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E 중동 지역연구  Area Studies of the Middl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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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평화의 중재자 쑬탄 까부스 Sultan Qaboos of Oman

- A Mediator as the Middle East Peace Process -

His Majesty, Sultan Qaboos bin Said

Photography by http://www.omanet.com

                          By Dr. Seong Min Hong (KIME)


                              홍성민(중동경제연구소장)

쑬탄 까부스의 오만

비교적 소규모의 원유매장량을 갖고 있는 나라가 오만이지만, 호르무즈 해협을 마주하는 전략적 위치 때문에 오만(Oman)은 국제석유시장에서는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비OPEC 산유국이라는 특성과 원유매장량과 인구가 적다는 의미 때문에 우리에게는 잘 알려졌지만, 낯선 국가가 오만이다. 한국은 1974년 3월 28일 공식 수교한 이후, 우호관계를 돈독히 해오고 있다. 

1970년 왕위를 계승한 쑬탄 까부스(Sultan Qaboos)는 1995년 향후 25년을 위한 전략적 비전을 제시했으며, 그것이 바로 'Oman 2020'이다. 이 계획은 현재 1인당 소득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며, 통화가치가 안정되는 2020년까지 소득수준을 두배로 향상시킨다는 데 주목적을 두고 있다. 오만 정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1) 과거 25년간 업적 달성의 유지, 2) 인간자원의 개발, 국내 기술의 향상, 그리고 기술혁신 및 관리 능력의 향상, 3) 안정적인 거시경제 구조의 창출, 4) 효과적이고 경쟁적인 민간부문의 육성 및 장려, 5) 경제의 다양화 실현을 위한 환경조성 및 생활수준의 향상 등에 정책의 주안점을 두고 있다.

'Oman 2020'은 쑬탄 까부스의 모든 통치이념이 반영된 종합적인 경제정책이라 할 수 있다. 쑬탄 까부스는 특히 '국민과의 대화'를 통한 직접 민주방식의 통치를 신봉하며, 성장과 환경 보존의 균형을 찾는 환경주의자이며, 국내 및 국제 분쟁의 해결에 있어서는 반드시 '대화를 통한 중재'방식을 선호하는 국제적 중재주의자이며, 중동평화 정착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평화주의자이다.


쑬탄 까부스 생애

쑬탄 까부스 빈 사이드(His Majesty Sultan Qaboos bin Said)는 1940년 12월 18일 도하(Dhofar) 령(領) 쌀랄라(Salalah)에서 태어났다. 그는 1744년 알-사이드(Al-Said) 가문(家門)의 창시자 이맘 아흐메드 빈 사이드(Imam Ahmed bin Said)의 8번째 직계 후손이다. 이맘 아흐메드 빈 사이드는 오늘날에도 오만에서 여전히 잘 알려진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내전(內戰)의 와중에 국가를 통일한 지도자이다.

쑬탄 까부스는 어린 시절 유능한 가정교사로부터 이슬람의 가르침과 아랍어를 배웠고, 후에 쌀랄라에 있는 사우디 사립학교에 진학하였다. 1958년 쑬탄 까부스의 아버지 쑬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Sultan Said bin Taimur)는 그의 공부를 심화시키기 위하여 영국의 수홀크(Suffolk)에 있는 사립학교로 그를 보냈다. 1960년 그는 영국의 산드허스트(Sandhurst)에 있는 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Academy)에 진학하였다. 2년후 그는 2등 중위(lieutenant)로 졸업하였다. 졸업후 그는 독일에 주둔하는 영국 대대(大隊)에 입대하였으며, 그의 일상적인 군복무이외에 참모막료(General Staff)와 함께 군사훈련을 받았다. 독일에서 6개월간 군복무를 마친 후 그는 영국으로 되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경영학과 지방정부에 관한 수업을 받았고, 그후 국제적 감각을 익히기 위해 3개월에 걸친 수학여행을 하였다. 1964년 쑬탄 까부스는 고향으로 돌아와 쌀랄라에 정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이슬람, 아랍어 그리고 오만의 역사 및 문화에 관한 공부에 보냈다.

1970년 7월 23일 그의 아버지 쑬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로부터 정권을 인계 받았을 때, 쑬탄 까부스는 자신에게 운명지어진 과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무스카트(Muscat)에 도착하였다. 동년 8월 9일 쑬탄 까부스는 국민과 국가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는 최초의 대중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에서 쑬탄 까부스는 "국가는 새로운 국기(國旗)를 가질 것이며, 더 이상 '무스카트와 오만'(Muscat and Oman)이라고 불려지지 않고, 통일된 '오만 쑬탄국'(The Sultanate of Oman)으로 불려질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단체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조국을 떠났던 오만인들이 조국 앞에 놓여진 도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되었다.

수많은 세계지도자와 정치가들은 종종 쑬탄 까부스의 정치적 수완을 칭찬하였다: 조국과 국민에 대한 헌신; 진보와 개발을 달성하기 위한 참여와 확고부동한 결심; 평화와 인권을 위한 세계적 차원의 역할과 그의 업적 등. 군사 퍼레이드에서 청년 장교들에게 행한 그의 연설에서 그 자신의 군사훈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내가 받은 훈련의 가치는 앞으로도 나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은 나는 잘 안다. 나는 훈련이 단지 다른 사람에게 부과한 어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무엇보다도 훈련은 어떤 사람이 가치 있는 지도자가 되려할 때 그 자신에게 응용할 수 있는 것임을 배웠다. 나는 또한 봉사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다: 봉사는 주는 것이지 받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봉사는 팀(team)이지 혼자서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의무란 책임과 함께 오는 것도 배웠다".

그가 왕좌(王座)를 승계하기전 오만의 석유 수입(收入)은 아라비아 반도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적은 편이었다. 비록 석유수입이 국가 전체의 국민소득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소비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오만은 근대적 생활의 기반도 없이 지극히 가난한 국가로 살고 있었다. 쑬탄 까부스가 왕좌를 승계 했을 때, 오만에는 단지 3개의 학교가 있었을 뿐, 병원이나 전력, 도로는 없었다. 더욱이 군사적 상황이 파경이 이른 도하에서는 군사적 반란이 있었다.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쑬탄 까부스는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하여 주된 개발계획에 즉시 착수하였다. 아울러 그는 도하에서의 심각한 도전에 응징하기 위하여 오만 군대의 현대화에 즉시 착수하였다. 해외 오만인들의 귀국 초청과 오만 르네상스에의 참여, 그리고 폭도들에 대한 대사면(大赦免)은 폭동지원을 중단시켰고, 쑬탄 까부스는 드디어 1975년 12월 11일 최후 승리를 발표할 수 있었다.

도하에서 평화가 이루어지자 쑬탄 까부스는 르네상스의 길고도 험난한 길에 있는 오만을 이끌었다. 다음해 그는 제1차 5개년 개발계획(Five Year Development Plan)에 착수함으로써 연이은 변화를 추구하였고, 근대국가가 되기 위한 여정(旅程)에 오르게 되었다. 집권초기부터 쑬탄 까부스는 '국민의 참여는 국가개발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기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1981년 국가자문위원회(State Consultative Council)의 설치에 관한 칙령을 발표하였고, 이 기구는 1991년 책임과 위원 모두를 '마즐리스 앗슈라'(Majlis Ash'ura)에서 포괄하게 되었다.

오만과 걸프지역에서는 처음으로 2명의 여성 대표가 앗슈라 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 위원회는 경제 및 사회 프로젝트의 입안과 인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국민에 대한 자문 역시 쑬탄 까부스의 쑬탄국 전체에 대한 연례적인 국민과의 만남(meet-the-people) 행사를 통하여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방문 여행은 오만인들에게 쑬탄 까부스 국왕에 대한 관심의 목소리를 직접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며, 그가 우선 그들의 욕구를 확인할 수 있으며 행동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증해준다.

왕위를 계승하고 해가 거듭됨에 따라 쑬탄 까부스는 세계적인 관심사를 평화와 인권문제에 두게되었다. 이러한 그의 관심에 대해 국제적 위기를 중재해달라는 일련의 요청이 쇄도하였고, 쑬탄 까부스는 이 과정에서 현명한 자문과 중재로 일을 성사시킴으로써 그의 정치적 수완(手腕)과 인권에 대한 이해에 대해 커다란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아무튼 1996년 탁월한 국제적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쑬탄 까부스의 이름이 '노벨 평화상'(Nobel Peace Prize) 후보에 제시되기도 하였다. 쑬탄 까부스가 그 자신의 국가를 '전체 중동 및 세계를 위한 개발과 정의의 모델'로 만들었고, 평화를 위한 그의 업적이 천거(薦擧)의 이유였다. 이러한 견해는 세계 문제에 대해 광범위한 영향력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알-사이드(Al-Said) 가문의 후예(後裔)

이슬람이전의 오만에 관한 기록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최근 고고학적 발견과 연구는 오만의 고대 문명이 최소한 5000년전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오만은 수메르인의 서판(書板)에 언급된 BC 3000년 칼도아 무역의 우르(Ur)같은 도시로 인용되는 '마간'(Magan)의 땅이다. 수메르인의 서판에는 구리(銅)의 원천으로 '마간'이라는 국가를 언급하고 있으며, 이는 오만을 일컫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소하르(Sohar) 부근의 유적지 유물은 BC 2000년까지 구리광산과 용광로 산업이 잘 발달돼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고대 종교와 사회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도하(Dofar)에서 발견된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에 쓰던 유향(乳香)은 초기 상업 공동체의 존재를 입증해준다. 이밖에도 오만에는 고대부터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던 정착민들이 거주했다는 증거가 있다.

오만 민족은 남아라비아에서 이주한 까흐탄(Qahtan)계와 북부에서 이주한 니자르(Nizar)계의 두 인종이 있다. 오만은 남아라비아의 최초 침입으로부터 AD 1-2세기경 예멘의 마립(Marib) 댐이 완전히 붕괴된 후 말리크 이븐 화흐만(Malik ibn Fahman)의 통치에 이르기까지의 전통은 남아라비아의 영향을 받았다.

AD 630년경 오만은 아미르 이븐 알-아쓰(Amir ibn al-As)에 의해 이슬람으로 전향한 최초 국가중 하나가 되었다. 알-아즈드(al-Azd) 부족의 오만인들은 이슬람 초창기에 이라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이슬람에서 칼리프체제(Caliphate)는 세습되거나 어느 한 가문(家門)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바디(ibadi) 교의(敎義)를 받아들였으며, 8세기에 오만에서 독립적인 이맘제도(Imamate)를 수립하였다. 그후 칼리프제국, 이란, 모굴 및 다른 여러 민족에 의한 침입이 때때로 있기는 하였지만, 오만은 대부분 독립을 유지하였다.

바스코 드 가마(Vasco de Gama)가 인도로 가는 희망봉 항로를 발견한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16세기초 그때까지 아랍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무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1세기반동안 무스카트를 점령하였다. 1650년 쑬탄 빈 사이프 알-야루비(Sultan bin Saif al-Yarubi)에 의해 포르투갈인들이 무스카트로부터 축출된 이후, 페르시아가 점령한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다른 외세의 오만 점령은 없었다. 야루바(Ya'aruba) 이맘은 국가를 통일하고 번영을 이룩함으로써 오만의 국내외적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니즈와(Nizwa) 요새와 자브린(Jabrin) 왕궁 등 최근 복원된 수많은 인상적인 성(城)과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야루바왕 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1744년 탁월한 개성과 용기를 지닌 아흐메드 빈 사이드(Ahmed bin Said)가 이맘에 선출되었다. 1718년 후계자 선출을 놓고 발생한 내전이 끝난 후, 그는 파벌을 와해시키는데 고충을 겪기도 하였지만, 오만 해군을 창설하여 해적에 대해 원정대를 보냈고, 바쓰라로부터 페르시아인들을 축출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그후 오만에는 쇠퇴기가 이어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기간동안 세계 교역활동가운데 오만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미하였다. 실제로 오만은 현재의 국왕 쑬탄 까부스(Sultan Qaboos)가 권력을 장악한 1970년까지 세계의 오지(奧地)로서 고립되어 있었다. 쑬탄 까부스는 국명을 오만 쑬탄국(Sultanate of Oman)으로 고치고, 국가 발전계획에 착수함과 동시에 미국과 서방 국가들과도 친분을 돈독히 하였다. 쑬탄 까부스의 통치는 오만의 역사적인 영광을 재현하고 발전, 번영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진보의 새로운 장(章)을 열었다.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쑬탄 까부스의 업적

쑬탄 까부스의 최대 관심사는 모든 국민을 위한 현대적 보건 서비스와 교육제도의 마련이었다. 특히 교육에 관한 최고의 업적은 1986년 개교한 장엄한 쑬탄까부스대학교(Sultan Qaboos University)의 설립이다. 이 대학은 현재 공공 및 민간부문에 대한 국제적 수준의 자질을 갖춘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다. 강력한 오만 산업에 대한 그의 관심과 함께 쑬탄 까부스는 환경문제에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최근에 행한 연설에서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진보에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는 강력한 산업은 동시에 환경을 보존해야한고 하였다. 이를 반영하듯 아랍세계에서 최초로 환경성(Ministry of Environment)을 설치한 국가는 쑬탄 까부스의 오만이다.

오랜 오만의 문화와 전통의 유지 또한 쑬탄 까부스의 최우선 관심사중 하나이다. 그는 쑬탄국의 수많은 역사적 건물의 복원과 과거 세대로부터 전승된 기술을 유지하기 위해 장인(匠人)들을 장려하는데도 각별한 개인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 국제적 수준에서도 쑬탄 까부스는 수많은 국가로부터 탁월한 과학자들을 데려온 UNESCO의 역사적 항해(航海), 즉 '문화교류에서 대화의 길'(Routes of Dialogue among Cultures)을 위해 국왕의 요트, 즉 훌크 앗-쌀라마(Fulk A'Salamah)를 제공하였다.

1970년 쑬탄 까부스가 왕위를 계승하던 해에 오만은 외부세계와는 실질적으로 공식적인 관계가 없었다. 오만이 세계에서 주권을 갖기 위해서 이를 개선하는 것이 핵심적인 사안이었다. 그 시도로서 쑬탄 까부스의 외교정책은 정치적 색채에 관계없이 선린관계 및 국내문제에 상호 불간섭에 기초하여 모든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이라고 공표 하였다. 현재 오만은 총 125개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으며, 한국과는 1974년 3월 28일 공식적인 수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홍성민. 1997. “오만 정치·경제적 상황과 석유산업.” [석유]. 가을호. 통권 73호. 한국석유개발공사.

Arab Net: Oman. http://www.arab.net/oman/oman_contents.html.

EUROPA. 1990. The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1991. London: EUROPA Publications Limited.

Ministry of Information. 1998. Oman 98/99. Muscat: Mazoon Printing Press.

Ministry of Information. 1996. Oman 96. Muscat: International Printing Press.

Ministry of Information. 1995. The Royal Speeches of H. M. Sultan Qaboos bin Said 1970-1995. Muscat: Oman Newspaper House.

Oman. http://hopia.net/kime/nation/gen/frk_nat11_oma.htm.

 

 

* 본 내용은 술탄 카부스-오만 부흥의 아버지.” [20세기 중동을 움직인 50인] 2000. 서울: 가람기획에 게재된 글이기에 인용은 동 출판사의 규칙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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