라고 불렀다한다. 이밖에 진달래=<>+<달래>, “, 진짜 달래라는 설도 있다. 참꽃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 같다.

이밖에도 진달래는 중국에서 왕권을 빼앗긴 두우의 아바타가 된 두견새가 한 맺힌 울음으로 토해낸 피가 서린 붉은 꽃이라 하여 두견화(杜鵑花)라고 한다. 또는 두견새 울 때 피는 꽃이라 하여 두견화라고도 부른다. 진달래꽃으로 담근 술을 두견주라 하는 것은 이 같은 설화에 따른 것이다.

진달래 필 무렵 소쩍새가 찾아와 솟쩍 솟쩍하고 울면 다음해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솟적다하고 울면 솥이 작으니 큰 솥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내년에는 풍년(豐年)이 온다는 설화가 있다. 믿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우리 선조들의 해학이니 재미는 있다.

 

철쭉은 진달래가 질 무엽 잎이 먼저 돋은 후 피며 진달래에 없는 반점이 꽃에 있다.

 

이렇듯 흔하고 잘 알려진 진달래지만, 꽃만 보고 진달래와 철쭉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시기적으로 보면 진달래는 잎보다 먼저 꽃이 피고 철쭉은 진달래가 질 무렵 잎이 먼저 돋아난 다음에 꽃이 핀다. 철쭉꽃에는 진달래꽃에 없는 반점이 있다.

우리나라 고유 향토수종으로 알려진 산철쭉은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산철쭉은 산 계곡이나 물가에 모여 핀다고 하여 물철쭉혹은 수달래로 불린다. 우리가 흔히 철쭉으로 알고 있는 꽃은 실상은 물철쭉, 수달래다. 철쭉은 꽃의 색깔에 따라 백철쭉, 홍철쭉, 황철쭉 등으로 다양하며 철쭉의 일종인 영산홍도 있다. 나는 본래 철쭉과 구분하기 위해서 편의상 산철쭉으로 부르기로 했다.

사진을 정리하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정원에는 진달래가 피고 철쭉이 피는 중간에 색깔도 꼭 진달래꽃과 철쭉꽃을 혼합한 은은한 연분홍 꽃이 해마다 핀다. 꽃도 오래가고 색깔도 연하고 온화하여 나는 그 꽃을 매우 좋아한다. 박달재 아랫마을 백운에서 구해왔기에 그저 산진달래라고 불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꽃이 진짜 철쭉이었다.

 

연달래로 불리는 진짜 철쭉

본래 철쭉은 연달래라 불리는 꽃이며, 잘 알려진 철쭉은 수달래 혹은 물달래이다.

 

철쭉은 진달래보다 서늘한 지역을 좋아하기에 고도 400-1500m의 높은 지대에 자란다. 5월경에 잎과 꽃이 동시에 피거나 잎이 먼저 난다. 꽃 색깔이 연하며 꽃부리 안에 적갈색 반점이 있다. 높이가 2-5m로 진달래보다 키가 크다. 철쭉은 연달라 핀다하여 <연달래>라고도 불린다.

꽃이 피는 순서대로 진달래, 연달래, 철쭉이 부르기 편하지만, 본래의 의미대로 부른다면 진달래, 철쭉, 수달래 혹은 물달래가 옳은 이름이다. 이미 철쭉으로 잘 알려진 수달래를 달리 부른다는 것은 매우 혼란스럽다. “산에 있는 철쭉이라 하여 붙여 본 나만의 이름이 산철쭉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진달래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진달래>, <철쭉>, <수달래> 또는 <산철쭉>으로 부르기로 했다.

대부분의 꽃이 사랑과 연관돼 있듯이 진달래의 꽃말도 신념, 애틋한 사랑, 사랑의 기쁨이다. 어린 시절 추억이 있어서인지 나는 유독 진달래꽃을 좋아한다. 아내는 어머님을 따라 늘 푸른 소나무를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이 시크릿 동산에서 만나니 사랑이 넘치지 않을 수 없다. 매실농장을 시작하기 전 아내와 함께 이 산에 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사랑의 기쁨에 대한 약속을 지켰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진달래꽃의 만발은 지상의 낙원임을 직접 보여준다.

 

매실농장을 개척할 때 우리 부부는 주말마다 이 산에서 땀도 많이 흘렸다. 소나무 키우며 가시달린 넝쿨을 제거하느라 땀 흘렸고 벌에 쏘여 몸이 퉁퉁 붇기도 했다. 김밥 담은 배낭 메고 딸기도 따먹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풀과의 사투를 벌이며 매실나무를 키웠고 드문드문 자생하던 진달래도 잡풀제거하며 키웠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그 보답으로 자연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향연을 선물로 주었다. 그 선물에 다시 보답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매년 이 산을 찾는다.

자식 키우듯 정성으로 개척했기에 즐거움을 느껴보자는 의미로 농장의 3가지 목표인 이기락(理氣樂) 가운데 <>으로 명명하고 이곳이 지상의 낙원이라고 해태상 기념물에 기록했다. 이 값진 시크릿 가든에는 부부송(夫婦松)이라는 특별한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도 정 들면 한 몸이 되더라! 매실농장 개척할 때 그늘이 돼 주던 부부송(夫婦松)

 

매실농장 개척시기에 산을 벌목했기에 그늘이 없었다. 오뉴월 따가운 햇빛을 피할 곳이라고는 두 그루의 소나무밖에 없었기에 우리는 그 그늘에서 간식도 즐기고 더위도 피했다. 그런 인연으로 부부송이라고 이름이 지어졌고 지금은 거목이 되어 당당하게 산을 지키고 있다. 세월이 흐르니 머리를 맞대고 엉키며 일심동체 된 모습이 부부송임을 남에게도 알려준다. 우리 부부가 매년 이 산을 찾아 매화도 감상하고 소나무 숲속의 진달래도 즐기는 또 다른 이유는 부모님도 함께 하기기 때문이다.

솔향기 그윽한 언덕에 수줍은 미소로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리면 온 산이 핑크빛 사랑으로 가득 찬다. 때맞춰 피어난 매화가 달콤한 향기로 벌과 나비를 부르니 초목도 헌 이불 걷어차고 잠에서 깨어난다. 늦잠 자던 황금 두꺼비도 눈비비고 일어나 천등산의 소쩍새를 부른다. 솔향 매향 어우러진 황전 언덕에 진달래 꽃사랑 황진이 사랑 덧없음보다 멋지고 홀가분하다.

대지의 왕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 못 다한 사랑이 가슴에 한을 맺고 대지를 적셨다. 적막한 이집트 사막에 핏빛으로 피어난 꽃이 대지의 왕 호루스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동에는 진달래가 없다. 이집트 왕 못지않은 선녀와 나무꾼의 애달픈 사랑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곳이 황전이다. 왕권을 빼앗긴 두견화는 필요 없다. 천상이건 지상이건 필요한 건 사랑이다. 그래서 노래한다. 황전언덕의 진달래를

 

황전 언덕의 진달래

 

연분홍 진달래

싱그런 젖가슴 드러내고 헤진 입술 모아

매향 따라 달래 꽃을 피운다.

 

오려가든 가지말지 학머무는 학고을

두견이 피토하며  못 이룬 옛사랑 노래하니

정주고 먼 길 떠난 기러기도 고향 그려 슬피운다.

 

늦잠 깬 황두꺼비

솔향 매향으로 안개 품어 무지개 그리니

천등산 소쩍새도 소리 높여 님 찾는다.

 

황전의 진달래

어깨 들썩 흥겨워 두견주로 사랑노래 전한다.

 

이른 봄 소나무, 매화, 진달래, 철쭉은 꽃 잔치를 벌여 아름다운 향연(饗宴)을 베풀어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우리 부부가 공들여 가꾸고 사랑한 보답으로 황전 언덕의 진달래는 아름다운 향연을 매년 베풀어준다. 고라니가 도라지랑 더덕을 모두 먹어치워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배설물로 옮겨진 씨앗이 언젠가는 이 산에 다시 꽃 피고 향기를 더해 줄 거다. 고라니가 아니라도 새들이 그 역할을 대신해줄 것이다. 자연에는 절대 공짜가 없다. 빼앗기는 것도 얻는 것이요 얻는 것은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다. 절대로 혼자만의 독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자연은 공평하고 질서가 이루어진다.

지평선에 해가 뜰 때부터 껴안아 수평선에 해질 때 내려놓고 싶은 연인처럼 사랑하고 싶다. 진달래 꽃잎 모아 두견주 담그던 시절이 생각난다. 두견주에 흠뻑 취해 못다 이룬 꿈, 소리 내어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다. 두견새 불러 한()이라도 풀고 싶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세월은 무한하고 인생은 유한하다. 그러나 헤어지기 싫은 연인처럼 이 언덕은 계속 사랑하며 지키고 싶다. 진달래 피는 언덕에 아름다운 향연은 즐기고 싶다. 내년에도 다시 봄은 오고 두견새도 찾는다. 시크릿 가든의 향연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2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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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인생, 천년의 삶

 

꽃과 나비는 기원전 1억년에 인간보다 먼저 세상에 출현하여 자연의 생명체를 먹여 살리느라 서로 사랑하며 바쁘게 산다.

 

인간은 백년세월도 채 못다 살면서 마치 천년을 살 것 같은 욕심으로 살아간다. 천년의 욕심은 곱씹어보면 욕망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욕망이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인 눈, , , , 몸의 감각대상인 색(), (), (), (), ()의 집착에서 생기는 다섯 가지를 말하며 이를 오욕(五慾)이라한다.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니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활이 재욕(財欲), 성욕(性欲), 식욕(食欲), 명예욕(名譽欲), 수면욕(睡眠欲) 등 오욕(五慾)에 의해 지배되면 반드시 대가를 받게 된다.

원시 공동체사회가 해체되고 상인계층이 출현하고 화폐가 등장하자 노예국가가 출현하였고 그로 인해 문명사회가 발전했다. 엥겔스(Engels, Friedrich)는 사유재산제도와 노예제의 출현은 잉여생산물의 등장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잉여생산물이란 자연계에서 인간만의 유일한 축적재산이고 그 재산은 결국 인간을 지배하는 수단이 된다. 다른 동물계와는 다른 권력과 지배의 수단이다.

꿀벌에게는 다른 생물과는 특이하게 이라는 타의에 의한 잉여생산물이 있다. 다람쥐도 식량으로 감추어 놓았던 도토리나 밤을 종종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교환(交換)을 위한 인간의 잉여생산물과는 다르다. 아무튼 자연계에는 교환을 위해 식량을 더 모으거나 집을 짓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인간이 배워야 할 덕목이다.

아무튼 꿀벌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동물과 인간이 꿀을 찾아 모여들고 꿀을 빼앗긴 꿀벌은 다시 꽃을 찾아 맛있는 과실을 만들어둔다. 다른 동물들도 그 열매로부터 꿀벌과 같은 과정을 반복하며 자연계는 순환한다. 흔히 남의 것을 탐했을 때 느끼는 맛을 꿀맛이라한다. 남의 떡이 더 맛있어 보인다는 말은 곧 인간의 이기심을 말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맛있는 꿀은 빼앗기는 벌꿀이 자연계에서 가장 불쌍한 생물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꿀벌은 자연을 먹여 살리는 헌신적인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독침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방어수단일 뿐이지 독침을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사용하지는 않는다.

세상에 먹고 놀기만 하는 생물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이점을 배워야 한다. 그저 부모의 혜택이나 받고 음풍농월(吟風弄月)하려는 사람은 달콤한 꿀만 빨아먹겠다는 어리석은 존재다. <유마경>의 표현처럼, 인간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썩은 새끼줄에 매달려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새끼줄에 흐르는 달콤한 꿀맛에 도취되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꿀만 빨아먹는 존재와 같다. 이런 점에서 꿀벌은 인간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지구상에 꽃과 꿀벌이 출현함으로써 생태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불과 1억 년 전의 일이다. 과학자들은 꿀벌이 사라지면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한다. 꿀벌이 없는 세상에서 식물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러면 동물도 다시 물속으로 뛰어 들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을 퇴보라 한다. 꿀벌이 생태계의 소중한 존재이듯이 인간도 자연계에서 소중한 존재임은 틀림없다.

 

벌은 꿀을 찾아 꽃을 찾아가고 꽃은 꿀을 주고 열매를 얻는다. 꿀벌이 사라지면 세상은 삭막해질 것이다.

 

아무튼 21세기는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사유재산제도가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인간에게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욕심(慾心)이다. 오히려 인간평등과 보편화로 인간의 욕망은 더 부풀면 곧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이기적 사회로 팽창하고 있다. 선악의 구분이나 기준이 사라지고 뺐고 빼앗기는 원시사회로 회귀하는 느낌이다.

TV나 언론에서 매일 보도되는 환각, 마약, 도박, 음주, 성폭력, 동성애 등과 같은 쾌락과 그에 따른 사회적 폐단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사회를 보더라도, 가장 큰 사회분열 요인은 아파트와 고급승용차, 명품 브랜드의 의상이나 치장물 등 재물이 주도한다. 아파트란 인간이 생활하는데 필수요건인 주택인데 아파트를 재태크 수단으로 사용하며 부()의 가치척도가 되고 있다. 주택을 부의 대물림이나 투자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사고의 전환이 없이는 사회발전도 어렵다. 개인이건 정부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행복을 추구하기는 곤란하다. 여기서 잉여가치는 또 다른 사회적 착취나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이점이 선진국과 다른 부의 개념이다.

세상이 다양화하다보니 출세나 성공의 척도도 크게 변했다. 서울의 강남에 고급주택에서 고급아파트를 타고 골프여행 다니면 성공한 사람으로 자랑하고 또 부러워한다. TV 프로에서 이혼한 유명 연예인이 빚 갚느라고 고생했다는 푸념과 빚 때문에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본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돈()공화국(Money Republic)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굶고 사는 민족처럼 TV를 켜면 고급주택을 자랑하고 먹거리나 찾아다니며 대박을 연발하는 연예인들에게 시청자들도 손뼉 치며 부러워한다. 더 나아가 100세 건강을 이유로 검증되지 않은 해외 식재료를 화학적 분석만을 통해 무작위로 소개하거나 산에 살며 자연만 해치는 자연인(自然人)을 선망으로 생각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도구를 사용하여 창조(創造)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살았는가 보다는 어떻게 살았는지?”가 성공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에는 도덕적 기준이 필요하다.

모두가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연예인은 연기로 가수는 노래로 의사는 병원으로 교수는 학교로 변호사는 법정으로 정치가는 행정으로 돌아가서 자기분야에 몰두해야 한다. 일부 개그 연예인들이 방송이나 전문분야까지 점령하여 전문가가 일자리를 빼앗기는 경우도 본다. 전문분야는 그에 필요한 전문가가 있다. 앵무새처럼 남의 이야기나 읊어주는 게 전문가가 아니다. 이는 비단 연예인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전문가가가 연예인화 됐다는 말이다. 연예인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본연의 역할이다. 모든 전문가들이 연예인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필요는 없다. 연예인들은 특별한 재주를 가졌기에 그 재주를 기술로 승화시키면 인간이 추구하는 예술(藝術)을 창조할 수 있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영화는 작가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연기자의 행위를 움직이는 화면에 담아내는 예술행위다. 영화의 장르에는 독재자의 삶을 미화하는 계몽영화도 있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다큐멘터리도 있다. 대부분 영화의 시나리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픽선(fiction)을 기초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제작된다.

영화는 역사적 기록이나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사회에서는 역사관련 영화, 특히 독립운동, 전쟁, 독재횡포 등과 같은 영화가 흥행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영화가 실체적 사실인양 흥분하거나 감동을 받는 경우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 역사적 사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관중이나 정치권에서 영화배우의 연기보다는 영화의 내용을 두고 공방하며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경우를 본다. 역사적 사실을 상상속의 감성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영화는 선악과 옳고 그름의 주제를 통한 오락의 대상이지 역사교과서가 아니다.

영화를 현실로 착각하면 안 된다. 특히 폭력영화의 경우가 그렇다. 혈기왕성한 젊은 청소년들이 영웅심에서 영화의 장면을 모방하면 안 되듯이 성인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모방하면 범죄에 이르기 쉽다. 영화에 몰입된 나머지 영화를 현실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자아의식이 없기에 현실에서 이단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영화감상에는 높은 의식수준과 깊은 안목이 요구된다. 옷을 모두 벗고 신체를 접촉해야만 에로영화이고 총칼로 찌르고 피를 흘려야만 실감나는 영화는 아니다. 적절한 음악과 배경 그리고 연기자의 명연기가 잘 어울려야 명화가 된다. 전자를 즐기는 사람은 쾌락의 목적으로 감상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오락의 대상으로 감상하는 것이다. 영화 쿠오바디스’, ‘타이타닉’, ‘사운드 오브 뮤직’, ‘인디아나 존스등과 같은 영화는 진실을 바탕으로 명연기자가 관중에게 즐거움을 주기에 명작임에 틀림없다. 시공을 뛰어 넘어 언제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명화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1951년 개봉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라는 뜻의 쿠오바디스라는 영화는 로마시대 폭군 네로치하의 기독교 항쟁을 다룬 영화로 현대인들도 공감하는 걸작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여 돈벌이나 출세의 수단으로 삼는 전문가들은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점술사의 지위를 벗어날 수 없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우리나라에 평화상을 제외하고 노벨상 수상자가 아직 없다는 점도 이점에서 찾아야 한다. 타인이 말하고 쓴 단어(單語) 하나 문장(文章) 한 줄로 그 사람 전체의 업적이나 인격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100세 수명을 누리면 장수한다고 한다. 그런 인간이 1000년의 이기심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보약이나 건강식만 챙겨먹으면 마치 자신은 늙고 병들지 않고 영원히 행복을 누릴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 자체가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사는 것이다. 장수시대를 살다보니 이제는 자식의 근심걱정도 안고 산다. 진정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자식의 대학입시나 선호하는 직장의 입사시험에서 부정사례가 적발되는 것을 본다. 자식에게도 100세의 긴 인생이 있기에 자식의 행복권을 빼앗는 결과다. 행복은 억지로 대물림한다고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AI가 지배하게 될 훗날 세상은 우리의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불로장생에 실패한 대표적 인물은 진시황(기원전 246~210)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만물에 수명이 있듯이 인간도 수명이 있다. 하물며 도리천 천인(天人)들의 수명도 1000살 이라한다. 도리천의 1년이 인간세상의 100년이라니 견줄 수는 없으나 인간의 수명이 아주 짧은 것은 확실하다.

기원전 45억년에 지구가 탄생했고 최초로 생명체가 탄생한 것도 기원전 35억년이다.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의 출현은 한참 이후인 기원전 20만년의 일이다. 더 나아가 문명이라 할 수 있는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불과 1만 년 전의 일이다. 글쓰기를 시작한 인간이 문명생활을 시작한 것은 겨우 5000년 전의 일이며 그 혜택을 누리고 산 것이 고작 2000년 정도의 시간이다. 인간은 지구에서 아직 유치원 학생일 뿐 갈 길이 멀다.

현대인들은 45억년 지구역사에서 겨우 2000년 길어야 5000년 정도 조상의 전통을 이어가며 살아왔다. 더구나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한 것은 불과 수세기 아니면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얄팍한 지식을 통해 알게 된 지식으로 인간이 마치 지구의 주인인양 행세한다. 천년이전의 조상과 천년이후의 후손을 생각하면 욕망만 채우기에 인간은 아직 유약하다. 하루의 해가 짧고 긴 밤 달의 시간도 부족할 뿐이다. 세상의 꿀맛만 즐길 것이 아니라 꿀을 제공하는 꿀벌을 생각해야 할 때다.

행복한 가정은 미리 누려보는 천국(天國)이라 한다. 이 짧은 세상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영광은 큰 혜택이다. 천국을 누려보려면 행복한 가정이 있어야 하고 행복한 가정이란 믿음과 사랑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사천개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금봉산의 호랑바위, 범바위는 호암동을 지켜보고 있다

 

금석뇌약(金石牢約)이란 말이 있다. “쇠붙이 돌과 같이 굳은 약속이라는 뜻으로 금석맹약이나 금석상약과도 같은 뜻이다. 결혼할 때 주고받은 다이아몬드나 금반지도 변치말자는 굳은 맹세의 상징이다. 갑자기 돌()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주변에서 발길에 채이고 바라보면 보이는 것이 돌이고 바위다. 우리보다 45억 전에 운석(隕石)으로 떨어진 돌이 지구가 되었고 거기서 나온 것이 금은보석이며 바위이고 자갈이며 모래인 것이다. 매일 밟고 다니는 흙먼지와 돌을 생각하며 우리의 존재와 미래를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돌 가운데 으뜸이 보석(寶石)이고 보석 가운데 일품이 다이아몬드다. 다이아몬드는 그리스어로 정복할 수 없다는 의미로 아다마스(adamas)에서 유래하였으며 금강석(金剛石)이라고도 불린다. 결혼식 최고의 선물로 일컬어지는 다이아몬드도 알고 보면 지구내부에 있는 마그마가 식으며 만들어진 돌이다.

다이아몬드는 변치말자는 의미로 결혼예물의 최고선물이 되긴 했지만,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왕족이나 귀족이외에는 소유자체도 불가능했다. 다이아몬드는 1866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대규모의 다이아몬드 광상(鑛床)이 발견되고 근대적 채굴법의 발달로 대중화되었다. 다이아몬드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기원전 78세기 인도의 드라비다족()의 장신구로 알려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성숙한 현대의 자본축적도 알고 보면 보석인 금()의 추구였고 이제는 다이아몬드로 옮겨진 상태다. 갑부들의 결혼예물에서도 누가 몇 캐럿짜리 다이아반지나 목걸이를 주고받았다는 기사가 단연 톱기사다. 1캐럿이 0.2g이니 매우 작지만 큰 가치가 있는 것이 다이아몬드이고 보석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아주 작지만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값진 연마기술을 습득해야한다. 45억년의 역사를 가진 다이아몬드의 가공기술이 개발된 것도 19세기의 일이다. 현재 이스라엘이 다이아몬드 가공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터키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약400년 간 거주했던 이스탄불의 톱카프궁전의 보물의 방에 전시된 보석은 당시 술탄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알리고 있다.

 

돌에도 보석을 비롯하여 각종 이름이 있다. 심지어 물에 깎기고 바람에 닳은 바위도 모양에 따라 코끼리바위, 사자바위, 촛대바위, 독수리바위 등으로 불리며 쌀이 나온다는 금강산 미출암, 선녀가 놀았다는 양양 일월산의 선녀암, 자장율사가 부처임 사리를 봉헌했다는 설악산의 봉정암 등도 나름대로의 상징적인 이름이 있다.

이밖에도 두 개의 돌 판에 새겼다는 모세의 십계명과 중국 깐수성(甘肅省)둔황석굴의 벽화도 중요한 종교적 내용을 바위에 기록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바위는 변치 않는다는 의미로 각종 기념비나 종교적 상징물을 돌이나 바위에 기록하고 조각했다.

아직까지 석재를 능가하는 건축자재는 없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대표적이며, 로마의 신전, 성당이나 성인들의 조각상, 불교의 부처상 등도 바위나 석재가 주재료다. 바위는 때로는 우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설이 되기도 한다. 등산객들이 바위를 찾는 이유도 그 전설 때문일 것이다.

세치 혀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말로 죄지은 사람은 발설지옥(拔舌地獄)으로 가고 다음 생에 말 못하는 존재로 태어난다고 한다. 거짓말 헛소리하는 망언(妄言), 말을 지어내는 기언(奇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양언(兩言), 남을 못 되게 험담하는 악언(惡言)들이 난무한다. SNS의 악성댓글이 대표적이고 위정자들이 하는 변명이 그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얼굴이 두껍다하여 철면피(鐵面皮)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철보다 강한 석면피라 부른다. ()은 몸에서 스스로 녹이나와 자신을 망치지만 돌은 그렇지 않다. 석면피 얼굴은 망부석처럼 영원히 세상에 전해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미다. 석면피가 판치는 세상이지만 그들도 인간이다. 그들은 100년의 인생을 10년밖에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철면피는 대부분 믿음이 없거나 약속을 깨는 사람들의 변명에서 나온다. 특히 위정자들의 변명은 듣기조차 거북하다. 음주하고 운전했으면 음주운전이고 뇌물을 받았으면 범죄행위이지 대가성이 없다고 죄가 없다면 누가 믿겠는가! 인간사회에서 불우이웃을 돕거나 자선행위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가없는 행위는 없다.

 

나무는 오래 묵을수록 품격이 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더 우아해지는 바위와는 비교대상이 못된다 .

 

오래전에 100세 넘으신 청원군의 탄공(呑空) 선사께서 경암(鏡巖)이라는 호()를 주셨다. 굳이 해석하면 거울 바위라는 뜻이다. 남에게 거울을 밝히는 바위처럼 살라는 말이기에 무거운 부담을 안고 살아간다. 그 후부터 거울은 못 되더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인간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나 혼자만의 맹세를 약속한 것이 충주 금봉산의 범바위다. 세월이 흘러 그 약속의 상징으로 호랑이 상징물도 세우고 산따라 물처럼 살겠다.”는 노래비도 세웠다. 훗날 나는 떠나더라도 그 범바위는 천년을 더하여 세상을 굽어보며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믿음과 신의가 지켜지는 사회여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을 반세기동안 뒤쫓으며 바쁘게만 살다보니 그 세상을 따라가는데도 지쳤다. 앞 만보고 달리다 보니 잃은 것도 많다. 이제부터라도 잃어버린 자아(自我)를 찾아야겠다. 인간에게 가장 큰 스승은 자연이다. 인명재천을 믿으며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법을 다시 익혀야 할 것 같다.

영원히 사는 꿈을 꾸며 내일 죽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다소 무서운 말처럼 생각되지만 내일 죽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았기에 그마나 의미도 있었다. 내일 없다면, 할 일도 더 많다. 내 즐겨 하는 말 가운데 나중에는 못한 다는 뜻이기에 나중에는 없고, () 중에 가장 싫어하는 새가 가봄새. 역시 세네카의 말처럼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다행히 문명사회에 태어날 수 있는 영광을 누렸기에 반세기이상 우리 사회를 경험할 수 있었고 길게는 5000년 전 우리조상들의 삶도 윤곽은 알 수 있었다. 그 가운데 500년 동안 조선시대의 폐쇄성과 아집도 알았고 일찍이 개방한 아시아국가의 오늘도 보았다. 더 나아가 개방은 있었지만 차별받던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세상도 배웠다. ()을 버린 인간세상도 보았고 종교를 국가이념으로 삼는 국가도 보았다. 가정에서도 형제자매의 편협한 이기심도 보았다. 인생의 참 공부였다. 백년인생을 천년의 생각으로 살아가니 아직도 할 일이 많다. (2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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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알리는 알람시계, 치킨(chicken)

 

그리스의 시인 크라티누스(Cratinus)는 닭을 새벽을 알리는 페르시아의 자명종(Persian alarm)”으로 불렀다.

 

닭은 새벽을 알리는 자명종(自鳴鐘), 요즘 말로하면 알람시계. 닭은 빛에 민감한 야맹증동물이다. 하지만 닭은 눈과 피부로 빛을 알아내며 빛을 느낄 땐 혈액농도가 높아져 생리적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 이유로 닭은 영물(靈物)로 알려지고 있다.  

농장에서 닭과 함께한 우정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꽃씨심고 화단을 정리할 때 졸졸 따라다니며 친구해주고 농장을 떠날 땐 예쁜 알을 선사해주던 닭들이 지금도 그립다. 주말이면 찾는 농장이지만 꽃과 나무만의 정적인 아름다움에 더하여 활동적인 동적인 친구가 필요했다. 어린 시절 냇가에서 꽥꽥거리며 꼬리 흔들고 줄지어 다니던 오리생각이 나서 한번 키워볼까 했다. 하지만 아내가 오리는 싫다고 하여 닭을 키워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외로워 닭을 키웠다. 대부분 사람들은 키워서 잡아먹거나 계란을 먹기 위해서 닭을 키운다. 남에게는 사치스러워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목적은 친구로 함께 지내기 위해 닭 별장이라 불릴 정도의 쾌적한 환경(環境)을 만들어주었다.

주말에 들르는 농장이기에 들짐승으로부터 보호도 필요했고 자주 사료를 줄 수 없어서 야생으로 키워보려고 넓은 닭장을 지었다. 물웅덩이를 사이에 두고 나무를 기둥삼아 울타리용 쇠 철망을 4-5m이상 두르고 다시 그 위에 섬유로 된 그물망을 더 높이 치고 예쁜 집을 만들었다. 닭들의 천국이라 생각하고 닭장을 멋있게 꾸몄다.

장날 토종병아리 몇 마리를 구해서 입주시키고 오디도 주워 먹이고 산사, 보리수 열매, 알프스 능금도 즙을 내어 정성껏 키웠다. 그 닭이 이듬해 알을 선사하며 훌륭한 친구가 돼 준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들짐승의 공격에 모두 없어지고 겨우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몇 장만이 남았다. 그런 이유로 닭에 대해 남다른 추억이 있다. 지금도 사진을 보며 행복한 시절을 떠 올리지만 단지 지나간 추억일 뿐이다.

 

야생동물의 침입을 우려해 4-5m 이상 울타리를 만들었지만, 닭은 훌훌 날아 울타리를 넘나들었다.

 

닭은 영어로 치킨(Chicken)이다. 닭이라는 제목을 정하고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들어 요즘 흔히 쓰는 치킨이라고 달아본다.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는 치킨게임(Chicken Game)이 유행했다. 절벽을 두고 달리다 먼저 핸들을 꺾는 사람이 겁쟁이(치킨)라는 뜻으로 게임에서 진다. 우리사회도 언제부터 치맥이라는 정체불명의 용어가 생겼다. 통닭보다 치맥이 더 잘 알려진 세상이니 치킨이 더 신선한 느낌을 준다.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편협한 행동을 할 때 닭대가리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닭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닭은 새벽을 알리는 자연계의 자명종(自鳴鐘), 즉 살아있는 알람(alarm) 시계다. 우리 조상들은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시간을 가늠하여 제사를 지냈다. 닭은 초저녁에 울면 재수가 없다하고 밤중에 울면 불길하다하며 수탉이 해진 다음에 울면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믿는 벽사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닭의 시간개념은 신비롭다. 오후에 해가 저물면 잠을 자기 위해 어김없이 나무 꼭대기로 올라간다. 고집도 무척 세다. 제아무리 포근한 집을 지어주어도 병아리시절부터 절대 땅에 있는 집에서 잠을 자는 법이 없다. 무조건 나무 꼭대기로 기어오르고 성장하니 날아서 나무로 올라 잠을 잔다. 주목나무에 망을 치고 닭 집에 볏짚도 깔아주고 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고집 센 나도 닭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먹이를 찾던 닭이 둥지에 들어가는 시간이 오후 5~7, 유시(酉時). 닭은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주목나무 위에서 잠자리에 든다.

 

야생의 닭은 잠을 잘 때는 반드시 지상을 떠나 날아서 나무 꼭대기에서 잠을 자는 고집 센 새().

 

닭이 날아서 나무 꼭대기에서 잠을 자는 걸 보면 새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밤에는 세상을 모른다. 손으로 만져도 날아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들짐승들에게 불행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닭은 날이 밝으면 울음으로 새벽을 알리고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닭이 새벽을 알리는 자연의 자명종(自鳴鐘)인 알람시계가 분명하다.

기원전 5세기 중엽 그리스의 시인 크라티누스(Cratinus)는 닭을 페르시아 경보(the Persian alarm)”라 불렀다. 기원전 414년 아리스토패네스(Aristophanes)는 그의 희곡 새들(The Birds)”에서 닭은 동쪽의 메디아, 즉 페르시아를 소개하는 페르시아의 새(the Median Bird)라 불렀다.

 닭은 반드시 물이 필요하고 수탉은 무리 중 한 마리만 있어야 한다. 수탉이 두 마리 이상이면 세력다툼에 처절한 피의 사투가 벌어지고 승자가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한다. 병아리들이긴 했지만 그들은 항상 수탉을 따라 다니며 먹이활동을 하며 가끔 먹이를 주기위해 닭장에 들어가면 우두머리를 따라 줄줄이 도망친다. 병아리 시절부터 여러 개의 홰를 층층이 만들어 편안한 집을 지어주었지만 결코 집에서 자지 않고 주목나무 가지를 타고 올라가 비좁은 틈에서 잠을 잔다. 주목나무를 그물망으로 감싸기도 했지만 나뭇가지 사이의 틈을 비집고 올라가기에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 와중에 몇 마리가 가지에 목을 찔려 죽기도 했다. 몇 달이 지나자 아예 날아서 나무 꼭대기로 올라간다. 고집 센 사람을 똥고집이라 한다. 내 생각에는 닭고집이 진짜 똥고집인 것 같다.

 

울타리 내부에 홰를 만들어주었지만, 병아리 때부터 이곳을 외면하고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잠을 잤다.

 

야생으로 키우다보니 먹이도 특이하다. 열심히 주는 사료는 외면하고 땅을 파서 벌레를 잡아먹거나 풀을 뜯어 먹는다. 처음에는 나만 보면 도망치고 사료도 무시하기에 얄밉다는 생각도 했다. 대략 4개월쯤 되자 낮에는 날아서 울타리도 넘고 밖에서 먹이활동하고 밤에는 다시 울타리안의 나무 꼭대기서 잠을 잔다. 그러는 사이 다시 들짐승에게 희생되어 암탉 한 마리만 남게 되었다. 농장에는 들 고양이와 살쾡이 같은 야생동물들이 돌아다녔다. 고양이나 살쾡이는 닭을 죽이기는 하지만 먹지는 않는다고 하니 분명 그들의 짓인 것 같다.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먹지도 않을 닭을 왜 물어 죽이는지? 어쨌든 희생당한 닭들이 불쌍해서 이것도 못할 짓이라 생각했다.

닭의 희생에 대한 죄책감과 실망 때문에 닭 사육의 포기를 결심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암탉 한 마리가 불쌍하다고 여겨 예쁜 수탉을 한 마리 구해서 짝을 지어주었다. 겨울이 다가오자 그 마저도 자취를 감추고 닭장은 텅 비었다. 물론 먹이도 줄 수 없었다. 농장에서 허탈감은 닭을 키우기 전보다 더 컸다.

닭은 잊은 채 농장도 새해를 맞았다. 정초에 농장을 찾았더니 먹이도 주지 않았는데 암수 두 마리가 울타리 주변에서 다정하게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너무 신기하여 뛸 듯이 기뻤다. 마치 집 나간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반가운 안도였다. 역시 닭은 생존력이 강한 새였다.

옛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1980년대 중반에 농장에서 토종닭을 키운 적이 있다. 그때는 농장관리인이 있었기에 그저 사료만 사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욕심도 많아서 병아리 한 박스를 사서 키웠고 두 세 달이 지나자 사료가 기하급수적으로 들어갔다. 나는 닭을 잡을 수 없었기에 성장한 닭들을 지인들에게 나눠주며 치우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사료를 감당하기 힘들어 애완용으로의 닭 사용은 포기했다.

이듬해 농장에서 암탉이 주목나무 밑에서 병아리를 키우며 몰고 다니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 닭의 생존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경험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비정했지만 먹이를 주지 않았다. 예상대로 야생이 된 닭은 나 없이도 잘 성장하여 농장의 봄을 맞이했다. 닭은 수천 년 동안 인간에 의해 사육돼온 가금(家禽)이기는 하지만 1억년이전의 본성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닭은 정말 강하고 독한 새임이 확실하다.

 

먹이도 주지 않았는데 닭 부부는 추운 겨울 울타리 밖에서 다정하게 먹이활동을 하며 살아남았다.

 

닭은 본래 신성한 동물이었다. 닭은 새벽을 알리기도 하지만 닭의 울음소리는 귀신을 쫓는 벽사(辟邪)의 기능도 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닭이 제때에 울지 않으면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신라인들은 특히 닭을 신성시했다. 서기 65년에 신라 탈해왕 때 경주 김 씨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신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숲속에 금궤가 걸려 있던 나무 아래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하여 이를 신성하게 여겨 그 숲이 계림(鷄林)이라는 국명이 되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던 날 우물에서 닭 모양의 용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 자태와 얼굴이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고 한다. 박혁거세 부인이 된 알영은 백성에게 농사와 누에치기를 가르쳤는데 신라인들은 그를 땅의 신이자 곡식의 신으로 숭배했다고 한다.

닭 머리에 쓴 관은 문을 상징하며 벼슬과 연관 지어 계관(鷄冠), 닭의 볏이라 한다. 닭은 오덕(五德)이 있다고 한다. 머리에 관을 쓴 것은 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것은 무(), 적에 맞서 물러나지 않는 것은 용(), 먹을 것을 서로 나누는 것은 인(), 밤을 지키고 새벽을 알리는 것은 신()이라 한다. ()의 발톱이나 고구려 무용총의 주작(朱雀)도 닭의 발톱이나 볏을 상징이라 한다.

동국세시기정월원일(正月元日) 벽 위에 닭과 호랑이 그림을 붙여 액이 물러나기를 빈다.”는 기록이 있으며, 닭은 액을 막는 수호초복의 동물을 상징하며 정월 첫 유일(酉日)닭의 날이라 하여 이 날은 부녀자의 바느질을 금하였다. 또한 정월 보름에 닭 울음소리가 열 번을 넘으면 그 해에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여성을 비유하는 말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속담과 임산부가 닭고기를 먹으면 태아의 피부가 닭살처럼 된다하여 임신 중인 여자는 닭을 먹지 말라.”는 전설은 닭의 신성함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일 것이다.

닭 그림은 입신출세와 부귀공명을 상징한다. 조선시대에 학문과 벼슬에 뜻을 둔 사람은 서재에 닭 그림을 걸어두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닭의 볏, 즉 계관(鷄冠)의 모양이 벼슬을 상징하는 관()을 쓴 것이라는 의미다. 닭과 맨드라미가 함께 있는 그림은 최고의 입신출세를 상징했으며, 닭과 모란이 함께 있는 그림은 부귀공명을 의미했다. 또한 닭 그림은 다산을 기원하는 것으로도 사용됐다. 조선후기 화가 변상벽의 암탉과 병아리그림에서 어미 닭과 병아리 십여 마리는 자손의 번창을 의미한다.

 

닭은 수탉을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수탉이 새벽을 알리듯 집안도 혜안(慧眼)을 갖춘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가정은 발전한다.

 

닭은 중국의 12지 가운데 10번째 상징동물이다. 중국의 민속종교에서 종교적 제물로 제공되는 닭고기는 조상숭배와 마을 신()의 숭배에 한정된다. 일반적으로 기쁜 축하행사에서는 구운 돼지고기가 사용되지만, 닭고기 공양은 진지한 기도와 함께 봉헌된다. 중국의 유교 결혼식에서는 중병에 걸리거나 의식에 참석할 수없는 사람, 예를 들어 갑작스런 죽음을 대신하여 닭을 사용한다. 오늘날에는 거의 실행되지 않지만, 빨간색 명주 천을 닭의 머리에 씌우고 결석 한 신랑이나 신부의 가까운 친척이 닭을 안고 의식을 진행한다.

유럽에서도 닭 그림은 그리스의 붉은 그림과 검은 그림 도자기에서 발견된다. 유럽에서 최초의 닭 그림은 기원전 7세기 코린트식 도자기에서 발견된다.

이밖에도 닭은 귀중한 약재로 사용되어 왔다. 동의보감에서는 붉은 수탉은 단응계(丹雄鷄), 흰 수탉은 백응계(白雄鷄), 검은 수탉은 조응계(烏雄鷄) 또는 오골계(烏骨鷄)로 나누어 그 효험과 사용법을 알리고 있다.

아무튼 고대부터 닭은 대부분 문화권에서 신성한 동물이었으며 신앙체계와 종교적 숭배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스인들은 수탉을 페르시아 새라고 불렀으며 이는 페르시아의 종교적 사용에 따른 것이다. 유럽에서도 닭은 원래 닭싸움이나 종교적인 의식을 위해 키웠으며 헬레니즘 시대가 지난 이후에나 비로소 식용으로 키우기 시작하였다.

 

닭은 본래 신성한 동물이며,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기능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닭이 일반적으로 제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닭이 이국적인 동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사자조차도 수탉을 두려워한다고 믿었고 이솝우화도 이러한 믿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닭은 그 용기(勇氣) 때문에 전쟁의 신 아레스(Ares), 제우스의 아들이며 인간의 신성한 보호자인 헤라클레스(Heracles), 지혜의 여신인 아데나(Athena)처럼 여겨졌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우리는 의술의 신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졌다.”는 말을 남겼다. 소크라테스가 마지막 한 말은 죽음이 삶의 병을 치료한다는 의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인) 크리토(Crito)에게, 나는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우수(Asclepius)에게 수탉을 빚졌다. 그 빚을 갚는 것을 기억하겠는가?”라고 플라톤이 술회했다. 자신의 죽음을 신성한 (약효를 갖고 있는) 수탉에 비유하며 남긴 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닭은 힌두교의 화장(火葬) 의식에 큰 의미가 있다. 닭은 의식기간 중에 나타날 수 있는 악령을 위한 통로로 간주된다. 닭들은 다리가 묶여지고 행사기간동안 모든 악령이 가족구성원이 아닌 닭들에게 들어가도록 의식행사에 닭을 참여시킨다. 의식행사가 끝난 후에는 닭은 집으로 가져가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간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배신을 예언했다. “베드로여, 오늘 수탉이 울기 전에 당신이 나를 아는 것을 세 번 부인할 것이다.” 그런 일이 발생하고 베드로는 심하게 울었다고 한다. 그에 앞서 예수는 예루살렘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자신을 어미 암탉에 비유하였다. “! 예언자들을 죽이고 당신에게 보내진 사람들을 돌로 만드시는 예루살렘, 예루살렘이여! 암탉이 그녀의 날개 아래에 병아리를 모으는 것처럼 내가 당신의 어린 양들을 얼마나 모으고 싶었는지! 그러나 당신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6세기에 교황 그레고리(Pope Gregory) 1세는 수탉을 기독교의 상징으로 선언했다. 9세기에는 교황 니콜라스(Pope Nicholas) 1세의 교황제정으로 수탉의 형상을 모든 교회 첨탑에 두도록 명했다. 유럽의 민화(民話)에서 악마는 수탉이 처음 울 때 처음으로 도망친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수탉의 울음은 동서양에서 벽사의 기능이 있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수탉은 프랑스의 상징이다. 프랑스의 상징으로 갈리아 수탉(Gallic rooster)을 선택한 것은 로마제국의 붕괴와 갈리아(Gaul)의 형성에 근거한다. Gallus는 라틴어로 수탉을 의미한다. 수탉을 프랑스의 상징으로 삶은 것은 수탉의 용기(勇氣)와 신의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유대인 관행에서는 정결한 동물이 머리를 감은 다음 오후에 속죄일인 욤 키푸르 (Yom Kippur)’ 전에 카파로스(kapparos)라 불리는 의식에서 닭이나 생선이 도살된다. 동물이 카파로스에서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기 때문에 동물의 희생으로 속죄를 받는 것이다. 여자는 의식에 암탉을 가져오고 남자는 수탉을 가져오며, 의식 후에 고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된다.

농장일은 대개 3월 초순부터 시작된다. 꽃씨도 뿌리고 화단을 정리하는데 엄동설한을 무사히 넘긴 한 쌍의 닭 부부가 찾아와 먹이활동도 하며 함께 봄을 맞는다. 사람을 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따라다니며 더 가까이 한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즐거움도 같이 나눈다. 이에 머물지 않고 조경수 아래 양지바른 곳에 알도 한 무더기씩 낳아 놓는다. 알을 챙겨 가면 자리를 옮겨 다른 곳에 알을 낳는다. 야생으로 키운 닭이라 달걀의 크기는 작았지만 노른자가 크고 맛은 정말 고소했다.

수탉의 암탉 사랑은 대단하다. 한번은 들 고양이가 나타났는데 수탉이 암탉을 가로막고 앞장서서 양 날개를 크게 펴고 한참을 위협하니 들 고양이가 기죽어 달아나는 모습을 보았다. 수탉은 든든한 동반자로서 암탉을 보호하고 암탉은 그 수탉을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수탉의 배우자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추종을 불허한다.

 

경북 의성의 열계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탉 한 마리와 암탉 세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웃집 수탉이 공격하여 수탉이 죽었다. 그 후 암탉 두 마리는 이웃집 수탉과 함께 살았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이웃집 수탉을 보면 늘 피해 다녔다. 이 암탉은 죽은 수탉과의 사이에서 생긴 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아리가 깨어나 성장한 어느 날 암탉과 새끼들은 이웃집으로 날아가 수탉의 목을 쪼아 죽였다. 암탉은 돌아오다 문 앞에서 죽고, 새끼들도 어미가 죽은 것을 보더니 모두 문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닭도 부부의 의리를 지키고,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야기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충분히 이해가 간다.

유대교의 경전 탈무드(Talmud)’에서는 수탉으로부터 배우자에 대한 예의를 배우라고 한다. 닭은 부부애는 물론 신의(信義)의 상징이다.

어린 시절 조부님의 "아내 사랑"을 닭을 키우며 깨달았다. 할머님은 집안에서 여왕처럼 모셔졌고 할아버님은 든든한 반려자였다. 맛있는 과자나 먹거리가 있으면 할머님이 1순위였고 그 누구도 감히 불평을 할 수 없었다. 귀가 어두워 워낙 말씀이 없기도 하셨지만 그 누구도 할머님께 저항하는 자식을 본적이 없다. 할머님 배후에는 엄격한 할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조부님은 예의범절을 무척 중요시했기에 동네에서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소문이 나있었다. 당시에 가장(家長)은 집안의 절대자였기에 가능했을지는 모르나 나쁜 점은 아닌 것 같다. 든든한 반려자가 떠난 장례식 날, 묘지의 잔디를 쥐어뜯으며 통곡하시던 할머님에게서 부부의 진정한 사랑을 확인했다. 아내의 회갑 때 자식들에게 그 사실을 전하며, “이제부터 우리집의 왕은 너희 어머니이니까, 누구든 어머니를 존경하고 따르라! 나 역시 앞으로 그렇게 살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유대교에서는 "수탉으로부터 배우자에 대한 예의를 배우라"고 가르친다.

 

한번은 농장에 갔더니 컨테이너 앞 반송아래 달걀이 한 무더기 있었는데 긴 뱀이 죽어있었다. 섬뜩했지만 우리 가족을 위해 위험을 제거해주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닭에게는 미안했지만, 매주 달걀을 수거하여 포근한 솜에 정성껏 싸서 귀경하는 길은 행복 그 자체였다.

그즈음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시고 계셨기에 아내는 수거한 달걀을 삶아서 어머님 병실의 다른 할머님들에게도 드렸다. 할머님들이 맛있다며 옛날 닭 키우던 일화까지 들려주신다. 비록 어머님이 병실에 계시긴 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번은 농장에 들렀더니 수탉이 컨테이너 옆에 죽어 있었다.

불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어린 병아리들처럼 미안하다. 다음 세상에는 천국으로 가거라!”하며 잘 묻어주고 향도 피워주었다. 불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다음 주에는 암탉이 수탉이 죽은 곳에서 멀지 않은 단풍나무아래서 똑같은 변을 당했다. 다시 묻어주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 한 달여 후에 어머님도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부부에게 이중의 애사(哀史)가 겹친 것이다. 예언이라도 하듯 닭들이 떠난 후 집안에는 불행이 계속되었다.

설성가상으로 어머님 장례 후 경전철의 비상탈출구가 농장 전체에 걸쳐 예정돼 있었고, 동생들도 농장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며 우리가족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불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18년에는 공사장의 토사가 장맛비에 농장으로 흘러내려 진입로가 크게 훼손되었다. 창고와 항아리 심지어 컨테이너도 토사에 묻혀 큰 피해를 입었다. 화단은 물론 닭장도 물웅덩이가 모두 흘러온 토사에 묻힌 채 폐허가 되었다.

큰 좌절과 허탈감속에 새해를 맞았지만 재기하려는 의지도 사라졌다. 그러나 닭과의 행복했던 추억은 잊을 수 없었다. 심기일전하여 생각해낸 것이 결국 닭에 대한 애착이었다.

우리집에는 닭에 대한 일화가 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닭을 키워 계란도 먹고 현금화하기도 했다. 오늘날 작은 슈퍼에 해당하는 달오네 가게라는 작은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계란을 모아주면 현금화가 가능했다. 1950년대는 무척 어려운 시기라 화폐도 귀했고 집안에 현금은 거의 없었다.

언젠가 할아버지께서 집에 오셨는데 떠나실 때 드릴 노잣돈이 없었다고 한다. 모아 놓은 계란이 몇 개 있기는 했으나 그것으로는 차비가 모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님은 닭이 알을 낳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그 시각이면 알을 낳는데 그날은 기미조차 안 보여 어머님은 초조했다. 어머님은 집을 나서려는 할아버님을 계속 만류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며 닭이 알을 낳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을 끈 덕분에 닭이 꼬꼬댁하며 알을 낳자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 가 없었다고 한다. 달걀을 껴안고 한달음에 가게로 달려가 돈을 마련해 시아버님을 보내드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지금도 닭의 고마움에 대한 그 말씀을 몇 번인가 계속 반복하시던 어머님의 생각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하나 마흐말바프이 감독한 이란영화 학교로 가는 길에 나오는 달걀 파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는 나에게 매우 감동적이었다.

 

다시 찾아온 행복에 닭들은 마지막으로 우리 식구수와 같은 5개의 계란을 남기고 농장과 이별했다.

 

이듬해 봄이 되자 마음의 상처라도 치유하고자 심기일전하여 닭장을 보수했다. 망가진 울타리를 보수하고 지붕은 그물망으로 새롭게 촘촘히 씌웠다. 그런 후에 어린 수탉 한 마리와 암탉 두 마리를 입주시켰다. 닭의 고집은 여전했다. 이번에는 망을 씌운 주목나무를 피해 지붕을 씌운 소나무 가지에 둥지를 튼다. 몇 개월 더 지나 성장하더니 계속 울타리 밖을 날아다닌다. 아무리 집을 예쁘게 꾸며 주어도 집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마음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잠은 집에 들어와 자니 안심은 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실력도 대단했다. 한번은 이웃집 개가 나타나 따라 나니니 날기 시작한다. 2m를 넘는 주목나무 위를 푸드득 푸드득 소리치며 날아다니며 개를 피한다. 장마철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자 잘 만들어준 보금자리에 알을 5개 낳아주었다. 우리 가족 수만큼 낳았다며 너무 반가워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 아내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 다음 주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농장을 찾았다. 하지만 불행이 다시 찾아왔다. 닭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향을 피우며 장례를 치러주며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남동생도 세상을 떠났다. 다시 찾아온 행복은 아주 짧은 순간에 끝이 나고 불행은 계속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의 가족 수만큼 5개의 계란을 남기고 닭들이 농장을 떠났다. 두려운 마음에 다시 닭을 키울 생각은 접어야 했다.

그러나 닭과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학교강의를 그만둔 터라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저 무위도식하기가 뭣해서 종교와 설화라는 글을 쓰고 있었는데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고대 유적지가 나타나고 그곳이 모헨조다로라고 한다.

처음 듣던 지명이라 모헨조다로를 잊어버릴까봐 깊은 밤중임에도 눈을 비비고 서재로 뛰어 내려가 컴퓨터를 켰다. 거의 탈고가 돼가는 상태였지만 모헨조다로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었고 원고에는 전혀 언급도 되지 않은 낯선 용어다. 인터넷으로 계속 자료를 찾았더니 모헨조다로는 닭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유적지였다. 그 순간! 내가 보내준 닭들이 영감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결코 상상할 수 있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손톱으로 손등을 꼬집어보았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꿈속에 나타난 모헨조다로 유적지는 인간의 최초의 닭 사육지였다(출처: en.wikipedia.org).

 

우르두어로 죽은 자의 돌 더미를 의미하는 모헨조다로(Mohenjo-daro)는 신드, 파키스탄 지방의 고대유적지다. 모헨조다로는 기원전 26세기에 건설되었다. 모헨조다로는 기원전 3000년경 인더스 문화가 발달했던 하라파 문명으로 알려진 고대 인더스 문명의 최대 도시 중 하나였다.

본래 도시의 본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금석학자인 이라바담 마하데반(Iravatham Mahadevan; 1930-2018)은 그 도시의 고대 이름은 쿡쿠타(Kukkuta) 도시(rma)’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수탉 싸움은 식량의 원천이라기보다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사육한 닭과함께 도시의 의식적이고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며, 모헨조다로는 닭의 세계적 가축화를 위한 확산지점이었을 것이 그의 주장이다.

나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쿡쿠타라는 지명이다. 이 지역 고대어에서 쿡쿠타는 잠에서 우리를 깨우는 수탉또는 닭싸움과 관련돼 있다. 도시의 이름이 닭의 울음소리 쿡쿠와 관련 있는 의성어이기에 더욱 신기하다.

삼국유사4권에 따르면, 옛날에 인도에서 신라를 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라 불렀다한다. 여기서 구구탁은 닭을 말하며, “예설라귀하다라는 뜻이라 하여 신라를 닭을 귀하게 여기는 나라라고 했다고 한다. 한국 역사학계의 진전된 연구결과가 궁금하다. 정말로 구구탁이 옛날의 닭을 말하는지?

쿡쿠타(Kukkuta)’이든 구구탁이는 닭의 의성어 쿡쿠와는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쿡쿠타가 모헨조다로의 도시를 말한다면, 닭의 최초 사육지라는 설도 설득력이 있다. 그리스에서 페르시아의 새로 언급됐듯이, 이 지역은 힌두교 문명지역과 관계가 있다. 아울러 최초의 닭 사육지를 오늘날 파키스탄 지역으로 추정하는 점과도 일치한다. 모헨조다로에서 닭이 제례(祭禮) 시에 신성한 봉헌물로 사용되었다는 점과 인도네시아에서 닭 제례의식이 전해짐도 이 위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모헨조다로가 닭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확인한 나는 농장에 남긴 “5개의 알과 영혼의 계시때문에 닭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닭 사육은 기원전 8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닭은 개, 돼지와 함께 최초의 오세아니아 신석기시대 태평양 문화, 즉 래피타(Lapita) 문화의 사육동물이었다. 또한 최초의 닭 사육지로 거론되는 지역은 오늘날 파키스탄 지역으로 거론되며, 그 후 태국에서 대규모 사육이 아시아지역으로 전파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닭은 귀하고 연회를 위한 명품음식이었으며, 델로스(Delos) 섬이 닭 사육의 중심지로 알려지고 있다. 기원전 약3200년경 오늘날 파키스탄의 신드(Sindh)에서는 닭 사육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아리안족의 공격이후에 이 닭들이 신드에서 발라카(Balakh)와 이란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식용을 위한 닭 사육은 돼지나 양보다는 훨씬 후세의 일인 것 같다. 그러나 닭 사육은 짧은 시간에 고기와 계란을 얻을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기에 인간의 육류소비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닭은 생후 170~200일이 지나면 번식능력이 있으며 연간 100~220개의 알을 낳는다.

치킨이 식량을 위한 최대 자원임에는 틀림없다. 2018년 통계에 따르면, 식용으로 닭이 690억 마리, 돼지 15억 마리, 칠면조 65,600만 마리, 57,400만 마리, 염소 47,900만 마리, 3200만 마리가 도축된다고 한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소비되는 계란은 매년 약12천억 개에 달한다. 한국인도 연간 약10억 마리의 치킨을 소비하며, 연간 1인당 254개의 계란을 소비한다. 놀라운 수치다.

 

농장에서 닭과 보낸 행복했던 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음에 고이 간직되고 있다.

 

요즘은 닭의 수난시대다. 인간이 집에서 키우며 오랫동안 보아온 탓인지 닭에 대한 일화도 많다. 흔히 쓰는 말 가운데 닭대가리”, “촌닭”, 계륵‘,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 .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한여름 복날에 즐겨먹던 삼계탕 정도가 보양식으로 인기였다. 그 시절 닭갈비라는 계륵(鷄肋)은 닭갈비에는 살이 없어서 먹기도 그렇고 버리기도 아깝다는 뜻이다. 닭이 흔한 요즘은 닭 가슴살만 발라먹을 정도로 인기식품이 닭요리다. 닭발요리는 인기가 있지만, 아직 닭 머리요리는 생소하다. 제사상에도 머리가 있는 닭을 봉헌하는 걸 보면 닭 머리요리가 유행하지 않는 점은 다소 이해가 간다. 아무튼 우리의 육류식단에서 단연 1위를 차지하는 치킨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 의미가 많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속어 가운데 영계라는 말이 있다. 대부분 젊은(young) ()”으로 알고 있지만, 본래 연계(軟鷄)라는 말이 변형된 것이다. 연계란 약이 되는 어린 닭을 말하는 것이나, 몸에 좋다는 의미로 옛날 주막이나 술집에서 젊은 여자나 기생을 부르던 말이다. 이러한 연계가 최근에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영계로 사용되며 나이트클럽 같은 곳에서 젊거나 어린 청소년을 의미하는 속어로 사용되고 있다.

한때는 신성한 동물로 취급받던 닭이 이제는 식량의 주공급원이 된 것이다. 양계장에서 사육되는 수많은 닭들을 생각하면 자연의 자명종도 자취를 감출 날도 멀지 않을 것 같다. 치맥을 즐기는 젊은이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신성한 닭들이 인간의 위한 희생물로 내 몸에서 악령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즐겨야겠다.

닭이 알에서 나왔다는 점은 확실하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1919년 그의 유명한 소설 데미안에서,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프락사스다.”라 했다. 닭이 알보다 먼저 태어났을 거라는 가정은 틀린 말이다. 모든 생물은 알에서 태어났다. 닭은 분명히 알을 깨고 나온 새다. 그래서 투쟁력과 생존력이 강하다.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밝은 밤 별 없는 하늘에 수탉이 슬피 운다.

암탉도 백주에 눈부셔 새벽인 줄 알고 부산하다.

 

닭의 목만 비틀면 먹구름 새벽이 온다.

암탉만 우는 세상은 혼돈의 세계다.

 

높은 관 꼬리 긴 붉은 수탉이 없다.

어둠 밝히고 개벽 알리는 주작이 기다려진다.

 

몸집이 큰 새들은 공룡이 멸종했을 때도 닭은 살아남았다. 그 가운데 일부가 진화하여 오늘날 사육되는 닭이 되었다. 닭은 꽃과 나비가 출현하기 이전인 기원전 1억년 이전에 젖 먹이 동물인 포유류보다도 먼저 출현하여 오랜 세월 진화하였다. 그래서 조류이기는 하지만 열매보다는 땅속의 벌레를 잡아먹고 흙도 먹기에 모래주머니도 있다. 그만큼 오랫동안 진화해온 동물이 닭이다.

충주에는 계명산(雞鳴山)이 있다. 옛날에 이 산에 지네가 많았다고 한다. 지네의 피해를 없애고자 산에 닭을 키웠다고 한다. 닭이 우는 산이라 하여 계명산, 닭다리가 많다하여 계족산으로 알려진 계명산 서편에 충주시가 있고 동편에 충주댐이 있다. 닭의 생존력이 강하다는 증거다.

닭에 대한 내력을 알고 나니 닭에 대한 경외심마저 든다. 인간의 식량을 위해 좁은 양계장에서 짧은 삶을 마감하는 닭들을 보며 슬픈 생각을 한다.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애완동물로 반려동물로 동물의 권리를 누리는 현실을 보며 닭의 권리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튼 농장에서의 닭과의 행복했던 추억은 다른 반려동물의 삶도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동물을 키우지만 사육당하는 동물은 인간에 위한 희생물이다. 지금도 아내와 종종 농장의 닭 이야기를 한다. 고향에서 노후생활을 보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는 실수 없이 닭을 잘 키우며 자연의 자명종 소리도 듣고 자연과 어울리는 생활을 하고 싶다. (2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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