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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But Rich

모방과 창조에 뛰어난 민족 - 자유중국

칭진(請進)! 타이뻬이

어서 오십시오(칭진)! 타이뻬이 공항(中正國際機場)은 조용하고 매우 신사적인 편이었다. 선진국, 특히 일본에서 겪어야 했던 한국인으로서의 수모(受侮)나 개도국에서 겪어야 했던 몸수색의 프라이버시 침해도 없었다. 공항 건물은 매우 현대식이었고 비교적 깨끗하고 조용하였다. 입국절차시에도 별다른 장애나 시간의 지체없이 공항 출구로 나올 수 있었다.

출구를 막 빠져나올 무렵 예기치 못한 놀라움이 나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리따운 두명의 아가씨가 한자로 정확하게 나의 이름을 쓴 피켓을 높이들고 누군가를 찾고 있지 않은가! "공항이나 호텔에서 친절하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경계하세요"라는 이곳 실정에 밝은 사람들의 전언이 뇌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상스러우리 만큼 이름이 정확하지 않은가!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을 반씩 가지고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나의 성명을 밝혔더니 두 아가씨는 환호를 지른다. 정신을 가다듬고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C교수가 보내서 마중 나왔다는 한국인 유학생 J와 R이었다.

대만을 여행 목적지로 삼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중동과 아랍의 경제를 전공하는 나로서는 항상 동서교역의 요충지 실크 로드(silk road)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료 조사를 위해 중국의 돈황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중국의 언어나 그들의 생활상에 매우 생소한 나로서는 선뜻 용기를 낼 수 없는 곳이 중국 여행이었다. 더욱이 중국 대륙의 방문에는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기에 초청장이나 여행허가에 필요한 서류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중국인의 기질과 삶이 응축되어 있는 대만에서 우선 중국에 대한 공부와 자료조사를 하려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제대로 연구도 못한 채 연구라는 명목으로 신혼여행도 제대로 못 다녀와 항상 미안해하던 아내, 지선에게 해외 여행을 한번 시켜 주고 싶었다. 다행히 내가 쓴 『중동경제론』이 재판에 들어감으로써 피보다 아까운 몇 푼의 돈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 돈은 아름답게 쓰고 싶었다. 지선 또한 교직 생활을 하는 터라 시간을 낸다는 게 그리 쉬운 편이 아니었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여름방학 시작하는 날에 출발일자를 맞추고 무작정 손을 잡아끌고 나선 것이 이번 여행의 시작이었다.

대만행을 결심하고 이곳 실정에 밝은 G선생님, L교수와 여행 상담을 하였더니, 대만 여행은 반드시 여행사를 통한 단체관광을 해야 한다고 일러 주셨다. 관광가는게 아니고 공부하러 가는 데 단체 여행을 하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고집을 꺽지 않고 비행기표와 호텔 예약을 완료하긴 했어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아 화교분이신 C교수를 다시 찾았다. 그분도 "혼자서는 어려울 텐데---"하시면서 여행에 관한 안내를 자상스럽게 해주셨다. 그리고 혹시 여행도중 문제가 생기면 제자가 그곳에 있으니 연락하여 도움을 요청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C교수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아예 이 학생들에게 전화를 걸어 주신 것이고, 바로 그 학생들이 지금 우리 앞에 와 있지 않은가!

가벼운 자기 소개가 있은 후 당황이 안도감으로 변했고,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공항밖은 공항안과는 대조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초여름 밤의 열기는 남방의 이국적 정취를 매료시키고 있었고, 길가엔 시끄러운 차량 행렬과 호객 행위를 하는 인파들이 뒤엉켜 한바탕 혼란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와 지선은 두 여학생의 안내로 어렵지 않게 예약해 둔 '요우스 따환띠엔'(優仕大飯店,이곳에서는 여관이나 호텔을 반점이나 대반점으로 부른다)에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타이뻬이의 야시장(夜市場)은 문자 그대로 화려하였다. 야시장은 가장 오랜 전통을 갖는 롱산스(龍山寺)야시장을 비롯하여, 뱀의 생피로 유명하여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이용하는 화시지에(華西街)야시장, 주변에 대학가가 위치하여 학생과 미인이 많다는 사림(士林)야시장, 그리고 문자 그대로 로타리를 중심으로 발전한 유엔환(圓環)야시장이 유명한 명소이다. 우리가 찾은 곳은 롱산스와 화시지에 야시장었다.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채 풀기도전에 이곳을 가자고 했을때만해도 나는 매우 당황하였다. 우리가 호텔에 도착한 시간이 이미 11시를 훌쩍 넘어 잠을 자야 할 시간이었고, 안내하러 온 사람이 여학생이라는 사실에 은근히 그들의 귀가가 걱정되어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야시장에서의 인파는 또다시 나의 걱정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 이곳 사람들은 낮에는 별로 활동을 안하고 이처럼 선선해지는 밤에 음식을 먹거나 시내를 활보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역시 중국은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인 것 같다. 이곳에서의 체험을 통해 뒤늦게나마 그들이 강요한 야시장행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야시장의 명물인 국수와 과일쥬스를 들면서 서울과 이곳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화려한 타이뻬이의 첫 밤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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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속의 과거 고궁박물관(故宮博物館)

대만의 인구는 약 2,000만명 정도이며, 기후는 연평균 22도 정도로 매우 무덥고 강우량(연평균 2,500mm)이 많은 나라이다. 1912년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 성립되었고, 1945년 50년간의 일본통치의 종식과 함께 독립하였다. 그후 1948년 장개석이 총통에 취임하였고, 그 다음해인 1949년 정부의 수도를 대만의 따이뻬이로 옮겼다. 1988년 장총통이 서거하자 이등휘(李登輝)가 제8대 총통으로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만의 민족은 중국 대륙에서 이주해 온 한민족(漢民族)과 원주민인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민족은 청조이전 대만으로 이주한 뻔성런(本省人)과 제2차 세계대전이후 국공(國共) 내전으로 이주해 온 와이성인(外星人)의 두 그룹으로 다시 나눠진다. 뻔성런은 대개 푸지엔성(福建省, 특히 泉洲와 彰州)에서 비옥한 토지를 찾아 건너온 사람들로 푸지엔성 출신이 뻔성런의 80%이상을 차지하며 민난위(閔南語)를 사용한다. 또한 꽝뚱성(廣東省)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광동인과는 달리 커지마(客家)라고 부르며, 한민족 가운데서도 독특한 생활양식을 지켜 내려왔다. 그들은 커지아위(客家語)를 사용하며 뻔성런의 약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와이성인은 약 200만명 정도로 쩌지앙성(浙江省)과 지앙쑤성(江蘇省) 출신자가 대부분이며, 현재까지 이들이 대만사회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다.

타이뻬이의 아침은 오토바이의 굉음과 자동차의 경적으로 혼란스럽게 시작되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중 하나는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을 가던지 그곳의 박물관을 가 보는 것이다. 관광을 즐기는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특히 이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저 유흥지에서 아름다운 자연만 감상하는 것이 관광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돈을 많이 들여가며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늘어놓는 이야기들이 고작 그 지역의 음식이나 기후 등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인 경우가 많다. 때문에 나는 첫 번째 방문지로 중국 4대 박물관의 하나인 고궁박물관을 택했다. 다행히 유학생 R이 수업이 없는 날이라고 동행해 주었기에 통역에 아무런 지장없이 박물관을 자세히 구경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오전 9시경 입장시간에 맞추어 박물관에 도착하자마자 또다른 경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수집한 소장품 62만점을 소장하고 있는 거대한 규모와 잘 갖추어진 시설이 우리의 탄성을 자아냈다. 항상 2만점을 전시하고 3개월에 한번씩 교체를 한다는 이곳의 소장품을 모두 감상하려면 무려 8년이상의 세월이 걸려야 한다고 하니 그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이 소장품을 본토에서 옮겨오기 위해 국공내전이후 장총통은 해상의 유물운송단을 직접 지휘하여 대만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중국인은 문화민족이며, 예술을 사랑하는 민족임"을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유물의 훼손과 도난방지를 위해 소지품은 매우 한정되며, 특히 카메라는 소지할 수 없고 입구에 맡겼다가 나올 때 다시 찾아야 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큰 방 전체에 세계문화사 연표가 걸려 있는데 한눈에 세계사와 중국역사를 공부할 수 있어 학생들에겐 더 없는 학습실이 되고 있다. 이곳의 연표에는 세계 역사의 흐름과 중국의 5000년 역사, 문화를 자세하게 대비시켜 놓았고, 그 밑에는 소장품의 복제물을 전시해 놓았기에 유물의 역사적, 시대적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대부분의 대만 학생들은 이곳을 방문하여 역사 공부를 하며, 학생들에겐 입장료도 매우 싸다고 한다. 또다시 우리나라 생각이 났다. 변변한 역사 박물관도 많지 않은데 학생들 수준에선 입장료가 터무니없이 비싼 것 같다. 특히 국립공원의 경우, 공원 관리비라는 명목으로 웬만한 사찰 하나만 구경을 가더라도 우리에겐 커다란 부담이 된다. 더욱이 그 곳에서 파는 기념품도 대개 상업적인 수준에만 치중하고 있는 점이 이곳과는 대조적이었다.

마침 우리가 고궁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는 행운도 따라 주었다. 이곳에서는 도예전이 열리고 있었기에 그 유명한 당삼채(唐三彩)를 감상할 수 있었다. 당삼채는 당나라 시대에 활발히 제작된 도기로 백유(白釉)에 녹색, 갈색, 남색의 연유(鉛釉)로 채색이 되어 있다. 또한 전시품중 눈길을 끄는 것은 전체가 옥(玉)으로 이루어진 취옥백채(翠玉白菜)이다. 취옥에다 배추에 잠자리가 앉아 있는 모양을 조각하여 놓은 것이다. 정교한 조각 솜씨뿐만 아니라 금방이라도 김치를 담아 먹을 수 있는 싱싱한 배추가 조명과 함께 빛나고 있는 이 작품은 저절로 감탄사를 나오게 한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전쟁은 항상 과거를 폐허에 묻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 그 창조란 과거 역사속에서 들추어낸 하나의 모방에 불과할뿐이다. 그렇기에 전쟁도 인간생활의 일부이고, 역사도 창조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이다. 얼마전 다국적군에게 참패를 당한 이락 국민들이 바그다드 유물의 도난에 마음 아파하는 점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리라! 확실히 중국인들은 과거를 알고 역사를 아는 민족이며, 또 그것을 지키려는 민족임을 이번 박물관의 견학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고궁이라는 의미도 '옛 고(古)'자 고궁(古宮)이 아닌 '오랠 고(故)'자 고궁(故宮)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 언젠가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한 말이 기억났다. "동북아의 세 민족-중국, 한국, 일본-을 시제상으로 나누어 보면, 중국민족은 과거 시제, 한국민족은 현재 시제, 일본민족은 미래 시제로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인은 보수적이고 개혁과 개방이 점진적이다. 한국인은 현실에 만족하기에 그저 경기가 좋으면 쓰고 보고, 불경기엔 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하고 다시 호시절이 오면 금방 어제를 잊어버린다. 일본인은 항상 미래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먼 미래를 대비한다. 그리하여 연 7년이상 세계 제1의 저축율을 유지하고 있고, 불경기가 오면 오히려 저축액이 늘어 정부에서는 자금 관리에 더 큰 어려움에 처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지금 이 박물관의 유물을 하나 둘씩 살펴보면서 역시 "중국인은 현재 속에 과거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민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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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라, 큰 나라

현재 속의 과거를 알기에 적합한 또다른 곳은 신쭈(新竹) 근처의 시아오런구어(小人國)이다. 타이뻬이에서는 타오유엔(挑園)까지 약 40분정도 기차를 타고 가서 40분 정도 버스를 이용하면 이곳에 도착할 수 있다. J와 R이 모두 수업이 있어서 더 이상 그들의 안내를 받을 수 없었기에 호텔에 부탁하여 친절한 기사 한 분을 소개받았다. 이곳에서도 행운은 계속되었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기사는 유창한 영어로 자기 소개를 하며 명함을 한장 건네준다. 라유덕(羅維德)이라는 한자 이름 밑에 워터로(Walter Lo)라는 영어 이름이 우리를 흥미롭게 해주었다. 또한 혼자였기에 갈 길을 걱정하던 싱가포르 보건성 소속의 미스 훵(Fung)이 동행하게 되어 더 없이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이루어진 후, 한국에서는 애수(哀愁)로 잘 알려진 영화 Waterloo Bridge를 기억해 내고 영화 얘기로 해서 우리의 대화는 무르익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로버트 테일러나 비비안 리 같이 멋진 연인은 아니었지만 워터루에서 만난 조그만 추억을 하나 만들 수 있었다.

지선과 미스 훵은 이미 다정한 친구가 돼 있었고, 앞좌석의 나와 기사 또한 좋은 말 동무가 되었다. 워터루는 한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기에 한국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한국의 높은 건물과 한강의 야경 그리고 청결함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더욱이 수안보에서 온천을 즐겼다는 말은 우리 사이를 더욱 좁혀 주었다. 그곳이 지선의 고향이며, 우리가 그곳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말에 끈끈한 대화는 계속되었다. 대화는 더욱 발전하여 한국, 싱가포르, 대만을 오가며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덕분에 2시간여의 행로는 지루하지 않은 채 순식간에 우리를 시아오런구어에 데려다 주었다.

이곳은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어서 그런지 여지없이 중국인의 상술이 발동되고 있었다. 소인국(小人國)이라는 한자 밑에 '중국의 창'(Window on China)이라는 부제를 단 안내책자를 아예 한글판으로 제작하였고,면세점의 안내문도 한글로 돼 있어 관광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따라서 국력의 위세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고, 우리가 더 이상 어려운 외국어를 후손들에게 가르치지 않기 위해서는 국력을 신장시키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사실도 새삼 알 수 있게 되었다.

시아오런구어는 1984년에 개장한 곳으로, 고궁박물관, 국부기념관, 중정기념관, 고웅항부두, 중국대륙 북경의 자금성, 만리장성, 귀문석불(龜門石彿) 등이 모두 1/25로 축소되어 약 5만개의 각 장소에 소인(小人)들의 복장과 모습이 자세하게 배치되어 있는 곳이다.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각품은 마치 실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관광사업이 대부분 오락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 오락과 질 모두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창설자의 의도에서 문화, 예술을 필수요건으로 하는 중국인의 기질을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에집트의 스핑크스, 이락의 사마라 이슬람사원, 마야의 피라미드, 미국의 큰 바위얼굴, 이태리의 레덴토레 수도원, 카프라 별장, 일본의 오오사카성, 천수각(天守閣), 동대사 칠층탑, 프랑스의 르 토로네수도원 등도 함께 축소 조각하여 배치하였다. 한국의 유물이 없었다는 점이 매우 유감이었으며, 옆에 있는 미스 훵에게 일종의 수치감을 느끼게 하였다. 다행히 국제공항에 대한항공 KAL이라는 로고를 단 비행기가 어슬렁거리며 기어다니고 있어 다소의 안도감을 주긴 했지만 못내 아쉬움과 문화적 수치감은 지울 수 없었다.

중국인은 상술이 뛰어나기는 했지만 예술을 이용한다는 점이 이채로 왔다. 본토에 두고와 별다른 문화 유적지를 소유하지 못한 대만으로서는 과감하게 본토의 문화재를 이곳에 끌어들였고, 이것도 부족하여 세계 각국의 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관광지로 개발한 것이다. 한국의 관광도 이 점은 배워야 한다. 국토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외쳐대놓고 막상 구경을 하려고 하면 변변한 안내책자하나 없는 나라가 우리의 현실이다. 유럽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조각품이나 그림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이지 않는가! 분명히 소인국은 작은 나라이지만 중국인은 큰 나라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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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기차, 기차는 화차

한국인 관광객이 대만 여행을 하면서 빼놓지 않고 가는 곳이 화리엔(花蓮)이다. 화리엔은 시원한 바닷가에 위치하고 대리석이 유명한 곳이어서 여행사의 선전문구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이다. 그 유명한 대리석의 도시를 방문하기 위해 여행사의 안내와는 다른 코스를 택해 보았다. 시간에 붸기는 터라 대만을 절반으로 나누어 그 중간 지점인 타이쭝(台中)을 택하고, 동서를 가로질러 화리엔을 돌아서 다시 타이뻬이(台北)으로 돌아오는 그야말로 섬의 절반을 완전히 한바퀴 돌아보는 코스를 설정했다. 화리엔을 가기위해서는 똥시헝跅공루(東西橫貫公路)를 지나야 하기에 타이쭝을 가야한다. 물론 언어와 풍속에 밝지 못했기때문에 안전을 고려하여 호텔을 미리 예약해 놓았다.

소인국관광을 마친후 열차편으로 타이쭝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양매역(楊梅驛)은 마치 한국의 1970년대쯤 고향의 시골역을 연상시키리 만큼 향수가 어린 시골역이었다. 대만에서의 열차이용은 매우 쉬운 편이다. 대부분 전산화가 이루어졌기에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는 습관에 익숙한 사람은 역이름만 한자로 알면 이용에는 큰 불편이 없다. 하지만 이곳의 사정은 달랐다. 조그만 시골역이었기에 직접 대화를 해야했고, 요금 계산의 어려움이 뒤따랐다. 다행히 타이쭝(台中)이라는 중국어 발음을 암기하고 있었기에 마음은 놓였지만 이내 마음은 불안하였다. 이 사실을 알았는지 친절한 워터루는 열차표를 구입해줬고, 출발시간도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멋진 여행이 되라는 말을 남기고 미스 훵을 싣고는 휑하니 가버린다. 열차가 올 시간이 약간 남아 있었기에 별다른 곳을 찾을 생각은 멈추고 역부근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방금전에 역까지 전송해주고 떠난 워터루기사 아저씨랑 싱가폴 훵아가씨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아쉬움만이 한적한 시공을 메우고 있었다.

이제 부터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는 다행히 영어와 한국어를 통역해줄 이들이 있었기에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이 모두 돌아가 버리고 지선과 단 둘이 돼버린 것이다. 어떻게해서든지 타이중에 도착해야 밤을 지낼수 있고, 그러기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릴수 밖에 없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열심히 지도를 놓고 타이쭝까지 가는 역의 이름을 중국어로 외우기 시작했다.

해외여행에서 빼놓을수없는 것은 지도와 현지의 일상용어 몇마디쯤 외워 놓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예외없이 나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대만은 한자문화권이기는 하지만 우리와는 다른 표현을 쓰는 말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것이 공항을 기장(機場), 여관을 반점(飯店), 정류장을 차참(車站), 기차를 화차(火車), 버스는 기차(汽車) 등으로 우리가 혼동하기 쉬운 용어들이 많다. 낯선 외국을 방문할때는 간단한 회화책이나 아니면 영어로 된 그 나라의 소사전을 한권쯤 챙기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간단한 인삿말과 "적어 주십시오, -까지 가주십시오 ---" 등 간단한 일상용어는 기내에서 외워두면 매우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다. 따라서 여행전에는 반드시 그 지역의 사정을 미리 공부해두고 다녀올 지역을 지도를 통해서 미리 암기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방문지에서의 각종 영수증이나 성냥갑 등을 수집해 오면 다음 여행시 비용의 계산이나 장소를 찾는 데 매우 유리하다.

대부분이 농업지대로 이루어진 지역을 통과하여 무리 없이 타이쭝에 도착하였을 땐 이미 밤늦은 시각이었다. 역에서 나와 택시를 잡고 Hotel National을 가자고 하여 첫 번째의 실수를 하였다. 그곳은 역에서 매우 가까운 지역이라고 알았는데 이미 택시는 시내의 중심가에 와 있지 않은가! 말도 통하지 않고 답답하여, 그래 내친 김에 시내 드라이브나 하면서 야경이나 구경하자고 마음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본요금이면 될 거리였는데 외국인 방문객이라 바가지를 쓴 것이었다. "따환띠엔"이라는 말을 할 걸 하는 후회를 하였다. 호텔에 도착했을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내륙지역에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야경이 화려한 이곳은 타이뻬이에서 남서쪽으로 약180km 떨어진 인구 70만의 상공업도시이다. 또한 토질이 기름져 쌀, 야채, 등 농작물이 풍부하다. 18세기초에 한민족이 대규모로 이곳에 이주하였고, 1884년에는 대만의 성부(省府)가 되었다. 그후 중부 관광의 기점이 된 타이쭝은 중부도시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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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과 여유 - 똥시헝 꽈안 공루(東西橫貫公路)

대만 여행의 정수는 역시 해발 2,500m의 험준한 산맥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똥시헝跅공루(東西橫貫公路)를 건너보는 것이다. 타이쭝에서 화리엔으로 가는 차편은 하루에 세편으로 한정되어 있기에 서둘지 않으면 안된다. 화리엔까지 보통 8시간 정도 걸려야 도착하는데 이곳에선 정확한 시간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도중에 기상이변이나 도로에 사정이 있으면 시간은 한정없이 지연되며 그들 특유의 만만디정신은 이 경우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 따라서 도착지에서의 시간약속이나 항공편, 열차편의 예약에는 상당정도의 여유시간을 두는 것이 안전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우리는 아예 화리엔에 호텔을 예약해 두었던 터라 시간에 관한 한 잊기로 했다. 타이쭝에서 화리엔으로 가려면 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타이쭝에서 7시 30분이 첫차이고, 9시 그리고 11시가 막차이다.

타이쭝의 아침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기공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치 중국영화를 한편 보듯이 자욱한 안개속에서 남녀노소 무리지어 기공체조를 하는 모습은 또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다행히 택시기사의 친절은 어제의 불안을 말끔히 뎨어주었다. 11시가 막차인 버스를 이용한다는 건 다소 두려움이 뒤따랐기에 9시차를 서둘러 타야했다. 그렇다고 타이쭝의 아름다움을 놓치긴 싫었다. 호텔에 부탁을 하여 영어를 잘하는 기사를 소개받고는 타이완성이후이(台灣省議會)와 만퍼스(萬佛寺)를 둘러보기 위해 일찍 체크 아웃을 하고 길을 재촉하였다. 주마간산식으로 의회와 사찰을 둘러보고 화리엔으로 가는 차를 잡기위해 다시 택시에 올랐지만, 바로 이 시간대가 러시아워였기에 이곳도 예외 없이 차량의 행렬은 뒤틀린 구렁이처럼 엉키고 있었다. 애써서 불안을 감추려했지만 마음은 달아올랐고, 택시기사는 승객인 우리보다도 더 시계를 자주보며 꽉메운 차들을 헤집고 가까스로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였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낯선 이방인이 길을 헤메면 동정심이 가기 마련인가 보다. 택시에 내려놓고도 마음이 안 놓였던지 기사는 아예 차에서 내려 나의 손을 낙아채고는 매표소로 달렸다. 버스비용을 확인하고는 친절히 화리엔까지의 표를 두장 구입해 주고 버스까지 안내해 준다. 출발까지의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고마움의 표시를 간단한 인사로 대체하고 구내매점에서 타이쭝의 명물인 도시락을 구입하고 차에 올랐다. 8시간이라는 장거리 여정에 좀 지루하기도 해서 그 동안 밀린 잠이나 자 두어야겠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버스에 올랐다. 공장지대와 주택가로 이루어진 시가지를 한시간 정도 달렸을 무렵 버스는 계곡을 쏜살같이 오르고 있었다.

잠이나 푹 자 두려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완전한 긴장이 계속되었다. 말이 2차선이지 겨우 대형버스가 지나갈 정도의 산악도로가 굽이 굽이 이어져 험준한 준령에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지 않는가! 양손에는 근육의 경직을 느낄 수 있었고, 엄지와 검지손가락은 이미 보물창고의 열쇠처럼 굳게 잠겨져 그 속에서 땀의 홍수는 진주알이 되었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운전솜씨를 자랑하려는 듯 계곡사이를 달리며 마주오는 차를 곡예사처럼 피하기 시작한다. 불과 10여 미터 앞의 계곡에서 불쑥불쑥 차가 튀어나와도 좀처럼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리는 운전기사가 얄밉기까지 했다. 고개를 슬그머니 돌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이미 100여 미터는 아니 천길아래 완전한 V자형 형태를 취한 바위계곡은 아예 나의 시선을 윗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좌우를 둘러보니 승객들은 이미 이러한 곡예에 익숙한 탓인지 흥겹게 정담을 나누고 있었고, 가끔 소양호같은 호반이 나타나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면 함성을 지르기까지 하였다. 옆에 앉은 지선도 10년 묵은 시집살이의 체증이 확 풀리는지 아름다운 경치와 곡예가 연출되면 손을 잡아끌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짝 긴장하여 독사앞에서 벌벌떨고 있는 모양을 한 개구리의 모습과도 같은 나는 시계만 열심히 보면서 "아직 산을 오르지도 못했는데 언제나 도착할까"하는 두려움으로 가득차있었다. 마음속으론 "오! 하느님, --- "라고 열심히 기도를 하였다. 한국에서는 대관령 고갯길이 굽이 굽이 돌아 동해안에 이르는 동안에도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여 조바심으로 일관하던 내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수가 없었다. 설마 이산을 넘어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바다가 보이는 평온한 길이겠지 그때까지만 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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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순응하는 중국인

협곡의 산, 그것도 온통 산전체가 거대한 바위 덩어리로 이루진 산을 휘감아 돌아오면서 다시 한번 중국인과 그들의 삶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모든 중국인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고 모든 자연의 파생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중국에 들어온 대부분의 종교는 종파를 가릴것 없이 도교적인 요소가 포함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영향이리라! 지금 내가 마음 조리며 기어오르는 이 좁은 도로도 과거 고산족들이 이용하던 좁은 통상로를 오늘의 길로 확장한 것이다. 이곳에 오기전에 읽은 자료에 의하면, 똥시헝跅공루는 이미 1960년대에 대부분 공정을 인간의 노동에 의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개통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중국인을 가리켜 과장이 심한 민족, 아니면 통이 큰 대국적 민족 정도로 일컫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도로를 보면서 그 섬세함과 끈기에 다시 한번 놀라고 두고 온 한국의 산하와 우리 민족성을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 힘겹게 오르고 있는 이 도로가 해발 2,000 미터를 훨씬 넘는다는 사실에 오히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높은 산이라는 곳이 백두산이나 몇몇 산을 제외하면, 그것도 현재 남한에 있는 고산이라는 곳이 고작 해발 1,000 미터 정도이며 이처럼 암벽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관광을 외쳐대며 이루어놓은 결과가 과연 어느 수준인가! 더욱이 이곳은 우리 보다도 태풍의 피해나 일기의 불순정도가 비교도 안되리 만큼 변화가 무쌍한데 중국인들은 과거를 버리지도 않았고 미래를 포기하지도 않았던가! 한국인을 가리켜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라했거늘 이 엄청난 차이앞에서 과연 은근과 끈기를 내세울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애창하는 유행가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이라던가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되는 노랫말에 애환을 달래는 우리 민족의 과장을 다시금 머리에 떠올리게 한다. 내가 연구하는 아라비아의 예멘에 출장갔을때 들은 얘기인데, 이곳 역시 바위로 이루어진 산들로 휩쌓인 협곡들이 많은데, 특히 큸자지역이 마치 똥시헝跅공루와 같다고 한다. 아라비아의 이 도로 또한 중국인들이 예멘인들이 말타고 거닐던 소도로를 확장하여 오늘의 자동차도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엉성한 것 같아도 상당히 섬세한 재주를 소유한 민족이다. 언젠가 포철연구소를 견학했을때, "방사광이라는 첨단장비는 수노동에 의해서만 만들 수 있는데, 전세계적으로 기술자가 7명밖에 없고 그중 4명이 중국인"이라는 한 연구원의 설명을 듣고 놀란적이 있다. 그들의 미세 조각품을 들여다보면 더 놀라고 만다. 쌀톨만한 크기의 옥(玉)에 반야심경(般若心經) 270자를 조각해 놓은 걸 보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차에 버스는 족히 세시간쯤 숨을 몰아쉬며 달려 덕기(德基)휴게소에 이르더니 잠시 쉬어 갈 모양이다. 몇분을 쉬어갈지 알수가없어 내리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그저 앉아 있기도 이상하여 기사분에게 손짓 발짓으로 시계를 가르키며 바디랭기지(body language)를 하였더니 10분을 쉬어간다는 대답이 나왔다. 10분을 확인하고는 버스에서 내려 주위의 경관을 감상하는 여유를 부리기도하였다. 약간의 휴식을 취한 기사는 제법 콧노래를 부르며 여유를 만끽하며 천애(天涯)의 절벽을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승객들도 차츰 안면을 익히기 시작했고, 나와 지선이 유일한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휴게소에서 밝혀졌기에 차츰 승객들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승객이라야 고작 열댓명 정도에 불과했기에 10분의 휴식은 얼굴익히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조금전까지의 불안은 차츰 쾌감으로 이어졌고 일종의 망상으로 변해 버렸다. 긴장이 다소 풀리면서 여유를 되찾기 시작한 나는 지선에게 음료수를 권하기도 하였다. 타이뻬이에서 썩힌 오리알에 입맛을 잃었다는 지선은 아예 앞자리에 앉은 촌뜨기 어린애에게 오리알을 건네주고 바디랭기지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몇 마디 안되는 중국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그애 엄마와도 친분을 맺고 있었다. 마치 동물원에 처음 들여온 아프리카의 기린이 자신을 알리며 같은 우리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순간과도 같았다.

차츰 주위의 사람들과 풍경이 친숙해질 무렵 버스는 산의 정상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고 이미 구름이 저 만치 아래서 흐르고 있었고, 역사책에서 읽은 개마고원같은 평원도 펼쳐지고 있었다. 특히 해발 1,041 미터 지점에 위치한 세계최고 지점에 위치한 인공호수(德基水庫)는 도저히 인공(人工)이라는 점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주변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다소의 안도감을 얻은 나는 차츰 이태백과 두보의 시가 머리에 떠올랐고, 소양강처녀의 추억도 되살리고 있었다. 이런저런 상념이 가슴을 꽉 메우고 있을 때 버스는 해발 2,000미터의 리산(梨山)에 사뿐히 도착하였다.

리산은 문자 그대로 배(梨)가 유명한 곳으로 고산지대인 탓인지 무척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은 본래 타이야르족(族)이 살던 곳인데 똥시헝跅공루가 개통되고 나서 배의 주산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의 정상부근이어서 그런지 경사가 매우 급한 지대에 배나무에 고임목을 받쳐가며 농사짓는 풍경이 이채롭기까지 하다. 버스역 주변에 위치한 기념품가게와 노점상이 이색적이다. 배의 주산지답게 배를 비롯한 각종 과일이 입맛을 돋우고 있었으며, 가격은 매우 비싼 수준이었다. 리산에서 30분정도의 휴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 승객들은 다시 활기찬 모습으로 버스에 올라 더욱 친숙한 모습으로 눈인사를 나누며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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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에 피어난 인정(人情)과 여유

리산을 출발하여 최고 정상인 따위링(大禹嶺)으로 향하는 도중 웃지 못할 해프닝이 연출되었다. 고사(枯死)한 수백년생 침엽수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그 사이사이를 이름 모를 야생화와 유유히 나르는 매가 한폭의 동양화를 수놓고 있었다. 도로의 양 옆에 마치 우리나라의 산나리꽃같은 야생화도 그 동양화에 붉은 채색을 하고 있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붉은 나리꽃앞에 버스기사가 급정거를하더니 우리나라서는 1970년대쯤에나 있었음직했던 동그란 모자를 들러쓴 안내양이 쏜살같이 뛰어내려간다. 그리고는 꽃을 한다발 꺽어오자 승객들은 일제히 박수로서 환영하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애써서 그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조금을 더 나아가자 이제는 아예 승객들이 "여기다!, 저기에! ---" 등등의 고함을 지르며 그 꽃의 출저를 일러준다. 그때마다 안내양은 어김없이 뛰어내려가 숙련된 박수를 받으며 다시 차에 오르곤 하였다. 똑같은 행위가 반복되는 순간, 나는 그 꽃의 이름도 모르고, 왜 그 꽃이 관심의 대상이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 꽃이 아름답건 아니면 약초이건간에 매우 희귀하고 귀한 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꽃의 아름다움이나 귀함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꽃으로 인해 승객들은 일종의 동심(同心)을 공감할 수 있었고 기다려줄 수 있는 포용력과 여유를 공유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아직 그들에겐 자연보호니 하는 말은 아예 미사여귀였으며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조화가 더 큰 아름다움이었다. 덕분에 버스기사는 콧노래를 부르며 안전운전을 할 수 있었고,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승객도 없었기에 안내양도 입가에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느덧 버스는 정상을 훌쩍 넘어 최고지점인 따위링에 도착하였고 해는 기울어져 있었다. 휴게소에서는 우리에게 낯잊은 마른 과일과 당고, 그리고 대나무잎에 싼 얇은 송편을 팔고 있었다. 몇해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어느 여름날 해인사를 찾았을 때, 1000원 주고 사먹은 송편이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기억이 다시금 입맛을 부추기고 있었다. 단지 그때는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인정을 채워주고 있다는 점이 다른 점이다. 이제는 승객과 하나 아니 공동운명체가 된 우리는 아예 그들과 한 가족이 되었다.

갑자기 젊은 청년이 가까이 와서는, "---Korean?" 하지 않는가! 뭍에서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하도 반가워서 "한국을 아느냐고?"고 물었더니--- 영어를 조금하는데 올림픽을 통해서 한국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직장에서 휴가를 얻어서 타이루꺼(太魯閣)에 놀러간다고 한다. 대화 중간에 은근히 그는 발전된 한국을 부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올림픽이 국위선양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음을 깨닫게 되었을 땐 일종의 자긍심마져 느낄 수 있었다. 잠시후 그는 가게에 들어가 이곳에서는 꽤 비싼 복숭아를 한봉지 사주더니 한번 맛보라는 것이었다. 별다른 답례품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당황하여 황급히 가방을 뒤졌다. 다행히 준비해 간 도라지 담배가 한갑 튀어나오길래 한국 담배 맛을 한번 느껴보라고 했더니 무척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애연가의 차원을 넘어 폭연가의 수준을 지니고 있었기에 항상 외국 출장중에는 도라지를 두 박스쯤 준비하여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모르는 외국 친구들은 날더러 nationalist라고 추켜세우지만 그 내막은 다른 담배가 입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도 예외없이 도라지 담배를 준비하자 지선은 골을 부렸고, 방금전까지도 "또 담배---"하고 핀잔을 주던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에 핍박받던 도라지와 내가 커다란 국위선양을 해내고는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다시 버스에 올랐다. 따위링에서 출발하여 타이루꺼로 향하는 길에서는 아예 좌석을 바꿔 그 청년과 서로를 알기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아뿔사! 그토록 고대하던 동쪽의 내리막길, 해변가가 보이는 완만하고 평탄한 길에 대한 상상은 또다시 나의 예상을 빗껴갔다. 서편보다 더 깍아지른 절벽이 이제는 아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찔하게 펼쳐질뿐이다. 무사히 도착만 하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하면서 한시간쯤 달렸을까? 아래에서는 도로를 포장하는지 보수를 하는지 아예 버스가 멈추고 말았다. 승객들은 아예 습관이 되었는지 한줄기의 초조한 기색도 보이지 않고 차례차례 하차하더니 젊은 연인들은 손에 손을 잡고 걸어서 내려간다. 어떤이는 으슥한 곳에가서 볼일도 보고 나이든 사람들은 담배를 피워물고 도로에 옹기종기 앉아서 덕담을 주고 받기도 하였다. 만약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상상만해도 피곤하다. 그들에겐 초조와 체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줄잡아 30분이상이 흘렀다. 다시 도로는 소통되었고 절반이상의 승객이 하차한 버스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번 버스를 놓치면 집에 돌아가기가 어려울텐데---"하는 나만의 조바심을 혼자서 안고 방금전에 사귄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버스는 굽이 굽이 돌면서 흩어진 승객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시작했고, 승객들도 합세하여 또다시 "여기! 저기!"를 외치기 시작했다. 한 10여분쯤 이렇게 해서 온 가족이 모두 승차하자 우리의 길잡이 운전기사 아저씨는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곡예를 계속하며 한시간쯤 더 내려가자 단애절벽으로 이루어진 협곡이 나타나고 타이루꺼(太魯閣)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대리석이 침식되어 생긴 협곡으로 대만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중 하나이다. 리우시(立霧溪)를 끼고 우뚝선 단애절벽이 20 km정도 이어진다. 더욱이 이곳에는 東西橫貫公路라고 쓰여진 문(門)이 있어서 관광객의 기념촬영으로 유명한 곳이며 아미족 차림을 한 여자들이 모델 노릇을 하고 관광객의 유일한 길벗이 되어 주기도 한다. 아쉽게도 따위링에서 만난 젊은 청년은 이곳에서 작별을 해야탖다. 그가 돌아가 버린 텅빈 자리는 왠지 모르는 허전함이 맴돌고 있었다. 그동안 짧은 순간이기는 했어도 정(情)이 들었었나 보다. 대리석 협곡으로 이루어진 이곳의 경치를 수십 km달려 평야 지대로 빠져 나오니 바닷가가 가까워졌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간간이 대리석 공장들이 눈에 띠었고 바나나와 야자수 가로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화리엔이 가까이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거의 9시간 정도에 걸친 여정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들었다. 단 10분도 눈을 붙여 보지 못한채 스릴과 인정을 만끽하면서 화리엔 정류장에 도착하면서 똥시헝跅공루에 대한 여정은 막을 내렸다. 어느 덧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였다. 낯선 거리에 네온이 하나 둘씩 켜지고 있었다. 이방인이된 나는 젊은 청년이 남기고 간 주머니에 든 복숭아씨를 만지작 거리며 다음의 행선지를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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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빨리』한국인

화리엔(花蓮)은 인구 20만 정도의 동부 최대 해안도시이다. 대리석으로 유명한 타이루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한 화리엔은 대리석의 도시이다. 해안선을따라 길게 형성된 도로는 대리석으로 포장되었고 가로수의 야자수와 어우러져 남방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도시이기도 하다. 화리엔의 산책로는 중간중간에 대리석 석조물로 정취를 북돋우고 있기에 연인들의 산책로로서는 안성마춤인 곳이다. 시내라야 해안선을 끼고 발달해 있기에 굳이 택시를 타지 않더라도 도보로 1시간 정도면 모두 돌아 볼 수 있고 쉽게 목적지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지역이다. 바닷가를 끼고 돌다가 우리나라 청년회의소 회원들이 건립한 우정의 기념탑을 발견했을때는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하였지만, 역시 화리엔은 한국인에게는 낯선 지역이라는 걸 쉽게 지울수다 없었다.

화리엔은 타이쭝보다도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가 묵은 숙소(中信大飯店)가 이 지역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호텔인데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은 데스크에 한명 밖에 없었다. 내가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의사전달을 위해서 영어를 하려면 그들은 아예 질겁을 먹고 나를 슬금슬금 피하기에 더욱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관광 안내를 위해 이곳 관광국에 전화를 걸었다가 결국은 언어문제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한번은 배가 몹시 아파서 종업원에게, "약국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층으로 가보라는 대답이었다. 허겁지겁 이층으로 달려갔더니 그곳은 "레스또랑---?" 배가 고픈 줄 알고 식당으로 안내를 해준 것이었다. 영어에 문제가 있나해서 영어 잘하는 데스크맨이 나올때를 기다려 다시 물어 보았더니, 이 호텔에는 약국이 없고 뒷편 모퉁이에 있으니 가보라는 것이었다. 한참 궁리끝에 애써 찾아보아야 말이 안 통할테니 몸으로 때우고 말자고 포기하고 말았다. 더욱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길가나 상점에서 만나는 이들이 처음 건네는 인사말이다. 한결같이 일본어로, "아리가또 고자이마스(안녕하세요)? 아니면 니혼진 데스까(일본인입니까)?"로 일관한다. 물론 힘주어, "와따시와 간곡꾸진데스(나는 한국인입니다)"를 외치지만 그들의 표정은 무언가 잘못짚었다는 표정이었다(나는 단체 관광객의 틈에 끼지 않고 개인 여행을 했기에 이러한 경험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아무튼 이 지역에서 일본어가 한국어나 영어보다 더 광범위하게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언어문제로 이 아름다운 도시의 정취를 망쳐버릴 수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더욱이 나는 관광을 즐기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중국을 알고 공부하기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던다! 비행기 기내에서 외운 몇마디 안되는 중국어를 다시 암기하기 시작하였다. "안녕하세요(니하오)?, 감사합니다(쎄쎄), 나는 한국인입니다(워스 한꾸어런), ---" 등 필요한 일상용어를 다시 암기하고 길거리에서 실험을 하면서 시내 한 복판으로 진출을 하였다. 대리석이 유명한 곳이었기에 도장을 하나 새겨 볼 작정으로 사해예품사(四海藝品社)라는 토산품점에 들렀다. 여태껏 암기한 단어를 늘어놓으며 도장을 골랐고, '비싸다'는 용어 '타이꾸이'를 암기한 지선도 가격흥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내친 김에 메모지를 얻어, 도장을 하나 파고 싶다고 엉터리 한자로"아요각인(我要刻印)?"이라고 썼더니, 좋다고(하오,好)한다. 다음 여정에 붸기고 있었기에 다시 종이에다, "한시간에 가능하냐?(一時間以內可能)"고 했더니, "안된다(뿌싱,不行)"고 한다. 드디어 2시간이내에 가능하다는 대답을 얻어내고 호텔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다시 가게를 찾아갔더니 그들은 억지로한 약속이지만 정확하게 지켰다. 짜이지엔과 쎄쎄를 연발하면서 돌아오면서 나는 또 한가지 사실을 배웠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데도 가능하다고 약속을 했놓고 헛걸음 쳐본 경험이 많은 나로서는 정말 그들의 약속이 믿기지 않았기에 의심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어려운 약속이라도 한번 이루어진 약속은 지켜야한다. 그리고 한국인은 빨리 빨리 서두르는 민족이라는 걸 온 세상이 다 아는 처지에 똑같은 시행착오를 남긴 내가 미워짐을 다시 한번 느꼈다.

언어장벽을 약간 극복하게 되니까 커다란 자신감이 붙게 되었다. 일부러 길거리에 나가 가락국수도 사 먹어보고, 과일쥬스도 사 마셔보고 새로운 익숙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똑같은 시행착오는 또다시 계속되었다. 이곳 원주민 아미족의 민속춤 공연이 오후 8시 20분에 있기에 이곳을 왕래하는 셔틀버스가 8시에 호텔에 도착한다고 한다. 그 시간까지는 30분의 여유밖에 없었고 우리는 그 사이에 저녁을 마쳐야했다. 지선은 얼마 안되는 기간이긴 하였지만 중국음식에 물려서 양식을 원하고 있었다. 종업원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30분에 가능하겠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한번 시도해보겠다는 대답이었다. 지선과 나는 게눈마파람 감추듯 먹어치우고 다음 음식을 재촉하였다. 열심히 주방과 우리 사이를 오가던 종업원이 나중엔 지쳤는지, 유창한 한국말로 "빨리 빨리---"를 한마디 한다. 그 순간! 얼굴이 확 붉어지고 여태껏 쌓아올린 내 자존심이 봄눈녹듯이 힘없이 내려않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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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족의 애환과 추한 관광객

챙피하기는 했지만, '빨리 빨리'덕분에 아미문화촌에서 노래와 무용을 즐길수 있었다. 대만의 민족은 중국대륙에서 건너온 한민족(漢民族)과 원주민인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가운데 고산족은 언어나 생활양식 등의 차이로 10개 종족으로 나뉘어지는데, 이들 고산족 전체의 인구가 약 30만명정도에 이른다. 그 가운데 아미족은 고산족가운데서도 가장 온화한 남방계 종족으로 농경생활에 종사하고 있다. 마치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안을 연상시키는 아미족은 이제 근대화의 물결에 밀려 관광객을 대상으로 춤과 노래로 생활하는 일종의 상품이 돼버린 것이다. 그들은 아미문화촌에서 과거의 전통 의상이나 무기들을 전시해놓고 매일 5-6회 정도의 전통무용 공연을 한다. 아무튼 화려한 의상과 중국인 재치의 상술은 손님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우리가 참여한 공연에는 우연히도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눈에 띠는것 같았다.

어느 나라를 가보아도 좀 시끄럽고 술취해 흔들어대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한국사람들이었기에 외국에서 한국인을 식별하기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회사에서 단체로 연수를 왔던가?, 아니면 유사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의 친목단체에서 왔는지 쇼가 시작되자마자 귀에 익숙한 노랫가락이 들려왔고, 무용수와는 관계없는 독창적인 객석댄스가 연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익숙했던 탓인지 관객을 슬그머니 유도하며, 한국어로된 우리 가요를 함께 섞어서 춤과 공연이 진행되었다.

어느새 무용수와 관객이 하나되어 공연은 절정을 이루었고 무용수들이 점지해둔 관객이 하나둘씩 무대로 끌려가기 시작하더니 비싼 돈주고 구경간 관객이 어느새 무용수로 전락하여 흥겨운 춤을 보여주고 있지않은가! 공연은 흥분과 열정으로 휘날레를 장식하고 있었고 어느새 찍었는지 날렵한 사진사는 공연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을 맞잡은 무용수의 손에 파트너의 사진이 든 액자를 건네준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노련한 파트너 무용수는 애교를 떨면서 액자를 사줄것을 요구하고 있지않는가! 어정쩡한 무용수가 된 한국인 남자 파트너는 울며겨자 먹기로 입장료보다도 더 비싼 액자를 사고 있지 않은가! 돌아오면서 지선이 귓속말로 내게 물었다. "저 사람들 액자 정말 한국에까지 가져갈까요?" 쇼는 좋았는데 뒷맛이 좋질않아 호텔에 돌아와 물끄러미 바닷가 야경을 보고 있었다. 무심코 줏어들은 영자신문에서 "매춘단속반, 외국인 관광객 적발 43명, 그중 한국인 7명포함"이라는 기사를 읽고 뒷맛이 씁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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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스승이다

타이뻬이로 돌아온 우리는 또다른 경험을 해야 했다. 실은 출발전부터 기회가 있으면 한번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단지 중국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유학생들에게 "주말쯤 돌아오니 연락해서 시간이 있으면 한번 만나고 싶다"는 사정만을 알려줬을 뿐이다.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숱한 경험을 하고 타이뻬이로 되돌아왔다. 호텔로 마악 들어서는 순간! 대학원 후배인 중화경제연구소의 K가 애인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고향에서, 그것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만나니 K는 어안이 벙벙해 하면서도 매우 반가운 기색이었다. 유학생 J와 R도 다시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되돌아온 타이뻬이에서도 또다른 경험을 해야 했다. 문화대학의 L교수가 시간 맞추어 이곳으로 오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흥분은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L교수는 서울에서 같은 대학에서 강의를 한 경험이 있는 분으로 정말 한번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을 감출수 없다. 얼마쯤을 기다리다가 후론트에 이야기해 놓고 타이뻬이의 마지막 밤을 즐기기 위해 시내로 나갔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가끔 호텔로 전화를 하면서, 그저 즐거운 여행담과 이곳의 생활에 대해 유학생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밤늦은 시간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그 순간! L교수는 초조한 모습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기다린 시간은 족히 2시간 반을 넘어 10시가 훨씬 넘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미안하다'는 말로 일관했던 데스크 걸이 지금 이 순간에도 밉다. 그는 갑자기 지방을 다녀와야 했고, 건네준 상아 도장에 아내의 한자 이름을 몰라서 새기지 못해 죄송하다며 계속 '미안하다고'만 했다. 진정 미안해 해야 할 사람은 우리들인데---

L교수는 막무가내기로 저녁식사를 했다는 우리를 다시 시내 중심가의 한국식당(韓香村)으로 안내했다. 이곳에서도 중국인의 상술은 돋보였다. 대개 한(韓)자가 들어 있는 식당은 한국식당이라고 하는데, 그저 단순한 한국식당이 아니라 중국식의 라운드 테이블에 신선로를 얻은 그야말로 합작품 식당이었다. 어느 곳을 가던지 중국인은 '모방과 창조에 뛰어난 민족'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타이뻬이의 마지막 밤은 화려한 야경과 함께 풋풋한 인정 그리고 대화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화엄경에 "길은 스승이며, 언어는 세상의 자유다"라는 귀절이 나온다. 역시 길은 스승이었고, 언어는 자유를 안겨 준 고귀한 여행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사니 도인이니 하는 말에 어김없이 '길 도(道)'자를 쓰는 것 같다. 영어에서도 길을 의미하는 'way'가 단순히 길을 의미하지 않고 방법이나 도리를 의미하는 것 같다. 또한 아랍어에서도 길을 의미하는 '샤리아'라는 단어가 있는 데, 이슬람에서 '샤리아'는 모든 법의 우선인 법원(法源)이 되고 있어 각 나라에서 쓰는 '길'의 의미는 동일한 것 같다. 진정한 도인이란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없어도 비굴하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중국인은 언뜻 보기에 지저분하고, 엉성하며, 과장이 심하고--- 등등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억지로 외부의 치장을 해 가면서 남에게 과시나 눈길을 끌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충분히 생각한 후에 행동하기에 마음이 급한 사람들에게는 게으름으로 보일 뿐이다. 애써서 겉치장과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나서 진실한 내면에서는 보여줄게 없는 사람들이 아닌 친절하고 섬세하며 의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해준 값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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