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性敏의 중동 문화유적 탐방   Visit to Cultural site of the Middl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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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문화 유적 탐방: 예루살렘, 왕들의 계곡,,움마이야의 고도(古都), 다마스커스,이집트의 진주, 필래 신전

* 이 글은 필자가 1996년 6월부터 평화문제연구소의 [통일 한국] 제 150호에서  153호에 게재했던 것으로 판권에 관한 사항은 평화문제연구소에 있음을 밝혀준다. 글에 따른 사진 설명은 추후 게재할 예정이다.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크리스마스!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기간이 다행히 성탄절과 겹쳐 있어서 화려한 축제를 볼 수 있으리라는 가슴 설레임으로 요단강을 건너서 이스라엘로 향하였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예상은 빗나갔고, 다소 음산한 날씨까지 합세하여 거리에서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긴장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착 이틀전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 군이 철수를 하고 약간의 소요가 있었다는 현지인의 전언이 있었기에 말이다.

이스라엘은 인구 약 450만의 국가이고, 그 가운데 약 50만 정도의 인구가 예루살렘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유대교를 믿고 있고, 기독교도는 겨우 2%에 지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전야제는 베들레헴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극히 한정된 기독교도들만의 축제이기에 거리가 텅 빌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거리에서 산타 크로스나 크리스마스 트리를 찾는다는 일은 무모한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곳에 도착한 날이 12월 22일 금요일이어서 이미 공휴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유태교, 기독교 및 이슬람이 공존하고 있고 서로 다른 공휴일을 갖고 있기에 이곳에서 금, 토, 일을 보낸다는 것은 서구의 달력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커다란 불편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이름은 본래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별칭(別稱)이다. 이스라엘의 아들 12명이 이스라엘 12지족(支族)의 조상이며, 이들이 기원전 18-12세기 팔레스티나 지역에 침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후 '사울'에 의하여 예루살렘을 수도로 이스라엘 왕국이 건설되었고, 왕국의 기반을 다진 것은 '다윗'(David)이며, 그의 아들 '솔로몬'(Solomon) 왕(王) 시대에 황금기를 맞게 된다. 따라서 유대인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기원전 586-538)을 하기 이전의 국명이 이스라엘이고, 그후 다시 시온동산으로 돌아와 세운 나라가 유대국이다. 솔로몬이 화려한 신전을 건축한 이후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잊혀질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이러한 유대국은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에 의하여 정복당한 뒤 로마의 종속국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로마 군에 의하여 무참히 진압되어 수천 년간 살아오던 고향을 떠나 유랑의 길을 걷게 된다. 1800여년 동안 기나긴 눈물의 유랑 끝에 유대인들은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을 건국함으로써 이 지역은 '세계 평화의 핵(核)'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이후 유대인들은 그 동안 아랍인과 네차례에 걸치는 피의 분쟁도 경험하였다.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 국가들과의 숱한 갈등 속에서 1993년 극적으로 PLO와의 평화공존을 이루긴 했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루살렘(Jerusalem).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를 의미하는 예루살렘은 그 동안 '약속의 땅', '진실의 도시', '신의 도시' 등으로 불리면서 숱한 영광과 고난의 역사를 함께 하면서 현재는 기독교, 유대교 및 이슬람의 성소(聖所)로서 서로가 '양보할 수 없는 땅'이 되고 있다. 예루살렘은 크게 나누어 신시가와 구시가로 나누어진다. 신시가는 '서예루살렘'으로도 불려지며 현대의 유대인들에 의하여 건설된 시가지이다. 예루살렘에서 의미 있는 지역은 구시가이며, 이 지역은 다시 - 이슬람 지역(동북쪽), 유대인 지역(동남쪽), 기독교 지역(서북쪽) 및 아르메니아 지역(서남쪽) - 등 4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구시가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7개의 문(門)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황금문'(Golden Gate)은 메시아가 강림한 날 열린다는 전설에 의해 닫혀 있고, 나머지 문은 열려 있다. 예루살렘의 문에 대한 상식이 없던 필자는 해프닝을 연출하고 말았다.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이 지역을 가자고 했더니 , 택시 기사가 "예! '다마스커스'(Damascus)요" 한다. 다마스커스는 시리아의 수도인데 나는 긴장하고 당황하여 "아니오, 다마스커스가 아니라 웨스턴 월(Western Wall)이요"라고 두려움을 표했더니 기사는 "우리는 편의상 '다마스커스 문'을 '다마스커스'라 부른다'면서, 예루살렘의 문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해줬고, 설명을 듣고 난 이후 안도의 마음을 가지고 '다마스커스 문'에서 내려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 방문을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우리에게 흔히 '비탄의 벽'으로 잘 알려진 '서쪽의 벽'(Western Wall)이다. 이 벽은 솔로몬 신전중 유일한 유물이며, 안뜰의 서쪽 벽에 있던 관계로 '서쪽의 벽'이라고 부른다. 신전의 건축 시기는 기원전 2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로마의 티토스 장군에 의해 기원전 70년 붕괴되었다. 유대교 신전이 로마에 의해 붕괴된 이후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메시아의 강림을 기원하면서 소원을 적은 종이를 돌 틈에 끼워 넣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한다고 하여 '통곡의 벽'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신전 붕괴의 날인 유대력 '아브'(Av)의 달 9일에는 메시아의 강림과 신전의 재건을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단식하며 기도하는 성스러운 장소이다.

'서쪽의 벽'위 황금 빛 찬란한 돔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곳. 이곳이 그 유명한 '바위 돔'(Dome of Rock) 이다. 691년 칼리프 말리크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이슬람 건축 양식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원으로 올리브산(Olive's Mt.)에 올라가 시가지 전경을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건물이 바로 '바위 돔'이기도 하다. 사원 내부에 높이 2m, 가로 15m, 세로 20m의 거대한 바위가 있기에 '바위 돔'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무함마드는 이 바위 위에서 그가 사랑하는 말 '엘 블랙'을 타고 승천했다고 하여 '예루살렘의 성석(聖石)'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편 기독교에서는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을 받고, 자기의 아들 '이삭'을 희생시키기 위하여 제단으로 삼았다고 믿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이 돌에 19개의 황금 못을 박았는데, 모든 못이 없어지면 지구는 원래의 혼돈 상태가 된다고 한다. 현재는 3개의 못이 남아 있다. 그 가까운 곳에 '알 아크사 모스크'(Al-Aksa Mosque)가 유명하며, 코란에 나오는 '흔들리는 모스크'를 의미한다. 서쪽 홀은 '하얀 모스크'라 불려지며 십자군 시대에는 솔로몬 신전이라 불려졌다.

서쪽의 벽을 돌아 기독교 지역으로 오르면, 유대인의 성지 '시온 산'(Mount of Zion)이 나타나며, 이곳에 다윗의 무덤, 최후 만찬의 방, 성모마리아가 승천하였다는 도오미션(Dormition) 교회, 비탄의 예수가 형을 선고받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Golgotha; 아랍어로 '해골 언덕'을 의미하며 '아담'의 두 개골이 이곳에 매장되어 있다고 전해짐)의 성분묘 교회까지 걸었다는 '비아 돌로사'(Via Dolorosa), 즉 '한탄의 길', 비아 돌로사의 최종점이며 예수가 처형된 골고다 언덕 아래 예수의 무덤이 있는 '성분묘 교회'가 있다. 이밖에 예루살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시가 서쪽에 수천년전부터 유대인들의 매장지가 있는 올라브산 기슭에 겟세마네(Gethsemane; 히브리어로 '기름짜는 그릇'이라는 의미) 동산의 무성한 올리브 고목들은 종교도시 다운 장엄함과 엄숙함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 지역이 '평화의 도시'라 불려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곳에서 실감을 할 수 있다. 서쪽의 벽에서 머리를 길게 딴 랍비와 신도들이 정성껏 기도를 드리는 순간! 바로 위쪽 '바위 돔'에서는 '알라'를 찾는 코란 낭송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방인인 필자는 싸늘한 전율과 긴장이 회오리바람처럼 가슴으로 밀려오는 걸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길을 묻는 내게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던 헤브류대학의 여학생을 뇌리에 떠올리면서, 화려한 성탄절에의 섭섭함보다는 '평화'를 갈구하던 '친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통일한국}. 8월호. 통권152호. 평 화문제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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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계곡

이집트 왕(王), 파라오(Pharaoh)의 권위와 영화(榮華)는 피라미드의 규모와 스핑크스의 장엄함에서 나타난다. 카이로 근교 기자의 피라미드(Pyramid)는 그 거대함에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이유로 현재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관광객들은 화려한 부장품과 미이라를 상상하며 기자의 피라미드를 찾는다. 땀을 뻘벌흘리며 좁은 통로를 통하여 중앙 홀에 이르면, 그 한가운데 커다란 관(棺) 하나가 덩그란이 놓여져 있고, 이를 확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커다란 실망을 한다. 이러한 이유가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을 소개하게 되는 동기이다.

발길을 돌려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이르면, 피라미드에서의 실망은 도착순간 감동의 탄성으로 바뀐다. 이곳에는 전국에서 출토된 화려한 부장품과 미이라가 전시돼 있으며, 황금 빛 찬란한 장신구들을 보면서 고대 이집트인들의 부와 사치 그리고 화려한 문명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투탕카멘'(Tutankhmen; 1354-1345 B.C.)의 비밀 보물이 가득차 있는 2층 계단을 오르면 다시 탄성은 경악으로 바뀐다. 미이라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가 1m 정도의 유리관 안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황금 마차와 와좌 그리고 호화로운 부장품과 장신구들이 박물관 전체를 보물 창고로 만들고 있다. 과장하여 말하면 이집트 박물관은 투탕카멘의 박물관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곳에서 투탕카멘의 미이라는 볼 수 없다. 미이라를 보기 위해서는 '왕들의 계곡'으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룩소(Luxor)의 나일강을 찾아 나서야 한다.

 

왕들의 계곡: 테베시대에 이르게 되면 피라미드는 사라지고 무덤은 계곡 속으로 스며들게 되며 이곳에서 미이라가 된 파라오들은 초조하게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영면을 계속한다

고대 이집트는 上이집트와 下이집트로 구별되어 각각 다른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 상 하(남 북) 두 나라를 통일하여 절대 권력의 '파라오'에 이른 왕이 '나르메르'(Narmer; 메네스라고도 불림) 왕이며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전의 일이다. 이러한 고대 이집트 왕조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30왕조가 흥망성쇠를 되풀이하였다. 고대 왕조는 크게 나누어 고대 왕국(3000-2250 B.C.), 중 왕국(2000-1570 B.C.) 및 신 왕국(1570-1100 B.C.)으로 나눌 수 있다. 고대 왕국은 절대 권력이 형성된 시기로 상 하 이집트가 통일 왕국을 형성한 기간이다. 다시 말하면 '기자'(Giza)와 '싸까라'(Saqqra)의 피라미드(Pyramid)로 대표되는 1왕조부터 6왕조까지를 말한다. 6왕조 이후부터 왕조는 절대 권력의 붕괴를 가져오고 下이집트에 건설된 수도 멤피스(Memphis)는 점차 쇠퇴하고 나일강을 거슬러 상류 쪽으로 이동하여 '테베'(Thebes)에 수도를 건설하며 중앙 권력을 부활시키는 11왕조부터 12왕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후 18왕조에서 20왕조까지 '룩소'와 '아부 심벨'(Abu Simbel)의 무덤과 사원을 건축하는 기간을 신 왕조라 부른다. 파라오의 권력 약화는 1왕조의 행정 수도 아비도스(Abydos)를 버리고 보다 상류 지역인 멤피스, 테베로 이동하게 되며, 거대한 삼각형 피라미드는 도굴을 피해 자취를 감추게 된다. 따라서 테베시대에 이르게 되면 피라미드는 사라지고 무덤은 계곡 속으로 스며들게 되며 이곳에서 미이라가 된 파라오들은 초조하게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영면을 계속한다. 아직도 수천 년의 베일을 간직하며 영면에 들어 있는 파라오를 만나기 위해서는 룩소가 돼 버린 테베를 찾아야 한다.

룩소는 카이로에서 비행기로 1시간, 열차로는 10시간 이상이 걸리는 먼 거리이다. 고대 왕국의 수도 테베의 일부인 룩소는 최전성기 1500 B.C.에는 인구가 1천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전해지며, 호머의 [일리아드]에도 그 화려함이 묘사돼 있다. 이곳에 그 유명한 카르낙 신전과 룩소 신전이 거대하게 장엄함을 뽐내고 있으며 오벨리스크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다. 룩소 신전의 오벨리스크 둘중 하나는 나폴레옹 침공시 프랑스로 옮겨져 현재는 파리의 뽕피두 광장에 있다. 그래서 인지 룩소의 분위기는 무언가 도둑맞은 듯한 어설픈 인상을 지울 수 없는 도시이기도 하다.

룩소신전: 고대 왕국의 수도 테베의 일부인 룩소는 최전성기 1500 B.C.에는 인구가 1천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전해지며, 호머의 [일리아드]에도 그 화려함이 묘사돼 있다

룩소는 나일강에 의해 동서로 대별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뜨는 나일강 동쪽에 신전을 지었고, 태양이 지는 서쪽은 주로 묘지나 제전 등을 지었다. 따라서 나일강 서쪽은 사자(死者)의 도시,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이며 이곳에 그 유명한 왕들의 계곡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피라미드 시대 다음인 1580-1085 B.C.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의 왕릉은 경주의 고분 마지도 못한 느낌을 준다. 도굴 방지를 위해 깎아지른 듯한 암벽 위에 조그만 구멍을 파고 그 지하에 미로(迷路)로 연결된 보물 창고, 분묘 등이 있고 바위 표면을 뚫어 신전을 지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64기가 발견되었고 그중 9기만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투탕카멘의 영면을 지켜볼 수 있으며, 그밖에 투트메스 3세, 세티, 람세스 3, 6, 9세의 무덤을 살펴 볼 수 있다. 계곡을 달리하면 여왕의 무덤, 귀족 무덤, 장인(匠人) 무덤 등이 형성돼 있고, 장제전, 멤논 거상(Colossi of Memnon)이 나일강을 향해 우뚝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트셉수트 장제전'(Deir el Bahari):  이 장제전은 여왕의 시아버지 투트메스 1세의 부활과 그녀 자신의 부활을 기리며 건립된 것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거대한 제전중 하나이다.

왕릉을 관람하고 내려오면서 규모는 작지만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귀족 무덤을 볼 수 있고, 계곡 너머에서 여왕의 무덤과 장인의 무덤들을 관람할 수 있다. 귀족 무덤에서 '델 엘 메디나'(왕들의 계곡을 건설한 노동자 마을)를 지나면 '하트셉수트 장제전'(Deir el Bahari)을 만날 수 있다. 여왕 하트셉수트(Hatshepsut)는 남편 투트메스 2세가 죽은 후 나이 어린 투트메스 3세를 섭정했으며 후에 스스로 파라오가 되었다. 이 장제전은 여왕의 시아버지 투트메스 1세의 부활과 그녀 자신의 부활을 기리며 건립된 것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거대한 제전중 하나이다. 15-16세기에는 그리스 교도들의 교회로 이용되었고, 여왕의 탄생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장제전을 뒤로하고 나일강 쪽으로 더 내려오면 폐허가 된 두 개의 거상(巨像)이 나란히 앉아 있는 데 이것이 유명한 멤논 거상이다. 이는 아메노피스 3세가 1411-1375 B.C.에 세운 것으로 높이가 20m에 달하는 의자에 앉은 모습을 한 거대한 스핑크스(sphinx)이다.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리 만큼 떨어져 나갔고, 거상 뒤에 있었다는 신전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이집트 박물관이 투탕카멘의 박물관이라고 표현 될 만큼 그의 권위와 부는 대단하였다. 1900년대 초에 발견된 투탕카멘의 무덤은 종교와 정치적 갈등속에서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죽은 왕의 묘라는 점에서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보다 화려하고 거대한 피라미드는 모두 도굴 당했고, 보잘 것 없는 어린 왕의 무덤이라 세인의 눈을 피해 오늘에야 발견된 것이다.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이 그토록 다양하고 화려하다면 다른 왕들의 무덤은 어느 정도 였을까? 왕들의 계곡을 뒤로하고 황혼의 나일 강변으로 향하면서 "부귀와 영화는 드러내면 허무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통일한국}. 9월호. 통권153호. 평화문제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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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마이야의 고도(古都), 다마스커스

 

세계 최고(最古) 상업도시중 하나인 다마스커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로 향하는 발길은 설레임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리아는 아직 우리와 국교 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은 유일한 아랍 국가였고, 따라서 비자 허가나 입국이 매우 까다로운 편이었다. 다행히 한국의 기업체들이 우호를 다져 놓은 터라, 요르단에 있는 동문의 도움을 얻어 자세한 관광 안내와 함께 암만(Amman)으로부터 다마스커스 입성은 비교적 손쉽게 이루어졌다. 다시금 국력(國力)을 생각해 보았고 중동에서 한국인의 자부심이 마음을 뿌듯하게 해주었다.

고대로부터 동서의 교통로로 유명하여 '사막의 항구'로 잘 알려진 다마스커스(Damascus)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이며, 안티 레바논 산맥 동쪽 기슭의 바라다 강 유역에 발달한 시가지로 구시가와 신시가로 구분되어 있다. 움마이야(Umayyads)의 고도(古都), 다마스커스의 유적들은 대부분 구시가지에 몰려 있고, 옹기종기 붙어 있어서 단시간에 유적을 감상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성 바울이 유폐 당했다가 탈출했다고 전해지는 요새의 높은 창, 아름다운 조각의 천장과 샘으로 알려진 아잠(Azzam) 궁전, 그리스도의 사도 아나니(Anani)가 눈먼 자를 고쳐 주고 세례를 베풀었다는 아나니의 집 등이 유명하다. 코린트식 회랑(回廊)과 넓은 안뜰이 있는 움마이야의 이슬람 대사원, 성 요한의 머리가 있다고 전해지는 황금색의 작은 건물, 그리고 시리아 국립 박물관 등이 있다. 이들 유적지들은 하마디예(Hamadiyeh) 전통시장과 인접해 있기에 아랍인의 체취와 여유를 맛보면서 유적지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움마이야의 '이슬람 대사원'. 다마스커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움마이야 모스크((The Great Mosque; 이슬람에서는 사원을 모스크라 부름)이다. 움마이야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감이 있지만 이슬람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왕조이다. AD 634년 무함마드 사후 아라비아 반도에서 계승권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시리아는 AD 636 이슬람 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그후 다마스커스는 이슬람의 주류인 움마이야 왕조(661-750)의 중심지가 된다. 이슬람은 멕카에서 발생되었지만, 그 문명과 문화는 다마스커스로 옮겨와 움마이야 왕조에 의해서 형성이 된다.

그후 이슬람은 압바스에 의한 계승권 승리로 아라비안 나이트로 유명한 이락의 바그다드에서 '압바스 왕조'(Abbasiyyads; 750-1258)가 형성되어 이슬람 문명은 바그다드에서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 제국의 중심이 지중해의 시리아로부터 비옥하고 관개 시설이 좋고 통상로가 교차하는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한다. 이러한 사실은 비잔틴의 계승 국가로부터 보다 아랍적인 국가로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는 커다란 역할을 하며 성장한다. 1516 오스만 터어키가 바그다드를 점령함으로써 찬란했던 이슬람 문명은 오스만 제국의 영향하에 서구 문명과의 만남을 통해서 완성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슬람 학자 S. D. 구아땡이 "이슬람을 '중간문명'(intermediate civilization)"이라고 표현한 점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다.

움마이야 왕조의 대표적 건축물인 다마스커스의 '이슬람 대사원'을 찾아가면서 이곳이 상업 도시의 전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매표소에서 100 시리아 파운드(약 5달러)를 내고 잔돈을 요구했더니, 잔돈이 없다며 다 내고 관람을 하던지 아니면 관람을 포기하라는 거였다. 그 유명한 이슬람 사원을 보기 위해 사막을 달려왔는데 못보고 간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물론 한국에서는 큰돈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아까운 생각이 들어 다시 문 앞으로 나와 10 파운드 주고 오렌지쥬스 한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잔돈을 바꿨다. 의기양양하게 매표소 관리인에게 잔돈을 내밀고 개선 장군처럼 대사원의 뜰로 들어섰다. 이 도시의 성격을 잘 모르는 사람은 지금 나의 행동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다마스커스는 세계 최고(最古)의 상업도시중 하나이고, 이들의 상업주의 정신은 '일물다가의 원칙'(一物多價原則)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쉽게 말하면 "한 물건에 일정한 가격이 없고 상인은 능력껏 가격을 받아도 좋다"는 상업주의 정신이다. 따라서 물건을 사는 사람도 능력껏 값어치를 알아서 사야 하고,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라 해서 사기(詐欺)니 하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정신은 아직도 이슬람 사회에서는 많이 남아 있으며, 특히 팁의 경우, 비싼 돈을 요구하다가도 거절당하면 그만이지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게 이슬람의 특성이다. 이슬람을 모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야속하게 들릴는지 모르지만

AD 714-15년에 완성된 다마스커스 '이슬람 대사원'의 돔(dome)은 원래는 목조로 이루어졌으나, 1898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움마이야를 대표하는 이 사원에 발길이 닿는 순간 눈에 띠는 것은 화려한 초록 빛 나무와 건물로 이루어진 벽화이다. 다마스커스 사원은 건축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이슬람 초기 건축물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의 '바위 돔'(Dome of Rock; AD 691-2)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이 사원은 또한 장방형 탑을 갖춘 서구 이슬람 초기 첨탑의 효시로 알려지고 있으며, 아라비아 반도 시기인 이슬람 초기의 평평한 '미흐랍'(mihrab; 멕카방향으로 벽면을 파내어 조각품이나 장식물을 놓도록 만든 곳) 대신 곡선 형태의 미흐랍을 도입하고 있음이 특색이다.

다마스커스 건축물은 로마 사원의 범주 내에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타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고, 그만큼 수난의 역사도 함께 하면서 손상을 많이 입어 왔다. 비잔틴 시대에는 성(聖) 요한의 교회로 대치되었고, 그의 성골함도 현재 이슬람 대사원에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모스크 양식도 교회와 궁전 모두를 위해서 사용되는 전통적인 바실리카(basilica) 풍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채는 커다란 기둥 위에 작은 아치를 갖는 두 개의 아케이드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다. 중앙에는 미흐랍의 축위에 세개의 바실리카 풍의 낭하(廊下)를 갖는 건물이 지붕 끝과 안뜰로 연결되어 있다. 안뜰은 두 개의 아케이드를 갖고 수도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위 돔'과 마찬가지로 외벽의 낮은 부분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서쪽 회랑의 아치와 그 뒤의 벽은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단장되어 있다. 대리석 벽의 위아래로 찬란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은 주로 풍경과 함께 푸른 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풍경은 이슬람에 의해 정복된 도시를 의미하고 이슬람 신도를 기다리는 '천국'을 묘사하고 있으며, 키 큰 나무는 황금의 분배에 대한 분배자로 사용되었다. 이렇듯 화려한 회랑은 곧바로 '하마디예 전통시장'(Souq al-Hamadiyeh)으로 연결돼 있어 신앙과 생활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도 가히 이슬람적 사고라 할 수 있다.

이슬람 대사원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해질녘 시내가 잘 보이는 '카시움 산(山)'에 올랐다. 온통 시가지가 모스크의 돔과 기둥으로 뒤섞인 작고 낡은 도시. 낮에 본 화려한 '이슬람 대사원'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낡고 오래된 유적들이 다시금 신비에 감싸지는 듯 했고, 이곳으로 통하는 '하마디예' 전통시장에서 손님을 불러모으는 상인들의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확성기에서 "알라는 위대하다는 알라후 아크바르"와 같은 코란 낭송이 하모니를 이루면서 도시 전체는 엄숙하고 장엄한 고요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간간이 고층 건물에서 현대식 네온사인이 켜지면서 귀가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통일한국) 7월호. 통권151호. 평 화문제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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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진주, 필래 신전

아스완을 찾은 것은 지난 해 연말! 중동에 자료 조사차 이집트로 출장을 갔다가 타이트한 일정에 쫓기기는 했지만, 일찍이 삐에르 로티가 '이집트의 진주'로 명명한 필래 섬은 반드시 보아야 한다는 욕심에 발길이 아스완에 이른 것이다. 인구 약 20만명 정도인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약 12km 지점에 1964년 독일과 소련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유명한 아스완 댐(폭 3600m, 높이 111m)이 있고, 이곳으로부터 상류쪽으로 약 500km에 이르는 소양호의 7.3배에 해당하는 거대한 인조 호수가 나일강의 근원지 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필래 섬은 아스완 댐의 하류 쪽에 위치한 환상의 섬으로 이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를 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누비족(Nubian)들이다.

아스완댐에서 바라본 나일강: 1964년 독일과 소련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유명한 아스완 댐(폭 3600m, 높이 111m)

누비人들은 아스완 댐을 경계로 약 100km정도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요즈음은 대부분 '다우' 혹은 '페루카'라 부르는 범선을 이용하여 관광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누비인들이 이곳에서 수천 년을 살아오긴 했지만, 외부 세계에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그들은 이집트인이기를 거부하고 흑인이기도 거부하며, 그저 누비인으로 남기를 발랄뿐이다. 더욱 더 특이한 것은 "누비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문자화되지 않은 구전의 언어를 독특하게 사용하며, 그들의 언어를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이 국가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지만 누비족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필래 섬으로 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만나야 하는 누비인들의 공통점은 착하고 친절하다는 것이다. 필래 섬으로 향하는 도중, 사진 찍으라고 천진스럽게 포즈를 취하던 꼬마 누비와 나일강 유람을 하고 고별의 차(茶)를 함께 마시던 운전기사 누비의 기억이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른다.

누비족: 특이한 점은 "누비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문자화되지 않은 구전의 언어를 독특하게 사용하며, 그들의 언어를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래(Philae) 섬은 역시 지상 낙원처럼 보였다. 조그만 보트들이 짙푸른 종려와 무화과 나무 잎새에 의해 그늘져 있는 신선하고 아담한 벼랑에 정박해 있었으며, 그곳의 약간 높은 위치에 이시스 신전과 우아한 트라잔의 키오스크(Kiosk)가 버티고 서 있었다. 이시스(Isis) 여신을 위해 잘 건축된 신도(神島)가 바로 필래 섬이었고, 그래서인지 더욱 매력적이고 환상적이었다. 필래 신전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가장 잘 보존된 3개의 신전중 하나이고, 나머지 둘은 에드후(Edfu)와 덴데라(Dendera)에 있다. 필래는 길이 400m, 폭 135m인 제1폭포 남쪽 하단의 세 섬들 가장 큰 섬이며, 그 이름 자체가 독특한 지리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 원문에서 필락(Pilak)은 '모퉁이 섬' 또는 '마지막 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원래 필래는 나일강 동쪽 둑위의 작은 만의 구석인 제1 폭포의 최남단 끝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두 개의 섬중 하나인 비게(Bigeh; 현재는 부분적으로 침수됨) 섬은 이시스 여신의 남편인 오시리스(Osiris)의 영면(永眠) 장소였기에 모든 인간의 출입이 금지된 신성한 장소이다. 따라서 배를 타고 온 성직자들만이 오시리스가 묻힌 이곳에서 360개의 제단위에서 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필래 섬의 신전들은 오시리스가 그의 부인 이시스의 사랑의 힘으로 흩어진 그의 부하들을 재집결하여 오시리스를 부활시켰던 이시스를 위하여 헌납된 것이다. 필래 섬의 여신에 대한 제사는 고대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이집트인들은 1년에 한 번은 이렇듯 신성한 섬에 순례 여행을 떠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유스티아누스 1세가 지배하던 A.D. 535년 제사에 종사하던 성직자들이 제게 됨으로써 사라지게 되었다.

나일강에서 바라 본 필래신전:  이시스(Isis) 여신을 위해 잘 건축된 신도(神島)가 바로 필래 섬이다.

필레 신전의 또 다른 가치는 이곳, 즉 아길키아(Agilkia)로 부터 약 500m 정도 떨어져 있던 유적들을 원형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신성한 섬은 1898년까지는 연중 내내 물위에 있었지만, 올드 댐의 건설로 인공 호수에 잠기게 되었다. 단지 8-9월에만 홍수를 조절하기 위해 댐의 소문이 열려질 때, 물에서 살며시 신비의 베일을 벗고 그 모습을 드러낼 때만 우리 인간이 접할 수 있는 문자 그대로 신비의 섬이었다. 더욱이 아스완 댐의 건설은 필래 섬을 위기 상황으로 몰아 넣었고, 신전의 기초들은 부식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1972-80년 기간에 호수의 물을 고려하여 필래의 지형이 재창조된 현재의 위치로 신전이 완전히 해체되어 정교하게 복원이 되었다. 출렁이는 물살을 가르고 이곳에 도착하자 마자 관광 기념품을 파는 누비인들의 외침과 함께 신비와 환상을 간직한 섬에 오르면서 인간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필래 신전은 크게 나누어 - 넥타네보(Nectanebo) 유적, 트라잔(Trajan) 유적을 부속 건물로 갖는 불멸의 이시스 신전 그리고 작은 하도르(Hathor) 신전 등 - 세곳으로 구성되어 있다. 필래 신전 장식물의 특징은 대부분 신성한 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대부분 신에게 헌납하는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실체가 상징하는 상징성이나 틀에 박히지 않는 창의력이 돋보이고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하드리(Hadrian)의 문 혹은 요새'이며, 이는 안토니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시스 신전의 서쪽 날개 부분에 있는 부조로서 나일강의 근원에 대한 개념을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상 상 하 나일강의 신성함, 즉 하피(Hapy)는 신인(神人)동형동성설과 양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신은 뱀에 둘러싸인 동굴 속에서 물이 흐르는 두 개의 물병을 쥐고 있다. 사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근원이 '하피의 물'을 의미하는 무 하피(Mu Hapi)라 불려지는 산 가까이에 있는 제1폭포에 이웃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연례 의식은 파라오 자신에 의하여 거행되었고, 소티스(Sortis) 별로 대표되는 나일강의 홍수가 시작되는 6월 중순에 시작되었다.

필래신전 입구:  필래 신전은 크게 나누어 - 넥타네보(Nectanebo) 유적, 트라잔(Trajan) 유적을 부속 건물로 갖는 불멸의 이시스 신전 그리고 작은 하도르(Hathor) 신전 등 - 세곳으로 구성되어 있다.

필래는 이집트, 그리스 및 로마 문명의 완전한 종합형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 이곳의 건축과 디자인은 하나의 형태로 함축돼 있다. 과거 올드 댐의 물이 이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뎨어버리기 이전에 모든 문자들은 파랑, 빨강, 노랑 및 녹색의 찬란한 색깔들로 채색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아스완 댐의 준공으로 필래가 인공호수에 침수되기 이전에 이곳을 방문한 여행자들에 의해서 입증이 되고 있다. 영국인 출신 대이비드 로버트(David Roberts; 1796-1864)라는 유명한 화가는 이곳의 아름다움을 본래의 색깔대로 섬세하게 그려 놓고 있어서 그 당시의 아름다움을 상상하기엔 충분하다. 아무튼 본래의 채색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삐에르 로티가 '이집트의 진주'라고 찬양할 정도로 매력적이고 우아한 자태를 오늘날까지 지니고 있는 값비싼 우리 인류의 문화 유산인 것이다.

필래신전의 벽화:  필래 신전 장식물의 특징은 대부분 신성한 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대부분 신에게 헌납하는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역사학자도 고고학자도 아닌 경제학자가 세계의 문화 유산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사실이 다소 쑥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여행 때마다 문화 유적이라면 무조건 셔터를 눌러 대고 돌아와서는 사진 설명을 위해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던 습관이 이제는 또다른 전공이 돼 버린 것 같다. 이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양의 사진을 막 정리해 놓고 설명을 위해 자료를 정리하던 중 원고 청탁을 받게 된 것이고, 내친 김에 용기를 내어 글을 써 보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이렇듯 인류의 역사가 한눈에 보존 된 값비싼 문화 유산을 감상하면서 감회를 느끼는 점은 이교도의 침입으로 인한 문화재의 파손 행위가 이곳에서도 여지없이 목격되었다는 점이다. 신전의 곳곳에 그리스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각인이 된 듯한 십자가 모양을 보면서 말이다. .(통일 한국) 6월호. 통권150호. 평 화문제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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