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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의 사회, 경제적 통합과 한반도

홍성민(RIES)

목    차


Ⅰ. 예멘의 분단과 통합과정

  1. 예멘의 약사(略史)와 분단

  2. 통합과정


Ⅱ. 예멘 통합의 배경과 특성

  1. 통합의 배경

  2. 통합의 특성

  3. 통합노력


Ⅲ. 예멘의 통합과 통일


Ⅳ. 예멘의 사회, 경제적 통합

1. 사회적 통합

2. 경제적 통합


Ⅴ. 예멘 통일과 한반도

2000년 12월 12일

 

* 본 내용은 분단국 통합과정과 남북관계]. (통합관계전문가회의 제1차 워크숍 발표논문). 2000. 서울: 통일부에 게재된 글이기에 인용은 동 부처의 규칙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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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예멘의 분단과 통합과정


1. 예멘의 약사(略史)와 분단

- BC 950-115: 고대 시바 왕국(Kingdom of Sheba), 시바 여왕의 나라로 알려짐

- AD 6세기: 남아라비아 왕국 융성,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는 힘야르 왕조 (Himyarite dynasty)에 의해 통치

-   1507: 포르투갈은 소코트라 섬을 점령하여 유럽 국가로서는 최초로 남아라비아에 대한 제국주의에 관심을 보임

- 1517 - 1918: 오스만 터키 지배, 1636년까지 예멘의 주종국의 됨

-   1839: 영국 조그만 어촌이었던 아덴(Aden) 점령

-   1962:  북예멘 쌀랄(as-Salal) 대령 쿠테타 성공, 예멘아랍공화국(Yemen Arab Republic; YAR) 성립

-   1967: 남예멘에서 영국군 철수이후 독립, 민족해방전선(NLF)이 ‘남예멘인민공화국’ (People's Republic of South Yemen; PRSY) 선포

-   1967:  민간인 카디 압달 라흐만 이리아니(Iryani)가 정권 수립, 남예멘 인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남-북 예멘 분단 고착

-   1978:  알-가시미 대통령 암살되고 알리 압둘라 쌀레(Saleh) 중령(현 대통령) 군부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 취임(7. 17)

-   1990: 남북예멘 통합(5. 22), ‘예멘공화국’(Republic of Yemen) 성립

-   1994: 남북 예멘 내전 발생(5. 5 - 7. 7), 북예멘 승리에 의한 완전한 통일국가 수립

-   1997: 4월 27일 통일이후 최초의 총선 국민의회당 압승


2. 통합과정


1) 협상기(1972-1978)

- 1972년 9월 남북 예멘간 국경분쟁이후 리비아의 까다피 대통령 등 아랍국가의 적극적인 중재로 통일에 관한 논의 시작. 1977년 7월 북예멘의 알-하미드(Al-Hamid) 대통령 암살로 양국간 긴장 고조

* 1972. 10 [카이로 정상회담]

* 1972. 11 [트리폴리 정상회담]

* 1973.  9 [알제리 정상회담]

* 1973. 11 [타이즈·호데이다 정상회담]

* 1977.  2 [카타바 정상회담]


2) 합의기(1979-1988)

- 1979년 2월 남북 예멘간 제2차 국경충돌이후, 3월 [아랍연맹평의회]의 중재안에 따라 쿠웨이트에서 양국 정상회담이 재개된 이후 1986년 1월 남예멘의 정변으로 통합작업이 소강상태에 들어감

* 1979.  3 [쿠웨이트 정상회담]

* 1979 - 80. 특사 교환 및 각료급 회담

* 1981. 12 [아덴정상회담]

* 1981. 12 통일헌법 초안 작성

* 1982 - 85. 지속적인 실무협상 계속

* 1988.  4 [타이즈 정상회담]


3) 실천기(1989-1990)

- 1986년 1월 남예멘 정변이후 집권한 알-아타스(Al-Attas) 정권의 광범위한 개혁, 개방 정책의 추진으로 통합작업이 급속히 진행되어 1990년 5월 22일 통합이 전격적으로 선포됨

* 1989. 11 [아덴 정상회담]

* 1989. 12 [통일헌법초안] 발표

* 1990. 1-3[공동각료회담]

* 1990.  4 [사나 정상회담]

* 1990.  5 [남북예멘 통합]


4) 과도기(1990-1994)

- 1990년 4월 22일 싸나 정상회담에서 통합 선포후 30개월간의 [과도기]를 두기로 한 ‘과도 정부기구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이 이루어진 후, 한달만인 5월 22일 남예멘의 수도 아덴(Aden)에서 전격적으로 통합이 이루어짐. 1993년 4월 27일 야당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과도기의 연장을 결정하고 총선거 실시, 동년 10월 헌법 개정을 비롯한 정계의 분규로 지연되었던 대통령 및 부통령 선출문제가 확정됨. 알-바이드 부통령은 취임을 거부하고 개혁을 요구

* 1990.  5. 22 ‘예멘공화국’(Republic of Yemen)의 통일 국가 선포

* 1991.  5. 15 신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하여 통일헌법 확정 공포

* 1992. 11. 대통령위원회 총선을 ‘93년 4월로 연기,

* 1993. 4. 27 통일헌법 복수정당제에 의한 총선 실시

* 1994. 남북 예멘 내전 발생(5. 5 - 7. 7), 북예멘 승리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


5) 완전통일기(1994 - )

- 1994년 남북내전후인 10월 부분적인 헌법 개정을 단행하고, 개정헌법에 따라 쌀레 대통령을 의회에서 임기 5년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새정부 출범(사회당을 배제하고, 국민회의당과 이슬라당의 양당 연정체제)

* 1994.  9. 국회 헌법안 승인, 쌀레 대통령에 재선출, 10. 6  신내각 구성

* 1995. 6. 13  내각 개편

* 1997. 4. 27. 통일이후 최초의 총선 국민의회당 압승

* 2000. 5. 22. 대내외적인 통일 10주년 기념행사


Ⅱ. 예멘 통합의 배경과 특성


1. 통합의 배경


1) 대내적 요인

- (민간이 배제된 상황에서) 통합을 이루겠다는 양국 지도자들의 자세

- (종족, 언어, 종교를 포함한) 민족적 동질성 유지와 아랍 민족주의(Arab Nationalism)에

  기반을 둔 강력한 통합의지 

- (1980년대 중반이후 개발된 석유부문에 대한) 남북예멘간 상호 경제협력의 필요성 증대

- 특히 남예멘의 해외원조 중단으로 인한 경제난 악화

- 정부 차원의 지속적인 통일대화 추진


2) 대외적 요인

- 동구 및 소련의 개방화에 따른 국제질서의 변화

- 미소(美蘇)의 데탕트로 강대국 영향력 감소

- 아랍연맹(Arab League)과 리비아를 비롯한 주변 아랍국들의 중재와 역할


2. 통합의 특성

- 30개월간의 잠정적인 과도기를 둔 [선통합 · 후조정] 형태 - 외세(外勢), 특히 강대국에

  의 의존이 비교적 적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합의통일

* 예멘인들은 ‘통일’(unification)이라는 용어보다는 ‘와히드’, 즉 하나(one)라는 용어를 사

  용함으로써 통일을 당연한 ‘동질성의 회복’의 문제로 받아들임


3. 통합노력

1) 민간 교류의 활성화

* 1979년 [쿠웨이트 정상회담] 이후 문화, 예술단체들의 상호 방문

* 1980년 [주민 왕래에 관한 협정] (1983연말부터 시행)

* 1988년 [통행자유화협정]


2) 지속적인 경제협력의 추진

* 1980년 [아덴합의서] 채택

  1980년 [예멘관광주식회사의 공동 설립에 관한 협정]

* 1983년 교역 활성화를 위한 [특별공동위원회] 설치

* 1988년 [남북예멘간 전력체계통합]

* 1989년 [예멘 석유·광물개발주식회사] 설립


3) 사회, 문화적 협력 강화

- 1980년 [공보, 문화, 교육 분야 업무조정에 관한 합의서]

* 언론 자료의 개방, 문화, 예술인들의 상호 방문 및 공동 작업

* 공보 출판물의 교환, 공동 전시관의 설립, 공동 문예주간의 설정

- 1983년 [단일 역사 교과서 제작 사용]

* 1984/85 학년도부터 모든 학교에서 남북 단일 역사 교과서 사용


Ⅲ. 예멘의 통합과 통일

남북 예멘은 1990년 4월 19일-22일 싸나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10개항으로 이루어진 “예멘공화국 선포 및 과도기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실질적인 통일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예멘공화국 헌법안 및 과도기 조직 승인에 관한 최고인민회의 비상회의에서는 1) 1989년 11월 30일 양국의 정치지도부에 의해 인준된 예멘공화국 헌법에 동의하며, 2) 최고인민회의는 결의안 공포이후 24시간 동안 예멘 공화국 수립조치에 관한 집행을 위임받는다는 합의하에, 1) 1990년 5월 26일자로 남북예멘은 ‘예멘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국제적 주체로서 남북 예멘의 각각의 주체는 용해되어 완전한 합병, 통일이 이루어진다(제1조),  합의서가 효력을 발생하면 과도기 예멘공화국 대통령평의회가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이들 위원중에서 제1차 회의를 거쳐 대통령평의회 의장 및 부의장이 선출된다(제2조), 3) 과도기는 이 합의서의 효력발생일로 부터 2년 6개월로 한다(제3조), 4) 대통령평의회에게 1990년 11월 30일 이전에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의 실시를 위임하여야 하며(제7조), 5) 쑤라의회와 최고인민회의에서 이 합의서와 공화국 헌법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면 남북예멘 양국의 기존헌법은 폐지되는 것으로 간주한다(제10조)는 등의 내용으로 된 합의가 이루어졌다. 신 헌법이 일정을 앞당겨 1990년 5월 22일 남북예멘 양국 의회에서 인준됨에 따라, 예멘공화국(Republic of Yemen)이 선포되었고 정부와 의회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여기서 통합과 통일이라는 용어는 1994년 내전이후 완전한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의 과정을 구분하여 사용하였음)



통 합 이 후    통 일 과 정

비   고

1990.  5. 22 ‘예멘공화국’(Republic of Yemen)의 통합 국가 선포 (북예멘 출신 쌀레(Saleh) 대통령, 남예멘 출신 바이드(Al-Baidh)가 부통령이 됨)

남북 통합

1990.  5. 22 남북예멘을 통합 5인의 최고의사결정기관인 대통령위원회 (Presidential Council)를 구성하여 집단지도체제 유지

1991.  5. 15 신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하여 통일헌법 확정 공포, 아덴에 자유지역 선포

1992. 11.    대통령위원회 총선을 ‘93년 4월로 연기, 알-바이드 부통령 수개월간 예멘공화국의 연정참여를 보이코트함으로써 과도후 하반기 부터 분열상을 드러냄

1993.  4. 27 통일헌법 복수정당제에 의한 총선 실시로 현 쌀레 대통령 당선, 국민회의당 40%, 사회당과 이슬람당은 각각 20%, 나머지는 무소속이 차지

      5.    GPC와 YSP 합병 합의 10. 11 의회에서 5인의 대통령위원 재선출

완전 통일을 위한 과도기

1994.  5.  4 남북 예멘간 내전 발발 5. 21 바이드(Al-Baidh) 부통령 분리독립선언

  7.  7 북예멘의 승리로 인한 내전의 종결 및 완전한 통일국가 수립

남북 전쟁

1994.  9.    국회 헌법안 승인

     10.    쌀레(Saleh) 대통령에 재선출, 하디(Abd-Rabboh Mansur Hadi) 부통령에 임명됨

     10. 6  신내각 구성

1995. 6. 13  내각 개편

1997. 4. 27. 통일이후 최초의 총선 국민의회당 압승(국민의회당 187석, 예멘 개혁당 53석, 나세르당 3석, 바스당 3석, 무소속 54석), 총 28명의 각료중 무소속 4명을 제외한 전원을 국민회의당 인물로 기용

2000. 5. 22. 대내외적인 통일 10주년 기념행사

완전 통일

Ⅳ. 예멘의 사회, 경제적 통합


1. 사회적 통합


1) 사회적 통합의 배경

- 북예멘의 정치체제는 이슬람(Islam) 원리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입헌공화국 정치체제

- 남예멘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치체제

* 정치이념과 정치체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은 국가운영은 권력이 소수의 집권층

  에 편중되었고 부족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 북예멘은 자유시장경제, 남예멘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추구하였지만 양국 모두 재정자립도가 낮아 해외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 남북예멘 모두 아랍권의 원조(援助)와 해외근로자들의 송금(送金)이 그들 경제의 중요

  한 원천이었다.

* 북예멘의 경우 약 100만명에 달하는 해외근로자들로부터 GNP의 약 40%에 달하는 약

  17억 달러의 송금이 있었으며, 남예멘의 경우도 약 8만5천명의 해외근로자들로부터

  GNP의 약 70%에 달하는 송금이 있었다.


- 남북 예멘간에 사회, 문화적 구조에서 이질성이 존재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아랍어를 사용하며, 아랍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함으로써 양 국민간에 커다란 문제를 노출시키지는 않았다.

- 국력면에서 북예멘은 인구(남예멘의 4배정도) 군사적 측면에서 남예멘보다 우세하였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양국의 격차(1인당 GNP 1988년 기준, 북 682달러, 남 420 달러)는 그리 크지 않았다.

* 전체적으로 볼 때 남북 예멘의 사회적 통합에는 인구(1986년 기준, 북예멘 927만명, 남

  예멘 235만명)와 군사적 측면(1989년 6월 기준, 북예멘 총병력 36,500명, 남예멘 27,500

  명)에서는 북예멘이 유리하였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 경제적으로 낙후되었지만 별로

  큰 차이 없는 경제상황(1988년 기준 GNP; 북 42.2억 달러, 남 13.9억 달러)과 이슬람과

  아랍의 문화를 공유한 민족의 동질성 유지는 사회적 통합에 좋은 계기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사회, 문화적 이질감


- 북예멘

* 1970년대이후 근대적 교육과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봉건적 사회가 해체되고는 있었지만, 부족제도에 의한 전통적 신분제도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결혼, 직업 등은 아직도 많 은 영향을 받고 있음).

* 높은 문맹률(70% 정도)과 전통적 아랍-이슬람 관습이 상존하여 가부장적 전통이 유지 되고 있었다. (여성이 공무원, 은행원, 판매원, 교사 등의 직업에 종사할 수 있었음은 다 른 이슬람 국가들과는 다른 특성임)

* 잠비아의 착용과 까트(Qat)의 상용으로 사회, 경제적 발전에 커다란 장애요인 제공

- 남예멘

* 영국 통치의 영향으로 도시 지역은 근대화가 이루어진 반면, 내룍지역은 전통적인 부족제도가 상존

* 산업시설의 국유화와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에 전통적 지배 계층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

* 보수성이 강한 주민들의 반발로 이슬람을 국교로 인정하고, 종교단체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승려들의 생활비는 국고보조- 따라서 막시즘은 사회에 깊이 침투되지 못함

* 까트의 금지를 법으로 금지하였고, 일부지역에서 술과 유흥장을 허가

* 일부다처제를 금지한 가족법(1974년)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 됨- 최고인민회의 의원직 6석, 지방인민위원회 위원직 10%를 여성으로 임명하도록 의무화

* 교육에 대한 강조로 문맹율이 1967년 97%에서 1985년 59%로 감소


3) 사회적 통합과정

- 남북 예멘은 1972년 10월 ‘카이로 회담’부터 아랍공동체를 강조하고 있으며, 협정 서문에 “--- 양국 정부는 예멘국민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 양국정부는 아랍중재위원회가 기울인 진정한 노력과 남북예멘간의 이견을 해소하기 위한 1972년 9월 13일자 아랍연맹 의회 결의안 2961호 결정에 따르며,  이 노력은 예멘 국민의 현실과 그 미래에 대한 아랍공동체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라는데 동의한다. ---”고 함으로써 회담 초부터 예멘국민은 하나이며, 또한 아랍공동체의 일원임을 강조하고 있다.

- 예멘의 사회통합은 남북간 주민왕래를 그 출발점으로 삼고 1979년 11월 19일 ‘남북예멘 내무장관 합의서’에서 “남북예멘 국민들의 이익에 기여하고 남북예멘 관계당국이 정하는 규칙내에서 국민들의 남북간 왕래를 용이하게 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 1980년 6월 12일 ‘남북예멘 국민의 상호 자유왕래에 관한 남북예멘 내무장관 합의서’에서 자유로운 통행에 합의(북예멘 신분증 제시, 남예멘 허가증 제시만으로 자유 왕래 보장)하였으며, 같은 날 ‘공보, 문화, 교육분야 업무조정에 관한 합의서’에서는 “쌍방은 예멘 국민들이 조국의 발전상과 생활상을 서로 알 수 있도록 허용함과 동시에 라디오 및 텔레비전의 자료와 프로그램의 교환을 장려하고 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13개 사항의 내용에 합의하였다.

- 1981년 11월 30일-12월 2일 북예멘 쌀레 대통령의 역사적 남예멘 방문으로 이루어진 ‘남북예멘간 조정 및 상호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교육, 문화, 공보분야의 합의 내용은,


1. 접경지대에 공동학교 건설에 관하여 동의

2. 남북예멘 양국출신 학생들에게 북예멘이나 남예멘 어느 쪽이든지 거주지역에서 더 가까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허용

3. 교과과정 단일화 및 사회과목 명칭 결정을 위한 조정임무를 문화, 교육, 공보위원회가 남북예멘 양국 교육장관에게 제시

4. 고등교육 및 기술교육 개발분야를 상호조정하고 그 전문성을  강구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고, 이와 관련된 특별 절차를 수립, 이 분야의 경험교환 및 깊이 있는 회의

5. 남북예멘의 공보기구가 싸나와 아덴으로부터 동일한 시간에 방송되는 라디오, 텔레비전 공동프로그램 업무를 맡는다. 이 프로그램은 예멘 통일의 역사적 기초, 통일협정, 공동사업 등을 다루며, 또한 이맘통치와 식민통치에 대항한 예멘 국민의 영웅적, 역사적, 투 쟁적 입장을 소개하고, 또한 예멘 전통과 대중예술을 소개하고 설명하며 국민들에게 조국 예멘을 소개한다.


- 또한 1982년 11월 29일-12월 1일 까지 아덴에서 개최된 ‘공동각료회의 제1차 회의’ 에서는 “공동위원회는 교육, 문화, 공보위원회가 1981년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싸나 회의에서 결정한 바에 따라 교육행정, 역사, 문학, 지리분야의 각 분과위원회를 감독하도록 지시한다. 동 위원회는 1983년 상반기중에 업무달성에 관한 보고서를 공동각료위원회에 제출하여야 한다.”는 내용에 합의를 보았다.

- 1983년 ‘예멘최고평의회가 구성한 특별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는 “모든 학과 과목에 대한 초등, 중등과정의 단일 교과서안의 작성안을 개시하여야 하며, 양국 장관은 6개월 이내에 교과과정 단일화안을 제출하여야 한다. 또한 남북예멘 교육장관은 1984/85학년도부터 이미 남북예멘 학교의 하나의 교육과정으로서 승인되어 확정된 역사교과서를 출판하여야 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 1985년 12월 10-12일 싸나에서 개최된 ‘공동각료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는 “공동각료위원회는 남북예멘 양국 교육장관에게 모든 교과과목과 각 과정의 교과서 및 교육과정의 단일화 작업이 계속해서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을 촉구하며, 남북예멘 현행 법률과 제도에 의거 남북예멘간 서적, 신문, 예멘 문화회보 등의 운송에 장애가 되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데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양국 문화장관에게 지시할 것을 촉구한다.”는 점에 합의를 보았다.

- 사회통합은 1972년 첫 정상회담에서 남북예멘공동위원회(YAR-PDRY Joint Committee for a Unified Political Organization)를 설치하기로 합의한 이후 17년만인 1989년 10월말 처음으로 위원회가 소집되어 상호방문이 이루어지고, 빈번한 회의 개최로 통일이 임박했다는 징후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1989년 11월 30일 ‘아덴정상회담 합의서’ 및 1990년 4월 22일 ‘예멘공화국 선포 및 과도기 조직에 관한 합의서’를 통해서 예멘통일에 초석이 되었다.


4) 사회통합

- 예멘의 사회통합에 관한 내용은 1991년 헌법에서는 제18조-제21조에 명시되어 있었으나, 1994년 개정 헌법에서는 제3장 사회, 문화 기조(제28조-34조)의 내용에 언급되어 있다.

* 모든 봉사행위는 신성한 일로서 사회적 통합과 규율의 원칙하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제28조)

* 국가는 사회적 공동협력을 토대로 자연재해 및 공동의 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제33조)

* 국가와 사회 구성원은 고대 유산을 보호해야 한다.(제34조)


- 또한 국민의 기본권과 의무는 제40조-59조에 명시되고 있으며,

* 모든 국민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영역에서의 참정권을 가진다. 정부는 법이 정하는 바

  에 따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한다.(제41조)

* 특히 예배장소나 과학연구장소는 신성시되어야 하며, 그 신성함은 법률에 의해 저촉되      지 않는 한 모독되어서는 안 된다.(제51조)

* 1. 모든 국민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정치적, 직업상 또는 노동조합에서의 협력권리를 지니며, 헌법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과학, 문화, 사회 분야에서의 단체를 결성할 권리도 지닌다. 2. 정부는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고 국민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하고 각종 연구소 및 정치, 과학, 문화 사회기관 등에 대해서도 전적인 자유를 부여하여야 한다.(제57조)


- 정치적 일괄타결방식으로 성립된 사회, 문화 분야의 통합은 근본적으로 동질성을 유지해온 단일민족과 단일언어 아랍어)라는 변수 때문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지 않았지만, 세부적인 분야에서는 다소의 마찰과 갈등 요인이 상존하고 있다.


- 북예멘 지역에서 성행하는 까트(Qat)의 이용은 계속 정치, 사회적인 해악요인이 됨(가계수입의 30-40%를 지출). 특히 농업 소득중 고소득인 점을 감안하여 까트의 경작면적이 점차 증가하여 농업분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됨(정부는 금년 들어 공무원들의 까트 이용을 전면 금지하였음)

- 통일이후 수도 싸나 지역으로 모여든 정부기관과 해외 취업자 (특히 100만명에 달하는 사우디)의 귀국 등으로 인구가 급증하여 전력, 식수 및 주택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됨

- 부족제도는 상존하고 있으며, 사법권을 갖고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는 부족장들은 권력안배에 커다란 영향력 행사

- 예멘통일은 이슬람을 기조로 이루어졌기에, 남예멘의 지식인과 높은 교육수준의 여성들은 노동조합의 결성과 부의 합리적 분배를 요구하고 있음


2. 경제적 통합


1) 경제적 통합의 배경

- 예멘통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경제적 요인’이 통일을 앞당기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 통일 이전에 이미 남북예멘간에는 경제협력의 필요성이 고조되고 있었다. 지하자원이

  주로 남예멘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고, 북예멘도 농업이외에 확실한 소득원이 없었기에 상호 경제협력의 필요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 예멘 경제통합의 가장 큰 요인중 하나는 석유를 포함한 광물자원의 공동개발과 아덴(Aden)항의 개발이었다.

* 1980년대 후반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양국 국경선 부근 (북 마립, 남 샤브와) 유전의

  공동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고조되고 있었다.


- 남예멘의 사회주의 경제제도 실패 또한 양국 통일을 앞당기는 인화제 역할을 하였다

* 남예멘은 소련경제에 의존하고 있었고, 군사 및 경제분야에 대한 원조가 거의 중단되자, 남예멘은 자구책으로서 유전개발과 아덴항의 공동개발을 목표로 통일에 기대를 걸게되었다.


- 소련경제의 붕괴 또한 예멘통일을 앞당기는데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개방, 개혁정책으로 서구사회와 화해함으로써 남예멘에 대한 간섭

  이 배제되었고, 이 지역의 이권경쟁에 나설 수 있는 여력을 잃었다. 북예멘은 이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였다.

2) 경제적 통합의 과정

- 1979년 11월 17-19일 싸나에서 이루어진 ‘남북예멘 내무장관 합의서’에서는 “남북예멘 주민 왕래에 편의를 제공하고, 남북간 교역증대를 위하여 승객과 상품의 운송수단에 대하여 최종목적지까지 모든 편의시설을 제공한다”는 내용에 합의를 보았다. 또한 1980년 5월 6일 아덴합의서는, “--- 남북 예멘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경제분야 활성화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 있어서 남북 예멘간의 접촉을 강화하고 조정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루어졌다.


1. 산업분야: 1) 남북예멘에 부탄가스를 조달할 공장건설, 2) 아덴정유소 석유생산품중 북

   예멘 수요분 계속 생산, 3) 석유화학 및 정제분야의 공동사업추진

2. 광물자원: 남북예멘의 광물자원 탐사, 탐사지도 작성, 경제적 효용가치가 있는 광물

  채굴을 위한 조사준비 관련 업무조정

3. 교통분야: 1) 예멘공동육상운송회사 설립, 2) 예멘공동해상운송회사 설립

4. 금융분야: 1) 남북예멘간 교역 및 서비스 업무를 위한 금융기관 역할증대 및 중앙은행

  들의 업무감독, 2) 통화단위 기초자료, 금융제도 및 관련 집행기구 조사를 위한 위원회

  구성

5. 통계 및 발전계획 분야: 각종 통계자료 및 기초 산출자료의 단일화를 위하여 남북예멘

   담당기구 및 발전계획의 상호 업무조정

6. 관광분야: 1) 예멘관광사업을 담당하는 예멘공동회사 구성, 관광분야 활성화를 위한 아

  랍 및 해외 관광회사의 활용, 2) 예멘공동호텔사업 추진 및 사업자금 조성을 위한 제3

  자의 공동참여

7. 전시장: 1) 예멘원산지의 생산품을 전시하는 공동전시장을 남북예멘에 정기적으로 설치

  하기 위한 노력

8. 통일의 길을 집행하기 위한 리비아의 감독, 남북예멘 법률에 의거한 활발한 경제사업을

   위한 민족자본, 아랍자본, 아랍기금 등의 참여를 장려하기 위한 노력


- 예멘관광주식회사 설립협정: 1980년 6월 12일(지분 50:50의), 협정 동의(7월 30일)

- 예멘해상운송회사 설립협정: 1980년 6월 12일, 협정동의(8월 31일)

- 천연자원 공동사업에 관한 양국 정부간 협정: 1980년 6월 12일, 천연자원 공동사업계획 (1982년 1월 23일 업무시작)  

- 1981년 11월 30일-12월 2일 ‘남북예멘간 조정 및 상호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경제분야 합의 내용은,


1. 남북예멘의 경제, 사회 개발계획의 상호조정

2. 지질 및 수자원 분야의 공동지도 작성, 접경지역의 모든 광물, 수자원에 관한 연구 및 탐사작업 수행, 남북예멘 공동기관의 광물 및 수자원 이용

3. 남북예멘간 공동 공업 및 농업사업의 경제적 이익을 연구하는 공동기구 창설

4. 수자원 연구 및 공동 농경지의 이용에 관한 경제 연구 보고서 작성

5. 남북예멘 전문 농업기관의 연구, 검토 및 계획 단일화  

6. 남북예멘 농업 계몽방법 및 기구의 단일화

7. 남북예멘 양국 상호간의 농산물 판매를 위한 공동기구 설립에 관한 검토

8. 이브-까으따바-다킴 통일로 건설사업의 지속적인 집행

9. 남북예멘을 결속시키는 기타 방법들의 집행에 관한 검토

10. 접경지대에 공동 진료소 설치 및 남북예멘 담당 위원회가 진료소 부지(敷地) 결정

11. 전염병 및 풍토병 퇴치를 위한 공동계획 수립, 기본적인 보건 후생문제에 관하여 계속 노력하고 상호경험 교환


- 또한 1982년 11월 29일-12월 1일 까지 아덴에서 개최된 ‘공동각료회의 제1차 회의’ 에서는 1981년 12월 2일 조인된 ‘조정과 상호협력 협정’에 의거한, 1) 주민의 왕래, 2) 예멘주식회사, 3) 교역, 4) 통일로 사업, 5) 농업분야 등에 관한 경제분야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 그후 연이은 협상을 통해 조정과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1988년 5월 4일 ‘남북예멘 공동합의서’에 따라 “남북예멘 경제통합(經濟統合)의 중요성을 고려하고, --- 천연자원 공동개발사업에 관한 조치들을 마무리 지은 뒤”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하여 합의가 이루어졌다.


1. 2,200km2로 추산되는 마립과 샤으바 양주간 공동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2. 공동 지지(地誌)위원회는 공동 투자사업지역을 선정하고 이의 홍보를 담당한다.

3. 공동개발지역은 남북예멘의 군사지역에서 제외되며, 1985년 1월 19일 양국 참모총장 회의 의사록 규정의 적용대상이 되지 않는다.

4. 남북예멘 석유장관은 개발, 기술, 재정, 운영절차와 그 밖의 경제적 투자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비롯하여 이 사업 진행에 관련된 모든 조치를 취한다.

5. --- 이 합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남북간 경계선의 설정이나 남북간 국경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 경제통합에 관한 합의는 1988년 11월 19일 ‘남북예멘간 공동지역개발에 관한 합의’를 거쳐, 1989년 11월 30일 ‘아덴정상회담 합의’ 및 1990년 4월 22일 ‘예멘공화국 선포 및 과도기 조직에 관한 합의서’를 통해서 통일에 이르게 된다.


3) 경제적 통합

경제통합에 관한 내용은 1990년 5월 1일-4일 싸나에서 개최된 “남북예멘 양국 각료회의 의장 공동회의” 합의문에 잘 나타나 있다.


- 통화

통화는 국가의 민족적 주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멘공화국의 국민경제를 보호하고 --- 폭넓은 민족적 기초원리에 입각하여 통일국 통화체계에 대한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리얄(북)과 디나르(남)는 통일된 날로부터 남북예멘 양국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예멘 통화로 간주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이 두 통화는 1디나르당 26리얄에 해당하는 환율로 모든 예멘에서 공식 지불 수단이 된다.


- 예산

남북예멘 재무장관은 통일국수립 선포이후 연말까지의 통일국 예산에 관하여 논의하고 준비하여야 한다. 이는 금년(1990년) 5월 20일까지 완료하여야 한다.


- 운송과 통신

양국 항공회사와 통신기구에 관하여 양국 교통, 운송, 노동장관 사이에 조인된 두 건의 회의 의사록을 승인한다. 이 두건의 의사록은 양국 항공회사와 통신기구 합병의 근거 규정이 된다.


- 민원과 노동

* 민원 및 노동 장관은 1990년 5월 15일까지 조직체계와 규정에 의거 직원 관계 법률적

  적용에 관한 논의와 그에 따른 직제 구성을 완료한다(기존 기구의 모든 근로자들을 수

  용함을 원칙으로 한다).

* 양국 민원 및 재무장관은 1990년 5월 15일 이내에 월급여 및 보수체계의 세부적 내용

  을 완성하여야 한다.

* 통일국 수도로 옮겨질 본부의 모든 업무 분야의 비밀문서 및 일반 서류는 붉은 양초로

  봉인되어 보관된다. 그후 필요에 따라 통일국 각료회의 결의안에 의해서만 개봉이 가능하다.

- 경제통합에 관한 내용은 통일헌법 제2장(제6조-17조)에 나타나 있으며, 중요한 내용으로는,

* 국가경제는 이슬람의 사회정의 원칙에 따르며, 공공의 이익과 법률에 따른 공정한 보상

  을 제외하고는 침해받지 않는 사유권(私有權)의 보호(제6조),

* 지하 또는 지상, 영해, 대륙붕 혹은 모든 관(官)경제지역의 파생물을 포함하는 자연자원

  및 동력자원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며, 국가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 이들의 개발을 보장한다(제7조).

* 국가의 경제정책은 공공의 이익과 국가경제 발전을 위한 정부 개발계획의 테두리내에

  서 일반 및 자연자원의 개발과 투자 그리고 모든 경제 및 사회분야의 공공, 민간 및 혼

  합부문에서 능력과 기회의 확대와 개발에 임하는 일반법인의 설립을 장려하는 방향에서

  과학적인 기획에 의거한다(제8조).

* 의회의 승인없이 행정당국은 차관(借款) 계약을 체결하거나 차관을 보증하거나 공공자금으로부터 지불을 요하는 사업에 임할 수 없다(제15조).

* 자연자원 및 공공 사업개발권의 부여는 법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제17조).

  등의 내용이다.


- 1994년 개정헌법은 구 헌법의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경제에 관한 내용을 2장(제7조-27조)에 포함하고 있다. 보다 세부적으로 광범위하게 명시된 경제기조에 관한 내용가운데, 

* 법에 따라 독점행위는 금지되며, 모든 경제 및 공공 개발분야에 대한 개인자본의 투자

  는 장려된다(제10조).

* 행정당국은 계약을 체결하거나 이를 지원해서는 안 된다(제16조).

* 천연자원 및 공공사업 개발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제18조).

* 상속은 이슬람 교리에 의거, 보호되어야하며, 이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제23조).

등의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4) 통합이후 예멘의 경제

- 예멘은 통일 이후 정치적으로 커다란 후유증을 함께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실업, 물가 및 인플레의 가중으로 어려운 과정을 겪기도 하였지만, 현재는 매우 양호한 성장을 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예멘 경제의 특성은 첫째로 정부 통제가 강한 시장경제, 둘째로 지하경제의 규모, 셋째로 까트(Qat)의 생산 및 소비와 관련된 데이터 작성의 어려움, 넷째로 해외 부문을 포함한 경제활동의 패턴, 그리고 데이터의 수집 및 작성에 대한 구조적인 한계 등 매우 복잡 미묘하다.


- 예멘통일이후 경제분야에서 가장 성공적인 분야는 화폐통합이라고 볼 수 있다.

* 높은 실업률과 물가고에도 불구하고 차분히 화폐통합을 이루어낸 점은 예멘경제의 예멘통일의 가장 큰 효과중하나라 볼 수 있다.


- 통일 예멘 정부의 가장 중요한 문제중 하나는 경제의 인프라(infrastructure) 부문을 개발하는 것이다.

* 정부 경제계획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신규 투자를 유발할 수 있는 아덴(Aden)항에 자유무역지대‘(Free Trade Zone)를 설립하는 것이다.


- 하지만 통일예멘은 노동과 관련된 문제점들을 해결해야만 한다.

* 과거 남예멘에서, 특히 관광 및 기타 분야의 국가 소유 기업들에 대한 새로운 통제의 결과로 실업의 공포와 함께 수많은 파업이 발생하였다. 다른 부문에서도 높은 생활비 때문에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 통일이후 예멘 정부는 “그들의 장래는 두 가지, 즉 ‘시간’과 ‘석유’가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 대부분 1970년대의 조사를 통하여 1980년대 중반 이후 상업적 규모의 유전이 개발되기 시작한 예멘의 석유산업은 통일이전 정치, 경제, 사회적인 어려움 등으로 개발이 지연되다가 1990년 통일이후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자본 조달을 위해 유전의 광구 분양과 관광산업 육성에 정책의 커다란 주안점을 두고 있다.


5) 예멘경제의 현재

통일이후 예멘의 경제 사정은 매우 호조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표 1>에 나타난바와 같이 1990년 통일 시점과 1994년 내전을 기점으로 예멘경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면서 성장하고 있으며, 미래 전망 또한 양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표 2>). 통일당시 GDP 약 1,000 리얄은 1999년도 약 7,200억 리얄로 증대되었다. 실질 GDP성장률도 통일당시 -0.3%에서 8.6%(1995년)로 상승하였다가 1999년에는 2.8%의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내전당시 145%까지 치솟았던 소비자 물가상승률도 1999년에는 7.9%의 안정을 유지하고 있으며, 환율도 내전이후 급등하기는 하였지만 1997-1999년 사이에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수출입 모두 통일직후 2배 가까운 수준으로 상승하였고, 경상수지, 외채, 지불준비금 등은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폭발적인 인구증가 현상은 예멘경제에 커다란 부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0년 통일 당시 1,100만명의 인구는 1999년 현재 1,767만명을 기록하여 통일이후 600만명의 인구증가가 이루어졌다.

예멘 경제의 관건(關鍵)인 석유부문도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 현재 일량 약 43만 배럴 정도의 원유를 생산하고 있다. 향우 고유가가 지속될 경우 예멘 경제는 보다 큰 탄력이 붙을 것이다. 한국도 1997년 경우 월 3,870만 달러의 원유를 수입하였지만, 1998년의 경우에는 월 1,720만 달러 어치의 원유를 수입하였다. 특히 예멘 상품수출의 경우 한국(25.4%)은 매우 좋은 파트너로 1996년의 경우 중국(30.6%)에 이어 제2위의 수출대상국이 되고 있다.

예멘은 현재 [1997-2000 경제개발계획]을 추진중에 있다. 1996년 3월 경제 및 행정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기반조성을 목적으로 [1996-2000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였으나, 1996년 6월 대규모 수해와 예산부족 등으로 시행을 유보해 오다가 1997년 8월 총 65억 달러 규모의 4개년 계획으로 수정하여 [1997-2000 경제개발계획]을 단축하여 시행하고 있다. 특히 이 기간중 예멘 정부는 석유 및 개스 개발 및 경제수도인 아덴에 [자유무역지대](Free Trade Zone)를 설치하는 것과 관련된 외국인 투자유치 등을 목적으로 총 44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하여 예멘 경제의 핵심 개발분야에 중점 투자하고 있다. 한국의 현대건설도 현재 아덴항 컨테이너 건설공사를 수주하여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표 1> 통일이후 예멘의 경제지표

내 용  /  연 도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a

GDP시장가격

(YR 10억)

100.1

123.1

197.6

477.3

1,357.8

447.8

655.2

740.6

701.3

716.6

실질 GDP성장율(%)

-0.3

-5.0

-2.1

3.4

-1.4

8.6

5.6

5.2

4.8

2.8

소비자 물가 인플레 (평균; %)

34.2

45.2

55.0

55.0

145.0

56.3

30.0

5.4

12.9

7.9

인구(100만)

11.3

12.54

13.0

13.45

13.92

15.37

15.92

16.48

17.06a

17.67

수출 fob(100만 달러)

1,410

1,200

933

1,040

1,753

1,937

2,263

2,264

1,501

2,467b

수입 fob(100만 달러)

1,914

2,122

2,231

2,346

2,646

1,948

2,294

2,407

2,223

2,441b

경상수지(100만 달러)

-

-

-

-

-

183

106

52

-228

321

지불준비금

(금 제외, 100만 달러)

250

220

180

-

-

619

1,017

1,203

996

1,350b

총 외채(100만 달러)

6,300

6,297

6,516

6,859

7,237

6,217

6,362

3,856

4,226a

4,501

외채 지급비율(%)

-

-

-

-

-

3.2

2.4

2.6

11.0a

8.0

환율c(평균, YR: $)

14

30

33

52

65

40.839

94.157

129.281

135.882

154.083b

주;    2000년 3월 6일 YR160.7: 1달러

출처: EIU Country Report 1st quarter 1995 및 2000



<표 2>  예멘의 경기예측(2000-01)(백만달러 미만의 지표)

내용/연도

1998a

1999a

2000c

2001c

실질 GDP 성장율(%)

4.8

2.8

2.8

2.3

소비자가격 인플레율(평균;%)

12.9

7.9

10.0

8.0

원유가격(달러/배럴, 브렌트)

12.76

17.90

20.0

17.88

원유생산(1000 b/d)

400

410

425

430

상품수출 fob

1,501

2,467

2,811

2,596

상품수입 fob

-2,223

-2,441

-2,520

-2,640

무역수지

-722

26

291

-44

경상수지

GDP 비율(%)

-228

-4.4

321b

6.9b

576

12.3

261

5.3

지불준비금(금제외)

996

1,350

1,500

1,575

환율(평균; YR: $)

135.88

154.08

158.50

155.08

출처: EIU Country Report 1st quarter 2000

Ⅴ. 예멘 통일과 한반도


1. 예멘통일의 평가

- 예멘통일은 비록 통일이후 높은 실업율, 물가, 인플레이션, 환율급등 등의 경제문제에 부딪치기는 하였지만, 역사적으로 [합의통일]에 의한 모델 케이스로 남을 것이며, 성공한 통일로 기록될 것이다(<표1> 참조).

- 예멘통일은 국제질서 흐름에 잘 편승하였고, 주변 아랍국과 아랍연맹의 중재역할을 잘 활용하였다.

- 예멘통일은 [선통합-후조정]이라는 ‘합의통일’ 방식을 채택하였기에 통일을 앞당길 수 있었다.

- 통합이후 [남북내전]을 거치긴 하였지만, [통합]과 [통일] 과정에 3년간의 [과도기]를 두면서 완전한 통일의 과정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남북내전이라는 정치적 변수만 제거할 수 있었다면, 완전한 평화통일도 가능하였을 것이다.

- [사회통합]의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전단계중 하나가 [통화통합]인데, 예멘이 극심한 인플레(외부적 요인이 강함)에 시달리면서도 [경제통합]을 이루고 [통화통합]을 이룩해 낸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중 하나다. 

- 예멘통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경제적 요인’, 즉 남북간 경제구조의 보완적 필요성이 인화제로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2. 예멘통일의 시사점


1) 정치적 측면

- 통일방식을 단순히 [흡수통일]이나 [합의통일]로 단순 비교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 예멘통일이 합의통일 방식에 의한 통일이기는 하기만, 경제문제를 포함한 다른 측면에서는 흡수통일의 요소도 있다. 독일의 경우도 그렇다.

* 통일회담의 시작부터 양국간에 분명한 통일의 [이념]과 [체제]문제에 대한 의견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실무회담에서 체계적인 대안을 가지고 통일협상을 지속해나 갈 수 있다. 예멘의 경우, 이미 1972년 첫 번째 정상회담에서, “새로운 국가는, 하나의 국기, 하나의 슬로건, 하나의 수도, 한사람의 지도자, 하나의 입법부, 하나의 행정부, 하 나의 사법부 --- 그리고 새로운 국가의 통치체제는 민주-민족-공화체제이다.”(카이로 협정, 제2조, 및 제3조)라는 점에 합의하고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 경제적 수준이 서로 다른 나라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더욱이 통일의 배경을 분석함에 있어서는 반듯이 국제 (경제)질서를 면밀히 분석하고, 후원자나 중재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와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 예멘의 경우 그 당시 기준으로 1인당 GNP(북예멘 약 680달러, 남예멘 약 420달러)로 경제력에서 커다란 차이가 없는 매우 낮은 단계의 경제수준에서 이루어진 통일이었고, 한국의 경우 약 1만달러에 달하는 1인당 GNP에 10배 정도 경제력의 차이를 갖고 있는 통일 문제를 비교 연구함에 있어서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또한 예멘통일의 배경에 있어서도 소련의 붕괴와 미소의 데탕트 과정에서 [아랍연맹]을 통한 중재와, 리비아, 요르단, 이라크 등 주변 아랍국가들의 중재노력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독일의 경우도 유럽공동체(EC),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CESE) 등의 지역적 협력의 틀 속에서 통일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밖에도 예멘의 경우 중동에서 안보적 성격이 강한 경제협혁기구, 걸프협력위원회(GCC), 아랍협력위원회(ACC) 및 마그레브연합(AMU) 등이 물밑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우리의 경우 통일 논의 과정에서 이 부분을 간과하는 경향이 많다.


2. 사회적 측면

- 사회적 측면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민족의 동질성] 회복 문제이다.

* 예멘의 경우 동질성 회복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주의라는 틀 속에서 전개되었지만, 한국의 경우와는 커다란 차이를 갖는다. 세계에서는 유일한 사회주의적 공산주의를 실천하고 또 그속에서 생활하였던 북한 주민과 자유주의를 신봉해왔던 남한 주민간의 동질성 회복 문제는 엄청난 시간을 요구할 것이다. 정부수립이후 한국정권의 민주화과정, 즉 1 공화국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민주화 과정에 관한 연구 또한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도움을 주리라 기대된다.


- 민족의 동질성 회복문제는 비록 시간(時間)을 요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실천 가능한 단계부터 시작하면 단일민족, 단일언어를 비교적 순수하게 지켜 온 전통을 잘 연구하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예멘의 경우 이 문제를 남북간 자유왕래, 단일 역사교과서의 활용, 텔레비전을 통한 홍보 등의 절차를 통해 이룩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교육(敎育)의 문제는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멘은 1983년이후 주민들이 신분증만으로 자유로운 왕래를 할 수 있었음은 차후 통일이후 후유증을 감소시키는 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 남북이산가족의 왕래도 자유의사에 맡기는 장치를 마련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며, 이 과정에서 (남북 공히) 재외국민의 남북한 자유왕래에 관한 기준도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차후 경제적 측면에서 운송, 교통의 분야에도 커다란 도움을 줄 것이다.

- 단일 [국어교과서]의 제작 및 교육은 민족 동질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급한 현안문제가 되고 있다.

* 예멘의 경우 1983년이후 단일 [역사교과서]를 제작하여 교육하여 이질감해소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예멘은 언어(言語)나 역사문제에 커다란 장애가 없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예멘의 경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언어의 경우 물론 한글을 사용하고 있지만, 해방이후 다른 체계(북; 한글전용)로 길들여져 왔고, 그래서 문법이나 어휘에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인터넷시대에 컴퓨터 한글화는 시급한 과제이며, 과학적 한글화 작업에 남북한 모두 서둘러 연구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역사교과서 의 경우 상당히 미묘한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요인이 있기에, 한국에서는 우선 단일 [국어교과서]의 사용이후, 단일 [역사교과서]를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양국의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예멘의 사례가 많은 도움이 되리라 기대된다.


- TV, 라디오, 매스미디어, 학술교류, 예술단체의 교류활성화 또한 동질성회복에 반듯이 필요한 선행조건이 되고 있다.

* 예멘의 경우 동시간에 동프로그램 방영을 통해 커다란 효과를 보았다. 특히 텔레비전은 이 과정에서 인터넷 못지 않게 커다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따라서 단순한 프로그램 교환이나 예술단 교환의 차원을 넘어 실질적인 학술교류와 토론의 장이 마련되어야 하고 삼국, 신라, 고려, 조선시대 등 한국의 역사나 인물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동시에 제작하여 방영하는 방법을 통해 민족의 위대성이나 동질성을 회복해 나아갈 때, 단일 역사교과서의 제작, 사용도 가능해 질 수 있을 것이다.


3. 경제적 측면

- 남북한 경제의 산업간 구조적 조정을 통한 경제적 효과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 예멘의 경우 경제협력 분야에서는 확실한 목적과 목표가 설정되어있다. 자본과 기술부족으로 한계에 부딪치고 있던, 자원의 공동개발과 관광분야의 육성 및 아덴항 개발 등과 분야를 산업구조의 조정형식을 택하여 효율성을 제고하겠다는 발상이 통일을 앞당기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 단순히 자본(資本)과 임금(賃金) 또는 노동력(勞動力) 등과 관련된 구조적(構造的) 결함을 탈피하기 위한 돌파구로 남북경협을 고려하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다. 따라서 현재 진행중에 있는 관광 및 경제특구의 경험을 토대로 자본과 노동력(임금)에 대한 체계적인 비교, 검토를 통한 산업간 구조조정을 국내경제개발과 연계시키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 대금결제 수단으로서의 (향후 전자상거래를 대비한 전자화폐를 포함한) 공용화폐의 이용과 그 선결조건으로서의 [투자보장협정]에 대한 장치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 자본과 노동력의 이동과 직접교역은 간접교역 단계를 지나서 직접교역 그리고 경제협력, 경제통합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경제통합이 통화통합을 이룩하면서 사회통합 을 거쳐야 일련의 완전한 통일로 이어진다. 높은 실업률, 인플레이션 및 환율 폭등에 시달리면서 이룩한 예멘의 [통화통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통일전 북예멘 통화는 $1=YR12, 남예멘 통화는 $1=YD0.46이었지만, 통화통합 당시 YD1=YR26이었다.


- 토지소유, 재산권 및 개발권에 대한 기득권 문제와 보상체계에 관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 예멘통일의 경우 이 부분이 흡수통일적 요소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분야인데 대부분 이슬람율법에 따르는 공공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사회주의제도하에서 제기되는 소유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특히 전소유자의 기득권 문제는 적절한 보상체계를 마련해줌으로써 재산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한국의 경우 해방이후 월남한 이산가족의 경우 과거 기득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보이기에 통일협상에서 이 문제가 반듯이 해결되어야만 통일이후 국토의 효율적인 개발과 관리가 가능할 것이다.


3. 우리의 과제

- 이제까지 연구되어온 통일 연구에 있어서 단순한 1국의 분석이나 체제의 분석을 탈피한 상호보완적인 다양한 사례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예멘의 경우도 ‘아랍통합’(Arab Unity), ‘아랍연맹’,  및 GCC를 비롯한 경제협력기구 등 주변 여건에 대한 연구가 병행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 지나치게 객관적인 통일의 원인, 배경, 과정, 결과만을 분석하는 체계를 탈피한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연구로 심화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경우 정확한 통일비용을 산출할 수 있으며, 통일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효과를 포함한) 경제적 효과를 정확하게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예멘의 경우 이제까지 연구는 예멘의 역사, 분단과 통일 등 객관적 사실과 예멘의 이해 정도에 미치는 미미한 연구가 되어왔다.

- 문제의 시각을 안으로 돌려 [한민족], [단일민족]의 차원에서 통일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삼국통일의 과정을 역사적 차원에서 재조명해보는 것도 -외국의 사례를 한국의 실정에 도입하려는 현실을 감안할 때- 효과적인 연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록>

예멘의 경제구조

<부표 1> 예멘의 GDP 구성

1998 GDP

전체비율

1998 GDP 구성요소

전체비율

농업 및 수산업

19.6

민간소비

59.0

광업 및 채석

22.2

정부소비

20.4

제조업

14.3

총 고정투자

36.3

건설업

5.8

수출(재화 및 서비스)

35.6

서비스

36.0

수입(재화 및 서비스)

-51.3

요소가격(기타포함) GDP

100.0

시장가격 GDP

100.0

출처: EIU Country Report 1st quarter 2000

<부표 2> 예멘의 주요 수출입품(1998)

주요수출품fob1998

YR 100만

주요수입품 cif 1998

YR 100만

천연연료 및 윤활유

186,152

식품 및 가축

83,667

식품 및 가축

6,742

기계 및 운송설비

71,357

원자재

3,358

가공품

50,939

기계 및 운송설비

2,480

미네랄, 연료 및 윤활유

18,977

기타 제조품

1,489

기타 제조품

15,542

출처: EIU Country Report 1st quarter 2000


<부표 3> 예멘의 주요수출입국(1998)

주요수출국 1998d

전체비율(%)

주요수입국 1998d

전체비율(%)

중국

30.6

미국

8.9

한국

25.4

UAE

7.7

태국

22.1

프랑스

7.6

일본

5.0

이태리

7.3

남 아프리카

2.1

사우디 아라비아

7.0

주:  aEIU 추계. b현재. c 자유시장율. 1996년 6월 1일에 발생한 자유시장 비율의 환율 통일.dIMF의 Direction of

     Trade Statistics에 의한 분기별 자료

출처: EIU Country Report 1st quarter 2000



<부표 4>  예멘의 원유수입국 및 품목($ 100만; 월평균)

수입품 cif / 국가

중국

태국b

한국

싱가폴

일본

1997

1998

1995

1997

1997

1998

1997

1998

1998

1999(1-11월)

원유

53.49

43.40

7.56

38.40

38.71

17.20

1.44

4.72

7.28

2.40

석유제품

0.72

0.00

0.00

0.68

0.52

0.43

1.39

1.29

1.74

1.54

주:    aFigures from partner's trade accounts. b1996 figures are not available

출처: EIU Country Report 1st quarter 2000


<부표 5>  대 예멘의 주요 수출국a 및 품목      ($1000; 월평균)

수출품 fob/국가

사우디 아라비아b

UAEb

미국

프랑스

영국

1-6월

1-6월

1-6월

1-6월

1-12월

1-12월

1-12월

1-2월

1-12월

1-12월

1998

1999

1998

1999

1998

1999

1998

1999

1998

1999

대 예멘

19,333

18,667

14,591

15,129

14,808

13,125

13,167

10,000c

6,436

8,740

주:    aFigures from partner's trade accounts. Including goods shipped to foreign oil companies; no data

      are available for the former Soviet Union and Eastem bloc countries. bDOTS  estimates.

출처: EIU Country Report 1st quarter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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