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E 중동 지역연구  Area Studies of the Middle East

  Korea Institute of the Mideast Economies

Home|  중동지역 연구|  중동인물 연구|  KIME 연구논문|  중동시사자료| |JKIME|  회원가입|  English

 

 

 

오아시스의 꿈을 실현한 행동주의자 (H. H. Sheikh Zayed bin Sultan Al Nahyan)

- Sheikh Zayed Who Realized the Dream of Oasis -

 

H.H. Sheikh Zayed Bin Sultan Al Nahyan

Photography by http://www.uaeforever.com/Zayed

 

By Dr. Seong Min Hong (KIME)

 

 

Content



                Short History of UAE


                Life of H. H. Sheikh Zayed


                Pursuing Both Development and Tradition


                The Forerunner of United Arab Emirates


                H. H. Sheikh Zayed's Achievement


                H. H. Sheikh Zayed's Philosophy Originates from the Desert

 

# This text was written in Korean. The modified text was published by the Center for Foreign Studies,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Seoul, Korea.


    홍성민(중동경제연구소장)

움 샤이프(Shaif) 연근해 유전에서의 최초 원유 수출과 함께 밥(Bab) 유전에서 원유 수출이 시작된 지 거의 30년이 지난, 현재의 ‘아랍 에미레이트연합’United Arab Emirates을 형성한 UAE는 오늘날의 근대화되고 발전된 사회로 탈바꿈하는 변화의 과정을 거쳤다. 1930년대 진주산업이 폐허가 된 이후, 유전(油田)의 조업이 차츰 증가함으로써 석유 수입(收入)의 증대와 함께 국가의 재정은 점차 증대되었다. 석유수입의 증대와 함께 원유 생산으로부터 이익을 추구하는 국민들간의 기대 또한 부풀어 있었다. 이와 같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UAE는 250년이상 아부 다비의 세이크였던 알 나흐얀Al-Nahyan 가문(家門)을 만났고, 새로운 지도자는 부(富)와 발전의 미지의 바다에서 국가의 배를 항해할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UAE는 과거 20년동안 아부 다비 동부에서 통치자의 대리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던 세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흐얀Sheikh Zayed bin Sultan Al Nahyan이라는 인물을 지도자로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아랍 에미레이트의 통치자로서 세이크 자이드 Sheikh Zayed의 즉위와 함께 거의 30년전인 1966년 8월 6일 아부 다비는 근대화에 돌입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 12월 2일이후 거의 30년동안 세이크 자이드는 자신이 구상한 ‘아랍 에미레이트 연합’(United Arab Emirates)으로 알려진 7개 연방국가의 대통령이다.

세이크 자이드는 1855년부터 1909년까지 에미레이트의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 통치를 한 통치자 세이크 자이드 빈 칼리파 알 나흐얀Sheikh Zayed bin Khalifa Al Nahyan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 세이크 술탄Sheikh Sultan은 1922년부터 1926년까지 통치자였고, 숙부에 의한 짧은 통치기간이후 세이크 자이드의 형 세이크 샤크부트Sheikh Shakhbut가 1928년초 군주에 올랐다. 오늘날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을 형성하고 있는 아라비아만(灣) 남부해안의 다른 6개 협상국가Trucial State들처럼, 그 당시 아부 다비도 그 지역에서 서로 다른 명칭으로 명명되었었다. 아부다비는 인근 국가의 지방 통치자와 해상휴전에 관한 일련의 협정에 조인을 한 1820년 초, 이미 이 지역에 최초로 주둔하였던 영국과 조약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부 다비는 어업과 해안을 따라 행해진 진주채취와 리와Liwa나 알-아인Al-Ain과 같은 내륙의 흩어진 오아시스에서의 단순한 농업에 기반을 둔 경제구조 때문에 가난한 후진국이었다. 1930년대 걸프만 진주에 대한 세계시장이 붕괴되었을 때, 가난했던 에미레이트는 혹독한 재앙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아부 다비의 국민과 마찬가지로 세이크 자이드 가문도 어려운 시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어린 자이드가 성장하였지만, 협상국가 어느 곳에서도 학교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베두윈식 교육을 받으려고 사막으로 갔었지만,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지방의 설교자로부터 단지 이슬람Islam 원리에 관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때를 회상하면서 베두윈과 생활하고 그 세계에서 격은 탐험이 그가 필생의 열정으로 간직하는 매사냥(falconry)과 국민들과의 교제를 포함하는 사막 생활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만족스럽게 말한다.

1977년 발간된 『매사냥: 아랍의 유산』(Falconry: Our Arab Heritage)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매사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매사냥 원정팀은 결코 60명을 넘지 않고 10명 이하가 되어도 안 된다. ․․․ 그들 중 각자는 도시의 아우성과 일상생활의 단조로움으로부터 유쾌하고 신선한 변화에 대한 기대 때문에 고무된다. 사냥 파티의 교제(交際)는 개인이나 각 구성원에게 금지나 억제가 없는 자유로운 대화와 각자의 생각과 견해를 표현하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국민의 요구를 그 자신에게 알려야할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국민들의 문제를 알고 또 그들의 견해를 적절히 인식함으로써 그들의 상황을 돕고 개선할 수 있게된다.”

이와 같은 초기의 사막생활은 세이크 자이드에게 국가와 국민들에 관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1930년대 초 최초의 석유회사 팀이 1차적인 지표조사를 하기 위하여 도착하였을 때, 그들을 사막으로 인도하고 향후 국가에 대해 커다란 효과를 발휘하게 될 산업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바로 세이크 자이드이다. 아부 다비는 오늘날 인구 20만명을 가진 번영하는 도시이지만 1946년 당시에는 아주 작은 시골에 불과하였던 알-아인 오아시스에서 통치자의 대표로서 그를 선택을 하였다.

세이크 자이드가 권좌에 오른 직후 알-아인을 방문한 석유회사의 대표인 유럽 방문자 에드와드 헨더슨(Edward Henderson)은 그의 비망록에서 젊은 자이드가 그에게 준 인상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말하고 있다. “그 당시 자이드는 약 30세 정도였다. 그는 유머스럽고 총명한 눈을 가진 잘생긴 남자였고, 풍채 있고 기품이 있으며 단순한 옷을 입고 분명한 행동과 결정을 하는 사람이다. --- 비록 그가 젊고 오아시스의 아부 다비 지역의 책임자였기는 하지만, 그는 그 지역의 정치에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고 이미 그 지역에서 가장 탁월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베두윈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갖고 있었다.”

또 다른 방문자 『아라비아의 사막』(Arabian Sands)의 저자인 탐험가 윌프레드 데시거Sir Wilfred Thesiger 경(卿)은 그의 저서에서 자이드는 대가족의 우두머리와 같다고 기술(記述)하고 있다: “그는 항상 국민들의 문제를 경청하며, 판단을 위해 그에게 문제를 갔고 왔던 사람들은 문제들은 기민한 통찰, 지혜 그리고 공정성이 돋보이는 그의 판단에 만족해하며 조용히 그의 곁을 떠나갔다.”

통치자 대표의 업무는 알-아인 자체의 행정 업무뿐만 아니라 국가의 통치기술과 1940년대말과 1950년대초 브라이미(Buraimi) 분쟁기간동안 보다 넓은 지역에 대한 정치적인 경험을 익힐 기회를 자이드에게 주면서 인근 지역 전체의 행정까지도 포함하였다. 세이크 자이드의 주된 과제는 지하수(falajes)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기존의 알-아인 자체의 지하수 개발과 그 지역에서 농업을 장려를 위한 새로운 채널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대단위 조림(造林) 계획의 일환으로 자이드는 장식용 나무를 식목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는 성장하여 아라비아에서 가장 조경이 잘된 도시중 하나로 변모시켰다. 학교와 병원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있던 자이드는 1953년 그의 형을 따라 최초로 영국과 프랑스를 방문하였다. 그는 자신의 국민들도 이런 나라와 동일한 시설로부터 교육․의료 혜택을 받아야한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세이크 자이드는 후에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많은 꿈이 있었다. 우리 나라가 근대화 된 세계를 따라 잡아야한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단지 꿈만으로는 내 손으로 그 꿈을 실현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는 그것이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비록 충분한 자원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알-아인에 있었던 20년의 기간동안 세이크 자이드는 다른 어떤 에미레이트의 통치자보다 빠른 속도로 나라를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대체로 원유 수출로부터 석유 수입(收入)이 에미레이트를 개발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했을 때, 세이크 자이드는 도전에 직면해 명백한 선택을 하였다. 그는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 석유수입이 증대함에 따라 그것을 국민의 서비스에 사용하기로 결심하고 도로 건설, 학교, 주택 및 병원을 포함하는 대규모 근대화 계획을 시작하였다.

1966년 권좌에 오른 후 그는 협상국가를 구성하는 7개 에미레이트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면서 공식적으로 이들 국가를 방문하여, “연합(federation)은 강국의 길이요, 힘의 길이며, 복지와 높은 명성의 길이다. ․․․ 시시한 독립체는 오늘날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역사에서 단지 존재했음만을 알려줄 뿐이다."라고 말했다. 항상 그래왔듯이 개발계획을 촉진하기 위하여 10년 혹은 그 이전에 설치된 협상국가 개발위원회에 대해 추가적인 기금을 제공하면서 구체적인 행동과 함께 그의 약속을 지켰다. 1968년까지 아부 다비는 최대의 기금 증여자였다.

1968년 영국이 1971년 말까지 걸프만을 떠날 의사를 표명했을 때, 세이크 자이드는 행동할 준비를 하였다. 과거 두바이Dubai 에미레이트의 통치자 세이크 라시드 빈 사이드 알-마크툼(Sheikh Rashid bin Saeed Al Maktoum; 후에 UAE의 부통령과 수상이 됨)과 함께 그는 에미레이트간의 연합 결성에 앞장을 섰다. 1971년 7월 아랍에미레이트연합 형성이 합의되었다. 초기 7개 협상국가에는 이후 독립을 선택한 카타르와 바레인도 참여하였다. 애초에는 참여할 것처럼 보였던 라으스 알-카이마흐Ra’s al-Khaimah에 대해 협력의 손길을 내밀었으나, 연합은 1972년에야 성사되었다. 카타르와 바레인에 대해서 세이크 자이드는 다음과 같이 코멘트하였다: “나는 누구에게도 연합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횡포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자신들의 의견이 있으며, 그 의견은 변할 수 있다. 때때로 우리들은 모든 견해를 함께 상정하고 거기서 통합된 공동 견해를 이끌어낸다. 이것이 민주주의이다.” 세이크 자이드는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의 최초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5년의 재임기간에 계속 재선되었다. 반면 세이크 라시드 알-마크툼은 부통령에 선출되었고, 1990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UAE는 영국의 철수와 동시에 1971년 12월 2일 공식적으로 하나의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였다.

UAE는 걸프만에 위치한 ‘석유부국’으로 전세계 원유매장량의 약 10%를 갖는 OPEC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국가이다. 다시 말하면 전세계 원유매장량의 약 26%를 차지하는 사우디와 10%를 차지하는 이라크에 이어 쿠웨이트(9.7%)와 각축을 벌이는 세계 3번째의 원유매장량 보유국이다. 지난 25년동안 세이크 자이드 대통령의 영도하에 UAE는 비교적 평온한 정정(政情)을 유지하면서 석유산업을 주도적으로 육성해왔다.

남한 정도의 크기의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은 그 공식 명칭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7개의 에미레이트가 연합하여 1971년 새로운 국가가 되었다. UAE는 인구 약200만 명의 ‘인구소국’으로, 약93만 명의 아부 다비, 67만 명의 두바이, 40만 명의 샤르자Sharjah, 15만 명의 라으스 알-카이마Ras al-Khaimah, 12만 명의 아즈만Ajman, 4만 명의 움무 알-꾸와인Umm al-Quwain 및 15만 명의 푸자이라Fujairah 7개 에미레이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UAE는 비교적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다. 한국은 1971년 UAE를 국가로 승인하고, 1980년 6월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은 UAE 승인이후 그들과 매우 우호적이며 지속적인 경제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수도가 위치한 아부 다비 에미레이트의 수장이 대통령으로 UAE를 대표하고 있으며, 상업도시로 크게 발돋움한 두바이 에미레이트는 세이크 마크툼Sheikh Maktoum bin Rashid al-Maktoum이  수상직을 맡아 왔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동북부에 위치한 UAE는 걸프만을 따라서 북서쪽으로는 카타르, 동남쪽으로는 오만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인구의 대부분은 수도인 아부 다비와 두바이에 모여 살고 있다. 걸프만은 비교적 풍부한 양의 어족(魚族)을 갖고 있기에 수산업이 매우 발달하였다. 아부 다비가 위치하고 있는 남서지역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사막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부지역은 라으스 알-카이마를 중심으로 해발 2,000m의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농업이 가능한 지역이다.

UAE는 산업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의를 중시하고 외국인에게 친절한 관습은 잘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주민들은 아직도 유목민 아랍인이며 공용어는 대부분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아랍어이다. 그러나 현재는 비아랍 이주 노동자들 때문에 아랍인들의 인구 구성 비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해안도시에는 수많은 이란인, 인도인, 파키스탄인, 발루치인 및 흑인들이 있다. 흑인들은 수세기 동안의 노예무역 전성기 동안 아프리카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원주민 대부분은 순니파 무슬림 들이다.

16세기초 포르투갈의 걸프만에 대한 독점적인 상업적 지위는 동부 무역에서 이윤을 분할하려는 유럽의 무역업자 - 첫 번째는 네덜란드 나중에는 영국에 의하여 - 들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 동부에서 포르투갈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하였고, 1650년 그들은 모든 아랍의 해안에서 세력을 잃고 오만으로 퇴각하였다. 그후 이 지역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의 상업적, 정치적 각축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네덜란드가 우세하였으나, 1766년 영국이 인도에 대한 패권을 강화함으로써 네덜란드 세력은 실질적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걸프만에서 유럽국가들과 아랍의 해적 행위는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매우 왕성하게 전개되어왔다. 까와씸(Qawasim)이라는 아랍의 해상 부족들이 권한을 휘둘렀고 걸프만의 모든 아랍 해안에 패권을 장악한 와하비(Wahhabi) 일당에 의한 약탈행위가 자행되었을 때인 19세기초에는 불법 행위가 고조에 달했다. 영국기를 게양한 선박에 대한 해적들의 공격은 결과적으로 1818년 라으스 알-카이마의 해적 사령부와 240km에 이르는 해적해안(Pirate Coast)의 항구에 대한 공격을 유도하였다. 1820년 해적행위와 노예무역을 억제하기 위한 일반 평화협정이 영국과 걸프만 아랍 부족국가들간에 이루어졌다. 이 조약은 해적해안과 바레인의 주요 세이크(Sheikh)들에 의해 서명되었고, 조약의 시행을 위해 영국의 강력한 함대가 라으스 알-카이마에 주둔하게 되었다.

1820년 일반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곳에는 단지 5개의 ‘협상국가’ 있었다. 1866년 샤르자의 최고 세이크가 사망하자, 그 영역은 그의 네 아들의 통치지역으로 분할되었고 샤르자, 라으스 알-카이마, 딥바(Dibba) 및 칼바(Kalba)에 독립된 분가(分家)를 형성하였다. 

19세기말이 되자 프랑스, 독일 및 러시아도 걸프만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92년 영국은 협상국 통치자들과 각각 분리되었지만 본질적으로 내용은 동일한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로써 이 지역은 사실상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52년 칼바의 통치자는, 푸자이라의 통치자가 했던 것처럼, 기존의 영국과 협상국가간에 존재하는 모든 협정을 받아 들임으로써 칼바는 샤르자에 합병되었다.

1952년, 영국의 충고로 두바이에서 7개의 모든 통치자들이 최소한 1년에 두 번 만난다는 조건으로 협상위원회(trucial council)를 설립하였다. 이의 주된 목적은 국가연합을 주도할 수 있는 행정적인 문제에 대한 공통적인 의견을 수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편 1960년대 중반 석유의 상업적 생산은 아부 다비에게 발전을 위한 호기를 제공하였다. 1928년이래 아부 다비의 통치자인 세이크 샤크부트Sheikh Shakhbut bin Sultan an-Nahayan가 폐위된 1966년 8월 개발을 막던 장애도 제거되었다. 왕가의 샤크부트는 그의 젊은 동생 세이크 자이드Sheikh Zayed bin Sultan로 대체되었다. 이와 같은 아부 다비의 역사는 엄청난 부(富)의 축적으로 급격히 변모한 한 사회의 전형적인 예가 되고 있다. 1966년 이웃의 두바이에서 석유가 발견되었고, 두바이 또한 석유로 인해 거대한 수익을 얻게 되었다.

영국 세력의 철수로 인한 연합(federation) 형성의 최초 제안은 바레인, 카타르 및 7개의 협상국가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보다 크고 발전된 이들 국가들은 궁극적으로 분리 독립을 선택하였다. 1971년 12월 1일 영국은 협상국가와의 모든 기존의 협정을 종결하였다. 그 다음날 아부 다비, 두바이, 샤르자, 움무 알-꾸와인, 아즈만, 및 푸자이라 등 7개국의 에미레이트는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을 형성하였고, 영국과 ‘친선협정’(treaty of friendship)을 맺었다. 이 연합은 공식적인 헌법이 작성될 수 있는 5년 후에 만료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임시 헌법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임시 헌법은 계속 갱신되어왔다. 라으스 알-카이마는 이란이 장악하고 있는 걸프만에 두 개의 툼브Tumb 섬에 대하여 영국든지 아랍 국가든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힌 1972년까지 이 연합에 참가하지 않았다.

UAE는 1971년 ‘아랍연맹’과 UN의 회원국이 되었다. 독립하자마자 아부 다비의 통치자 세이크 자이드는 UAE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1958년이래 두바이의 통치자인 세이크 라시드Sheikh Rashid bin Said al-Maktoum는 부통령이 되었으며, 그의 맏아들 세이크 마크툼Sheikh Maktoum bin Rashid 왕자가 수상이 되었다.

UAE는 비록 아랍국가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국가중 하나로, 1973년 10월 전쟁시 아랍주의에 상당한 지원을 하였으며, 석유의 생산감축과 보이코트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UAE는 미국에 대해 석유의 금수조치를 단행한 최초의 국가가 되기도 하였다.

1990년 8월 쿠웨이트 침공으로 야기된 걸프전 때에도 UAE는 다른 아랍국가들과 함께 이라크의 침공에 대한 저항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모든 국민들에게 6주 동안의 군사훈련을 위해 군대에 입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라크의 침공을 반대하는 군대는 에미레이트에서 군사시설을 제공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한편 두바이의 통치자인 부통령 겸 수상 세이크 라시드는 1990년 10월 사망하자, 그의 직위는 그의 아들인 부수상 세이크 마크툼에 의해 두바이의 통치자로서 승계 되었다.

세이크 자이드는 행동의 결과로 자신이 평가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며, 말보다는 행동을 선호하는 인물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중 하나인 국가의 우두머리 세이크 자이드가 이끄는 UAE는 1971년 12월 2일 새로운 UAE의 국기가 펼쳐진 이후 각 에미레이트는 통일된 하나의 국가로서 역사의 새로운 장(場)을 열었다. UAE는 현재까지 27번째의 국경일을 맞이하며 근대화된 모습으로 크게 변모하고 있다. 1971년 당시 약18만 명의 인구가 현재는 거의 240만 명에 달한다. 당시 3만 명 이하에 달했던 학생도 현재는 사막이나 작은 산악 및 도시에 걸쳐있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어 5만 명에 달한다. 이밖에도 대부분이 알-아인에 있는 에미레이트 대학교(Emirates University)와 6개의 고등기술대학(Higher College of Technology)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1만 5천명의 학생들이 있다. 자이드의 재임기간에 UAE의 실질적인 국부(國富)는 그들의 조상과 자이드 자신도 달성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회를 부여해 주고 있다.

UAE의 발전은 도로등 기간산업에서 학교 사회적인 서비스와 주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주된 분야 중 하나는 10만 헥타 이상의 경작지를 갖는 농업과 1억 그루에 해당하는 나무를 사막에 다시 되돌리는 조림(造林)사업이다. 알-아인에서 자이드의 어린 시절이 시작된 이후 세이크 자이드는 사막국가인 자신의 조국을 푸르고 유쾌한 나라로 만드는 꿈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의 이러한 꿈은 차츰 현실화 되어가고 있다.

환경문제에 관한 깊은 인식을 갖고 있는 자이드는 “야생 생물은 보호돼야하고 유지돼야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1960년대에 이미 그는 알-아인에 동물원 설립을 지시했으며, 현재는 이것이 중동 전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동물원이다. 10년 후 자이드는 통제되지 않은 사냥은 국가 야생 생물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국가 전체에 걸친 불법 사냥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고등환경위원회(Higher Environmental Council)의 설치를 추진하여, 현재는 인간의 건설이 국토에 손상을 가하지 않고 국가의 동․식물군(群)의 보호를 책임지는 연방환경기구(Federal Environmental Agency)로 탈바꿈하였다.

세이크 자이드는 국가적 유산(遺産)의 보존은 현세대(現世代)가 미래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 중요하다고 믿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자이드는 연구기관의 설립과 과거 문명의 증거를 조사하는 아부 다비 섬의 탄생에 관한 고고학적 조사를 지원함으로써 국가의 과거에 관해서도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자이드는 실험적인 연방의 실현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국가발전의 전체적인 과정은 석유에너지와 50년 동안 국민을 통치한 자이드에 의한 헌신적인 지도력으로 이루어져 왔다. UAE에서 달성된 수많은 것들은 멀리서 지시하기보다는 항상 직접 개입하는 자이드 자신의 통치 스타일의 탓으로 돌려진다. 그가 알-아인의 통치 대리인이었던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그가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팔라즈Falaj 관개시설의 청소였다. 이는 대추야자 숲과 오아시스에 이용할 수 있는 물을 개선하고, 국내 농업경제를 장려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관개시설의 굴착과 청소가 한참일 때, 그가 노동자와 함께 수로(水路)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기도 했었다.

이와 같은 능동적인 참여는 아부 다비의 통치자가 되고 에미레이트연합의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똑같은 통치 스타일의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개발이 진행될 때 그는 건설현장에 대한 규칙적인 방문계획을 수립하며,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를 그 자신이 확인하기 위하여 수행원이나 공표도 없이 종종 작업현장에 나타나기도 한다.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자리를 뜰 것을 고급관리들에 의해 종용받지만 그는 항상 현장접근 자세를 견지한다. 

자이드는 “국가의 진정한 부(富)는 재정적인 자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의 국민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부는 돈이 아니다. 부는 인간에게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진실한 힘이 있는 곳, 즉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힘에 자리잡고 있다.  인간은 보호받아야 할 보호자이다. 이는 신(神)이 국가에 대한 서비스로 우리에게 제공한 부를 사용하고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는 모든 자원에 대해 우리가 직접적으로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때에 부는 증가하고 번성하며, 새로운 세대가 우리와 형제들에게 도움이 될 적절한 시기에 그들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철학에 따라 자이드는 일반 대중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도시와 농촌 도처에서 사람들과 만나며 국가건설을 위해 힘쓸 것을 역설하고 있다.

개인적인 부나 혹은 가족의 부에 관계없이 젊은이들은 일해야하며, 사회에 기여해야한다고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노동(勞動)은 국가의 젊은이들의 강한 팔에 의지하는 개인과 사회 모두를 건설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며, 커다란 가치를 갖는다. 봉급의 크기는 개인의 가치척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존경과 권위의 의미이다. 젊은이들이 일할 것을 장려하고, 그들 자신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며 국가에 대한 봉사를 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국가 젊은이들의 지도자로서 나의 의무이다.”

자문과 중재는 베두윈 생활의 근간이며, 세이크 자이드는 그가 성인이 된 이후 이 두 가지를 능숙하게 실행해오고 있다. 알-아인에서 잘 훈련된 그의 능숙한 자문과 중재술은 현재 UAE의 국경 너머 멀리에서도 잘 실천되고 있다. 아랍통합(Arab Unity)의 장기 목표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자이드는 그의 아랍 동조자들간에 협력을 구축하는 일에 있어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자이드는 1981년 UAE, 쿠웨이트, 사우디, 바레인, 카타르 및 오만으로 구성된 아랍걸프협력위원회(AGCC; Arab Gulf Cooperation Council) 설립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AGCC에의 참여와 국제법 원칙과 UN 헌장의 준수로 국제관계에도 능숙한 자이드는 1990년 이라크 침공이후 AGCC 회원국인 쿠웨이트를 지원하는데 앞장섰으며, 내전으로 고통받는 소말리아에 대한 질서 및 평화회복을 위한 UNISOM Ⅱ에 UAE 군대를 파병하였다.

아랍 민족주의자뿐만 아니라 신실한 무슬림인 세이크 자이드는 빈곤하고 쇠망하는 국가에 대한 지원 정책을 견지해오고 있다. 그 예로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인의 침공으로 인한 집단학살이 무슬림 공동체에 자행되고 보스니아 내전이 정점을 이루던 시기에 국제사회를 감동시키는 국제적 대응을 요청하였다. 또한, 세이크 자이드는 1969년 초 요르단 계곡의 팔레스타인 전사들을 방문함으로서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독립 투쟁운동에 대한 오랜 지지자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UAE는 자이드의 견해에 따라 UN안보리 결의 및 ‘평화를 위한 땅’(land for peace)의 원칙에 기반을 둔 공정하고 항구적인 평화정착을 위해 투쟁하는 팔레스타인 국민들을 지원하고 있다. 동시에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Jerusalem의 특별한 지위는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이드는 또한 이슬람Islam의 적절한 이해를 도모하는데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오늘날 무슬림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극단주의자들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취한다. 외국인을 살해하는 극단주의는 이슬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이슬람은 인류에게 존엄을 주는 문명화된 종교이며, ․․․기본적으로 진보와 일치한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이슬람의 견해에 따라 자이드는 극단주의자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거부의 의사를 명백히 하고 있다.

세이크 자이드의 정치철학은 사막(砂漠)에서 얻어 졌다. 어린 시절 베두윈과 함께 한 사막의 꿈이 오늘날 UAE의 번영을 가져왔다. 다시 말하면 베두윈 생활과 매사냥에서 익힌 ‘대화와 중재’의 생활양식을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로 탈바꿈시켰고, 사막을 보호하는 환경주의자적 입장에서 국토를 근대화하여 ‘자연과 문명’이 어우러지는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들고 있는 이가 바로 세이크 자이드이다.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항상 ‘자연과 인간’을 염두에 두고있어, 경제개발계획도 이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 그는 경제발전의 원천이 자원이나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人間)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여 ‘인간자본’(human capital)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젊은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국제문제에 있어서도 항상 대화와 중재를 원칙으로 하는 평화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아울러 세계의 분쟁지역에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세계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유고사태의 심각성을 미리 감지하고 국제적 해결책을 찾았던 이도 세이크 자이드이다.

UAE에 관한 이해 중 선행되어야 할 부분이 정치 문제이다. UAE는 석유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두바이를 중심으로 한 중개무역과 소규모 어업,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한 농업 및 목축업이 산업의 전부였다. 하지만 1962년 원유생산과 함께 UAE 경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여 현재는 석유산업이 전체 GDP의 60%, 재정수입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현재는 1인당 GNP가 30,000달러에 육박하는 세계 최고의 소득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석유로 인한 부(富)가 현재 지속되고 있는 장기 집권의 기틀을 마련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1930년대 매장 가능성이 확인된 UAE의 석유가 1958년 아부 다비에서 상업적 규모의 유전 발견과 수출로 7개 에미레이트 중 가난했던 아부 다비를 가장 부유한 에미레이트로 탈바꿈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1966년 아부 다비의 지도자가된 세이크 자이드는 UAE 탄생 이후 줄곧 대통령으로서 UAE를 대표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아무튼 “확고한 통치이념을 갖고 국가를 능동적으로 이끄는 지도자가 있는 한 그 국가는 발전할 수 있다”는 선례를 세이크 자이드는 몸소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홍성민 1997,  “UAE 정치·경제적 상황과 석유산업.” [석유]. 봄호. 통권 71호.   한국석유개발공사.

Arab Net: UAE. http://www.arab.net/uae/uae_contents.html.

EUROPA 1990. The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1991, EUROPA Publications Limited, London

Ministry of Information & Culture 1995. The United Arab Emirates, Emirates Printing Press, Dubai

Ministry of Information & Culture. United Arab Emirates.

UAE. http://hopia.net/kime/nation/gen/frk_nat11_uae.htm.

The United Arab Emirates. 1996. UAE Yearbook 1996, Trident Press, London

The United Arab Emirates. 1996. Chronicle of Progress: UAE 1971-1996. Trident Press, London

The United Arab Emirates. 1996. UAE Yearbook 1995. Planet Publishing Ltd, London

The United Arab Emirates. 1990. Sheikh Zayed Hopes and Deeds.

Werner Forman 1996. Phoenix Rising: The United Arab Emirates Past, Present &   Future, The Harvill Press, London

 

* 본 내용은 “세이크 자에드-오아시스의 꿈을 실현한 행동주의자.” [20세기 중동을 움직인 50인] 2000. 서울: 가람기획에 게재된 글이기에 인용은 동 출판사의 규칙에 따른다.


종합연소식

중동소식

예멘소식

KMEA 소식


KIME 중동 지역연구 Area Studies of the Middle East

Publisher: Korea Institute of the Mideast Economies (KIME). Editor: Dr. Seong Min HONG

Kwanak P.O. Box 49, Seoul  151-600, Korea, Tel: 82-2-876-4249, Fax: 82-2-876-4349.


This publication is consisted of  Korean, English, Arabic and the other languages concerned. The contents of the newsletter do not necessarily reflect either the position or the views of  KIME.

Copyright ⓒ 1997-2002 KIME. All rights reserved. E-mail; kime@hopi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