鏡巖 중동의 문화유적 탐방: Explore Cultural Heritage of the Mid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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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바트 왕국과 고대의 향료길

 

1. 페트라 아라비아(Arabia Petraea)’로 알려진 나바트 왕국

 

 페트라: 베일에 쌓인 고대의 상업도시

나바트 왕국은 BC 4세기와 AD 106년 사이에 번성했던 고대 대상(Caravan) 무역의 중심지

  

홍성민(중동경제연구소장)

나바트 왕국(Nabatean Kingdom)BC 4세기에서 AD 106년 사이에 요르단지역에서 번성했던 강력한 정치적 실체였으며, 오늘날 폐허가 된 페트라가 수도가 그 수도다. BC 312년까지 부유한 공동체가 페트라 인근에서 번성했다는 사실이 그리스 원정대에 의해 증명되고 있지만, 그리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나바트 왕국을 BC 168년 최초의 왕으로부터 아레타스 4세 왕이 죽고 나서 로마제국에 복속되었을 때인 AD 106년까지 인정한다.

나바트인(Nabataeans)들은 아라비아반도 남동쪽으로부터 온 아랍부족으로 기원전 6세기에 요르단 동부에 있는 사막에서 최초로 출현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페트라에 정착했으며 그들의 영토를 호란(Horan)과 레반트로 계속 확대했으며 보스라(Bosra)를 수도로 삼았다. 하나의 가정은 아라비아반도의 남서쪽에 있는 오늘날 예멘이 본래 고향이지만, 그들의 신(), 언어 및 필서(script)는 남아라비아와는 관련된 공유점이 없다. 또 다른 가정은 아라비아반도의 동부 해안에서 왔다고 주장이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나바트인들은 이스마일 빈 이브라힘(Ismail bin Ibrahim)의 아들 브나유트(Bnayut)의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us)나바트는 BC 312년 최초로 출현하였고 오라톨(Oratol)을 숭배한다.”고 했다.

나바트인들은 북부 아라비아와 남부 레반트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이다. 오늘날 페트라로 불리는 라끄무(Raqmu)의 수도로 추정되는 지역에 그들의 정착은 유프라테스에서 홍해에 이르는 아라비아와 시리아 사이의 국경과 대비하여 나바텐(Nabatene)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농업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오아시스에 집중되었던 통상로를 강력하게 통제하지 못했던 나바트인들은 사막으로 둘러싸였기에 안정하게 표시되는 경계선을 갖지 못했다. 기원전 4세기에 출현하여 독립적 영토를 유지했던 나바트인들은 기원후 106년 로마 황제 트라잔(Trajan)에 의해 정복되어 로마제국에 합병되었다.

 

라바트 왕국(Rabatean Kingdom)

BC 4세기 라바트 왕국 성립

 

아레타스 1(Aretas I)

BC 168144

 

랍벨 1(Rabbel I)

BC 140120

 

아레타스 2(Aretas II)

BC 12096

 

오보다스 1(Obodas I)

BC 9686

 

아레타스 3(Aretas III)

BC 8662

 

오보다스 2(Obodas II)

BC 6259

 

말리쿠스(Malichus)

BC 5930

 

오보다스 3(Obodas III)

BC 309

 

아레타스 4(Aretas IV)

BC 9 BCAD 40

AD 106년 로마제국에 의해 정복,

Petra Roman Road 건설(아라비아 페트라로 명명됨)

-

363년 대지진으로 폐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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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년 아랍인들 페트라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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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십자군 점령, 일시적으로 성채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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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스위스 탐험가, 조안 루드윅 부르크하르트 재발견

-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나바티아(Nabatea)로 명명된 나바트 왕국은 전통적인 고대시기(classical antiquity)’ 동안 아랍 나바트인들의 정치적 실체였다. 로마의 아라비아 지방으로 알려진 페트라 아라비아는 2세기에 시작되는 로마제국의 국경지역이다. 페트라 아라비아는 요르단의 과거 나바트 왕국, 레반트의 남부, 시나이 반도와 북서부 아라비아반도로 이루어졌다. 나바트 왕국은 시리아에 의한 북쪽, AD 135년 출현한 시리아와 함께 유데아와 이집트에 의한 서쪽, 아라비아 사막과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로 알려진 나머지 아라비아에 의해 남쪽과 동쪽의 국경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바트 신전의 신들은 완전한 조상(彫像)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사원의 구석에 있는 출입구나 동전, 무덤, 도자기에 조각돼있으며 부적이나 주문(呪文)에서도 나타난다. 나바트 문화의 초기 가장 중요한 신들은 알 꽈움(Al-Qaum), -쿠트비(Al-Kutby), 알 우즈자(Al'Uzza)이다. 알 까움은 전쟁의 신이며 백성의 수호자, 밤의 신, 영혼의 수호자이다. 알 쿠트비는 지식의 신이며 쓰기 및 점술의 신이다. 알 우즈자는 신성과 세속적인 힘과 관련 있는 최상의 어머니 여신이다.

나중에는 운명과 풍요의 여신인 마나와트(Manawat), 갱신, , 풍요의 여신인 알라트(Allat), 태양과 관련 있는 산맥과 낮의 신인 두샤라(Dushara)로 대치되었다. 두샤라 신이 가장 오랫동안 남았으며 그 신은 나바트 사원의 지붕위에서 숭배되었다. 두샤라 신은 로마에 의한 복속에 따라 동전에도 계속 표현되었다.

나바트인들이 군사 정복에 저항하긴 했지만, 주변 국가들의 헬레니즘 문화는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헬레니즘의 영향은 - 특히 나바트 제국이 BC 150년경 북쪽의 시리아로 확장되었을 때 - 나바트 예술과 건축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나바트인들의 정치, 경제력은 로마인들을 걱정하게 되었다. BC 65년 로마인들은 다마스쿠스에 도착했고 나바트인들에게 그들의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폼페이(Pompey)는 페트라를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했다. 나바트의 아레타스 3세는 로마군단을 방어했거나 아니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공물을 바쳤을 것이다.

 

라보르 작가가 그린 페트라(1830, https://books.openedition.org/ifpo/4896)

 

BC 44년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의 암살은 페트라에서 로마인들에 대한 상대적 무정부상태를 예고했으며,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의 파르티아(Parthia) 왕들은 공격에 유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나바트인들은 로마인들과의 전쟁에서 파르티아와 합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파르티아의 패배이후 페트라는 로마에 공물을 바쳐야했다. 이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나바트 왕국은 로마의 헤로드(Harod) 왕에 의해 두 차례 공격을 받았다. BC 31년 두 번째 공격으로 로마는 시리아로 가는 수익성 있는 북부 교역로를 포함하는 나바트 영토의 넓은 지역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바트인들은 - 풍요로운 향료무역을 발전시키기 위한 카라반 루트를 따라 정착촌을 세운 - 아레타스 4(BC 9AD 40) 왕의 집권기간 동안 계속 번성하였다. 나바트인들은 로마의 세력을 깨닫고 계속해서 AD 70년 유대인의 봉기를 제압하기 위해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바트 왕국이 직접적인 로마의 통치로 치닫는 단지 시간상의 문제였다. 나바트 왕국의 마지막 왕, 랍벨 2세는 그의 재위기간동안 로마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AD 106년 그가 죽자, 로마는 나바트 왕국을 복속하고 국명을 페트라 아라비아(Arabia Petrea)로 개명하였다. 페트라 도시는 전통적인 로마건축 형식으로 새롭게 디자인되었고, 상대적 번영기가 팍스 로마(Pax Romana) 아래에서 계속되었다.

나바트인들은 로마의 근동 무역로에 합병이후 잠시 동안 이익을 보았고, 페트라는 전성기동안 20,00030,000명의 사람들이 거주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시리아의 팔미라(Palmyra)에 대한 교역로의 이동과 아라비아반도 주변의 해상루트의 확장에 따라 상업에서 이익이 감소하였다.

 

[지도] 나바트 왕국과 고대 무역로

출처: Shaher Rababeh, 2005, Factors Determining the Choice of the Construction Techniques in Petra, Jordan.

 

4세기경에 나바트인들은 그들의 수도 페트라를 떠났다. 나바트의 도시들은 로마의 통치하에서 감소하였고 363년 지진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도시를 떠났다. 이 지역은 그 도시들에 교회를 설립한 동로마 (비잔틴)제국에 의해 통치되었고, 광범위한 파괴의 결과를 초래한 551년 또 다른 지진이 발생했을 때까지 상업은 재활성화 되었다. 그 후 7세기 아랍이 침범할 때까지 나바트 왕국은 잊혀진 상태로 남았다.

 

 2. 고대 향료길(Spice Road)에서 페트라 아라비아

향료길(Incense Route)이라는 용어는 BC 67세기와 AD 2세기에 남아라비아와 가자(Gaza) 항구에서 종사했던 방향이 서로 다른 상인들의 교역로를 말한다. 이 루트들에 따른 교역은 나바트인들이 이 길을 따라 가장 중요한 도시들을 통제하였을 때인 BC 3세기 대부분 유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향료길은 단일한 길이나 아라비아와 가자사이의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두 지역사이를 오고간 상인들의 일반적인 방향을 말한다. 플리니 더 엘더(Pliny the Elder; AD 2379)에 따르면, 향료길은 1,931km에 해당하며 매일 밤 정상적으로 도심을 경유하며 편도를 여행하는데 65일이 걸린다고 했다.

기원전 3세기까지 나바트인들에 의해 통제되었던 이 도시들은 상인들이 피할 수 없이 가야만하는 필수불가결한 교역로가 되었다. 이 정류장들은 단순히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업의 중요한 측면이었다.

 

 

 

기원전 1000년 아랍인, 페니키아인과 인도인들은 향료, , 보석, 희귀동물들의 가죽, 흑단(黑檀), 진주와 같은 사치품을 교역하는 해상 및 육상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해상무역은 홍해와 인도양에서 이루어졌다. 홍해에서 해상교역로는 밥 엘 만데브(Bab-el-Mandeb)’로부터 베레니크(Berenike)’로 이어지며 거기서부터는 육로로 나일(Nile) 강으로 향하며 다시 보트로 알렉산드리아에 도달한다. 육상교역은 낙타를 이용하여 서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이루어졌다. 인도인들은 카타마란(Catamaran)이라는 보트를 이용하여 인도양에서 서풍(西風)의 도움으로 항해하며 동아프리카와 주로 계피와 계수나무의 향료무역에 종사했다.

기원전 1000년 후반기 남서아라비아의 아랍부족들은 남아라비아로부터 지중해로 가는 향료에 대한 육상무역을 통제하였다. 아랍부족들은 (오늘날 예멘지역인) 마인(M'ain), 까타반(Qataban), 하드라마우트(Hadhramaut), 사바(Saba), 힘야르(Himyarite) 부족이었다. 북쪽에서는 나바트족(Nabatean)이 페트라에서 가자(Gaza)까지 네게브(Negev) 사막을 가로질러 교역로를 장악하였다.

이러한 무역은 아랍인들을 매우 부유하게 만들었다. 남아라비아 지역은 그리스인들에 의해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라는 의미로 유대몬 아라비아(Eudaemon Arabia)로 불렸으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생전에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던 곳이다.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은 함께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기원전 2세기말 그리스인들은 인도인들이 어떻게 아덴으로부터 몬순 바람을 이용하여 인도의 서쪽 해안으로 직접 항해할 수 있는지를 배웠고 그 후에 해상무역을 장악하였다. 기원후 1세기 유대몬에서 중개인을 피하는 새로운 진전을 이루었고, 아라비아 바다를 용기 있게 횡단하여 직접 인도의 해안으로 갈수 있도록 만들었다.

기원전 1세기 행운의 아라비아에서 (오늘날 아덴항과 동일시되는) 유대몬의 아랍도시는 홍해무역에 있어서 교역품을 바꿔 싣는 환적항이었다. 유대몬은 1세기경 에르트리아의 필사본 문서(periplus)에 묘사돼있다. 필사본 문서에 나타난 유대몬 아라비아는 다음과 같다;

 

인도의 배들이 이집트로 가지 못하고 이집트의 배들이 더 이상 항해하지 못하고 이 지역까지 왔을 때 유대몬 아라비아는 한때 본격적이 도시였다.”

 

나바트 왕국은 이웃 국가들의 부러움을 사로잡는 커다란 부()를 축적하는 지역의 대다수 통상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나바트 왕국은 다마스쿠스가 짧은 기간(BC 8571) 통제했던 지역인 헤자즈(Hejaz)까지 홍해 연안을 따라 세력을 펼쳤다. 따라서 나바트는 페트라 아라비아(Arabia Petraea)’로 명명된 AD 106년 로마제국에 의해 복속될 때까지인 BC 4세기부터 독립적인 왕국으로 남아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나바트인들은 그들의 상업 활동으로 이미 유명하였다. 네게브와 시나이에서 교역로의 주인이었던 나바트인들은 역청과 같은 그들의 생산품을 미이라 처리와 보트 코킹을 위해 이집트에서 사용했던 역청과 같은 생산품을 사해(Dead Sea)로부터 알렉산드리아와 (페트로 수도를 위한 주된 시장인) 가자에 수출하였으며, 행운의 아라비아(예멘), 아라비아만 그리고 인도양으로부터 육로와 해로로 수입된 유향, 몰약, 봉숭아와 향료와 같은 사치품을 거래하였다. 이러한 생산물들은 지중해지역에서 인기가 있었으며 최대한 서쪽까지 나바트 상인들이 활동했다는 증거가 있다.

나바트인들은 당시 강력한 무역의 중심지였던 이웃의 사바를 통하여 까타반(오늘날 예멘)으로부터 타격을 받은 향료길과 지중해의 가자지역을 통하여 무역업자들로서 첫째로 그들의 부를 축적한 네게브 사막으로부터의 아랍 유목민들이다. 이들 교역로에서의 끊임없는 여행은 그 지역을 친밀하게 이해했으며, 물을 찾고 보존하는 그들의 기술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재화를 그들에게 재빨리 효과적으로 물자를 운송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바트인들은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한 교역로를 따라서 대상무역(Caravan Trade)과 아일라(아카바)와 루케 코메를 포함하는 몇몇 항구들을 통하여 홍해에서 무역을 통제하였다. 이 교역로들은 특유의 장인정신을 지닌 물건, 도색한 도자기와 램프, 은전과 동전, 프톨레미 스타일을 따른 독특한 건축학적인 모티프, 나바트로 알려진 도시들 등에 따른 경로로 분포되었었다.

그러므로 상인들은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했을 것이며 가자 항구의 최종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각 정류장에서 그들의 상품을 교역했을 것이다. 일부 도시들이 상인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함에 따라 보다 우호적이라고 생각되는 다른 지역으로 교역지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까지 나바트인들에 의해 통제되었던 도시들은 그들이 피할 수 없었던 교역로를 따라 교역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나바트의 요새들이 상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도로를 따라 건설되었지만, 무역업자들에게 부과하는 세금과 함께 그들의 보호는 가격이 부과되었다. 나바트인들이 기원전 3세기에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들은 향료길의 엄격한 통제를 통해 점점 더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류장들은 단순히 휴식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으며 비즈니스의 중요한 측면을 갖고 있었다.

나바트의 요새들이 상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도로를 따라 건설되었지만, 무역업자들에게 부과하는 세금과 함께 그들의 보호는 가격이 부과되었다. 나바트인들이 기원전 3세기에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들은 향료길의 엄격한 통제를 통해 점점 더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해상무역로 개척되고 라바트 왕국이 무역의 요충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점은 위와 같은 이유에 따른 것 일 것이다.

 

참고 사이트

http://nabataea.net/trestoration.html

http://www.alluringworld.com/al-khazneh/

http://www.visitpetra.jo/

https://www.alamy.com/stock-photo/al-khazneh.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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