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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But Rich

칭기스칸 대초원의 어머니 바다, 훕스골(Khovsgol Lake) - 몽골

국토면적의 80%가 초원인 몽골의 유목민들은 방목지를 찾아 게르(Ger) 생활을 한다.

 

세계를 뒤흔든 세계 최대 몽골제국의 미스터리

몽골제국의 말발굽이 중세 세계를 뒤흔들었다. 몽골은 동으로는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로 서로는 아랍 이슬람국가를 넘어 유럽으로 남으로는 동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로 북으로는 러시아에 이르는 인류역사상 세계 최대의 제국을 형성했다.

당시 유럽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과 함께 봉건제도와 교회의 속박으로 학문과 예술이 쇠퇴하였던 시기로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1000년 동안 암흑기였다. 반면 아랍중동은 서로마 제국 명망 후 아라비아반도에서 7세기 초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후 과학과 예술분야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루며 동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위세를 떨쳤다.

 

위대한 왕을 의미하는 칭기스칸(11621227)1206년 몽골 족을 통일하여 제국을 세웠다.

 

몽골제국은 이슬람문명이 쇠퇴하기 시작한 12세기 후반에 세계사에 새롭게 등장했다. 유럽의 암흑기와 중동의 쇠퇴기에 나타난 제국이기는 하지만 짧은 기간 몽골제국의 출현과 멸망은 미스터리다.

몽골은 면적이 한반도의 약7배에 달하며 인구는 300만명 정도로 이 가운데 절반은 수도인 울란바타르에 거주한다. 국토의 약80%가 기복이 완만한 초원으로 몽골인은 수백 년 동안 가축의 방목을 위해 물과 초원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으로 살았다.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고사성어도 하늘이 높고 말리 살찌는 계절로 그들에게는 활동하기 좋은 계절이다. 초원에서 살 오른 몽골의 말발굽이 한때 세계를 두려움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현재 300만명의 적은 인구가 세계를 제패했다는 사실이 첫째 미스터리고, 세계 최대의 제국이 어떻게 한순간에 사라져 사막에 묻히고 계승되지 못했는지도 미스터리다.

몽골의 부족장이 한번 돼보는 것만으로도 사나이의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었다.

 

중동의 실크로드(Silk Road) 교역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몽골제국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칭기스칸의 초원길이다. 그런 이유로 언젠가는 몽골의 대평원을 달려 옛 수도 카라코룸 가보고 싶었다. 수차례 몽골을 방문하긴 했지만 수도 울란바타르나 인근의 초원을 보는 게 고작이었지 말 달리는 넓은 초원은 미지의 땅이었다.

201692325일 아시아중동학회(AFMA)의 국제학술회의 때문에 다시 울란바타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특별한 계획도 없었지만, 그저 힐링이 필요했기에 귀국비행기 표를 여유 있게 예약했다. 학술회의를 마치자마자 선화이모에게 바이칼 호수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다.

돌고르마(Dolgormaa)는 울란바타르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2008년 몽골 국제학술회의에서 만난 그녀의 엄마가 한국에서 유학하는 딸을 소개해주었기에 귀국한 후 수양딸로 인연을 맺었다. 누군가 지어주었다는 수연이라는 한국이름이 촌스럽다며 소요사 큰 스님이 선화로 이름을 바꿔주었다. 2012년에는 선화 엄마와 이모가 대학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었지만 함께 관광도 하며 즐거운 시간도 보냈다. 선화 이모는 빌기(Bilgee)인데 편의상 빌리(Billy)로 부른다.

그런 선화 이모에게 그저 힐링하고 싶다며 바이칼 여행을 꺼냈던 것이다. 빌리는 기차표부터 비자문제까지 자세히 알아보았고 일단 부딪쳐보자고 했다. 그러나 여행기간이나 러시아 비자 등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확실한 여행스케줄도 잡지 못했기에 빌리는 혼란 속에 친구들까지 동원하여 바이칼 여행을 도와주려 분주했다.

결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빌리가 호감이 가는 제안을 했다. 울란바타르에서 약1000km 정도 가면 리틀 바이칼이라는 훕스골(Khovsgol Lake)이 있다며 그곳을 추천한다. 운전은 친구가 해주겠다고 한다며 . 그런 인연으로 찾아간 곳이 어머니의 바다(Mother Sea), 훕스골이다.

 

왕복 2000km의 여정, 리틀 바이칼(Khovsgol Lake)

 

훕스골 가는 길에 처음 들른 우리칸(Urikhan) 휴게소

 

일반적인 훕스골 관광코스는 <UB 무룬(Murun) Khovsgol Lake>이다. 울란바타르(UB)에서 무룬까지는 비행기로 약2시간 정도 걸리며 무룬에서 홉스굴 호수까지는 약100km정도 거리다. 따라서 시간과 경비가 많이 소요되며 UB에서 왕복 2,000km 정도의 여정이다.

먼 길이기는 했지만, 아버지가 파일럿이라는 빌리 친구 밤브(Baambuu)의 훌륭한 운전솜씨와 안내로 짧은 시간에 많은 현지체험을 할 수 있었다. 빌리와 함께 한 대초원 여행은 서부영화에서나 보던 상상을 직접 체험하는 값진 경험이었다. 함께한 여행일정은 아래와 같다.

 

 

울란바타르(UB) 출발(09/26) Darkhan Erdenet Bulgan Khutag Undur Hovsgol, Murun Khatagal Lake Khovsgol Lake - Jankhay /Khovsgol Lake/ Khatgal Murun Khutag Undur Khantai - Gunbaa's home Saldarga /Eg river/Khutag Undur Bulgan Erdenet Darkhan UB 도착(09/29)

훕스골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룬(Murun)을 거쳐야 한다. 사전 예비지식이나 방향감각도 없이 그저 빌리의 안내에 따라 무룬으로 출발했다.

 

늦은 밤 뛰어드는 야생마도 피하며 심야여행

 

요즘은 전통가옥 게르(Ger)가 현대화하여 원주민의 생활체험이 쉽지 않다.

 

몽골의 9월 하순은 무척 춥다는데 날씨도 좋았다. 한국의 가을 날씨처럼 하늘도 맑고 공기도 신선했다. 어려운 결정 끝에 926일 늦은 오후 훕스골이라는 지명만 알고 여행이 시작됐다.

몽골에서 술은 기본이었다. 자동차가 출발하자마자 빌리는 독한 보드카를 건넨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중간 중간 한잔씩의 보드카는 여행의 활력제가 되었다. 자동차로 한 두어 시간쯤 달려 우리칸(Urikhan)이라는 휴게소에 들렀다. 뷔페식 전통식당이었는데 음식도 입에 맞는다. 휴게소에 들른 현지인들로부터 몽골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외부에 있는 화장실에 들렀다. 문을 열자마자 토할 것 같은 냄새에 순간적으로 뛰쳐나왔다. 빌리와 밤브가 배꼽을 잡고 웃는다. 더 이상 글로 표현하기는 좀 그렇다. 어린 시절 우리의 뒷간 모습과 흡사했다.

우리칸 휴게소를 떠나자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다르칸을 지나 UB로부터 약 380km 지점에 있는 에르데네 소도시를 지나 무른 근처에 불간(Bulgan)에 도착했다.

도중에 가슴조이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야심한 밤에 계곡에서 뛰어드는 야생마 떼와 부딪칠 뻔 했으나 운전이 노련한 밤브는 개의치 않고 차분히 잘 피했다. 야생마들은 대개 밤중에 산에 올라가 먹이활동을 하기 때문에 특히 밤 운전은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그가 베스트 드라이버임을 확인하자 안심이 되었다.

대략 78 시간여의 주행 끝에 관광도시 무룬 가까이 불간인지? 도저히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작은 도시에 늦은 밤 도착했다. 700km의 거리를 그 시간에 달렸으니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운전이다. 12시가 넘은 야심한 밤이었지만 식당은 성업 중이었다. 러시아식당을 찾아 맥주 마시며 흥청대는 러시아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현지인 아니면 감히 체험할 수 없는 밤풍경이었다.

야식을 마친 후 밤브는 후타그 운드르(Khutag Undur)에 있는 자신의 브라더 집에서 하루 묵자며 다시 차를 몰았다. 야심한 밤중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밤브의 친척은 눈을 비비며 반갑게 맞이하고 가벼운 식음료를 대접한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친절과 관용이다.

죄송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오히려 최근에 집을 지었다며 잘 정돈된 거실과 주방을 친절히 소개시켜주며 방문을 반긴다. 현대식 목조건물로 신축한 전통가옥의 내부는 생각보다 화려하게 잘 정돈돼있었다. 후타그 운드르의 밤브 친척집에서 1박하고 아침 일찍 하타갈을 향해 출발했다.

 

하타갈을 지나야 훕수골(Khövsgöl Nuur)

 

컴퓨터를 켤 때 첫 바탕화면이 몽골의 하늘이라더니 정말 하늘이 맑고 탁 트였다.

 

훕스골은 반드시 하타갈을 거쳐야 갈 수 있고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우선 무룬으로 가야한다. 무룬 가는 길의 초원은 정말 장관이었고 하늘은 블루 스카이였다. 도로에는 양떼들이 한가롭게 드나들고 붉고 푸른 각양각색의 천을 두른 샤머니즘의 돌무더기도 나타나며 긴 막대위의 독수리가 오히려 지나가는 사람과 자동차를 구경하고 있었다.

무룬 가는 도중 아크막(Achmag Lake)이라는 작은 호수를 만났다. 호수 주변의 산은 예멘의 코카반이나 시밤 가는 풍경과 너무 흡사하여 잠시 혼동에 빠지기도 했다. 아크막 호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사실 나는 몽골초원이 메마르고 호수가 없는 줄 알았다. 물이 부족하다는 지식만 있었던 탓이다. 나의 무식을 타이르는 듯 말들이 의기양양하게 호수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몽골 하타갈가는길.JPG

하타갈 가는 길 도로에서 만난 양떼. 몽골에서는 이런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아크막 호수를 뒤로 하고 한참 달리니 무룬이 나타났다. 분위기 있는 호텔에서의 점심식사는 일품이었다. 취향에 맞는 조용한 분위기와 온갖 꽃들로 장식된 실내가 매력적이었다.

관광도시 무룬의 시장이 보고 싶었지만 분위기는 싸늘했다. 반갑고 신기하여 견과류 파는 여인들에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더니 건강한 청년들이 시비를 건다. 중동에서의 상황과 비슷하다. 빌리와 밤브가 중재하는 바람에 큰 분쟁은 없었다. 하지만 시장의 사진을 찍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무룬을 벗어나는 데도 검문이 심했다. 청정호수를 보호하기 위한 정부시책인 것 같았다.

검문소를 통과하여 한참을 더 달려 하타갈 입구에 도착했다. 다양한 리조트 시설로 보아 첫 눈에도 관광지다. 하지만 9월 하순이 비수기라 관광객은 없었고 관광지는 한산했다.

 

비취빛 수정처럼 빛나는 수심 267m의 하타갈 호수는 청정수의 진면목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수심 267m의 하타갈 호수는 비취빛 바다의 진수였다. 수심이 워낙 깊어 보트 타는 게 두려웠지만 멋진 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보트로 섬을 한 바퀴 유람하니 가슴도 탁 트이고 단풍 물든 주변경관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환상적이었다.

주변에 몇몇 상인과 기념품 상점이 있었지만 관광객이 없어 한산했다. 감격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밀납에 쌓인 매미를 샀다. 이름도 잘 모르는 견과류, 전통 빵과 함께 마신 커피의 맛은 아직도 혀끝에 맴돈다.

 

어머니 바다(Mother Sea), 훕스골 호수

 

몽골 사람들은 홉스굴 호수어머니 바다(Mother Sea)’라 부른다.

 

훕스골에 가까워지자 기온이 갑자기 변한다. 아직 9월임에도 언덕에는 눈이 쌓여있었고 방금 지나온 하타갈과는 풍취도 달랐다. 노을 질 무렵 하얀 눈 위에 소복이 쌓인 낙엽송 잎사귀는 은쟁반에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눈부셨다.

드디어 고대하던 비취빛 맑은 물 훕스골 호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 얼마나 보고 싶었던 바이칼 호수였던가! 비록 바이칼 호수는 아닐지라도 어머니 바다의 물이 바이칼 호수로 흘러간다니 바이칼의 상류에 온 것은 틀림없다.

숲속에서 유유자적 노니는 야크 떼를 본체만체하고 호수가로 내달아 청정수에 손을 담갔다. 어머니가 부른 것이라 생각했다. 손에 닿는 물은 차가웠지만 몸에선 따듯한 온기가 느껴진다. 호수 넘어 산 넘어 어머님 고향을 생각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먼 산 바라보며 청정수와 혼연일체가 되었다.

 

어머니 바다, 훕스골 호수에 손 담그며 어머님의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훕스골의 어원은 터키어의 일종인 Tuvan()에서 유래한 푸른 물 호수라는 뜻이며 누르(Nuur)는 몽골어로 호수를 뜻한다. 홉스굴 달라이(Khövsgöl ocean) 또는 달라이 에즈(ocean mother)라 불리는 홉스굴 호수는 수량에서 몽골 최대의 민물호수다. 홉스굴 호수는 “6자매 중 가장 어린 동생이라는 애칭으로 바이칼 호수로도 불린다.

훕스골 호수는 몽골 북서쪽 해발고도 1,645m의 고지대에 있으며 호수의 북쪽 끝은 러시아와 경계를 이룬다. 민물호수 가운데 세계에서 14번째로 크며, 세계 담수 총량의 1%를 차지한다. 1월 평균 기온은 -22.6, 7월 평균 기온은 16.2이며, 1~4월에는 얼음으로 덮여 있다.

호수의 면적은 2,760, 둘레는 380이며, 수심이 최고 262m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깊다. 동서 길이는 36.5, 남북 길이는 136로 전체적으로는 육면체 모양이다.

96개의 크고 작은 강과 시냇물이 흘러들어 거대한 호수를 이루지만, 출구는 에긴 강()이 유일하며, 이 강을 따라 세계 최대의 담수호 바이칼호로 흘러든다. 천혜의 자연조건이 어우러져 '몽골의 알프스', '몽골의 푸른 진주'로 불린다.

 

눈 덮인 훕스골 언덕 양지바른 곳 민들레도 꽃 피워 이방인을 환영했다.

 

1992년 깨끗한 자연환경 때문에 주변 지역과 함께 몽골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호수에는 민물연어인 타이멘을 비롯한 각종 어류가 서식하고, 주변의 삼림에는 큰뿔양, 야생염소 아이벡스, 피티사슴, 순록, 사향노루, 갈색 큰곰, 스라소니, 비버, 늑대, 말코손바닥사슴 등 68종의 포유류와 244종의 조류, 60여 종의 약용식물을 포함한 750여 종의 식물이 서식한다.

관광 비수기여서 호젓한 마음으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호숫가를 산책하다보니 해는 기울어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아쉬움을 남긴 채 온 길 되돌아 약120km 거리에 있는 밤브 브라더의 집이 있는 후타그 운드르로 향했다.

비포장 굽은 길을 돌아 나오니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고 하늘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밤길을 안내했다. 늦은 시간 다시 브라더 집에서 신세를 지기 싫어 외딴 길거리 식당에서 요기하고 실랑이 끝에 호텔을 잡았다. 낮에도 이미 취해 있었지만 훕스골에서의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어 다시 보드카를 마셨다. 잠 못 이루던 그 밤에 묵은 숙소는 아담한 지구르(JIGUUR) 호텔이었다.

 

엄마의 품, 에긴 강(Egiin River)

 

에딘 강은 낯익은 고향에서 만난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고 따스했다.

 

훕수골의 감격은 후타그 운드르에서의 밤에 사라졌다. 심한 과음 속에 선친이 꿈에 나타나 불길한 마음까지 든다. 에딘 강을 가려면 아직도 비포장 초원길을 약45km 더 가서 밤브의 친척이 있는 한타이(Khantai)까지 가야한다. 이날따라 출발부터 맥이 빠지고 흥도 사라진다. 덜컹거리는 초원길도 걱정된다.

말을 탄 듯 덜컹거리며 굽이굽이 초원길을 얼마쯤 가다가 약수터처럼 생긴 수원지를 만났다. 우리의 전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돌무더기 틈으로 맑은 물이 흘러나왔고 주변에 지폐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성소(聖所)였다. 깨끗한 1달러 지폐로 안전여행을 기원했다.

한참을 더 달려 가축을 방목하는 유목민을 만났다. 초원에서는 이방인이라도 인사를 나누며 지나친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세상의 정보를 서로 주고받는다. 밤브가 차를 세우고 그들과 대화하는 동안 유목인은 나에게 승마를 권한다. 약간 두렵기도 했지만 일단 말에 올라 주변을 살피니 말도 친절하게 안내하며 초원을 고분고분 돌고 돈다. 초원에서 처음 경험한 승마로 호연지기도 시험해보았다.

드넓은 초원은 그야말로 소와 말, 염소와 양들의 천국이었다. 방목하는 몇몇 유목민을 더 만나고 자작나무 우거진 언덕 위의 좁은 길을 돌아내려가 밤브의 친척 군바(Gunbat)의 게르(Ger)에 도착했다. 군바는 출타 중이었고 부인만 있었는데 치즈와 빵으로 대접을 한다. 치즈 발라 먹은 빵은 초원의 맛이었다.

 

처음 보는 유목민이 말을 타보라며 길동무하니 초원의 관대함은 극에 달했다.

 

소떼 양떼 바라보며 초원을 뒤덮은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한유(閑遊)를 만끽했다. 광활한 초원에서 자유를 누리던 순간 핸드폰 벨이 울린다. 여행 떠난 줄 모르는 동생이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귀국해서 만나자했다. 선친의 꿈은 어떤 예시였다. 설상가상 동생의 전화는 무르익던 흥취에 재를 뿌렸다.

빌리에게 조차 이번 여행목적을 말하지 않았다. 지난 7월 어머님이 하늘나라로 가시고 상심하던 차에 국제학술회의를 빌미로 힐링을 하려던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잠시 상심도 떨치고 에딘 강에 가기위해서 서둘러야했다. 자작나무 울창한 산길을 넘어 에딘 강가는 길, 살다르가(Saldarga)에서 나이든 노송가지의 쇠붙이 장식을 발견했다. “잊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Don't forget, be back again)”는 약속의 징표라 한다. 밤브의 설명에 따르면, “옛날에 남편이 아라비아로 장사하러 갖는데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을 기다리며 집을 지키던 부인은 세월이 흘러 홀로 외롭게 죽었다. 그 후 남편이 돌아왔지만 부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는 실화가 다시 돌아오라는 약속의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초원의 사람들은 한 식구처럼 포근했다. ‘약속의 소나무를 지나 조금 더 가서 밤브의 지인을 만났다. 그들은 밤브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더니 즉석에서 우리와 합류한다. 다시 산길을 돌아 조금 더 달려 장하이(Jankhai)의 에딘 강에 자리 잡았다. .

에딘 강은 산으로 둘러싸인 숲속을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마치 고향에 온 듯 조용히 흐르는 강물은 엄마의 품처럼 포근했다. 일행들이 풀밭에 누워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매혹에 이끌려 홀로 강가로 내려갔다.

멀리 보이는 산이 고향의 산이었고 흐르는 물이 영락없는 고향의 강이었다.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마음이 포근해졌다. 올갱이 줍던 남한강, 박달재 아래 삼탄마을, 수주팔봉 등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가재 잡던 어머니 고향이 떠오른다. 역시 생멸은 진리고 이곳이 잠시 쉬어가는 낙원이었다. 경암농원 해태상에 기록한 우주는 변화무쌍하고 생멸은 진리니 이곳이 잠시 쉬어가는 낙원이로다(Life and death is the truth. Hence here is the place of paradise to rest for a while).”가 명문이었음을 확인해준다.

어머니의 고향은 훕스골이 아닌 에딘 강이 분명했다. 그 고향에서 어머니가 부른 것이다. 어머니 고향에서 시공여행을 한다는 생각에 좀처럼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저 떠나기 아쉬워 예쁜 조약돌 하나를 마음의 징표로 가져왔다.

에딘 강 주변에는 각종 약초들이 널려있었다. 보리수 같기도 하고 작은 석류 같기도 한 빨간 열매도 있었고 마른 인진쑥도 있었고 몽골 기자 쑤렌이 준 행운의 풀도 있었다. 많이 따먹은 빨간 열매는 로즈힙(rosehip; Nokhoin Khoshuu)으로 신장과 허리 아픈데 특효약이라 한다. 어머니도 약초를 무척 좋아했다. 마치 집안의 정원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동행한 현지인이 강기슭에서 갑자기 나뭇가지를 꺾어 땅을 후벼 파더니 알뿌리를 캔다. 산 마늘 같은 와일드 포테이토(wild potato). 뿌리에 흙을 툭툭 털고 닥아 이거 먹으면 15년은 더 산다며 권한다. 몸에 좋다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는 건강하게 살아서 15년 후에 다시 오겠다하니 강가엔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천둥번개 비구름으로 변덕스럽던 하늘에 어머니는 선명한 무지개로 아쉬운 작별을 알렸다.

 

아쉬운 에딘 강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 날씨는 무척 변덕스러웠다.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앞을 보기조차 힘들다. 맑아졌다 밝아졌다 변덕스러운 하늘은 산을 넘어오니 다시 맑게 개였다. 앞산 계곡에 일곱 빛깔 무지개가 선명하게 반긴다. 가지 말라고 애원하던 어머니의 눈물이 떠나겠다는 자식을 마지못해 놓아주며 행복을 빌어주었다는 생각을 했다. 에딘 강에서의 감상적이고 울적한 마음도 빗물에 깨끗이 씻어내고 다시 군바의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전통식 소고기 요리와 밥이다. 여기에 에딘 강에서 밤브의 지인이 준 생선은 별미였다. 에딘 강에서만 산다는 레노크(Lenok)는 매우 희귀한 물고기라 한다. 맑은 물 남한강에만 산다는 쏘가리처럼 희귀한 생선인 것 같다. 레노크는 손님인 나에게 양보하고 자신들은 매일 먹는 음식으로 식사를 한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레노크가 손님을 위해 특별히 배려된 초원의 관대함이었기에 남기지 않는 답례로 정성을 다했다.

 

통역도 필요 없는 초원의 대화

 

초원에서 깊은 밤 불빛을 비추면 동물의 눈은 별처럼 반짝인다.

 

에딘 강 방문 후 현지인들과 함께한 초원의 밤은 정열의 밤이었다. 군바의 집에서 주변 지인들도 함께 먹고 마시며 이방인을 환대했다. 한국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유목민들만의 개방이고 전통이다. 우정의 밤무대는 군바의 게르(Ger)였다.

군바의 자녀들은 도시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오직 부부만이 전통가옥 게르에서 소, 염소, 양 등 가축을 방목하며 살았고 2주후엔 에긴 강 근처의 겨울 집(Winter House)으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라고 한다. 부부만의 공간에서 남녀 이방인이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며 동숙(同宿)할 수 있음은 유목인만의 전통인 것 같다. 초원에서만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무한 자유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밤브가 입을 연다. 간밤에는 통역이 필요 없더군. 군바가 다음에 오면 사슴을 잡아 줄 테니 다시와하니, “알았어! 다시 올 테니 꼭 잡아줘야 돼라고 대답하며 둘이서 밤새 대화를 주고받더라는 군! 사실 군바는 몽골어밖에는 외국어를 하지 못했고 나도 몽골어는 몰랐다. 그런 두 사람이 잠자면서 대화를 주고받다니 모두들 다시 웃으며 지난 밤 못 다한 대화가 계속 됐다. 서로 모르는 외국어로 잠꼬대든 술타령이든 대화를 했다는 사실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이 통했다는 증거다.

 

몽골초원의 군바의 게르에서 하룻밤은 이심전심의 대화였기에 통역도 필요 없었다.

 

지난밤 밤브만이 운전 때문에 술을 참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몹시 취했다. 대화의 주제는 주로 사냥에 대한 모험담이었다. 얼마 전 한국인 헌터들이 이곳에서 랜드로바 3대로 17일 동안 사냥을 시도했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라(Amaraa)의 무용담은 밤새 이어졌다. 그의 실행담 역시 . 유목민의 솜씨는 놀라웠다. 군바는 목장일을 하다가 다쳐서 손이 크게 부어있었다. 빌리가 나에게 감기약 있느냐 묻길래 이상하다는 듯 꺼내서 주었더니 상처부위의 고름을 짜내고 감기약을 바른 후 붕대로 감아주었다. 한국같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무일 없다는 듯 군바는 밤새도록 술마시며 나와 우정을 나누었다. 진정한 초원의 우정이었다.

칠흑의 어둠속 드넓은 초원에서 고기 구워 술 마시며 나눈 우정은 순수 그 자체였다. 간간히 들려오는 늑대 울음에 집 지키는 사냥개의 응답도 조화롭게 어우러진 화음으로 들렸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과 마음으로 통한 동심은 초원의 향기처럼 온화했다. 이 밤엔 모두 취했고 쏟아지는 별빛도 휘황에 더하여 찬란했다.

 

가족 잃은 소()도 눈물 흘린다.

 

젖을 못 먹인 어미 소가 아쉬워 풀 뜯으러 가는 행렬에서 계속 뒤쳐지며 송아지를 바라본다.

 

초원의 아침은 조용하고 공기는 상쾌하며 유목민들은 분주했다. 지난밤 과음에도 불구하고 군바 부부는 일찍부터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 마침 겨울 준비하기 위해 도축하는 날이라 이웃 주민들도 도와주기 위해 왔다.

우리에 있는 소 한 마리를 골라 멀리 데리고 나간다. 차마 도살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없어 그저 멀리서 바라보았다. 쇠망치 같은 도구로 머리를 후려치니 소가 즉사한다. 곧바로 달려들어 가죽을 베껴 내장을 꺼내고 살코기를 발라낸다. 부인들이 달려들어 내장을 손질하고 남자들은 살코기를 날라 나무로 된 구조물에 걸어 말린다. 그 가운데 일부는 밤브를 위해 비닐에 싸서 트렁크에 싣는다. 물도 별도 사용하지 않고 깨끗하게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처리된다. 놀랍고 신기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모든 일이 깔끔하게 끝이 났다.

송아지만 따로 있는 우리의 빗장을 풀자, 어미 소들이 들어와 젖을 먹인다. 한 마리 한 마리 자기 자식 찾아 젖을 먹이는 모습은 신기하고도 신비로웠다. 젖을 다 먹인 소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우리를 벗어나 풀 뜯으러 길을 나선다. 불행히도 자식을 못 찾아 젖을 못 먹인 어미 소가 우왕좌왕하더니 마지못해 일행을 따라 나선다. 못 내 아쉬워 뒤처지며 뒤돌아보며 계속 송아지를 찾는다. 동물의 본성이고 모성애다. 어미젖을 먹지 못한 송아지에게는 군바 부인이 우유를 가져다 먹였다. 안개 낀 초원에서 리더를 따라 일렬로 풀 뜯으러 나서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우리에 갇혀있는 염소와 양들도 빗장을 풀자 풀을 찾아 떼 지어 모두 나간다. 군바의 농장은 텅 비었고 참새 떼들이 몰려와 먹이를 찾는다. 가축이 모두 떠나고 한가해지자 아침식사가 시작된다.

점심때가 되자 풀 뜯으러 나갔던 소들이 다시 일렬로 되돌아온다. 우리를 지나치더니 아침에 도축한 소가 있던 자리에 동그란 원을 그리며 모인다. 순간! 깜짝 놀랐다. 먼저 죽은 소를 위한 일종의 애도행사인 듯 했다. 처음 보는 동물의 애도현장이다. 소도 인간처럼 추모행사를 하는 걸 보며 인간세상도 다시 생각해보았다. 한참동안 원형 상태로 모여 있던 소들이 다시 한 줄로 길을 떠난다. 풀을 뜯은 다음 물을 찾아 떠나는 길이란다.

군바 하우스에서 하룻밤으로 초원의 생활을 모두 알기엔 부족했지만 그래도 많은 걸 보고 배웠다. 모든 것이 현대화된 세상에 초원에서 원주민의 전통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비록 짧은 일정이었지만 정들어 헤어지기 싫었다. 관대한 친절과 융숭한 대접에 마음으로의 감사를 표하고 우리는 울란바타르를 향해 다시 길을 재촉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초원의 위대함과 유목민의 관대함에 많은 생각을 했다. 비록 34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현지인들과 함께 했기에 많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최적의 여행코스를 잡아 준 빌리와 먼 길 안전운전하며 길 안내해준 밤브에 대한 고마움은 입이 아닌 마음으로 전했다.

 

칭기스칸의 대초원은 포용과 관용이 뒤엉킨 생명의 터전

 

분위기 좋은 러시아 식당에서 선화와 맺은 몽골 가족과 마지막 석별의 정을 나눴다.

 

비록 34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몽골의 대초원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몽골사회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몽골의 대초원에서 유목민의 삶은 어느 정도 이해했다. 황량한 대평원에서 몽골인들이 생존할 수 있는 배경에는 이웃을 친절로 받아드리고 자비로 감싸 안는 너그러움, 즉 포용과 관용의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 몽골에는 처음 만나는 이방인에 대한 친절한 환대와 피를 나눈 혈연이 아니라도 가족으로 너그럽게 감싸는 유목민의 전통이 아직 살아있다.

이 모든 것은 자연의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중요한 점은 포용과 관용이 사회적 정의에 위반되면 그 어떠한 노력도 필요 없다. 가식적인 대의명분보다는 현실적인 실사구시가 중요한 사회다. 사회적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칭기스칸이 짧은 기간에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점에서 찾았다. 이방인에 대한 환대와 관용으로 타종교나 타민족을 포용했고, 혈통보다는 능력위주의 통치이념으로 인간을 존중했다. 여기에 살해당한 칭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에 대한 복수심은 배신을 용서하지 않는 원칙이 작용했다. 칭기스칸을 부정적으로 평가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후자를 강조한다.

하지만 몽골제국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지 못한 미스터리는 아직 풀지 못했다. 몽골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라코룸에 가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의 몽골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초원을 사랑하는 몽골인들이 전통을 중시하며 국부인 칭기스칸을 신()처럼 생각하는 정신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았다. 몽골인들은 아직도 강하다.

여행 마지막 날도 바빴다. 아직 만나지 못한 오랜 친구 ETUEGEN 대학의 니얌자그드(Nyamzagd) 총장은 꼭 만나고 싶었다. 다행히 점심약속이 되어 새로 신축한 그의 대학에서 만났다. 몇 해 전보다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기숙사를 포함하여 새로 지은 건물을 자세히 설명하고 한국 유학학생들에 대한 배려도 특별했다.

예전 같으면 시내의 유명식당이었을 텐데 이번에는 구내식당에서의 점심초대다. 한국인 유학생을 통역으로 배석시킨 가운데 된장찌개가 준비돼 있었다. 주방의 요리사도 불러 된장찌개의 배경도 설명한다. 오늘 처음 총장님의 지시에 따라 된장찌개를 요리했는데 맛이 어떠냐며 조심스레 묻는다. “맛이 한국 된장찌개와 똑같다고 하자”, 요리사도 안도하고 니암자그드 총장도 만족해한다. 그의 환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아들인 이데르싸이한(Idersaikhann)의 통한 호텔까지의 배웅도 잊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 한국의 국제학술회의에서 처음 만나 우정을 주고받은 니얌자그드 총장에게는 건장한 두 아들이 있고 부인은 과거 보건성 장관을 지낸 인텔리다. 그 후 수차례 몽골을 방문하면서 그의 가족들과도 유대를 가졌다. 2008년 시바와 함께 방문했을 때는 둘째 아들 이데르싸이한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몽골에서 승승장구하는 니암자그드와 그 가족에게 감사와 행운의 메시지를 다시 보낸다.

니암자그드와의 약속 때문에 선화 엄마와 이모는 오후에 만났다. 재회의 기쁨과 함께 시내 백화점에서 쇼핑도 하고 캐시미어로 유명한 GOBI 쇼핑센터도 들렀다. 그동안 이용하며 정들었던 분위기 좋은 러시아 식당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몽골가족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 오르길(ORGIL) 호텔에 도착하니 밤브가 공항까지 차를 태워주겠다며 기다리고 있었다. 선물로 캐시미어 티셔츠와 시바의 입 마름병을 고쳐주겠다며 귀한 약용열매도 구해왔다.

공항으로 가는 길! 다시 여행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칭기스칸 공항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귀국 길에 올랐다. 힐링하러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힐링도 하고 몸에 좋은 약초랑 따뜻한 동물의 피도 마시며 건강도 회복했다. 큰 기대 없이 방문한 훕스골에서 어머님과 시간여행도 했고 초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깊은 우정도 나눴다. 몽골가족과 함께한 시간은 그야말로 친절과 배려가 뒤엉킨 대초원의 향연이었다. 결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다음 방문을 다시 기대한다. (2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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