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E 중동 지역연구  Area Studies of the Middle East

 Korea Institute of the Mideast Econom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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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압둘라 쌀레 - 예멘 통일의 주역

Alī Abdullāh Saleh Al Ahmar - The Leader of Yemeni Unification

Alī Abdullāh Saleh Al Ahmar, Yemeni President

이상봉 교수 작품, 1998

    By Dr. Seong Min Hong(KIME)


    홍성민(중동경제연구소장)

쌀레 대통령은 예멘의 역사적인 영광을 되살리기 위한 민족적 혁명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쳐 왔다. 그러한 위대한 역사적인 노력의 결과 그는 1990년 5월 22일 예멘 통일을 선언함으로써 다당제와 표현의 자유, 자유 시장경제 및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인권 존중을 바탕으로 재건과 발전을 향하여 중요한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는 반란과 재분단을 도모하는 세력들에 과감히 맞서 투쟁했다. 그리하여 바로 지난 1997년 4월 27일 예멘 국민들은 통일을 이룩한 지 두 번째로 새 의회 선거라는 민주주의를 향한 시험을 치러 민주주의의 기초를 더욱 굳건히 하였으며 법치국가의 개념을 뿌리내리게 되었다.

선거 결과 예멘 집권당인 국민회의가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적극적인 개혁 실시 덕분에 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국제 감시단도 이번 선거가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였음을 인정하고 있다.

현재에는 정치적인 안정과 대통령의 지도하에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고 삶을 윤택하게 하며 경제성장을 실현하고자, 석유와 가스 및 수산업 자원을 포함한 국가 자원과 에너지 개발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멘 정부는 모든 국내 및 해외 투자자들에게 각종 다양한 혜택과 편의를 제공하는 투자 법을 공포하였다. 현재 예멘에는 30여 개의 전세계 유수 회사들이 예멘의 석유탐사 및 채굴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프랑스, 미국, 한국 합작회사와 예멘 정부간에 액화 천연가스 LNG 채굴 협정이 체결되기도 했다. 석유나 가스분야 뿐만이 아니라 건설이나 농업, 관광 및 기타 다른 분야에서도 투자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듯이, 예멘은 수 천년에 걸친 고대 문명과 아름답고 웅장한 고대 건축양식으로 유명한 나라이다. 한편 아덴은 자유무역지대로 선포되었으며 1996년부터 2000년까지 통일국가의 제1차 경제5개년 계획의 닻이 올려짐과 때를 같이하여 사유화 정책이 실행되기 시작했다.

지도자인 쌀레 대통령은 모든 계획과 업적실현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그는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였고 전반적인 개혁 정책을 단행하여 그 첫 번째 결과로서 국내 통화의 안정과 적자 감소와 경화의 예비준비율 증가가 이루어졌다. 그에 대한 효과는 이웃한 국가들과 다수의 지역 및 국제기구들이 이러한 건설적인 노력에 지원하게 됨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알리 압둘라 쌀레 대통령은 아랍의 결속과 이웃 국가들과의 평화적인 협력과 신뢰의 회복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대외정책은 상호이익을 추구하고 다른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으며 주권을 존중하고 모든 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데에 주력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책은 이웃 국가들과의 국경분쟁에도 잘 반영되고 있다. 평화와 안정과 협력의 분위기 하에서 예멘은 종국에는 파멸과 후회밖에 남지 않는 무력이나 전쟁으로 자원을 고갈시키는 대신 선진 국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도록 경제성장을 이룩하자는 정부와 국민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통령은 신뢰와 긍정을 바탕으로 한 다가오는 새 시대를 향하여 미래의 국가 건설을 위하여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예멘 역사의 기원은 시바 왕국Kingdom of Sheba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는  B.C. 950에서 B.C. 115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이후 AD 6세기까지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는 힘야르 왕조Ḥimyar dynasty에 의해 통치되었다. AD 525년 이디오피아는 힘야르 왕국을 정복하였으나, AD 575년에는 페르시아의 침략에 의해 정복되었다. 7세기에 예멘은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며, 9세기에는 자이드派 이맘 야흐야 알-하디 일라-하끄Yaḥya al-Hādī ila'-Haqq는 라시드Rashīd 왕조를 세웠으며, 이 왕조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단절을 계속하면서 존속하였다.

1517년 예멘은 오스만 터키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오스만의 점령은 1918년 ‘무드로스’Mudros 휴전 때까지 지속되었으나, 1911년 이맘Imam 야흐야는 터키의 종주권을 인정하지만 고지대의 이맘과 티아라Tiara의 터키간 행정 통제를 분할하는 조약을 보장하기 위하여 대규모 봉기를 주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이맘은 터키를 지원하였고, 1799년 페림Perim 섬을 점령하여 1839년 아덴에 보호령을 수립한 영국은 아시르Asir의 작은 주(州)로부터 예멘의 북쪽 지역까지 침공한 이드리스Idris의 침략자들을 지원하였다.

1962년 9월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이 쿠데타는 후에 대통령이 된 압둘라 앗-살랄Abdulla as-Salal 대령을 포함한 예멘 군장교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통일아랍공화국(UAR; United Arab Republic)의 군대에 의해 지원되었으며, 공화국 군대는 대부분의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였다. 이집트와 시리아간의 통일국가가 통일아랍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1958년 2월 수립되었다. 새롭게 탄생한 UAR과 예멘은 동년 3월 8일 다마스커스에서 협정을 조인하였다. 새로운 연합은 통일아랍국가United Arab States로 명명되었고, 통일된 국방 및 외교 정책을 수립하였으며 후에는 관세동맹 및 단일 통화를 유지하도록 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들 연합은, 비록 UAR이라는 명칭이 1961년까지 유지되긴 했지만, 시리아가 이집트와의 연합에서 탈퇴한 직후인 1961년 12월 UAR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새롭게 선포된 ‘예멘아랍공화국’(Yemen Arab Republic; YAR)은 곧이어 소련과 미국에 의하여 승인되었으며, 1963년초 UN가입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왕정을 계속 인정하였으며, UAR이 철수할 때까지 YAR을 승인하지 않겠다고 계속 천명하였다.

1990년 예멘이 통일될 때까지 YAR은 보수적인 일련의 군사정권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안정은 교묘히 이루어졌다. 1962년이후 4명의 대통령이 쿠데타나 혹은 암살에 의하여 전복되었다. 두 전임자의 사망 이후 8개월 이내에 육군 중령(후에 육군 장군이 됨) 알리 압둘라 쌀레Ali Abdullah Saleh는 1978년 7월 대통령이 되었다. 1978년 9월 암살 시도와 동년 10월 선임 육군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 시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쌀레 대통령은 형식적인 후퇴를 생각하였다. 이들 두 사건에 있어서 남예멘(PDRY)의 개입 의혹은 두 예멘간의 관계에 긴장을 야기시켰다. 1979년 2월과 3월 광범위한 국경 충돌은 공개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과정에 보호국과 예멘의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는 항상 미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잦은 충돌은 1914년 3월 오스만 정부와 서명한 국경의 경계 설정을 유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예멘의 터키 군대는 보호령의 커다란 영토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1919년 대부분의 부족장들은 영국과의 조약을 갱신하였지만, 예멘의 원칙적인 종교적 권한을 행사하는 싸나Ṣan'ā‘의 이맘은 모든 영토에 대한 주장을 유지하였다. 1962년 8월 예멘은 런던회의에서 합의된 협정을 선포하였고, 아덴 영토에 대한 주장을 반복하였다. 드디어 1962년 9월 27일 혁명 이후 YAR이 수립되었으며, 혁명 지도자 쌀레 대령은 그 당시 새로운 정권이 아덴 영토에 대한 주권을 강요할 의도가 없음을 천명하였고, 그 대신 영국과의 친선을 희망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남-북 예멘은 운명을 달리하는 두 국가로 갈라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아덴에서는 연방 정부로 편입되는데 대해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1962년 8월 발생한 사건은  합법적인 국가로서 연방 정부로의 결합을 천거하는 백서(白書)를 발간케 만들었다. 이에 대해 몇몇 정당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반대하였고, 1962년 발생한 사건에 대하여 동맹파업과 데모로 직접적인 반대를 하였다. 동년 9월 초안된 조약이 아덴 입법회의의 통과됨과 동시에 심각한 폭동이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연방 정부는 1963년 1월 협정에 서명하여 연방 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1967년 6월 20일 영국 정부는 예멘의 의도를 알게 되었고, 동년 8월 25일 예멘으로부터 영국군의 철수는 일찍이 시작되었다. 아덴이 독립 의사를 표명했을 때, 영국 정부는 군대 철수를 서두를 것과 가능하다면 1968년 1월 9일 남아라비아를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1967년 11월 27일 영국 군대가 남아라비아의 군대에게 아덴 지역을 양도한 이후, ‘민족자유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은 ‘남예멘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Southern Yemen)의 창설을 선포하였다. 새로운 정권은 전임자들보다 좌익적이고 친소적 입장을 취하였다. 드디어 1970년 11월 새로운 헌법은 예멘 통일의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예멘인민민주주의공화국’(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Yemen; PDRY)으로 국가 명칭의 개정을 공포하였다. 영국군의 철수 이후 아덴에서 새롭게 형성된 정부의 출현은 사실상 예멘을 체제가 다른 두 국가로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남· 북 예멘의 통합에 관한 논의는 1972년 9월 양국간 국경분쟁 이후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의 적극적인 중재로 동년 10월 28일 ‘카이로정상회담’을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1979년 2월 남·북예멘간 제2차 국경분쟁 이후 ‘아랍연맹평의회’의 중재안에 따라 동년 3월 ‘쿠웨이트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면서 통합 과정은 제2기를 맞게 된다. 1986년 7월 남예멘의 알·앗타스al-Attas 대통령과 북예멘의 쌀레 대통령은 리비아의 까다피Qaddafi 대통령의 초청으로 트리폴리에서 통합 및 북예멘에 거주하는 남예멘 피난민 송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회담을 갖는 등 광범위한 통일 논의를 계속하였다. 1988년 5월 싸나에서 개최된 회담에서 북예멘의 쌀레 대통령과 남예멘 사회당(YSP) 중앙위원회 사무총장 알-바이드Alī Salim al-Baidh는 양국의 통일에 관한 회담을 지속적으로 열 것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1990년 5월 남북예멘의 무장이 통일에 앞서 기술적으로 해제되었고, 1990년 5월 22일 '예멘공화국'The Republic of Yemen이 전격적으로 선포되었다. 북예멘의 지도자 쌀레 대통령은 대통령의 직책을 맡았고, 부통령은 남예멘의 지도자 알-바이드가 맡게 되었다. 또한 북예멘의 수도 싸나는 모든 각료와 정부위원회를 불러들여 새 정부의 ‘행정수도’로 명명되었다. 지리적으로는 훨씬 크지만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남예멘의 수도 아덴Aden은 보상을 위하여 ‘자유무역지대’(free trade zone)의 약속과 함께 ‘경제수도’로 명명되었다. 1993년 4월 선거에서 알-바이드가 패배한 이후, 쌀레와 알-바이드 관계는 악화되었고 알-바이드는 동년 9월 싸나를 떠나 아덴으로 되돌아갔다. 오만과 요르단의 중재 노력을 포함한 수많은 화해 시도에도 불구하고 양 지도자는 잘래 공화국의 정치기구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해결의 열쇠인 제도 통합에 대한 실패는 남․북예멘간의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1994년 초 산발적인 무력 충돌을 가져왔다. 결국 남예멘이 통일된 공화국에서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1994년 5월 5일 전면적인 내전(civil war)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남예멘측 공군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남예멘 군대는 아덴으로 후퇴하였고, 동년 7월 7일 항복하였다. 북예멘은 남예멘 분리주의자들에 대해 ‘군의 통일’을 위한 승리를 선언하였고, 남예멘 지도자들은 인접 국가로 피신하였다. 그후 알-바이드는 오만에서 정치로부터 은퇴를 하였고 북예멘의 ‘재통일’ 형식으로 예멘은 통일을 이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알리 압둘라 쌀레 알 아흐마르 통일 예멘 대통령은 1942년 싸나의 바이트 알 아흐마르Bayt Al-Aḥmar 마을에서 태어나 쿠탑kuttāb에서 처음으로 교육을 받았다. 1958년 군사학교에 입교하여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1960년 장교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후 혁명을 준비하는 장교 그룹에 가담하여 하사관의 신분이었던 ‘라낍’의 신분으로 집행부에도 참여하였다. 쌀레는 예멘의 여러 지역에서 혁명과 공화국을 방어하는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수 차례의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쌀레는 전투에서 뛰어난 용맹성을 보였으며, 국가의 여러 문제 있어서 지각 있고 책임 있는 행동으로 군사 활동에 있어서도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1963년 쌀레는 소위 계급에 해당하는 물라짐 싸니 mulāzim thānī로 진급하였고, 그 해말 서부지역에서 혁명을 주도하기 위한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1964년에는 장갑차 학교에 입교하였고, 1967년 남북간에 있었던 '10일 전투'의 영웅중 한 사람이 되었다. 쌀레는 우방국에 개인 혹은 사절단 자격으로 공식적인 방문이나 대화를 하였다. 쌀레는 장갑차 분대장, 기갑부대의 분대장, 비밀대장, 참모를 거쳐, 알-문담 지역의 소장, 타잇즈의 소장 등 군사령부의 여러 직책을 두루 거쳤다.

쌀레는 1978년 6월 24일 공화국 임시수반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군사령부의 부사령관, 총장성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1978년 7월 17일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뒤이어 기초 국민회의, 즉 의회에서 군 총사령관에 선출되었다. 1978년 9월 17일 안보 국방을 공고히 하고 현대화에 기여한 위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군사위원회의 만장일치로 대령인 아끼드‘aqīd로 진급하였다. 그는 기초 국민회의로부터 국가 봉사를 위하여 혁명 정신을 새롭게 하고 안정과 안보를 실현한 노력과 자기희생 정신을 기리어 최고 훈장인 '공화장'을 수여 받았다.

쌀레는 1982년 8월 30일에는 일반국민위원회의 사무총장에 임명되었고, 1983년 5월 23일 선거를 실시하여 다시 대통령과 군 총사령관직에 선출되었다. 1988년 7월 17일 국가자문위원회을 통하여 대통령과 군 총사령관직에 다시 선출되었다. 1990년 10월 12일 예멘 공화국 대통령 위원회의 초대 의장에 선출되었고, 국회의원들의 만장일치로 중장에 해당하는 ‘알파리끄’로 진급하였다. 1993년 4월 27일에 실시된 첫 번째 총선후, 5월에는 다시 대통령위원회의 의장에 재선되었다. 1994년 10월 국회를 통하여 공화국 대통령과 군의 최고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1995년 7월 일반국민위원회의 제5차 총회에서 이 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쌀레 대통령은 다섯 자녀를 두고 있으며, 장남의 이름은 아흐마드Aḥmad이다.

1962년 예멘은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바뀐다. 쌀랄 대령이 이끄는 군부쿠데타가 성공하여 예멘 아랍공화국이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쌀랄정권 역시 대중적 지지기반이 약해서 이후 정정(政情)은 혼미를 거듭한다. 1967년 남예멘이 영국으로부터 독립, 남예멘 인민공화국이 탄생하여 사회주의 체제를 성립시킨다. 그해 북예멘에서는 이리아니 정권이 수립된다. 그러나 이리아니 정권은 1974년 알-하마디에게 넘겨지고 1977년 알-하마디 정권은 다시 친 사우디 아라비아 계열의 알-가쉬미에게로 넘겨진다. 그러나 가쉬미 정권 역시 정치·경제·사회적 난국을 극복하지 못하고 가쉬미 역시 폭탄 테러로 사망한다. 그리고 나서 1978년 7월 군부의 지지를 받는 타이즈의 군사 지도자 알리 압둘라 쌀레 중령이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정치, 사회적인 갈등,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쌀레 대통령은 가장 먼저 정치조직을 근대화하여 의회의 역할을 증대시켰다.

의회는 1962년 공화국 수립 후 그 존재가 인정되었으나 그 역할은 아주 미약했다. 1962/3년 혁명의 성공 후 정치지도자들은 왕정의 잔재와 식민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국민회의를 창설했다. 국민회의의 성립은 민주주의와 공화제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수행하기 위한 기본토대가 되었다. 민주주의, 이것은 예멘아랍공화국이 추구하는 제1의 통치이념이었다. 민주주의는 공화국의 신념이자 믿음이었으며 민주주의 실현의 제1목표였다. 1971년에는 의회의 역할을 증대시키기 위해 쑤라Sūrā 의회를 구성하여 의원을 선출하게 된다.

1979년 쌀레 대통령은 3차 헌법을 통과시켜 국민회의의 역할을 확대시킨다. 그때까지 99명이던 의원 수를 159명으로 늘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입법부로 만들어 나가는 작업을 실행에 옮긴다. 또 각 주마다 9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는 지방의회를 발족시킨다. 그러나 주민의 완전한 직선에 의한 의회의원 선출을 이룩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하였다. 국민회의 의원이나 지방의회 의원은 선출직과 임명직의 두 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의회의 경우도 2/3는 국민이 선출하고 나머지 1/3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절충적인 방식을 도입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급격한 변화로 인한 정정불안을 염려한 쌀레 대통령의 고육지책으로 분석된다.

쌀레는 또한 국민들의 정치의식과 이슬람 사상을 결합, 국민헌장을 만들었다. 국민헌장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정치에 반감을 느끼는 모든 세력을 포용하는 것으로 국민통합의 강령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국민헌장이 추구하는 기본목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보다 나은 현재와 미래를 건설하고자 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예멘혁명의 목표에 부합하는 국민세력을 창설한다.

둘째, 다양한 의견의 제시는 새로운 예멘사회 건설이라는 독립적이고도 자유로운 희망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셋째, 국민의 이익에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두며 국가의 독립과 국민 주권을 강화시켜 나간다.

넷째, 혁명의 목표를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실행원칙들을 마련한다.

다섯째, 새로운 예멘사회 건설이라는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 모든 국민은 자유롭고 솔직하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사표명의 기회 역시 주어진다.

이러한 국민헌장을 토대로 1980년에는 국민 대화위원회가 구성되고 국민들의 정치참여 폭이 넓어졌다. 국민회의는 정치기구로, 입법기능은 물론이고 대행정부 견제기능까지 수행하게 된다. 국민회의는 정파의 이익이나 부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정한 민의(民意)의 대변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바람직한 국가의 건설과 국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정치세력으로 그 입지를 굳혀갔다.    

알리 압둘라 쌀레 대통령은 1978년 7월17일 대통령직에 취임한 이래 지도력과 경험 그리고 탁월한 안목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그는 원래 군사지도자였으나 정치적인 지도자로 발전해 갔다. 앞으로 예멘이 안고있는 경제문제만 해결한다면 20세기를 마감하는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쌀레 대통령은 취임이후 10년동안 정국을 안정시켰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1990년, 통일이라는 예멘민족의 염원을 성취시켰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남·북예멘의 통일은 80년대까지만 해도 일견 불가능해 보였다. 사회의 체제나 조직, 인적구성 등에서 이 둘은 물과 기름의 관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쌀레 대통령은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해냈다. 이것은 쌀레 개인의 애국심과 추진력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통일 예멘공화국의 건설은 아라비아 반도뿐 아니라 중동, 더 나가서는 세계적으로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예멘의 정치발전은 후진국 정치발전의 사례로 연구대상이 되었다. 앞으로 쌀레 대통령이 추구해야할 경제발전 역시 어떻게 진행될지 세계 각국은 주목하고 있다. 또 통일을 추구하는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는 합의통일과 흡수통일 두 가지 과정을 겪은 예멘의 사례가 통일을 이루는데 시금석이 될 수도 있다.

1990년 5월22일, 통일 예멘공화국은 수립이후 쌀레 대통령의 영도하에, 안정된 국가로 발전하고 있다. 통일된 국가의 기틀은 완전히 마련되어서, 헌법과 법령, 사상과 종교, 경제와 사회 등 전 분야에서 고른 발전이 기대된다. 이러한 과정은 시련의 연속이었으며 그 결과도 아직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지금도 예멘정부는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이라는 기본목표를 설정하고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에 대한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이를 위해 사회간접자본인 도로와 항만을 확충하고, 자유무역지대 등을 건설하고 있다. 이러한 제반조치가 경제발전의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예멘은 공공기관의 지출을 삭감하고 수출규모를 늘리며, 농수산업, 제조업, 서비스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 생산되기 시작한 원유의 생산은 경제기반을 강화하고 경제를 활성화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쌀레라는 지도자의 역할이 예멘의 역사가 새로운 시대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하겠다.

예멘에서 1978년은 격동의 해였다. 싸나와 아덴에서는 권력투쟁과 정치적 소용돌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쌀레가 국민의회의 선거를 통하여 1978년 7월 17일 대통령과 총사령관의 권력을 잡았을 때,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를 반겼다. 당시 예멘의 현실은 극도로 복잡하였고 수많은 정치인들은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탈피하고자 관망하고 있었다. 세계 대부분의 예멘 분석가들은 쌀레 대령의 정권이 1-2년 안에 무너지리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은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오늘날까지 예멘의 대통령으로 건재하고 있으며, 예멘의 생활수준 향상과 경제성장의 측면에서 커다란 성과를 기록하고 있다. 쌀레 대통령의 통치기간 초기의 1년반동안의 기간에, 그는 북예멘의 흩어진 여러 부족들을 잘 훈련시킬 수 있었고, 동시에 남예멘의 사회주의 체제의 절박한 위기도 함께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남-북예멘 양국간에 있었던 1979년 내전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예멘 건설을 위해 나타난 1980년대 초의 특징은 우선 첫째로 역사적으로 서로 이질적인 양국간의 현실에서 국가 이익의 창출과 정치, 경제, 사회적 건설을 위하여 국민적인 상호 협조와 안보 및 안정을 위한 원칙을 실현할 수 있었으며, 둘째로 대부분의 주요 정치 세력이 포함된 폭 넓은 정치적 단체로서 정치기구를 구성하여 권력의 안정을 도모하였으며,  1982년 국민의회가 결성되었고, 셋째로 국민의 자본축적과 장기적인 경제정책으로 국가의 자체 능력과 발전 가능성에 기반을 둔 공업, 교통, 수송, 농업 분야에 대한 전문적이고 완벽한 경제적 성장동기를 제공하였고, 넷째로 쌀레의 집권 시기는 예멘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고 경제발전 및 현대적인 국가 건설과 전통간의 조화, 그리고 예멘의 사회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탁월하고 민첩한 통치적 유연성을 발휘하였고, 다섯째로 쌀레의 집권이후 기본적인 서비스 분야,  예를 들면 보건, 교육, 기타 사회 서비스 분야 등에서 국민을 위한 가시적인 업적을 쌓았으며, 그의 경제정책은 사회활동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효과적인 것이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투쟁과 복잡한 국제관계에도 불구하고, 쌀레 대통령의 집권이후 예멘의 대외정책은 어느 한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독자적인 독립성을 지키고 있다.

쌀레 대통령은 역내 국가들은 물론 세계의 국가들과의 우호관계를 배경으로 예멘의 통일을 이루어 내기 위하여 평화적인 대화를 통한 노력을 경주하였고, 아덴의 통치자들과 통일을 위한 협상을 통하여 형제 관계를 맺었다. 1979년 3월 쿠웨이트 접촉을 시작으로 1989년 11월 아덴 접촉을 마지막으로 적극적인 통일 협상을 계속하였다. 드디어 쌀레 대통령은 1990년 5월 22일 그의 노련한 정치적인 경험과 입장 고수의 덕분으로 통일을 이룩하여 예멘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따라서 쌀레의 업적은 역사적으로 예멘 국민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예멘 통일의 정치적 교훈은 오랫동안 식민지 지배 때문에 분파 되었던 국민과 나라를 재통일한 첫 번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1990년 5월에서 1994년의 기간동안 쌀레 대통령은 종족주의 시대로 회귀하지 않고 예멘 공화국의 체제를 유지하는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였다. 쌀레는 내전 이후 종족주의의 소용돌이로부터 안전한 곳, 즉 거친 폭풍우 가운데서 예멘이라는 배를 탁월하게 순항시킬 수 있었다. 드디어 1997년 7월 7일에 예멘 전역에 완전한 통일의 깃발이 펄럭였을 때 완전한 승리는 쌀레에게 안겨졌다. 쌀레 대통령은 파괴된 남북내전의 흔적을 없애는데, 그리고 국가 이익을 위한 경제발전과 건설에 있어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데 온 정열을 바치고 있다.

1972-1979년 국경분쟁을 치른 남북 예멘은 양국의 충돌이 협상과 대화의 창구를 마련하여 1990년 통합을 이루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는 점이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예멘 통일은 독일의 「흡수통일」과는 다르게 거의 대등한 관계에서 「선통합-후조정」이라는 통일 방식을 취하고 있기에 한반도의 통일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진행된 예멘의 통일 과정은 내부적으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면서 전개돼 왔다. 통일에는 반드시 후유증이 있다는 사실이 「독일통일」과 「예멘통일」의 예에서 입증되고 있다. ‘독일통일이 경제적 후유증이 특색이라면, 예멘통일의 특색은 정치적 후유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멘통일의 경우, 독일방식의 「흡수통일」 형태가 아니기에 그 후유증의 근원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재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한 예멘 통일의 후유증을 독일과 똑같이 경제적인 원인에만 국한하여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시각이다.

비록 예멘이 통일이후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구조적으로 볼 때 이의 원인은 내부적 경제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인 측면, 즉 걸프전(The Gulf War)의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멘이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편을 들었기에 곧바로 UN에 의한 금수조치의 여파가 취약한 통일 정부에 몰려온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사우디는 이 조치의 일환으로 100만명에 달하는 예멘인 근로자들을  추방하였다. 이는 곧바로 예멘 국내에서는 실업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면서 어려운 경제에 암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예멘경제는 구조적으로 해외 의존형이다. 인접 아랍국가에서 보내 오는 근로자들의 송금이 예멘 경제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며, 인접 아랍 국가들, 특히 이라크, 사우디 및 쿠웨이트의 원조에 의존도가 심한 경제구조를 갖고 있는 나라가 예멘이다. 따라서 현재 경제난의 원인을 통일 후유증으로 분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만일 그들이 통일이 되지 못한 상태라도 현상황은 감내 하기 어려운 경제적 위기 상황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예멘이 겪고 있는 어려움중 하나가 지나친 정부 조직의 비대화 현상이다. 자본주의 형태의 북예멘과 사회주의 형태의 남예멘이 통일을 이룩하여 행정부에 공무원의 수가 증대됨으로써 재정에 커다란 압박을 받고 있고, 행정 업무의 비효율성을 초래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의 해결은 매우 첨예한 정치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에 오랜 시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제외한 순수한 예멘 내부의 경제적 후유증은 우리의 시각처럼 심각한 것 같지는 않다. 예멘은 ‘통화통합’을 그런 대로 순조롭게 이룩해 낸 편이다. ‘사회통합‘의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전 단계 중 하나가 ’통화통합‘인데, 예멘이 극심한 인플레에 시달리면서도 통화통합을 이룩해 낸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 중 하나다. 아무튼 예멘의 통일과 통일이후 현재까지 안정기조를 유지하는 것은 쌀레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군사지도자에서 정치지도자로 변신하기는 했지만, 예멘의 ‘민주화 개혁’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점은 쌀레 대통령의 강력한 국가건설을 위한 의지라 볼 수 있다.

예멘 통일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민족간 동질성 회복 문제이다. 예멘은 동질성 회복의 수단으로 통일이전 10여 년에 걸치는 기간동안 쌍방의 협력을 바탕으로 이 문제를 회복하였다. 예를 들면 통합 국어 및 역사 교과서의 사용, 매스컴을 통한 상호 이해의 증진 등은 이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해냈다. 한국도 예멘과 마찬가지로 1972년 통일 문제에 관한 남북간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예멘은 통일을 이루었고 우리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예멘 통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교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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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알리 압둘라 살레-예멘통일의 주역.” [20세기 중동을 움직인 50인] 2000. 서울: 가람기획에 게재된 글이기에 인용은 동 출판사의 규칙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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