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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But Rich

 

결혼기념 이별여행 - 경주

 

결혼 33년 만에 다시 찾은 경주 안압지에도 인연의 수레바퀴는 돌고 있었다.

 

박달재 넘어 유랑시인 김삿갓도 만나고

 

사랑하는 박달의 과거급제를 손 모아 빌던 금봉이의 한 맺힌 눈물이 서린 천등산 박달재

 

한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초하루 가족을 불러 모았다. 시집간 큰아이 가족은 피해 줄까봐 피하고 우리가족 네 명만이 고향집 충주에서 만났다. 갑작스런 여행제안에 가족들은 행선지도 모른 채 따라나섰다. 그저 가면서 상의하자고 서둘러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바닷가라도 찾아가고 싶었다.

영월을 거쳐 자주 가본 강릉의 바닷가나 가볼까 했다. 제천가는 영덕리 사거리를 지나 천등산 박달재로 향하니 어머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생활하시던 생가나 시댁 그리고 마지막 계셨던 병원도 여기서 가까웠고 불과 며칠 전 모신 선영도 가까운 천등산 아래 황전에 있기 때문이다. 722일 어머님 장례를 모신지 열흘밖에 안된 날이었다. 성도사에 49재를 입재하고 돌아오니 한여름인데도 기이하게 정원에 산목련이 피었고 농장에도 자목련이 만개했다. 어머님이 유독 좋아하시던 꽃이 뜬금없이 피었으니 길조라 생각했다.

부모님이 모두 가족을 떠나 장남의 어깨는 무거워졌고 혼자 남아 집지키는 어린애처럼 불안하기도 하다. 설상가상으로 동생들은 삼우제가 끝나자 49재는 관심이 없다며 재산문제만 따지더니 49재 입제하고 돌아오니 은행의 예금계좌도 정지시켜 놓았다. 장례 후 처리할 행정문제가 산재했음에도 골치 아픈 전화만 매일 온다.

황순원의 소설 카인의 후예가 떠오르고 성경속의 아벨과 카인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무튼 상중이니 머리나 식히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달리다 보니 천등산 터널입구가 보인다. 자주 애용하던 도토리묵 생각에 박달재에 잠시 들렀다. 새로운 조형물도 많이 생겼으니 구경이나 하고 가자하니 가족들은 관심도 없다. 그저 사진 몇 장 찍고 영월로 행했다. 강릉을 가려면 영월을 거쳐야하고 그곳에 녹전은 아내가 첫 교편을 잡은 곳이다. 녹전의 학교도 다시 보고 싶었다.

제천가는 박달재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아버님 생각이 난다. 청풍요양병원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 되었다. 폭풍우 속 장례식 때 두 동생들이 노란완장 차고 설쳐댈 때 상처도 아직 머물지 않은 상태다.

어쨌든 별다른 지병이 없으셨던 어머님이 86세의 연세로 돌아가셨다. 어머님의 어머니 외할머님이 100세의 연세로 떠나신지 6년만의 일이다. 인생무상이다. 제천시내를 가로지르니 간병인 모습도 떠오른다.

오랜만이라 영월 가는 길도 낯설다. 우선 영월군청으로 가서 관광안내도를 살폈다. 방랑시인 <김삿갓 문학관>이 눈에 띈다. 공원처럼 꾸며진 문학관에 갔으나 가족들은 역시 시큰둥한 반응이다. 여행기분을 돋아주기 위해 주변 <아프리카미술박물관>도 들렀다. 마침 에티오피아, 커피축제와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 좋은 시간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큰 실망과 함께 발길을 돌려 <조선민화박물관>으로 갔다. 가족과 함께 관람하기엔 좀 민망스러운 곳이었다. 허전한 마음으로 바로 자리를 떴다. 당황한 나머지 자동차를 후진하다가 뒤쪽 범퍼가 긁혔다. 시작부터 조짐이 좋질 않다.

늦은 오후가 되었지만 목적지도 결정하지 못하고 난처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가족들도 밝은 표정은 아니다. 고민 끝에 바닷가는 휴가철이라 붐빌 테니 울진의 불영계곡으로 해서 가능하다면 경주에 가자고 제안했다. 모두 찬성이다. 가족이 여러 번 가본 곳이니 일단 안심했다. 허기가 찾아오고 있었지만 가는 곳까지 가보자고 무작정 달린 곳이 영주였다.

 

봉황산 부석사에서 정든 임을 다시 만났다.

 

무량수전으로 유명한 봉황산 부석사는 우리가족이 여러 번 방문한 낯설지 않은 사찰이다.

 

밤늦은 시간 영주시내에 도착했다. 오래전 친구들과 맛있게 먹은 불고기 생각이 나서 동궁식당이라는 능이버섯 불고기집을 찾았다. 허기진 탓도 있지만 맛도 깔끔하여 모두 만족했다. 지방이라 그런지 주인도 친절했다. 가족의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가족여행에 아픈 추억도 있다. 200512일로 문경과 단양 도담삼봉을 여행한 적이 있다. 아빠 맘대로 여행한다는 둘째 딸의 불만 때문에 아픈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는 가족여행을 강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 딸이 함께 여행을 하고 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인다.

강요긴 하지만 10년만의 가족여행이다. 저녁 후 백 다방이라는 커피숍에 갔다. 다방이라는 간판을 걸기는 했지만 다방이 아닌 현대식 커피숍이었다.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중심가의 작고 아담한 하얏트모텔도 모두가 만족했다.

영주에 왔으니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부석사다. 계곡이나 시냇물도 낯설지 않다. 영주는 충주에서 멀지 않기에 우리가족이 부모님과 함께 주말이나 방학 때 많이 와본 곳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손잡고 땀 흘리며 걷던 길이다. 성장한 그들이 자동차속에서 옛 추억을 서로 이야기하며 즐거워한다.

동행하지 못한 큰딸이 생각난다. 내 제자들과 부석사 구경하고 소백산 휴게소에서 아이스크림 맛있게 먹던 그 어린애가 벌써 시집가서 아들까지 키운다. 오는 세월 막을 수 없고 가는 사람 잡을 수 없다. 그때 동행했던 제자들도 결혼해서 우리 애들만큼 장성한 자녀를 두고 환갑을 앞에 두고 나처럼 늙어간다. 나는 그날을 분명히 기억한다. 199082!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기습침공한 날이다.

격세지감을 느끼며 도착한 부석사도 많이 변했다. 잘 정돈된 사찰입구와 주차장이 눈에 띈다. 예전에는 먼 길 걸어서 올라왔는데 지금은 다르다. 화엄경을 잘 알려진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숨결을 느끼며 무량수전에 오르니 멀리 보이는 소백산 영봉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집에서 늘 보던 배롱꽃도 반긴다. 부모님과 나 그리고 내 자식들이 이 고찰을 오르내리며 얼마나 많은 혈연의 정을 나누었던가!

 

인연 따라 찾아온 부석사에서 다시 인연을 만났다는 징표로 가족사진을 남겼다.

 

마침 백중이 가까워 천도기도 접수가 한창이다. 뜻밖의 부모님과의 재회를 반기며 천도제에 동참했다. 뒤돌아 나오는 길, 인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부모자식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준 천륜(天倫)이다. 천륜을 땅바닥에 팽개치고 달아난 자식에게 한 맺힌 가슴안고 저 세상으로 가신 분이 어머님이 다시 측은하다.

범망경(梵網經)의 선근인연(善根因緣)에 따르면, 부모자식은 8천겁의 인연이라 한다. 1()432천만년이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이다. 인연의 수레바퀴에서 주고받을 것이 있어서 만나는 사이가 부모자식이라한다. 아직 부모자식 간 인과응보가 남았는지 집안은 평화롭지 못하다.

3대가 정을 나누던 부석사를 뒤로하고 푸른 벌판을 달리니 다시 동생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부모와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없다. 어머님은 천륜을 끊겠다는 자식이 미워서 세상을 버린 것 같다. 발길조차 없던 사위가 장례식 날 웃통 벗고 대들고 삼우제날 벌떼처럼 달려와 재물얘기 하던 자식들을 어머님은 기억할 것이다. 부모자식의 인연은 부부인연보다도 1천겁이나 더 깊은 인연인데 어머님은 불안한 마음으로 자식들을 떠나셨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내로 돌아오니 애들이 인터넷으로 맛 집을 검색한다. 시내외곽에 있는 능이버섯 칼국수라는 식당을 찾았다. 어제 맛 본 능이버섯이 특별했나보다. 찾아간 식당은 고가(古家)처럼 실내장식을 했는데 칼국수도 분위기에 맞았다. 처음 맛본 능이칼국수로 점심을 마친 후 정 도너츠에서 영주의 특산품을 간식거리로 준비하여 경주로 향했다.

 

가족여행이 집안의 전통이었던 우리가족

우리가족에게는 대를 이어온 여행의 전통이 있다. 조부모님이나 외조모님도 그랬고 내 부모님도 여행을 즐기셨다. 부모님은 교직에 계셨기에 방학이면 늘 여행을 하셨고 우리부부도 교직에 종사했기에 함께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런 전통으로 우리 자식들도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와 함께 전국 방방곳곳을 여행할 기회가 많았다. 사실 아내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 가족이 된 후 집안의 전통 때문에 자연히 여행가족의 살림꾼이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특이한 가족여행도 있었다. 1960년대 초등학교 시절 경주 불국사를 들러 부산 해운대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라 학부모의 동행도 가능했다. 몇몇 학부모들과 함께 우리가족도 합류했다. 우리는 외할머니, 어머니, 여동생까지 합류하여 수학여행이 아닌 가족여행이 되었다. 여행이 힘들던 시절이니 친구들에게 창피보다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이런 이유로 불국사와의 인연은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기념품으로 긴 지팡이를 구입하고 토함산 올라 석굴암 구경하고 불국사 청운대, 백운대 계단에 앉아 단체사진 찍고 첨성대 앞에서 폼 잡던 그런 시절이었다.

 

경주 불국사와 나와의 인연은 1965년 수학여행 때부터 시작되었다. 3대가 함께한 수학여행은 가족수학여행이었다. 어머님은 3살배기 막내 여동생을 안고 기념품 산 단장으로 폼을 잡고 있는 아들 옆에 어머님의 어머님과 함께 3대가 불국사 수학여행을 하였다.

 

우리가족은 고향집에서 3대가 함께 대가족생활을 했기에 자식들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행복했다. 부모님과 우리부부 모두 교직에 종사했기에 주말과 방학은 여행의 좋은 기회였다. 그런 이유로 충주 인근의 월악산과 남한강은 물론 청풍, 단양, 문경, 속리산까지도 속속들이 안 가본 곳이 거의 없다. 방학이면 멀리 경주, 부산 해운대, 대천, 여수, 지리산, 주왕산, 오대산, 설악산 등 동서해안 산과 바다 모두 다녔다. 지금 생각하니 대단한 여정이다. 오죽하면 우리 아이들이 모두 가본 곳이라 수학여행도 가기 싫다고 까지 했겠는가!

 

문경의 소백산 계곡에서 세 자녀들과 캠핑하며 물놀이하던 가족

 

여행이 집안의 전통인지라 집안에 모임도 많았다. 부모님은 형제분들과 매년 여행을 즐겼고 연세 드신 외할머님도 90세 무렵까지 형제여행을 하셨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할아버지 자손들이 12일로 모이는 수범회. 내가 주도했기에 아내의 신역도 매우 고됐다. 할아버님 100세 기념모임에는 100번째 손녀가 태어났으니 대단히 규모의 가족여행이다. 행사가 매월 8월 첫째 주말행사이니 일주일 전부터 준비해야했고 헤어진 후 마무리에 아내는 녹초가 되었다. 지금은 모임이 중단되긴 했으나 친척들은 그때의 즐거움을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으로 우리집에는 언제나 여행에 필요한 모든 장비가 준비돼 있었기에 가족여행은 쉽게 떠날 수 있었다. 자동차가 출발하면 갈증에 좋다는 오이를 먹으며 손뼉치고 노래하던 아이들이 벌써 40을 바라보니 세월이 무상하다. 이러한 전통으로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불국사도 방문했다. 경주는 우리부부의 신혼여행지로 종종 찾기에 낯익은 고향 같은 도시다.

 

신혼여행의 추억이 살아있는 경주, 불국사

 

우리부부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신혼여행지 경주, 불국사

결혼 20주년 기념일에 다시 그 자리에 섰다. 바쁜 삶에 지치긴 했어도 정은 더 깊었다.

 

 영주에서 울진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피서객들로 북적였다. 경주에 도착하자마자 한옥마을에 있는 황남관에 숙소를 정했다. 아담한 고풍이 마음에 들었다. 짐을 풀고 천마총을 관람하고 도솔마을이라는 한정식 집을 찾았다. 몇 해 전에 경주에 왔을 때 제자 혁이 부부의 환대를 받은 곳이다. 다시 생각나서 통화하고 시간이 있으면 만나기로 했다. 내 스타일을 잘 아는 제자이기에 흉허물이 없다.

저녁 후에는 안압지로 갔다. 야간임에도 관광객들이 북적이며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조명 받은 안압지(雁鴨池)는 더 이상 신라의 폐허가 아니었다. 본래 안압지는 신라 패망 후 기러기()와 오리()만이 찾는다는 폐허의 호수였다. 야경을 즐기며 호수를 한 바퀴 도니 옛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경주는 내 인생의 두 번째 출발지다. 우리가 결혼하던 해는 2월 말임에도 날씨가 예상을 깨고 무척 추웠다. 1983221일의 일이다. 출발부터 험난한 인생길을 예고하는 전조(前兆)와도 같았다. 그때 신혼여행지가 경주다.

그 당시 신혼여행지로는 제주도가 단연 인기였다.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다. 그 시절 나는 부산 해운대도 아닌 경주를 신혼여행지로 택했다. 아내가 다소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큰 불평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10년 후 해외여행을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충주에서 대전까지 승용차로 이동한 후 고속터미널에서 겨우 뒷좌석을 마련하여 경주로 왔다. 캄캄한 밤이었지만 호텔은 예약했기에 숙소는 문제가 없었다. 그 호텔이 불국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웨스틴조선호텔이다. 신혼여행을 못 갈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던 내가 이런 여행을 하는 점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카메라 아내는 앵글이랑 가방을 둘러메고 시내버스를 이용하고 택시도 타며 시내관광을 했다. 황룡사지터를 걸으며 신라의 기왓장도 줍고 쇼핑은 보문단지의 기념품가게를 이용했다. 남에게는 초라한 신혼여행일지 몰라도 우리부부에게는 열심히 살아보자는 값진 새 출발이었다.

부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았다. 부부란 7천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데, 그보다 1천겁 많은 인연의 내 자식들과 이곳에 함께 왔으니 남다른 소회다. 부모님과 함께 3()가 경주에서 어울린 적도 있으니 대단한 인연이다. 부부보다 깊은 부모자식 간의 인연이 방황하는 우리가족을 경주로 불러 모았다는 생각이 든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어린 독수리를 훈련시켜 사냥하다가 짝짓기를 할 때가 되면 날려 보내고 주인은 눈물을 흘리며 뒤돌아 온다고 한다. 인간도 그런 것 같다.

어머님은 혈육이 아닌 며느리를 33년 잘 키웠으니 행복하게 살라며 풀어주고 떠나신 것 같다. 앙성면의 병상에서 나 왜 그렇게 고생시켰느냐는 아내의 질문에, “너 교육시키느라 그랬다. 미안했다.”고 하신 어머님과 그동안 모든 회포를 풀던 고부지간의 화해는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앞으로 너만 믿고 잘 살아 보겠다.”던 어머님의 손을 꼭 잡고 지난 날 얘기하던 그 행복한 모습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자연으로 날아간 독수리를 그리워하는 주인의 심정으로 어머님이 우리 가족을 경주로 부른 것 같다. 그러니 이번여행은 결혼기념여행이 아닌 이별여행이다. 이제 본격적인 이별이니 새 출발을 준비하라는 어머님의 위한 부름으로 이해됐다.

 아무튼 출발은 초라했지만 우리부부는 열심히 살았다. 주말마다 서울 충주 먼 거리를 오가며 가족들과 화합했다. 인간이기에 다툼이 없을 수 는 없었지만, 우리는 인연을 소중한 끈으로 생각했다. 다투면서 강해지고 인내로 화해하며 거친 세파를 헤치다보니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삶도 바쁘고 정은 깊어졌다.

나는 가족의 생일이나 기념일은 반드시 챙기는 습관이 있다. 결혼기념일은 결코 잊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까운 곳을 여행하거나 경주를 찾아간다. 이 점은 내 자식들도 잘 배운 것 같다. 형제자매간 생일은 서로 알아서 챙겨준다.

결혼 20주년 되던 2003년에는 경주를 다시 찾았다. 신혼여행 때 묵었던 웨스틴조선호텔에 숙소를 잡고 불국사도 다시 찾았다. 비록 몸은 늙어가고 있었으나 경주에서 맺은 사랑이 더 깊은 향으로 숙성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30주년 때는 경주를 찾지 못했다. 어머님이 입원하고 계셨고 그해 4월에는 큰 딸이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결혼 10년 후 약속도 지켰다. 하늘도 도와 때맞춰 저서인 [중동경제론]의 저작료가 나왔다. 결혼약속을 지키며 부부가 처음 대만으로 해외여행을 했다. 그 후에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몽골이외에 두바이, 이란, 예멘, 이집트, 터키 등 내 전공지역을 함께 두루 섭렵했다. 기회와 건강만 허락한다면 앞으로도 국내건 해외건 여행은 계속할 것이다.

 

살아서 경험하는 부처님 나라가 경주 불국사

 

우주의 정상인 수미산에 있는 부처님 나라를 이 땅에 옮겨 놓은 곳이 불국사다.

 

이튿날 불국사를 찾았다. 결혼 33년 만에 어머님이 떠나신지 열이틀 만에 불국사에서 가족이 다시 모였다. 방황하며 인연 따라 오다보니 신혼여행지에 자식들과 함께 다시 온 것이다. 신혼여행지가 어머님과의 이별장소가 되었다.

불국사는 아버님 정년퇴임 후 가족화합을 위해 여행을 싫어하는 남동생은 남겨두고 부모님과 우리가족과 여동생 가족이 함께 온 적이 있다. 아이들을 동행했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불국사도 차근차근 돌아볼 수 있었다. 3()의 인연이 부처님 세상을 보았다.

그 인연을 잊지 말라고 어머님이 우리가족을 부른 것 같다. 우리 아이들 손잡고 계단을 오르던 부모님 생각이 아른거린다. 연꽃으로 태어나 연화문 올라 극락세계 아미타불 찾아가실 어머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환희로 바뀐다. 어머님의 불심은 대단하셨다. 전국의 유명사찰은 거의 섭렵했고 봉정암도 5번이나 오르셨다. 그 정도 불심이니 극락세계 할인쿠폰은 마련하신 것 같다.

불국사(佛國寺)는 부처님 나라다. 불국사는 우주의 정상인 수미산 위의 부처님 세계를 현실화한 것이다. 일주문, 사천왕이 있는 천왕문을 지나면 불국사가 나타난다. 불국사에 도착하면 동쪽에 33단 계단의 자하문과 서쪽에 48계단의 안양문이 있다. 건축물의 안전을 위해 출입을 금지했기에 그 계단을 직접 오를 수는 없다.

불국사는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현실에 옮겨 놓은 곳으로 신라인들의 3가지 염원이 사바세계, 극락세계, 연화장세계 응축된 곳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며, 나머지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이다. 불국사는 이 3가지 세계를 대웅전, 극락전, 비로나자나전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국사는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때인 528년 어머니(영제부인)의 소원에 따라 처음 지었다. 그 후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지소부인)가 개창하여 아미타여래상과 비로자나불을 봉안했다. 문무왕 10년인 670년에는 무설전을 지어 화엄경을 강의했고, 경덕왕 10751년에 김대성이 대대적으로 중수하면서 청운교, 백운교, 석가탑, 다보탑 등을 건설했다.

백운교, 청운교 33() 구름 속을 지나 자하문을 들어서면 수미산(須彌山) 정상에서 석가여래, 다보여래의 설법을 듣고 대웅전의 부처님 만나 18()을 다짐하며 극락세계를 만난다.

죽어서 극락을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서 이 땅을 부처님의 정토로 만들자는 신라인들의 염원이 불국사다. 사람들은 살아서 부처님 세상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을 찾는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천당이나 극락세계가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지 알고 죽고 말지라는 말도 쉽게 한다. 무지(無知)하고 무명(無明)한 사람들의 철모르는 망언이다. 이 세상의 죽음은 저 세상의 출발이다. 죽음이란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학생으로 치면 유치원생활과도 인생의 성적표와도 같은 것이다.

어느 종교든 이점은 가르친다. 기독교는 사랑’, 불교는 자비’, 이슬람교는 평화라는 수단으로 가르치고 마음의 정화(淨化)를 강조한다. 몹쓸 짓하거나 빚을 잔뜩 지고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다. 천당이나 극락에서 성적이 나쁜 더러운 영혼은 절대 받아주지 않는다. 다시 재교육하여 교화(敎化)의 수료증을 받아야 입학시켜준다. 그 교화 장소가 화탕지옥(火湯地獄)이다.

 

극락(極樂)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영혼이 가는 길은 다르다.

 

청운교, 백운교 33() 도리천을 올라 자하문을 지나면 부처님 세상인 제석천을 만난다. () 짓고 죽은 영혼은 연꽃으로 환생하여 서쪽의 안양문을 올라 곧바로 극락세계로 간다.

 

자하문(紫霞門)은 산 사람이 오르는 문이고, 안양문은 죽은 영혼이 오르는 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부처님 설법을 듣고, 죽은 영혼은 연꽃을 밟고 아미타불 세상인 극락을 만난다. 극락전은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법당이며, 아미타를 의역하여 무량수전(無量壽殿)으로도 부른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세계에 머물며 설법하는 부처님이다. 아미타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뜻을 세우고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구제하고자 48()을 세운 부처다. 자하문이건 연화문이건 극락전에 오르려면 아미타불의 실행인 48원을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자하문은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중문(中門)이다. 산 사람은 청운교, 백운교 33계단을 올라 자하문을 지나 석가여래, 다보여래의 설법을 듣고 대웅전에서 부처님 세상을 만나고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극락전으로 간다.

도리천의 주인은 제석천(帝釋天)이다. 제석천은 불법을 지키는 신을 말한다. ()는 범어 인드라(Indra)의 번역이며, ()은 석가의 음역으로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을 말한다. 제석천은 원래 인도 신화의 인드라(Indra) 신의 한자어다. 인드라는 힌두교의 최고의 신으로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등 삼신의 왕이다.

반면 안양문은 수행하고 복 짓고 죽은 영혼이 구품연지에서 다시 태어나 연꽃을 밟고 극락세계로 가는 문이다. 안양문은 극락전에 오르는 중문으로 안양(安養)은 극락정토를 말한다.

안양문에 가려면 범영루 앞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품연지를 반드시 통해서 33계단 연화교, 14계단 칠보교와 나머지 1계단까지 48계단을 올라야 한다. 안양문을 통과하해야만 극락전에 갈 수 있다. 안양문 48계단은 48()을 상징하며 신앙심으로 복 지은 영혼만이 오를 수 있다.

아미타불을 믿으면 영혼이 49일 만에 연꽃으로 피어난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믿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구품연지의 연꽃 봉오리 속에 잉태된다고 한다. 열심히 아미타불을 믿는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연꽃으로 피어 극락에 태어나고, 신앙심 깊은 사람은 49일 만에 꽃이 핀다고 한다. 그래도 극락에 가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자식들이 영혼을 위하여 의례를 치러주는 것을 49()라 한다.

49재는 불교에서 망자를 위해 치르는 의례로 제사가 아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칠칠일(49) 동안 저승에 머무르며, 일곱 대왕들에게 7일째 날마다 심판받다가 49일째 되는 날 최종심판을 받고 환생(幻生)한다고 한다. 자식들은 심판을 받는 날에 맞추어 49일 동안 7번 재()를 지낸다. 49재를 거부한 동생들이 연화문 오르는 피안언덕에 재를 뿌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三世佛)이 모셔진 대웅전

 

대웅전에 봉안된 삼세불은 갈라보살(좌측), 석가모니(중앙), 미륵보살(우측)이다.

 

자하문에 들어서면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大雄殿)이 나타난다. 중앙에 대웅전이 있고 그 앞에서 우측에는 다보여래, 좌측에는 석가여래가 설법을 하고 있다. 그 탑이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이 모셔져 있는데 중앙이 석가모니, 우측이 미륵보살, 좌측이 갈라보살이다.

삼신불(三神佛)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며, 일반적으로 법신은 비로자나불, 보신은 아미타불과 약사여래, 화신은 석가모니불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대웅전에 봉안하고 있는 삼신불은 선종(禪宗)의 삼신설을 따라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것이 통례다. 화엄사상을 중요시하는 절은 삼신불을 봉안한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가 본존불이 되고, 좌우로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부처의 덕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나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보살과 과거불(過去佛)인 갈라보살이 협시한다.

불국사는 수미단 위의 중앙에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이 봉안돼있고, 그 좌측에 과거불인 갈라보살, 우측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존자(우측 끝)와 아난존자(좌측 끝)가 부처님을 협시하고 있다.

대웅전의 서편은 극락전이고 뒤편에는 처음 건축되었다는 설함이 없다는 무설전이 있다. 무설(無說)이란 진리의 설법은 언어를 빌리지 않고 설법되는 것을 의미한다. 무설전 위쪽에는 비로전과 관음전이 있다.

대웅전 뒤쪽 언덕의 보타락가산을 오르면 관음전(觀音殿)이 있고 현실세계를 강조한 비로전(毘盧殿)이 있다. 비로자나불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이 이 부처님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비로자나불은 육신이 아닌 진리의 모습, 즉 진신(眞身)인 법신불이다. 붓다는 비로자나불의 분신이며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난 부처다. 힌두교에서는 비슈누 신의 9번째 화신을 붓다라 한다. 한편 노사나불은 범망경화엄경의 교주로 진리인 몸(法身)’이기 때문에 삼라만상의 본체를 뜻한다.

 

석가여래의 설법을 증명하는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석가탑과 다보탑

 

대웅전 앞에는 석가여래가 설법하고 증명하는 다보여래의 상징인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다.

 

자하문을 들어서면 중앙의 대웅전과 좌측에 석가탑, 우측에 다보탑이 있는데 세 위치는 거리가 같은 정삼각형()이다.

석가탑(釋迦塔)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탑으로 국보 제21호이다. 석가탑은 본래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이지만 줄여서 석가탑이라 부른다. 또한 석가탑은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에 따라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 하여 무영탑(無影塔)으로도 불린다.

석가탑은 단조로우면서도 균형 잡힌 전형적인 신라의 석탑으로 한국의 석탑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탑 주위에는 연꽃을 조각한 탑구(塔區)가 있는데 이것이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이다. 팔방금강좌를 둔 것은 탑의 깨끗한 지역을 구별한 것으로, 연꽃 1송이에 1보살씩 8보살의 정좌(正坐)를 의미한다.

196610월 석가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 경전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사리봉안을 위한 금, , 유리로 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와 동경, 경옥제곡옥, 구슬, 향목 등이 발견되었다.

다보탑은 불국사사적기에는 본래 다보여래상주증명탑지만 줄여서 다보탑이라 부른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묘법연화경을 기초로 건립되었다. 석가여래가 설법하면 다보여래가 증명한다는 의미다. 다보여래는 인간 세상에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다보탑의 특징은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하는 돌계단 좌우의 8개 기둥에 있다. 기단의 사방으로 4개의 돌계단이 있고 그 위에 모두 8개의 기둥이 있다. 팔정도를 거쳐야 부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상징이다.

다보탑은 4, 8, 둥근 원()의 형태로 변하는 점이 특색이다. 사각(四角)은 부처님의 세계다. 4각은 사람이 만든 물건에만 있으나, 원은 하나의 점이지만 확대하면 온 누리의 우주다. 수행을 계속하면 네모의 한 모서리가 떨어지고 다시 한 모서리가 떨어져 점차 8각이 된다. 수행하면 4각에서 8각 그리고 원으로 이어져 부처님 세계인 원융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흔히 성격이 삐뚤거나 독선적인 사람을 모난 사람이라한다.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한다. 모난 사람은 인간이 만든 4각형(四角形)의 테두리에 사는 편협한 인간이다. 지구는 사과처럼 둥글다. 사과를 반으로 쪼개면 빨간 테두리를 인간세상에 비유할 수 있다. 위아래 꼭지가 블랙홀이고 씨앗이 마그마다. 인간은 둥근 지구에 달라붙어 하루 한 바퀴씩 따라 돌며 살아간다. 마치 안정된 평평한 대지위에 사는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동물이 인간이다. 지구는 항상 마그마의 자기장에 의해 변화한다. 이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영원한 것도 없다.

숫자에도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나는 3안정해서 좋고 7잡아줘서좋다. 간단히 말하면 3은 삼삼해서 좋고 7은 칠칠해서 좋다. 3월 삼짇날 제비 찾아오니 반갑고 77석이면 견우직녀 먼발치 눈물로 재회하니 슬프다.

3이라는 숫자는 품위(品位)가 있다. 술도 혼자마시면 외롭고(), 둘이 마시면 단조로워() 셋이 마시면 품위()가 있고, 넷이 마시면 편이 갈린다()고 한다. 3이 안정이라는 점은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입증하고 신()도 삼신이 많다. 사랑도 삼각형이 안정이고 올림픽도 3등까지 메달을 준다.

7은 잡아주고 다시 풀어준다. 일주일도 일곱 빛깔 무지개로 신이 정해준 선물이다. 하루를 쉬게 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여 7일 후에 다시 쉰다. 7의 정점은 일곱째 7, 49일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 따르면 죽은 지 3일까지는 영혼이 세상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난다고 한다. 이 점은 모든 종교가 거의 유사하다. 아무튼 7이라는 숫자는 7선녀, 7자매(seven sisters), 북두칠성 등, 동서양에서 신비 혹은 행운의 숫자다.

나와 숫자의 인연은 생일뿐만이 아니다. 연구소를 개원할 때 전화를 신청했더니 끝자리가 49였다. 그 후 팩스도 49, 우체국의 사서함도 49, 핸드폰도 끝자리가 49이다. 아무리 우연의 일치라도 신기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49재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부처님 나라에서 내려다 본 세상이 속세의 인간세상

 

석가여래 다보여래 설법을 듣고 도리천 자하문에서 내려다 본 세상이 인간세상.

 

불교에서 도리천 천인들의 수명은 1000세라고 한다. 도리천의 하루가 인간세상의 100년이라니 인생은 정말 한 순간 찰라. “눈 깜짝할 새라는 말이 있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천인들의 생활에 견주어 인간의 시간이 짧다는 의미다. 인간의 눈 깜짝하는 시간은 대략 1초 내외다. 지구에 같이 사는 파리나 모기의 수명은 대략 한 달 정도며 하루살이의 수명은 23일에서 약14일 정도다. 파리 목숨에 비하면 인간의 수명은 하늘에 사는 천인들의 수명에 버금간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생에서의 삶은 미리 보는 천국과 지옥의 체험장이 틀림없는 것 같다.

수명을 늘려 장수하는데 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릴 만큼 충분한 수명을 타고 났다. 인생에서는 얼마나 사느냐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천지가 한번 개벽해서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을 1()이라한다. 천인들을 그저 부러워하며 수명을 늘리는데 노력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다시 찾아보면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들이 너무 많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사람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다. 하늘만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運命)만 탓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행복이 찾아가지 않는다.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 천사(天使)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부지런하게 무언가를 추구하는 삶은 알차게 사는 가장 좋은 수단임에 틀림없다.

세상은 얻음이 있으면 반드시 잃음이 있어 공평하다. 부자도 그렇고 위정자도 마찬가지다. 참된 부자는 자선을 베풀고 위대한 지도자는 백성을 먼저 챙겨야 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는 귀족에게만 해당하는 윤리가 아니다. 혁혁한 성과는 그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희생의 대가가 성과(成果). 이러한 점에서 나는 자연인(自然人)을 싫어한다.

세상은 온갖 불협화음을 휘저어 아름다운 운율로 조화시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같다. 바다가 대표적인 기능을 한다. 모든 물은 바다로 모여서 생명을 키워낸다. 세상에 물을 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용한 것처럼 보이는 큰 산도 바다가 화를 내면 견지지 못한다. 천지요동의 근본도 알고 보면 바다가 성내는 현상이다. 인간은 순리를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아벨과 카인이 보여주었듯이 인간은 본래 이기심을 갖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로 유명한 소크라테스(Socrates)삶의 올바른 방법을 깨닫는 것이 지식의 목적이라며 영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도덕적 행위를 덕목으로 제시했다. 무명에 대한 깨달은 사람이 곧 부처다.

젊은이들이 이혼을 밥 먹듯이 하는 걸 본다. 심지어 나쁜 사람은 이를 빌미로 돈까지 챙긴다. 부부인연이 7천겁에 이루어졌음을 안다면 최소한 7천 번만 참으면 불행할 리가 없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부부인연은 그보다 더 가까운 소중한 만남이다. 부부의 소중함을 깨달으면, 오늘 하루가 모자라고 10년 세월도 짧을 것이다.

해인사에서 만난 노보살의 덕담이 생각난다. 포목상을 한다는 그 보살은 자신은 전생에 지은 업보 때문에 찌그러진 냄비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복 지으며 살아야 한다고 한다. 남편도 복 짓는 자세로 정성껏 모셔야 건강하고 사업도 잘할 수 있다고 한다. 무조건 처음 번 돈은 보시하니 장사도 더 잘된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은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일해도 고통스럽지 않고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한다. 내가 만난 그 어떤 스님보다 그 보살이 큰 가르침을 주었다.

자하문을 내려오면서 동행했던 여동생 가족이 생각났다. 부모님과 함께 경주에 왔을 때 미술이니 예술이니 하며 가족과 떨어져 행동하며 쌈밥집 찾아다니며 가족을 고생시킨 적이 있다. 어머님이 3살 어린 나이에 이곳에서 인연을 가르쳐주었고 가족화합을 위해 그 가족을 다시 데리고 왔건만 부부인연만 주장하며 제 뜻대로 산다. 어머님을 이별하자 형제자매도 버리고 제 갈 길만 간다. 애련의 정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다. 하늘은 결코 카인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이번 여행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경쟁관계로 태어난다는 형제자매의 인연부모자식의 인연보다 더 오랜 선업(先業)이다. 부모님이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인연의 뿌리가 있다. 그렇기에 부모님은 부모자식 간 천륜도 못 깨달은 자식들의 숙업(宿業)까지 해결할 능력이 애초부터 없었다. 그 숙업의 뿌리는 자식인 우리가 해결해야한다. 이 점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부모님을 원망했던 나의 불찰이 죄송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지만 부모 따라 고향 가는 길이 더 평탄하다.

불국사도 백중 천도제가 있었다. 3대의 걸친 인연으로 우리 가족이 여기서 다시 만났으니 반가워 기도입제를 했다. 아직 극락세상 못 오르셨다면 내일 모레 두 번째 심사에는 꼭 합격해서 연화세상 닿으시라고 . 마음이 개운하고 홀가분해졌다.

신라밀레니엄파크를 거닐며 경주타워에 올라 문화재도 감상하고 경주시내도 둘러보았다. 다시 본 세상은 밝고 명랑한 인파들로 아름답게 보였다. 혼란하던 잡념도 사라졌다. 제자가 초대한 맛 집에서 점심을 들며 세상사는 이야기도 즐거웠다.

 

자부심과 인내심만으로 버텨온 삶은 자승자박의 족쇄였다.

 

세상의 주인처럼 살고 싶었지만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었고 삶의 족쇄였다.

 

이번 여행은 그저 목적만 가지고 열심히 사는 인생은 공()이라는 점을 알려주었다. 삶의 목적 이전에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이 노력이다. 아무리 성공한 사람도 전후가 바뀐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 대부분 후회한다. 대표적인 사람 중 한명이 석유왕 록펠러 (J. D. Rockefeller). 맨주먹으로 노력하여 석유왕이 되었지만, 55세에 그 스트레스로 병에 걸렸다. 더 이상 욕심을 버리고 자선사업을 시작하자 병세도 호전되어 98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반면에 죽는 순간까지도 권력과 부를 껴안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사람들은 불행의 씨앗을 남기는 것이며 크건 작건 상속분쟁은 그 대표적 사례다.

점심을 마치고 포석정을 돌아 신라 토종개, ‘동경이로 유명한 동경이 마을을 찾았다. 우리가 묵은 황남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교촌한옥마을’인데 민속촌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가족 모두가 즐거워했다. 교촌한옥마을 마지막으로 뜻깊은 경주여행도 끝났다.

경주의 특산품 경주찰보리빵을 기념으로 챙긴 후 귀가 길에 올랐다. 떠날 때 어설프던 여행이 희망으로 마무리되었다. 신혼여행지 경주가 어머님과의 이별여행 종착지였다.

어머님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킬 일만 남았다. 고향집, 선산, 농장 등 . 자식들에게는 결코 불행의 씨앗을 남겨주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1960년대 6.25 전쟁 후 그 어렵던 시절에도 우리집 마당에는 채소보다 꽃이 많았고 그 꽃을 보고자란 나는 성장하여 아름다운 농장을 일궜다.

 

어머님은 꽃을 유난히 좋아하셨다. 6.25 전쟁이후 어렵던 시절에도 우리집 마당에는 채소보다 꽃이 더 많았다. 고향집이나 외갓집에도 대문을 들어서면 작은 정원이 있었다. 사과과수원을 하던 고향집 할머님께서는 4계절 약초를 캐서 비법(秘法)의 한약을 만드셨다. 조상들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어린 시절부터 농장의 꿈을 키웠고 지금 내 농장에는 아름다운 꽃에 더하여 몸에 좋다는 약초들도 많다.

농장도 인연이고 아내도 인연임에 틀림없다. 나는 농장을 일구며 열심히 키우고 아내는 건강보조식품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하지만 이 전통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30년 이상 정성으로 일군 농장이 불행의 씨앗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대에 걸친 인연이 내 자식들에게는 선근(善根)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부모님의 악연이었던 2명의 애물단지 고모삼촌의 인연이 내 자식들에게는 단절되었으면 좋겠다. 내 자식들은 농장에서 욕망과 욕심의 차이를 배웠을 것이다. 욕망은 키워야 할 나무이고 욕심은 없애야 할 잡초와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내 농장은 자식들에게도 소중하다.

어머님 병실에서 아내가 처음 시집와서 파리 한 마리 죽였다고 그렇게 혼내시던 어머님이신데, 숨만 쉬어도 좋으니 5년은 더 사셔야 한다. 아니 1년은 더 버티셔야 한다.”며 울먹이던 때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다. 병실에서 함께 따라 우셨던 할머님들 생각이 떠오른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 심정을 모른다. 그만큼 어머님의 그림자는 짙었다. 부모는 안식처이고 어머니는 포근한 가슴이다. 이제는 망망대해를 홀로 헤치며 가족을 이끌어야 한다. 3의 인생은 이제 시작이다.

역시 눈에 보이는 건 진리(眞理)가 아니었다. 열심히 노력하고 인내하면 고해(苦海)를 건널지 알았다. 눈에 보이는 진리만을 추구하던 내 연구가 부끄럽다. 내가 개척한 학문이나 농장도 모두 공허하다. 결국 나를 속박으로 옭아매는 족쇄일 뿐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출발했지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 왔기에, 이번 여행은 매우 값진 선물이었다. 경주에서 제2의 인생의 시작은 단지 제3의 인생을 위한 이정표에 불과했다. 잊지 않고 경주를 찾았던 것도 인연법칙을 깨닫기 위한 야외수업이었다. 다시 시작하는 제3의 인생은 지금까지 달려온 속도보다 더 서둘러 더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신혼여행지 경주에서의 이별여행에서 값진 선물을 얻도록 도와준 가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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