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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예멘의 초기 국가개혁 전략

홍성민(종합경제사회연구원장)

 

. 국가개혁 당시의 일반적 상황

  1. 정치

  2. 경제

  3. 사회

  4. 국제정치


Ⅱ. 개혁추진 주체와 방향설정

  1. 1986년 남예멘 내란

  2. 개혁 추진의 주체

  3. 방향설정


Ⅲ. 개혁을 위한 분야별 제도적 장치 확립과정과 특징

  1. 정치

  2. 외교

  3. 경제

  4 사회


Ⅳ. 국가개혁의 주요수단

1. 유전개발

2. 아덴(Aden)항 개발


Ⅴ. 국가개혁상의 문제점 및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

1. 문제점

2.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


* 참고문헌

 

* 본 내용은 [사회주의 국가개혁 전략과 북한 - 개혁․개방 초기 단계 전략중심]. 2001. 서울: 통일부에 게재된 글이기에 인용은 동 부처의 규칙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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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소식

KMEA 소식

Ⅰ. 국가개혁 당시의 일반적 상황


  1. 정치

남예멘은 1839년 아덴(Aden)항에서 시작되고 1959년 영국지배하의 남아라비아연방(Federation of South Arabia) 형성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던 영국통치 이전 분리된 초기의 종족국가나 부족들을 합병하였다. 1967년 독립이후 남예멘은 막스주의에 기반을 두는 아랍민족주의(Arab Nationalism) 정권을 수립하였다. 주로 순니-샤피(Sunni-Shafi'i) 계열의 약 200만명의 남예멘 국민들은 알리 쌀림 알-바이드(Ali Salim al-Baidh) 대통령 치하에서 세속적이며, 관료주의적이고 경제적으로 계획경제체제속에서 살았다. 남예멘은 900만명의 인구중 약 40-45%가 주로 두 개의 북부연합1) 출신인 자이드-쉬아(Zaydi-Shi'i) 계열인 북예멘과는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북예멘의 정치문화는 1978년이후 알리 압둘라 쌀레(Ali Abdullah Saleh) 대통령체제하에서 가족연대, 전통주의 및 이슬람적인 종족가치 그리고 최소한의 정부간섭에 기반을 두는 체제에 집중돼 있었다. 남북예멘 국민들은 그들의 정부를 분리된 실체로 인식하였고, 서로 다른 정치적 의도로 발전시켰다. 따라서 통합에 대한 열망도 현존하는 통합된 정치적 공동체로부터 나올 수 없었고, 다른 근원 - 1960년대이후 아랍통합(Arab Unity)2)을 향한 대중의 움직임과 두차례(1972년 및 1979년)의 무력충돌이후 남북예멘간의 평온을 되찾기 위한 개념으로서의 통합수단 - 으로부터 도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대는 또한 현재의 인식을 판단해볼 때 모든 예멘인들이 행복하게 통합되었던 ‘상상적인 공동체’, 즉 신화적인 과거의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로부터 도출되었다(Joseph Kostiner, 1996; 1-2).

1986년 남예멘에서의 내란은 1967년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이래 남예멘이 직면하였던 가장 심각한 정치적 위기였다. 1986년 발생한 1․13 내란은 남예멘 체제를 와해시킬뻔한 정변이었지만, 다행히 그 정변이 남예멘의 경제와 군사력을 지탱해오던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부가 와해되기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소련의 긴급대처로 남예멘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1986년 1․13 내란의 와중에서 1986년초 출범한 하디다르 아부 바크르 알-아타스 정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었다. 1986년 1․13 내란은 당시 남예멘 온건파 지도자 알리 나세르 무함마드 대통령세력과 예멘사회당(YSP)을 다시 장악하게된 과격파 지도자 알-파타 이스마일 당서기장 세력간의 권력투쟁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의 실권을 잃게된 알리 나세르 무함마드 대통령이 이스마일을 비롯한 당정치국원들을 제거하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선제공격은 반대파 당간부 4명을 제거하였지만, 일부 군부의 반격으로 일주일간 포격전이 계속되고 양측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결국 알리 나세르 무함마드 대통령이 북예멘으로 망명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이스마일 계열의 사회당 정치국원 알-바이드(al-Baidh)이다. 무함마드 알리 나세르 대통령이 1986년 1월 13일 그의 정적들을 당정치국원 회의석상에서 체포 또는 사살하려던 기도는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규모의 유혈극으로 끝났다. 제거대상의 한 사람이었던 알-바이드는 도주하는 바람에 화를 면하였지만 50여명의 사회당 간부들을 포함한 최소 2,000명은 당쟁의 제물이 되었다. 내란 발발시 해외여행중이던 알-아타스 당시 수상은 소련을 거쳐 귀국, 국가원수 및 당서기장을 겸직한 자격으로 북예멘을 비롯한 주변국을 방문하여 선린관계 수립에 주력하였다. 내란상태에 빠진 남예멘에 대해서 북예멘이 공격을 가해올 징후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지만, 소련과 남예멘은 북예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당시 남예멘의 수뇌는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국내 질서를 어느 정도 수습한 다음에야 실력자 알-바이드는 알-아타스에 이어 북예멘의 쌀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임할 수 있었다(유지호, 1997; 202-204).

1986년 10월 사회당 전당대회에서 신임서기장으로 선임된 알-바이드(Al-Baidh)는 남예멘의 제1인자로 부상하였으며, 그의 개혁정책을 통해 예상보다 빨리 국가적 혼란으로부터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따라서 1989년 11월말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을 무렵 남예멘은 외교적 고립상태에서 탈피한 상황이었다.


2. 경제

남예멘 경제는 1986년 내란의 여파로 국가경제에 미친 막대한 손실과 소련 원조의 격감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그 추정 손실액은 남예멘 GNP의 10%에 달하는 1억 2천만달러에 달하였다. 남예멘은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하여 외국의 중장기 경제원조를 필요로 하였지만, 불안한 정권에 투자하려는 나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욱이 남예멘 주변 산유국들도 국제적인 경기침체와 유가의 하락, 그리고 이란-이라크 전쟁의 부담으로 남예멘을 도울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었다. 1983년 4억 8,640만 달러의 재정적자를 메울 수 있었던 해외 근로자들의 송금이 1988년에는 2억 5,950만 달러로 계속 떨어졌다.

소련은 1986년 남예멘의 내란을 수습하기 위한 긴급원조를 제공하였던 유일한 나라였으나, 국내의 정치,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여 대외원조를 대폭 삭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공산체제의 붕괴로 남예멘을 비롯한 후진국에 파견되었던 많은 동구권의 경제 및 군사 고문단도 철수하였다. 남예멘에 대한 소련의 원조도 1988년 4억달러에서 1989년는 1/8인 수준인 5천만달러로 격감하였다(위의책; 230).

<표 1>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인구 약 200만명으로 북예멘 인구의 1/4 정도 밖에 안되는 남예멘의 1988년도 외채가 20.7억달러(북예멘 29.4억달러), 무역적자가 5.1억달러(북예멘 8.6억달러)에 달함으로써 남예멘의 심각한 경제사정은 새로운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표 1> 통일이전 남·북예멘의 경제, 사회지표

구    분

남   예   멘

북   예   멘

국    명

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Yemen

Yemen Arab Republic

인    구

235만명(1986년)

927만명(1986년)

면    적

336,869 sq.km

200,000 sq.km

수    도

아덴(Aden)

싸나(Sana'a)

체    제

사회당의 중앙집권제

대통령중심의 입헌공화제

국가원수

Al-Baidh

Al-Saleh(현 대통령)

특    징

부족제도 소멸

부족제도 상존

G  N  P

13.9억달러(1988년)

42.2억달러(1987년

1인당GNP

420달러(1987년)

682달러(1988년)

외    채

20.7억달러(1988년)

29.4억달러(1988년)

무역적자

5.1억달러(1988년)

8.6억달러(1988년)

통    화

$1=YD0.46

$1=YR12

민    족

아랍인

아랍인

언    어

아랍어

아랍어

종    교

이슬람 

이슬람 

문 맹 율

30%

70%

기타

 

까트(Qat) 제한

까트(Qat)허용

 

1부1처제  

뇌물수수와 사회적 부패만연

자료: 東西經濟社會硏究院, 1995, [經濟와 社會], 제4호(통권19호), 46쪽.

주) 통일이후 YD1=YR26으로 통용되었으며, 암시장 활동이 성행하여             $1=YR29까지 통용됨.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남예멘측의 심각한 경제난은 남북예멘간 화해를 몰고 오지 않겠는가 하는 북예멘측의 기대도 분출되었다. 북예멘으로 망명한 전 남예멘대통령 알리 나세르 무함마드에 대한 미결문제가 남북관계 개선에 계속 걸림돌이 되었지만, 북예멘의 쌀레 대통령과 남예멘의 알-바이드 사회당 서기장간의 관계는 1987년부터 서서히 개선의 조짐을 보였다. 1986년 내란이후 남예멘의 새로운 지도체제가 주변 아랍산유국들에 대한 관계개선을 적극 모색한 것도 북예멘에 호감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북예멘과의 통합 가능성은 1988년에 이르러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남예멘 수뇌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선택으로 부상하였다(위의책; 230-231). 아무튼 1980년대 중반이후 개발된 석유부문에 대한 남북예멘간 상호 경제협력의 필요성 증대된 상황에서, 특히 남예멘의 해외원조 중단으로 인한 경제난 악화는 통일에 대한 개혁 프로그램을 착수하는데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사회

남예멘은 영국 통치의 영향으로 도시 지역은 근대화가 이루어진 반면, 내륙지역은 전통적인 부족제도가 상존하고 있었다. 남예멘인들은 196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때까지 약 130년에 걸치는 외국의 식민통치를 계속 받아왔기에 북부 예멘인들과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영국은 아덴항을 인도로 잇는 중요한 항구로 생각했기에 1839년 아덴을 점령한 이후 남예멘 지역은 어느 정도 외국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이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남부 예멘 및 서부 연안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 이슬람의 순니-샤피 계열은 쉬아-자이디 계열의 이맘에게 순종할 종교적 의무가 없었던 관계로 무역 및 상업 등 경제활동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안지역은 어느 정도 근대화가 이루어졌고, 내륙지역은 보수적인 부족제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산업시설의 국유화와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에 전통적 지배 계층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였다. 보수성이 강한 주민들의 반발로 다시 이슬람을 국교로 인정하고, 종교단체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이슬람 성직자들의 생활비는 국고보조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막시즘은 사회에 깊이 침투되지 못하였다.

예멘인들이 즐겨 씹는 까트(Qat)는 법으로 금지하였고, 일부지역에서 술과 유흥장을 허가하는 등 근대화의 일면도 보이고 있었다. 1974년 일부다처제를 금지한 가족법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최고인민회의 의원직 6석, 지방인민위원회 위원직 10%를 여성으로 임명하도록 의무화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진출도 확대하고 있었다. 남예멘은 특히 교육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문맹율이 1967년 97%에서 1985년 59%로 감소하였으며, 교육에 대한 열정도 매우 높았다.


4. 국제정치

남예멘에서 통일에 자극은 소련 고르바초프(Gorbachev)의 후원의 철회정책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었다. 비록 소련이 남아라비아에서 유리한 거점과 아덴에서 피보호자 정권을 지원을 포기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강경한 막스주의자(Marxist)들에 의해 승리되었지만, 이념적인 분열이 내재되어 있는 파벌주의(factionalism)의 가시적인 투쟁양상과 결과적으로 예멘인민민주공화국(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Yemen; PDRY)의 경제를 취약하게 만든 1986년 내란의 여파 때문에, 소련은 이미 PDRY 내부의 예측할 수 없는 상황뿐만 아니라 그곳에서의 만족스럽지 못한 사회, 경제적 개발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후 소련은 PDRY 전후 지도자들에게 정부의 기반을 해외로 확대함으로써 국내적인 고립을 종식시키고 주변의 아랍 산유국들과 관계를 개선하고, 심지어 경제에 자극을 주기 위하여 서구 국가들과도 관계를 개선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러한 소련의 충고는 단순한 소련 연방의 자원희소의 결과가 아니었다. 소련은 우정을 가지고 남예멘엑 신념을 제공하였고, 소련 자신의 개혁 프로그램을 반영하였다. 소련은 남예멘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따를 것을 권유하였고, 막스주의가 아닌 새로운 사회 경제적 및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추구할 것을 권유하였다3)

아덴 정부의 반응은 완전한 변화의 선택이었다. 비록 남예멘의 지도자들이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해 영향을 받은 1989년 여전히 모스코바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구 소련 방식을 파기하였다. 1989년 8월 PDRY 각료위원회는 과거 20년이상 남예멘 정권 건설과정에 범한 과오를 수정하기로 결정하였다. 1989년 초 알-아타스(Haydar Abu-Bakr ‘Attas) 남예멘 지도자는 ‘과거의 과오(過誤)는 대중들에게 가난한 경제와 삶의 조건을 가져다 주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남예멘은 예멘사회당(Yemeni Socialist Party; YSP)의 사무부총장 무함마드(Salim Salih Muhammad)를 승인한 국가실체, 즉 정부와 일치하지 않는 소련 및 동유럽 정당체제를 기계적으로 복사하고 있었다. 남예멘 외상 달리(‘Abdul al-‘Dhali)에 따르면, 아덴정부는 PDRY의 과거 강경 반서구정책에 관하여 대외관계의 잘못된 평가를 인정하였다. 그들이 종합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공식화함으로써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 PDRY 지도자들의 주된 목표가 되었다. 또한 동유럽에서 소련의 위성국가들이 계속해서 붕괴되었을 때 개혁은 소련의 위성국가 이미지를 떨어버리는 수단이 되었다.

1989-90년 동안 소련과 동유럽 군사고문단, 경제, 군사 및 기술고문들의 철수에 의해 이러한 결정들이 이루어졌다. 샤브와(Shabwa) 유전에서 자문단들을 제외하고 소련은 군사기지를 철수하였고, 동독의 자문단들과 함께 정보 및 비밀경찰조직을 해체하였다. 동유럽 블록의 실질적인 해체와 함께 남예멘은 새로운 선택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Joseph Kostiner; 6-7). 동구 및 소련의 개방화에 따른 국제질서의 변화는 남예멘의 개혁에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특히 남예멘 정부는 1988년 5월 헝가리에서 온건개혁파 그로스가 서기장으로 취임한 이래 동구권의 개방화, 민주화의 풍조가 확산되는 추세에 영향을 받았다. 이에 덧붙여 미소(美蘇)의 데탕트로 강대국의 영향력이 감소한 상황하에서 아랍연맹(Arab League)과 리비아를 비롯한 주변 아랍국들의 중재와 역할은 남예멘이 통일로 가는 길에 순풍(順風)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개혁추진 주체와 방향설정


1. 1986년 남예멘 내란

남예멘에서 통일을 위한 개혁은 1986년 1월 13일 발생한 시민전쟁(civil war)을 필두로 가속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 예멘 통일의 배경은 1986년 남예멘에서 발생한 내란 이전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 알리 나세르 무함마드(Ali Nasir Muhammad)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은 예멘사회당(Yemen Socialist Party; YSP)이 국제관계와 특히 남북관계에서 보다 실용적인 접근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무함마드 대통령은 북예멘의 쌀레 대통령과 개인적인 좋은 관계를 발전시켜온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사회당내의 강경파 비판세력들과 싸워야 했기에 남북관계의 진전은 잘 이루어질 수 없었다. 동시에 사우디 아라비아는 북예멘의 목을 죄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예멘위원회(Supreme Yemeni Council; SYC)를 설치하기로 한 1981년 협정은 1983년 및 1984년 두 차례의 회합에 의하여 결국 성사되었다. 1985년 1월 잠재적인 원유매장지역의 국경에서의 긴장은 쌀레 대통령이 이미 원유의 공동탐사의 가능성을 제시한 상태였기에 조속히 진정되었다. 1985년에는 또한 미래의 경제협력과 조정이 합의되었다. 1986년의 내란은 무함마드를 무너뜨리고 그의 실용․ 화해 정책을 반대하는 YSP내의 강경론자들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알리 나세르 무함마드 대통령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의 제거와 북예멘으로의 탈출은 남북화해 과정에 또다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러나 알-바이드(Ali Salim al-Baidh)를 정점으로 하는 아덴(Aden)에서의 새로운 지도체제는 궁극적인 통일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Gerd Nonneman, 1997; 63).

아무튼 1․13 내란의 와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알-바이드는 동년 10월 사회당 서기장으로 취임하였지만, 당시의 혼란 상황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를 그에게 가져다 주지 못했다. 알-바이드는 국내질서를 어느 정도 수습한후 북예멘과 통일협상에 임하게 되었다.


2. 개혁 추진의 주체

남예멘 지도층에 대해 정책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준 실례는 여러 분야에서 발견된다(위의책; 65-66). 1987년 이후 국내적으로 민주화에 관한 고르바초프(Gorbachev)의 표현은 점차 수사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명백한 혼돈이 존재했다. 1989년 2월까지 추방된 대통령의 추종자들중 단지 25명만이 감옥에 투옥돼 있었다. 민간 및 해외투자의 요구가 제기되었고,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알-바이드와 함께 남예멘형의 개혁(perestroika)이 착수되었다. 1989년 7월 이슬람 및 아랍전통, 자유 언론, 당내의 개선된 민주적 절차 그리고 경제의 일부 부문에 대한 자유화 등에 대한 과거보다 긍정적인 태도를 허락하는 개혁 프로그램이 발표되었다.

알리 쌀렘 알-바이드(Ali Salem al-Baidh)는 계급투쟁으로 알려진 남예멘의 동부지역 하드라마우트에서 야피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1950년대 영국치하의 수도 아덴으로 상경한 알-바이드는 아덴 노조활동에 참여하면서 반영(反英) 불법 독립운동 조직인 민족전선(National Front; NF)의 창립에 가담하였다. 그는 민족전선에서 영국 식민통치와 부족주의에 반대하는 좌파에 속하여 조직내 보수세력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다. 1969년 6월 알-샤비 정권을 타도한 헤담 중도파와 민족전선 좌파와 야합한 무혈혁명에 가담했던 알-바이드는 좌파 지도자의 일원으로 신정부에 입각, 그해 10월 외무장관으로 부임했다. 알-바이드는 비교적 모가 나지 않 동향출신 알-아타스 총리의 협조와 능숙한 사태수습에 힘입어 사회당 서기장에 취임하여 1980년대 후반 새 집단지도체제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부상하였다(위의책; 234-240).

외교정책에 있어서 화해주의 노선은 과거와 명백히 동일하였다. 내전직후 외상(外相)은 북예멘과 걸프 4개국을 방문하였고, 7월에는 오만 외상이 아덴을 방문하였다. 1년후 쿠웨이트에 대한 고위층의 방문도 이루어졌으며, 아덴정부는 계속하여 사우디를 포함한 주변국가들 모두와 관계개선을 회복하기 위한 제휴노력을 성사시켰다. 1988년 2월 이집트와 외교관계를 재개함으로써 아덴정부는 아랍강경대결전선(steadfastness front)을 떠났다. 1988년 10월 알-아타스(al-Attas) 대통령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대해서도 이미 언급하였다. 더 나아가 외상은 아덴정부는 ‘혁명수출’의 환상을 거절했다고 강조하였다.

이미 이루어진 사건과 특히 1987년 가을이후 축적된 전격적인 증거들을 고려하여, 북예멘의 지도층은 “아덴에서의 변화는 실질적이며, 최악의 불안한 위협은 끝났다”고  종결짓고 아덴정부를 정당화하였다. 실제로 (북예멘 출신의 간부) 압둘 화타 이스마일(Abdul Fattah Ismail)의 배후의 강경론자들은 이제 지도층에 도전하는 비교적 소수의 강경파들과 함께 실용주의자들로 돌아섰다. 더욱이 대부분의 국민들은 1986년 형태의 또 다른 동란(動亂)을 거의 모두가 바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남예멘 국가개혁은 예멘사회당(YSP)과 정부주도로 추진되었고, 그 배후에서 알-바이드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3. 방향설정

남예멘은 1986년 1․13 내란의 혼란에서 하루속히 안정을 되찾고 북예멘을 비롯한 주변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경제 및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특히 남예멘의 YSP는 구 소련의 개혁․개방정책과 동유럽의 붕괴라는 외부적 충격과 예상외로 급진전되는 남북관계는 통일에 대비한 노력의 일환으로 개혁의 방향을 전환하였다. 1989년초 남예멘 정부는 소련이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정책에 따라 남예멘에 개혁실시를 요구하면서 경제 및 군사원조 감축을 통보하자 서방 및 북예멘과의 경협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대대적인 개혁․개방정책을 단행하였다.




<표 2> 남예멘 개혁의 동기와 추진력

 

- 도표는 책자를 참조 하십시요-

 

 

<표 2>에 나타난 바와 같이, 남예멘 개혁의 동기는 경제난 악화였으며, 예멘사회당은 1980년대 중반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석유자원과 고대로부터 지리적 잇점을 갖고 있는 아덴(Aden)항의 개발을 개혁의 추진력, 즉 개혁수단으로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대내적으로는 1986년의 1․13 내란, 대외적으로는 동구 및 소련의 개방-개혁이 남예멘의 개혁에 불을 당기는 기폭제 역할을 한 남예멘 개혁의 추진요인이 되었다. 무엇 보다 중요한 점은 예멘사회당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이를 곧바로 통일과 직결시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혁의 출구를 통일과 연결지음으로써 개혁이후 나타날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니면 국력을 한곳으로 집중시킬 수 있는 구심점으로) 삼았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정치(精緻)되지 못한 남예멘의 개혁은 통일이후 권력안배 과정에서 불만이 노출되어 1994년 무력충돌을 야기시킨 내전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개혁을 위한 분야별 제도적 장치 확립과정과 특징


1. 정치

알-바이드 서기장은 대통령 윤번제, 기본 인권, 아랍과 이슬람 문화 및 종교에 대한 옳지 못한 입장의 시정 등을 포함하는 정치적 개혁4)을 제시하였다. 또한 1989년 10월 뉴만 총리는 복수 정당제가 민주주의의 요건이며, 경제개발에는 민간부문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언명하였다. 남예멘은 1989년 12월 다당제에 의한 정당조직을 허용하였고, 1990년 2월 남북 합동회의에서 관세, 과세, 금융, 노동조합, 여행 및 외국인 거주규정 등 46개 법률안을 처리하여 통일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한편, 1990년 3월 비밀경찰과 군을 통일예멘군으로 재편한다고 발표하였다.

남예멘은 1989년 12월 불법화되었던 나세르 통합조직(Nasserist Unionist Organization)의 정당등록을 승인함으로써 예멘사회당(YSP)의 1당 독점시대를 끝내고 복수정당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남북예멘 전역에 당원과 조직망을 갖춘 첫 정당인 예멘통일당(Yemen Unity Party)의 창당도 허용되었다. 외국간행물에 대한 판매금지가 해제되고 여러 종류의 신문과 잡지 발행도 허가되었다. 그리고 아덴정부는 과학적 사회주의원(The Institute of Scientific Socialism)의 명칭을 사회과학원으로 개명함과 동시에 1, 2대 대통령 알-샤비(1967-1969)와 살림 루바이 알리(1969-1978)의 명예도 회복시켜 주었고, 아울러 해외여행의 권리도 부여하게 되었다. 입후보자의 자유경선을 통한 지방의회 선거를 처음으로 실시하여, 상당수의 비사회당 소속의 진출문호를 열어 놓았다(유지호; 261-262).

아덴정부의 갑작스러운 각종 통제의 해제조치는 물가를 자극하여 인플레이션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과 같은 예상밖의 부작용을 수반하였다. 아덴 정유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발전소, 은행, 섬유 및 수산업 분야로 확산되었다. 근로자들의 생활비 30% 인상요구에 대하여 정부는 타협함으로써 파업은 일단 수습되었다. 동유럽에 시민의 반대운동과 시위로 달성되었던 정치, 경제적 개혁이 남예멘에서는 사회당과 정부 주도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시장경제체제와 보다 공개된 사회,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는 북예멘과의 통일협상에서 알-바이드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남예멘이 처한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남예멘의 개혁은 초기에 있어서는 통일에 대비한 정지작업이라기 보다는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알-바이드의 정치개혁의 가치는 그 내용보다는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와해되기전에 단행된 타이밍에 있었다(위의책; 262-263).


2. 외교

1․13 사태 와중에서 1986년초 출범한 하디다르 아부 바크르 알-아타스 정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그는 혼란기의 와중에서 축출당한 전임자의 국가원수직, 즉 행정수반 겸 당서기장직을 그대로 이어받게 된 것을 기화로 북예멘, 사우디 아라비아 등 주변국가들과의 대외관계 개선에 어느 정도 재량권을 갖고 주력할 수 있었다. 한편 그해 10월 사회당 전당대회에 신임 당서기장으로 선임된 알-바이드는 동구 공산정권의 붕괴과정을 주시한 나머지 정부주도의 경제 및 정치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남예멘의 제1인자로 부상한 알-바이드는 그의 개혁정책을 통해 예상했던 것 보다 빨리 국가적 혼란상태로부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86년 1․13 내란 발발시 해외 여행중이던 알-아타스 당시 수상은 소련을 거쳐 귀국, 국가원수 및 당서기장직을 겸직한 자격으로 북예멘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방문하여 선린관계 수립에 주력하였다. 남예멘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알-아타스는 사우디 아라비아를 방문하였다. 그는 사우디 아라비아 왕 파드에게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한 남예멘의 혁명선동을 중지하겠다고 다짐하였고, 사우디 아라비아로부터 남예멘에 대한 경제원조를 약속 받았다. 1989년 3월 아덴-리야드간에 공동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양국간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이웃국가 오만과도 화해관계가 성립되어 알-아타스는 남예멘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오만(Oman)의 수도 무스카트를 방문하여 국경선 획정을 포함한 수개의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와 함께 다른 걸프 연안 산유국들로부터도 경제원조를 제의 받았다. 또한 1․13 내란 당시 알리 나세르 무함마드편에 섰던 이디오피아와 이스마일 정권의 1977년 소말리아 내전 개입으로 소원해졌던 소말리아와의 관계도 수복되었다. 더 나아가 남예멘은 온건 이미지 부각을 위해 모로코 왕국 및 이집트와의 외교관계도 재개하였다. 이라크의 사담 훗세인은 바그다드를 방문중인 알-아타스의 요청에 부응하여 아덴 정유공장의 이라크 원유 정유량 배당을 늘려 주기로 합의하였다. 남예멘의 압둘 아지즈 알-달리(Abdul Aziz al-Dhali) 외무장관이 1989년 처음으로 브뤼셀의 유럽공동체 본부를 찾아갔고, 영국의 각료가 1967년 독립이후 처음으로 아덴을 방문하였다. 알-아타스는 미국과도 수교가 교섭중이라고 밝혔다. 국내 질서를 어느 정도 수습한 후, 실력자 알-바이드는 알-아타스에 이어 북예멘의 쌀레 대통령과 정산회담에 임하였다(위의책; 258-259).

3. 경제

남예멘 경제는 20여년간에 걸친 이념을 앞세워 통제경제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1980년대 후반 소련의 대 남예멘 경제원조가 삭감되는 바람에 재정적자가 가중되어 남예멘 경제는 사실상 붕괴직전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농수산개혁은 오히려 농수산 분야의 생산량 감소현상을 초래했고, 과거 세계적인 중계무역항으로 유명했던 아덴항은 한산한 항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20년간 공공부문의 진흥에 주력하였던 사회주의 경제정책에도 불구하고 공업생산량은 현격히 감소하여 국민총생산에서 민간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50%선을 상회하였고, 해외근로자들의 송금액은 정부예산의 절반에 달했다. 남예멘 경제의 어려움은 북예멘에 비교해 석유부문에서 더욱 심하였다. 1984년 처음으로 미국회사에 의해 발견, 개발된 마립유전은 5년후 일량 20만배럴을 생산하는 규모로 성장하였지만, 거의 같은 시기 소련에 의해 개발된 남예멘의 샤브와 유전은 통일직전까지 5억달러 이상 외자가 투입되었는데도 소량의 원유밖에 생산하지 못했다(위의책; 259-260).

고르바초프 체제하의 소련은 일부 군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냉전후 아덴의 군사기지가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소련의 대 남예멘 원조가 1988년 4억달러에서 1989년에는 거의 1/8 수준인 5천만달러로 삭감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실질적으로 중단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동구의 공산정권도 1989년 와해되기 시작했다. 동구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공산정권에 대한 시민의 반대운동이 주축이 되어 추진되었지만, 남예멘에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부주도로 이루어졌다. 사회당은 그해 7월초 6개 실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실무위원회로 하여금 당의 역할, 국가와 국민간의 관계, 경제, 행정 및 문화시책 등 향후 변혁을 요하는 일련의 정책과제를 검토케하여 개혁방안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유연성을 결여한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누적된 각계 각층의 불만과 비판을 최대한 수렴하고 생존전략을 모색하는 노력이었다. 그 결과 아덴정부는 심각한 주택난 해소대책으로서 판매나 임대용 개인주택의 건축에 대한 규제를 풀고 공장과 호텔의 개인소유를 허용하였다. 아덴 시민과 해외거주 교포들의 자본투자를 권장하기 위해 세금과 관세를 감면해주기로 하였다. 외국인투자자들의 과실 송금에 대한 통제도 완화하였다. 남예멘은 석유개발, 관광시설, 아덴항 현대화를 특별 투자유치 권장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이밖에도 아덴정부는 1969년 국유화되었던 은행의 주식 소유자들에게 배상해주었고, 몰수했던 망명자들의 자산을 원상 회복시키겠다는 방침을 통일직전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방대한 공산당 관료조직을 해체하고 선박조달을 포함한 일체의 정부 전매사업을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위의책; 260-261).

남예멘은 자유시장제도에 기반을 두고 이미 1986년이후 대부분의 통제와 제한을 포기하는 경제정책에 커다란 비중을 두어 왔다. 외환과 수입규제가 완화되었으며, 특히 관세와 상업 및 산업세의 면세뿐만 아니라 해외 이윤의 송금과 관련하여 새로운 투자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법이 제정되었다. 수출지향 프로젝트에 우선 순위가 주어졌으며, 몰수 재산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상업자산이 그들 원래의 소유자들에게 되돌아갔다. 또한 [아덴자유무역지대]와 관련된 법안이 국적상실자와 아랍 및 외국의 투자자들을 유입하기 위하여 새롭게 제정되었다(홍성민, 1991(2)). 1989년초 남예멘 정부는 소련이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정책에 따라 남예멘에 개혁실시를 요구하면서 경제 및 군사원조 감축을 통보하자 서방 및 북예멘과의 경협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대대적인 개혁․개방조치를 단행하였다.


4. 사회

남예멘은 영국 통치의 영향으로 도시 지역은 근대화가 이루어진 반면, 내륙지역은 전통적인 부족제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산업시설의 국유화와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에 전통적 지배계층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기도 하였지만, 보수성이 강한 주민들의 반발 때문에 이슬람을 국교로 다시 인정하였다. 종교단체의 재산은 국유화하고 승려들의 생활비는 국고에서 보조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막시즘은 남예멘 사회에 깊이 침투되지 못하였다. 까트는 법으로 금지되었고, 일부지역에서 술과 유흥장은 허가되었다. 1974년 일부다처제를 금지한 가족법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의원직 6석, 지방인민위원회 위원직 10%를 여성으로 임명하도록 의무화하였으며, 교육에 대한 강조로 문맹율이 1967년 97%에서 1985년 59%로 감소하게 되었다.

사회부문의 개혁조치에 대한 자료의 입수가 곤란하여 1989년 11월 30일 ‘아덴정상회담 합의서’의 내용에 따라 분석하고자 하였다. 예멘의 사회통합에 관한 내용은 1991년 헌법에서는 제18조-제21조에 명시되어 있었으나, 1994년 개정 헌법에서는 제3장 사회, 문화 기조(제28조-34조)의 내용에 언급되어 있다. 그 주요 내용은 모든 봉사행위는 신성한 일로서 사회적 통합과 규율의 원칙하에서 수행되어야 한다(제28조). 국가는 사회적 공동협력을 토대로 자연재해 및 공동의 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제33조). 국가와 사회 구성원은 고대 유산을 보호해야 한다(제34조)는 것 등이다.

또한 국민의 기본권과 의무는 제40조-59조에 명시되고 있으며, 모든 국민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영역에서의 참정권을 가진다. 정부는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하며(제41조), 특히 예배장소나 과학연구장소는 신성시되어야 하며, 그 신성함은 법률에 의해 저촉되지 않는 한 모독되어서는 안 되며(제51조), 첫째로 모든 국민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정치적, 직업상 또는 노동조합에서의 협력 권리를 지니며, 헌법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과학, 문화, 사회 분야에서의 단체를 결성할 권리도 지니며, 둘째로 정부는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고 국민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하고 각종 연구소 및 정치, 과학, 문화 사회기관 등에 대해서도 전적인 자유를 부여하여야 한다(제57조)데에 합의하였다.

정치적 일괄타결방식으로 성립된 사회, 문화 분야의 통합은 근본적으로 동질성을 유지해온 단일민족과 단일언어인 아랍어)라는 변수 때문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지 않았지만, 세부적인 분야에서는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이질적인 생활방식 때문에 통일 후유증은 가지고 있다.

통일이후 북예멘 지역에서 성행하는 까트(Qat)의 이용은 계속 정치, 사회적인 해악요인(가계수입의 30-40%를 지출)이 되고 있다. 까트가 고소득 작물인 점을 감안하여 까트의 경작면적이 점차 증가하여 농업분야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예멘정부는 이러한 해악을 줄이기 위해 금년 공무원들의 까트 이용을 전면 금지하였다.

통일이후 수도 싸나 지역으로 모여든 정부기관과 해외 취업자, 특히 100만명에 달하는 사우디 근로자들의 귀국 등으로 인구가 급증하여 전력, 식수 및 주택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부족제도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사법권을 갖고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는 부족장들은 권력안배에도 커다란 영향력 행사하고 있다. 예멘통일이 이슬람을 기조로 이루어졌기에, 남예멘의 지식인과 높은 교육수준의 여성들은 노동조합의 결성과 부의 합리적 분배를 요구하고 있다.


Ⅳ. 국가개혁의 주요수단


1. 유전개발

남예멘의 석유탐사 노력은 북예멘보다 10년이상 앞섰지만, 1986년까지 커다란 진전을 보지 못했다. 남예멘에서 석유가 처음 발견된 것은 1982년으로 남부 해안지역에서 이태리 석유회사 AGIP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생산으로 까지는 연결되지 못했다. 1986년 12월 소련의 국영 석유회사 테크노엑스포트가 소련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에 힘입어 북예멘의 마립 유전 부근의 국경이남 동부 샤브와(Shabwa) 지역의 에야드라는 곳에서 발견한 석유갱에서 원유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에야드 유전외에도 남예멘의 두 지역에서도 유전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샤브와 지역의 원유매장량은 당시 북예멘 매장량의 3배에 해당하는 30억배럴로 추정되었고, 남예멘-소련 석유개발 협정에 따라 샤브와 지대 3,600km2에 대한 배타적인 석유개발권은 소련회사에게 부여되엇다. 그러나 샤브와 지대 유전에서 생산된 원유는 1987년 파이프라인이 부설되지 못했던 탓으로 육로로 아덴 정유소에 하루 평균 5,000-10,000만 배럴 정도 밖에 수송할 수 없었다. 유전에서 연안 항구까지의 수송가능량 하루 평균 10만배럴의 230km2 파이프 공사 지연으로 인한 수송량의 제약조건외에도 소련의 낙후된 채굴기술과 부족한 자본문제가 겹쳐서 생산량 증가에 대한 억제요인으로 작용하였다(유지호; 225).

남예멘은 1970년대 이후 석유산업에 커다란 우선 순위를 두고 석유회사들에 대해서 많은 호혜조건을 주고 있다. 최초로 채굴권 협정이 동독 및 소련과 이루어졌다. 1975년 캐나다 회사가 채굴권을 양도받았고, 예멘과 알제리 합작회사가 하드라마우트(Hadramaut)에서 1976년 탐사를 시작하였다. 1977에는 이태리의 ENI계열의 AGIP사(社)가 근해의 석유채굴권협정을 체결하여 사마하(Samaha) 근해에서 채굴을 시작하였다. 이밖에도 미국계 Hunt Oil사(社)와 브라질계 Braspetro사(社)도 1982년 채굴권을 양도받았다. 1982년 AGIP은 일량 3,000 바렐 정도의 오프쇼어(offshore) 매장량을 발견하였고, 동년 5,000 sq km에 대한 아덴만(灣)의 오프쇼어 채굴권을 확대하기 위한 협정을 남예멘 정부와 체결하였다. 1983년 쿠웨이트(Kuwaiti Independent Petroleum Group)의 민간단체도 샤브와 지역의 원유 탐사를 위한 ‘생산분할협정’을 남예멘 정부와 체결하였다. 더욱이 남예멘정부는 외국계 석유회사를 유치할 목적으로 1984년 탐사를 위한 4곳의 신규 채굴권 지역(Aden, Abyan, Balhaf, North Hadhramaut, Rub al-Khali 및 Socotra 해안)을 발표하였다. 또한 새로운 석유 수입을 고려하여 정부는 1985년 2월 ‘에너지 및 광물성(省)’을 신설하였다.

AGIP사(社)가 잠재적인 상업적 규모의 매장량을 갖고 있는 내륙의 채굴권을 1983년 최초로 양도받아 1987년 이 나라 최초로 샤브와(Shabwah)에서 생산을 개시하였다. 샤브와에서 생산되는 원유는 5,000-10,000 b/d 정도가 육로를 통하여 아덴으로 수송되어 그곳에서 정제되었다. 한편 1989년 1월에는 남예멘의 샤브와와 북예멘의 마립/알-자우흐 유전이 국경선을 따라 2,200 평방 km에 달하는 석유를 탐사 및 개발하기 위하여 양국 정부 합작으로 예멘 석유 및 광물자원투자회사, 즉 YCIOMR이 설립되었다. 사우디 아라비아도 사우디 유전으로 파이프라인으로 연결하기 위하여 하드라마우트(Hadhramaut) 해변에 석유기지건설을 위한 자금 제공에 합의하였다.

예멘의 석유개발은 크게 나누어 네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마립(Marib) 지역으로 1987년 12월부터 생산을 하고 있으며, 1991연말 생산량은 19만 b/d에 달하였다. 가채매장량은 약 10억 바렐로서 향후 15년간 생산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도 24.5%의 지분율을 갖고 지분율 75.5%를 소유하고 있는 HUNT EXXON사(社)와 함께 이곳의 석유개발에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