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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경제: 선사상(禪思想)을 중심으로

洪性敏(綜合經濟社會硏究院 院長, 經博)

Ⅰ. 머리말


Ⅱ. 불교의 경제윤리와 경제관

1. 원시불교의 경제윤리

2. 불교의 경제관


Ⅲ. 불교(佛敎)와 경제

  1. 불교와 선(禪)

  2. 불교의 경제사상

  3. 범망경에 나타난 경제윤리


Ⅳ. 현대의 경제문제와 불교적 대안

  1. 현대경제의 특징과 문제

  2. 선정(禪定)의 경제적 의미

  3. 선사상을 통한 해결책


Ⅴ. 맺음말

# 영문초록

* 참고문헌

 

 

禪學會 月例發表會

2000年 11月 18日 (土)

 


Buddhism and Economy: With Special Reference to Zen Mind

Prof. Dr. Seong Min Hong (RIES)


Ⅰ. Forward


Ⅱ. Economic Ethics and View in Buddhism

1. Economic Ethics in Primitive Buddhism

2. Economic Aspect of Buddhism


Ⅲ. Buddhism and Economy

  1. Buddhism and Zen

  2. Economic Thought of Buddhism

  3. Economic Ethics in Sutra


Ⅳ. Modern Economic Issues and Buddhist Alternative Solution

  1. Characteristics and Problem in Modern Economy

  2. Economic Meaning of Samādhi

  3. Economic Solution by Zen Mind


Ⅴ. Concluding Remarks


* Bibliography

 

< RESUME >

A view of Buddhist economy can be said as the middle-the-road (madhyama pratipad) economy. It considers accumulation of wealth as an apt means of human life. Its means must be taken by reasonable ways and distribution of wealth also must be done fairly. Moreover Buddhist economy pursues the establishment of a new state, welfare state by a merciful spirit (maitri-karuna). In view of economic system, Buddhist economy principally seems to be nearer capitalism that is based on liberalistic thought rather than socialism .

Considering economic life is a part of human life and a means containing a part of human life that is not goals itself, Zen and economy become an inseparable relation. Therefore the study of Zen and economy must begin with human life itself and we must find a conclusion in Prajna ( wisdom) of Buddhist thought.  

Bodhisattva has to rely on paramita to carry seeking after truth into practice and Buddhist alms (dana) is considered very important things in Zen mind. There are similar donation systems in other religions. For example, Zakhat system of Islam has been developed a new financial institution in the form of interest-free banking. A new proposal financing the fund of Buddhist alms that has more self-control function than Islamic Zakhat may be an alternative method for the practice way of life in Zen mind. To perform the function effectively, we can imagine the establishment of financial institution as a sort of Buddhist Banking that can be a practical solution following the Buddhist spirit that things must be used properly in economic life. In modern society Avatamsaka-Sutra may play a great role in actual state of thi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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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한국의 선(禪)은 계정혜 삼학을 통합하여 현세 성불을 지향하며, 내세 극락정토를 이룩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경제(經濟) 또한 인간의 현실의 문제를 다루기는 하지만, 물질적 욕구 충족이외에 정신적 욕구, 즉 행복(幸福)의 추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공통의 변수는 우리에게 다소 이질적이라 생각되어지는 ‘선과 경제’라는 논의를 일깨워주고 있다.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 즉 세상을 다스려서 백성을 구제한다는 말을 함축하고 있다. 선에서도 그 근본원리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위로는 보리(菩提)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가 생산, 분배, 유통, 소비에 관한 것이라면, 불교는 인간의 생로병사에 관한 문제를 사제관(四諦觀)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눈다. 즉 그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세계”에 관한 문제로서 고집(苦集)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있지 않으면 안 될 이상세계”에 관한 멸도(滅道)의 문제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 가지로 요약한 것이 삼법인(三法印)이며, 불법에 귀의(歸依)함으로써 팔정도(八正道)와 오계(五戒)를 지킴으로써 신자로서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자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의 보살행을 실천함으로써 구도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육바라밀을 실천하면서 구도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재가자와 출가자들이 지켜야할 계율이 있는 데 이것은 범망경속에 잘 나타나 있다. 선과 경제는 불교의 중도사상(中道思想)에 기본을 두고 ‘상구보리’로 출발해서, ‘하화중생’에서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철저한 육바라밀이 실천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계율이 있어야 한다. 그 계율은 현실세계, 즉 고집(苦集)의 세계에서 경제윤리의 틀을 제공할 수 있다.

본 논문은 불교와 경제라는 광범위한 틀 속에서 선사상을 고찰하기 위해 불교와 선(禪) 문제를 차별화 하는데 치중하였으며, 불교의 경제관과 선에서의 경제문제를 연관시키기 위해 원시불교의 경제윤리를 도입하여 불교의 경제관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불교의 발전적 대안으로서 불교에서 용인되고 있는 식리적(殖利的) 기능을 이용하여 선사상의 활용을 통한 불교은행을 차후의 연구과제로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 원시불교를 통한 선사상을 현대적 의미에서 고찰 - 하기 때문에, 그 특성상 중요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교과서식으로 분석해야 함이 본 논문의 맹점(盲點)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불교와 경제라는 큰 틀 속에서 선과 경제를 도출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기에, 그 내용도 현대 경제문제에서 선사상의 역할에 대한 이해 정도로 머물 수밖에 없음을 밝혀둔다 .


Ⅱ. 불교의 경제윤리와 경제관


1. 원시불교의 경제윤리

원시불교에서 재가자의 경제행위에 관한 설법은 “각 개인이 부지런히 애써서 영리(營利)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재물을 천하게 생각하는 사상이 두드러진다고 생각되지만, 그 반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현세적 재물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재산의 축적(蓄積)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소망스러운 목적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AN.Ⅱ: 32). 특히 상인(商人)에 관하여 부지런히 애써서 얻은 재물의 축적을 칭찬하고 있다(An. Ⅰ: 115-116). 부(富)의 축적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다른 면에서 소비(消費)를 가능한 한 줄여야 한다. 구체적인 정신 태도로는 사치나 향락에 빠지는 일을 피하게 하고 재물의 소비를 금하고 있다. 사람을 게으르게 하고 멍청하게 하는 원인가운데 가장 큰 것이 음주(飮酒)이다. 불교는 애초부터 음주를 엄중히 금하고 있다. 그리고 향락적인 오락이나 도박도 금하고 있다. 나카무라 하지메(中村 元)는 그의 저서 [原始佛敎-그 思想과 生活]에서 경제에 관한 윤리를 1) 금욕적 정려(精勵)의 정신, 2) 중도(中道)의 경제사상, 3) 시여(施輿)의 도덕, 4) 생산(生産)의 문제 등 4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1)(鄭泰赫, 譯. 1993: 281-296).

불교의 전체적인 기조는 세속인에게는 매우 금욕적이기는 하지만, 극단적인 생활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2) 사상에 의거 수입과 지출이 균형잡힌 생활의 유지를 강조한 것 같다. 원시불교에서 가장(家長)은 근면하게 생업에 종사하여 금욕적으로 부지런히 애쓰는 것에 의해서 재산을 축적하는 것을 권하고 있다.

“계를 지키는 현명한 사람은, 산마루에서 타오르는 불과 같이 빛난다. 벌이 꿀을 모으듯이 일하면, 그의 재산은 저절로 모인다. 마치 개미집이 쌓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재산을 모아서, 그는 가족을 위해서 실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집주인이 된다. 그의 “재산은 넷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4분법(四分法)3)을 통하여 가정경제의 운영, 대인관계, 저축 및 미래의 대비에 관해서도 말씀하셨다. 특히 부채(負債)는 반듯이 반제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원시불교에서는 이자금지(利子禁止) 사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채에 대한 이자의 정당성을 승인하고 있다. 교단성립이후 경전자체가 이자(利子)를 받기 위해 대부하는 것을 세속인에게 적극 장려하고 있다. 그리고 후대가 되면, 불교교단 자신이 대부를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정려에 의해서 부(富)를 얻더라도 혼자서 독점(獨占)해서는 안 된다. 재산을 모은다는 것은 결국 그것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복리(福利)를 나누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나누어준다는 것”, 즉 보시(布施, Dāna)의 도덕을 강조한다. 따라서 재산을 얻었더라도 남에게 주지 않고 인색하게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시여(施輿)는 특히 칭찬 받는다(Itiv. 75). 시여의 경우, 물질적인 재물도 좋고, 노력으로 봉사하는 것도 좋다.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주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다. 본래 인간은 부가 많을 경우에는 탐욕(貪慾)의 즐거움에 빠져서 과오를 범하기 쉽다(Sn.104). 물론 남에게 베푼다고 하는 것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단지 무턱대고 함부로 베풀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어떤 것을 준다는 것은 반듯이 여유가 있는 사람, 풍부한 사람만이 행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각 개인의 마음여하에 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속에서 베풀고, 어떤 사람들은 풍부해도 베푸는 일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빈궁한 사람들이라도 남에게 베푸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SN.Ⅰ: 18).

원시불교에서는 분배하는 쪽의 도덕이 강조되고 있는데 비하여, 생산하는 쪽의 도덕이 설해지고 있는 것은 비교적 적다4). 하지만 생산에 관한 가르침도 있다. “동산을 마련하고, 숲을 마련하고, 다리를 만들고, 급수하는 곳과 우물과 휴식처를 만들어서 베푸는 사람들, 그들의 선(善, 공덕)은 주야로 증대한다. 그들의 법을 구하고, 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천계(天界)에 간다.”(SN.Ⅰ: 33). 여기서는 분명히 생산(生産)의 도덕이 설해지고 있지만, 주로 교통로의 설정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인도 상공업자의 사회이상(社會理想)이 이와 같은 형태로 표명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고용관계(雇傭關係)에서도 고용주는 다섯 가지 방법5)으로 노복이나 용인에게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하고 있다.


3. 불교의 경제관(經濟觀)

불교의 경제관을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현대의 ‘후생경제학’과 궤를 같이하며, 그 목적은  복지국가(福祉國家)를 실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원시불교에서 나타나는 개념은 ‘생산’보다는 ‘분배’쪽에 더 많은 치중을 하고 있고 공동체(共同體)의 유지를 위한 공공사업에 더 많은 할애를 하고 있다. 체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공동체의 유지라는 면이 다소 사회주의적이라는 요소를 내포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유주의 사상에 기초한 자본주의(資本主義) 요소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공동체 개념도 현대경제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빈민구제 내지는 사회보장제도라는 측면에서 공동의 복지를 위한 사회간접자본(SOC)의 확충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6).

부처님은 누구보다도 경제생활의 안정이 가족의 건전한 도덕생활을 유지하고 넓게는 사회 전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전제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가계의 생활이 어려워지면, 도둑질, 사기, 살인, 방화 등 사회질서가 혼란하게 되고 치안유지에도 어려움을 겪게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출가자는 수행에 정진할 것을 권하였지만, 재가자(在家者)에게는 먼저 그 직업에 충실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직업에는 전혀 귀천의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7). 부처님은경제적 기초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재물을 얻는 수단으로서 정당한 직업적 수양’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재물을 얻으려고 탐욕을 부려, 마침내는 죄를 범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생경(善生經)에서는 “처음에 기술(技術)을 배우고, 나중에 재물(財物)을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朴京俊 譯, 1992: 263). 가정경제를 합리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직업활동에 의해서 얻은 수입을 4등분해서 써야 하는 사분법(四分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가정경제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낭비(浪費)이다. 낭비는 음주, 밤나들이, 쾌락, 도박, 나쁜 친구, 게으름 등 6가지의 원인이 된다고 하여 경계하고 있다8).

부처님은 또한 재산의 손실 혹은 소모의 인위적, 자연적 원인으로 여덟 가지를 들었으며, 이것을 ‘팔난설(八難說)’이라 한다. 가혹한 조세(租稅)나 부당한 정치에 의해서 국민의 재산을 수탈하는 군주의 행동을 말하는 ‘폭군의 난(王難)’, ‘도적의 난(盜難)’, ‘수재(水災)’, ‘화재(火災)’, ‘자연소모’, ‘빚(債務)’,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데도 베풀지 않기에 늘어나는 민중의 원성에 의해 가문이 쇠퇴해가는 ‘원가(怨家)의 파괴 및 ’자녀의 낭비‘ 등으로, 재산은 반듯이 믿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것을 절약적, 계획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박경준, 이영근 譯, 1992: 83).

부처님은 먼저 정당한 직업을 배우고, 이 직업을 통해서 얻은 재물로 가정을 꾸려가며, 여력이 있으면 저축하여 불시에 대비하는 것이 곧 건전한 가정생활의 기초가 된다고 설하였다. 부처님은 이처럼 저축(貯蓄)을 장려하였지만, 지나치게 절약(節約)하여 수입에 비해 터무니없이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배척하였다. 일찍이 발가(跋迦, B(V)yagghapajja)라고 하는 나이 어린 바라문(婆羅門)이 석존께, “어떻게 하면 현세에 안락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부처님은 사법(四法)을 실천하라고 가르쳤다. 부처님은 수입에 비해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uḷāra jivika)을 영위하는 것을 優蕓鉢離果에는 씨앗이 없음에 비유하고, 수입에 비하여 너무 궁핍한 생활은(kasirā jivika)을 영위하는 것을 餓死狗(ajadhumārika)에 비유하여 이러한 것들을 경계하고 있다. 부처님은 여기에서도 중도(中道)의 생활을 주창하신다. 부처님은 생계를 세우는 도를 가르친 뒤에 후세안락의 4법을 설하던 중, 그 하나로서 시구족(施具足, cāgasampadā)의 법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무소득(無所得)의 마음으로 해탈시(解脫施, muttacāga)를 행해야 하는 법이다. 경제적 안정은 가정을 도덕적이게 하는 기초임과 동시에, 재물을 얻는 것도 재물을 쓰는 것도 모두 도덕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이다(朴京俊 譯, 1992: 265-267).   

가계의 절약적 관리는 궁극적으로 가정의 주인이 자신과 자신의 처자를 부양하는 이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난한 친척을 돕고, 노비와 고용인에게 급여를 주고, 벗을 기쁘게 하고, 빈곤한 사람에게 베풀며,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보시하는 것과 같은 선행(善行)을 하기 위함이라고 역설하였다. 더욱이 저울을 속이고 화폐를 위조하고, 사기와 속임수를 쓰거나 폭행을 일삼는 것과 같은 부정과 못된 짓을 이용해서 재물(財物)을 획득하는 것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저질러졌든 부처님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은 단순히 일반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현실에 사회문제 해결에도 주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박경준, 이영근 譯: 83-84). 불교의 경제관은 부(富)의 축적 자체를 인간생활 영위의 적절한 수단으로 보았고, 그 수단은 정당한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져야하며 형평한 분배(分配)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더 나아가 자비(慈悲)의 정신에 의한 새로운 국가, 즉 복지국가(福祉國家) 건설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이러한 세계를 최초로 건설한 실천자는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군주인 아쇼카 바르다나왕(기원전 268-232)이라 볼 수 있다.

슈마허(E.F. Schumacher)는 부(富)의 기본적인 원천이 인간의 노동(勞動)에 있다는 점에 대해서 근대경제학과 불교경제학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본다. 또한 재화의 소비와 소유 또한 목적을 위한 수단(手段)이다. 불교경제학은 주어진 목적을 최소한의 수단에 의해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한다. 반면에 근대경제학은 경제활동의 유일한 목표를 소비로 보고, 토지, 노동, 자본 등의 생산요소(生産要素)를 수단으로 다룬다(김정우 譯, 1987: 59-63). 전자는 소비의 최적패턴에 따라 인간의 만족을 극대화시키고자하고, 후자는 생산노력의 최적패턴에 따라 소비를 극대화시키고자한다. 따라서 불교경제학의 연구는 경제성장을 정신적, 종교적 가치보다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는 ‘근대적 성장’과 ‘전통적 침체’간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주의자의 경박성과 전통주의자의 무기력 사이에서 나타나는 가치(價値)의 문제인 것이다. 


Ⅲ. 불교(佛敎)와 경제


1. 불교와 선(禪)

중국의 선사상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로 표현된다. 중국의 선종은 인도의 좌선을 정통으로 이어받았고, 중국의 노장사상(老莊思想)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인도불교가 순수하게 전해진 것은 아니다. 인도에는 윤회(輪廻)의 사고방식이 있고, ‘현세에서 깨달음이 열린다는 말’(見性成佛)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윤회사상을 막아내는 수단이 선종(禪宗)이며 정토교(淨土敎)이다. 정토교는 죽어서 극락왕생 한다고 하여, 윤회의 사고방식을 단절시켰다. 선종에서는 저승까지 갈 것 없이, 이승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선사상은 인도불교와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신(神)을 설정하여 인간을 대립시킨다. 이 양자의 중개자가 예수이며, 인간(人間)에서 신으로 가는 길은 없다. 신은 어디까지나 영원이며, 인간은 상대적 존재로 돼있다. 그러나 불교의 선에서는 그렇게 설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와 같은 실재자(實在者)를 절대로 설정하지 않는다. 인간 자체속에서 근원적인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 선이다. 자기에게 대립하는 절대자를 외부에 설정하지 않고, 자기에게 내재하는 근원적인 ‘하나’를 설정한다. 그러나 최후에 가서는 그것마저 부정한다. 초기 선종에서 ‘하나’란 무상(無相)이며, 공(空)이다(양기봉, 역, 1998: 61-66).

인도불교에서 선은 계(戒), 정(定), 혜(慧)의 3학중에서 정학(定學)에 해당되지만, 중국의 불교에서는 계, 정, 혜의 세 가지를 모두 선(禪)에 통합하였다. 불교에서 선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특징적인 점은 선은 어디까지나 현세에서의 성불(成佛)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현세 자체안에서 안락의 근거를 추구하는 것이 선이며, 현세와 바로 이어지는 내세에서 극락정토를 추구하면서 현세를 현세로서 자각하려는 것이 정토교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윤회설을 타파하기 위해서 일어난 종파이다. 정토교와 선의 발생은 남북조시대(420-589) 끝 무렵 수(隨)나라에 걸쳐 이루어졌다(위의책: 135-138). 중국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불교 또한 선사상(禪思想)에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한국의 불교는 현실을 직시하는 선의 수단을 통해서 한국인의 신앙생활, 더 나아가 인간생활 그 자체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선이란 한마디로 진정한 자유(自由)를 구하는 길이며, 진정한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니, 그러한 절대성에서의 자유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온갖 종류의 의존성을 벗어나고, 아집(我執), 법집(法執) 등 모든 집착을 놓아버린 곳이다. 계, 정, 혜 삼학이 일치되었을 때, 선은 완전한 자유가 되어 해탈(解脫)의 경계에 있게 된다. 완전한 자유인을 임제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하였다(교양교재., 1999: 121). 중국 선종의 초조인 달마(達磨, - 528)의 “환희 트여 있을 뿐 거기에는 성스럽다니 하는 것은 없다(廓然無聖)”는 것은 불교의 원리가 공(空, Sunyata)임을 구명한 것이다. 현상은 공에서 나타난 것이며, 그 현상은 다시 공으로 사라지는 것이므로 성스러운 진리(眞理)마져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육조 혜능(慧能, 638-713) 또한 선심(禪心)을 표현함에 있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게송으로 나타내고 있어, 선심은 바로 공(空)의 정신임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선(禪) 수행은 공(空)의 수행이다. 자신의 원래 근원으로 돌아가는 수행이 선이므로 어떠한 이론이나 논리철학도 배제되어 있으므로 따로 불교의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은 없다. 따라서 선은 공사상에서 찾을 수 있으며, [반야심경(般若心經)]에 간략히 요약되어 있다(양기봉 역, 212-243).

인도에서는 자기가 경작하여 먹고사는 것을 교단에서 금지하였다. 중국에서도 처음에는 그랬지만, 백장(百丈) 선사시대에 와서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즉 “하루 놀면 하루 굶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청규는 생활이 곧 선임을 강조한 대목이다. 선에서 말하는 자유(自由)라든가 자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의식하거나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음을 말한다. 의식하면 아무래도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백장선사가 목표하는 바는 바로 그런 사로잡힘을 벗어나서 전혀 아무 것에도 걸리지 않는 일상생활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자는 것이다. 따라서 생활이 곧 선이며, 참선하는 사찰의 생활은 엄격해야 한다. 좌선의 모습은 삼매왕삼매(三昧王三昧)의 모습이다. 자기 자신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면, 8풍9)이 몰아닥쳐도 전혀 공포가 없다. 8풍은 우리들 마음을 동요시킨다. 그러나 본래 자기가치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양기봉 역: 99-106).

공양(供養)도 선의 생활이다. 3계(欲界, 色界, 無色界) 만물의 일체 망령에 대한 사은 행사가 공양이다. 우리들 모두와 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세계에서, 그 시간성으로 보아 과거에 속하는 일체 영혼, 정령을 위로, 사은하는 행위이다. 진리(眞理)의 눈으로 보면 일상생활은 곧 헤맴의 생활이다. 바른 지혜로써 일체를 바로 관찰해야 한다. 현대의 경박한 합리주의의 눈은 욕심의 눈이다. 지혜의 눈으로 보면 몸과 마음이 하나이면서 모습이 없음을 터득하게 된다. 보시(布施)하는 사람, 보시 받는 사람, 보시하는 물건, 이 세 가지는 그 행위가 끝나는 즉시로 자취가 남지 않는다. ‘나를 위하여’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위의책: 108-112).

인간의 일생은 결국 행복(幸福)을 추구하는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행복한 인생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달려있다. 시대는 변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나만 좋으면’이라는 자기중심적 사고로는 어떤 일이든지 잘 해낼 수 가 없다(이남재, 역: 191-195). 인간세상에서 생활은 경제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인간생활은 상호의존관계 내지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하며 유지되고 있다. 컴퓨터, 인터넷, TV, 자동차 등으로 대변되는 현대의 생활도 그 내막을 자세히 보면, 나와 너가 아닌 관계가 없고 복잡한 인간관계와 사회관계 더 나아가 국제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각 개체는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이며, 다양성 또한 인간의 행복추구를 위해서 하나가 되기 위한 과정(一卽多, 多卽一)”이라 볼 수 있다. 불교의 신앙은 자기라는 생각을 놓아버리고, 욕망(慾望)과 무엇인가를 얻는다는 생각을 떠나서 천지에 가득한 본래의 청정한 자성(自性)을 깨닫기 위해 무심(無心)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때문에 좌선을 하는 것이다(위의책: 49). 경제생활 또한 인간의 생활이며, 삶의 한 부분을 포함하는 수단이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선(禪)과 경제(經濟)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선과 경제는 인간생활 그 자체에서 출발하여 반야(般若)의 지혜에서 그 귀결점을 찾아야한다.


2. 불교의 경제사상


1) 중도의 경제사상

불교는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진리의 가르침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팔만사천 법문이라 불릴 정도로 막대한 양으로 설해지고 있다. 그 가르침을 세 가지로 집약한 것이 ‘삼법인(三法印)’이다.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며 정수(精髓)인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 가지를 말한다. 따라서 불교는 어떤 절대적인 것이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종교나 철학사상과 불교를 뚜렷하게 구분해주는 진리 역시 삼법인이라 볼 수 있다. 불교의 모든 사상을 한마디로 간략히 표현하면 ‘중도사상(中道思想)’이며, 그 실천도법은 ‘팔정도(八正道)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원시불교의 경제관도 한마디로 ‘중도의 경제관’라 할 수 있다. 중도는 성도후 최초의 가르침으로 극단적인 쾌락주의와 극단적인 고행주의를 물리치고 혼자 밟아 나아가야 할 진실한 실천덕목으로, 1) 바른 견해(正見), 2) 바른 생각(正思惟), 3) 바른 말(正語), 4) 바른 행위(正業), 5) 바른 생활(正命), 6) 바른 노력(正精進), 7) 바른 기억(正念), 8) 바른 선정(正定)의 팔정도(八正道)이다. 더욱이 불교는 무아정신에 입각하여 무소유를 이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자본주의에 있어서 독점자본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2) 욕망과 무아(無我)

인간의 욕망(慾望)에는 한이 없다. 하나의 욕망의 대상이 획득되는 그 순간부터 다음의 새로운 욕망이 생긴다. 욕망은 욕망의 충족(充足)에 의해서 만족되는 것이 아니다. 제한이 없는 욕망의 추구는 쾌락이 아니라 최대의 고통(苦痛)이 되기도 한다. [법망경] 갈망의 장(章) 가운데 이런 시구(詩句)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재물로 제 몸을 묶어(愚以貪自縛)

피안으로 건너갈 생각을 잃는다.(不求度彼岸)

재물과 애욕에 물들어(爲貪愛慾故)

남을 해치고 또 자신을 멸한다.(害人亦自害)


이것은 종족사회가 멸하고, 새롭게 출현한 개인의 사적 소유가 진행되던 시대 배경하에 불러진 노래로 보여진다. 한없는 재부(財富)를 구하는 자는 ‘피안(彼岸)을 구하지 않는 무지(無知)한 자다.’ (여래 편집부 역, 1991: 106)

‘물질에서 마음으로’라고 하는 본래의 의미는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의 대상’을 의미하고 있고, 무심(無心)은 ‘욕망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물질에서 마음으로’라는 것은 물적 욕망지상주의의 가치관을 버리고 마음의 평온과 행복을 구하는데 인생의 가치관을 두어야함을 의미한다. 불교는 물질이라고 하는 말을 ‘색(色)’이라 하고 마음이라는 말을 ‘공(空)’이라고 하여 자아(自我), 즉 욕망에 붙잡혀 있는 자기를 떠나서 무아(無我)에 도달하는 길을 설하고 있다. 물질이라고 해도 건물, 자동차, 상품 등과 같이 형태가 있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형태인 레저, 여행, 각종 놀이, 섹스 등 인간에게 욕망의 대상으로 되는 것은 모두 물질이다. 그러면 사업경영을 행하는 데도 돈벌이라고 하는 욕망을 떠나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하면 좋을까? 할 수도 있겠지만, 경영(經營)도 역시 무아를 근저로 하는 목적으로 전환하면 된다. 다시 말해서 경영의 목적을 “현재의 사업을 통해서 세상과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자비와 동사섭(同事攝) 정신의 실천이다. 세상을 위하고 남을 위하면 모든 사람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에 연결되고 통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으로 인식하여 협력을 아끼지 않게 된다(이남재 역, 1999: 40-41).


3) 무소유의 소유(所有)

불교에서 무소유(無所有)를 설명할 경우는 ‘안 가진 자’의 무소유를 말한다. 요컨대 문자 그대로 소유(所有)의 결핍이 아니라 ‘가진 자’의 소유에 대한 발언이다. 전자는 단적으로 말해서 빈곤의 해결에 의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고 사회과학의 과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되어도 오히려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남는 것은 후자의 소유에 대한 무소유10)이다. 먼저 소유는 실존 그 자체이다.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여 자유로운 노동(勞動)이 회복되어야 할 세계라고 한다면, 소유는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문제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불교에서는 소유에 대한 무소유의 자각을 우리에게 예민하게 추궁하고 있는가? 그것은 경제적 빈곤이 해결된 단계에서도 정신적 빈곤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실체적 자아를 아(我)라 하고, 자기 소유의 관념 및 사적 소유를 아소유(我所有) 또는 아소(我所)라 부르고 있다11). 이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소유는 ‘나’라고 하는 주체에 대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는 주체의 대상에 대한 활동이 전제되는 것이며, 그 활동은 어떤 의미로 ‘노동’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여래 편집부 역: 87-89). 재화(財貨)는 크게 경제재(經濟財)와 자유재(自由財)의 두가지로 나눈다. ‘무일물중무진장(無一物中無盡藏)’, 즉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곳에 무한의 소유가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오늘날 공공재(公共財)와 자유재의 개념에 커다란 논거를 제시할 수 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인권운동, 여성운동 및 환경운동 같은 것들은 ‘경제적 빈곤’의 문제가 아니며 ‘정신적 빈곤’ 문제의 대두라 볼 수 있다.


4) 자본과 노동

자본(資本)은 재(財)의 축적의 결과다. 재를 추구한다고 하는 것, 일반적으로 경제활동(經濟活動)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욕망의 대상 및 그 대상을 추구하는 욕망의 활동 그 자체이다. 일정한 대상을 획득하는 것에 의해 얻어지는 욕망의 충족, 그것에 의한 만족감은 시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없이 재를 추구하는 것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불교의 입장에서 기업가(企業家) 이윤을 어떻게 ‘순화’하고 ‘세련’되야 하는가는 부처님 당시 상업 자본가들의 이윤추구를 살펴보면 한층 더 역사적 현실성이 살아날 것이다. 따라서 ‘시여(施輿)의 윤리’는 기업가 이윤을 순화하고 세련하므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여래 편집부 역, 1991: 107-108). ‘사섭사(Catvārī Saṃgraha Vastūnī)는 원시불교이래 불교의 실천체계로서 보살들에게 널리 설해져왔다. 사섭사는 네 가지 장악(掌握) 방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1) 보시섭(布施攝), 2) 애어섭(愛語攝), 3) 이행섭(利行攝), 4) 동사섭(同事攝) 등 네 가지이다. 사섭사를 경제행위와 관련하여 보면, 보시섭은 서비스 정신, 애어섭은 대화술, 이행섭은 공동체에서의 사회적 책임, 동사섭은 노동에 있어서 자율정신의 확립으로 볼 수 있다(여래 편집부 역: 167-174).

원래 대승불교의 보살은 중생과 함께 모든 고통을 인내하면서 불교가 이상으로 하는 경지로 사람들을 이끄는 자이다. 이런 보살 정신은 대승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에 있는 인욕(忍辱)과 정진(精進)이다. 세속의 경제행위를 불교용어로 말하면 정진이라 한다. 이른바 정진은 문자 그대로 정려(精勵), 즉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세계에서 노동의 정신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노동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 수익 직업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自利)’, 즉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다. 다른 것에 의해 주어져서 살아가야 하는 절대한 자기 존재를 자각할 때, 우리들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수동적으로는 이러한 은혜 가운데 살아감과 함께, 능동적으로는 은혜에 응하며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노동에 힘쓴다는 것은 보은(報恩)의 행이다. 아무리 자신이 강한 인간(人間)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살려짐과 함께 살아가고, 살아감과 함께 살려지고 있다는 실감, 이것이 보은행의 목표이다. 노동자는 임금(賃金)을 목표로 하는 단순한 노동력으로서가 아니라, 먼저 인간으로서 일에 참여한다. 경영자는 직능적 권위를 드높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권위로서 참여한다. 거기서 최초로 협력, 상호존경, 선의에 가득찬 기업의 인간공동체가 형성된다. 이 경우에 기업내의 책임분담이 가능해지며, 노동자도 경영자도 모두 함께 사회적 책임을 갖는 것이 가능해진다(위의책: 98-104).


5)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협력정신

불교의 핵심사상중 하나는 “남을 이롭게 하면 그 이로움이 결국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이다. 조직이나 공동체와 자기 자신의 관계는 자리이타 각행궁만(自利利他 覺行窮滿)이라는 가르침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자기 자신의 이익이 동시에 모든 것의 이익이 되고, 그럼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최고 자각(自覺)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본래적인 자기확립은 곧 상구보리(上求菩提)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진실한 깨달음을 구하여 인격을 완성시킬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사회적 책임을 다해나가는 것이 하화중생(下化衆生)이니, 이것은 사회적인 입장에 서서 모든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완성을 목표로 실천, 노력해나가는 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구도자(보살)의 이상인 것이다. 상구보리는 성불의 완성이며, 화하중생은 불국토 건설이니, 개인의 완성과 사회의 이상이 합일되는 곳에 불교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이다(위의책: 151-152).


3. 범망경에 나타난 경제윤리(經濟倫理)

계(戒)는 불교의 해탈법인 계, 정, 혜 삼학 가운데 하나이고,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로 나눠지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이며, 경, 율, 론 삼장중 율장에 해당하는 불교도덕의 총칭이다. 어느 불자나 반듯이 지키도록 되어 있는 불살(不殺), 부도(不盜), 불음(不淫), 불망(不妄), 불주(不酒)의 5계 뒤에는 자비(慈悲), 복덕(福德), 청정(淸淨), 진실(眞實), 지혜(智慧)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숨겨져있다. 불자들은 단순히 몸조심하고 말조심하고 행동을 조심하여, 신, 구, 의 삼업을 잘 다스린다고 하는 계율의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서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자비와 지혜를 기르고 입으로 진실을 가꾸며, 행동을 통하여 복덕과 청정행을 쌓아 가야한다. 이것이 근본 5계(五戒)속에 담겨있는 참 정신이다. 이 5계는 재가인의 생활신조로서, 몸과 말과 뜻을 잘 다스리는 생활을 지향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밖에도 범망경(梵網經)은 재가인과 출가인이 지켜야 할 공동수지계를 열가지 무거운 10중계(重戒)12)와 가벼운 48경계(輕戒)로 나누어 설하고 있다(日陀1, 1992: 63-74). 48경계중 인간의 경제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제 9 불간병계(不看病戒): 병든이를 간호하라.

제10 축살중생구계(畜殺衆生具戒): 중생을 죽이는 기구를 마련해 두지 말라.

제11 국사계(國使戒): 나라의 심부름꾼이 되지말라.

제12 판매계(販賣戒): 나쁜 마음으로 장사하지 말라.

제16 위리도설계(爲利倒說戒): 이익을 위하여 그릇되이 설하지 말라.

제17 시세걸구계(恃勢乞求戒: 세력을 믿고 구하지 말라.

제26 독수이양계(獨受利養戒): 혼자만 이양을 받지 말라.

제29 사명자활계(司命自活戒): 삿된 직업으로 생활하지 말라.

제31 불행구속계(不行救贖戒): 값을 치르고 구원하라.

제32 손해중생계(損害衆生戒): 중생을 해롭계 하지 말라.

제41 위리작사계(爲利作師戒): 이양을 위하여 스승이 되지 말라.

제45 불화중생계(不化衆生戒): 중생을 항상 교화하라.

제47 비법제한계(非法制限戒): 옳지 못한 법으로 제한하지 말라.

제48 파법계(破法戒): 법을 파괴하지 말라.


1. 불건전한 직업

“너희 불자들이여, 나쁜 마음으로 이양을 위하여 남색이나 여색을 판매하거나, 제 손으로 생명을 죽여 나쁜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스스로 갈고 스스로 찧으며, 남녀를 점치고 상보고 해몽하면서 길흉을 말하며 이 남자 저 여자에게 주술로 교묘한 술수를 부리거나, 매를 길들이는 법과 백 가지 약이나 천 가지 약을 섞어 독약을 만들거나, 뱀독과 금과 은과 벌레로써 독약을 만들면 도무지 효순심이 없는 것이니, 만일 짐짓 이런짓을 하면 경구죄를 범하느니라13).”

원시불전에는 고기를 팔아서는 안된다는 규정은 없는 것 같지만, 술을 팔고 사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이밖에 인신매매는 불교에서 엄격히 금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위에서 열거한 내용 중에서도 그것이 남을 해롭게 할 목적이 아닌 경우, 예컨데 극약이라 할지라도 어떤 질병을 치유할 목적으로 독약을 제조하였다면 결코 범계가 되지 않는다. 홍찬스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일 재가인으로서 주술과 공교한 기술을 익히거나 의약의 기술을 익혀 여법(如法)하게 활용함으로써 중생을 상해하지 않는다면 계를 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출가한 이가 바른 정법의 주술로 위태로운 액을 구제해 주기 위해 쓰는 경우,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마음이 없을 경우 또한 무방하다.”

법도에 맞게, 그리고 정법(正法)에 입각하여 주문을 외우고 기술을 활용하되 사리사욕이 없다면, 이 계를 범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홍찬스님은 삿된 방법으로 사는 사구활명의 종류를 재가 5종, 출가 4종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14)(日陀4, 1992: 120-124).


2. 청정한 생업

어떻게 사는 것이 사명(邪命)이 아닌 바른 생활, 곧 정명(淨命: 正命)으로 사는 것인가? 홍찬스님은 출가인의 4종 정명을 들고 있으며, 대승보살은 중생을 요익하게 하기 위해 중생과 함께 살아가는 동사섭행(同事攝行)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 15권에서는 보살이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영농공업(營農工業)․상우공업(商佑工業: 상업)․사왕공업(事王工業: 정치학)․서산(書算: 수리학)․계탁(計度: 산수)․수인공업(數印工業: 경리)․점상공업(占相工業: 점술)․주술공업(呪術工業)․영조공업(營造工業: 경영학)․생성공업(生成工業: 축산업)․방나공업(防那工業: 방직업)․화합공업(和合工業: 재판․법률학)․성숙공업(成熟工業: 조리술)․음악공업(音樂工業)등을 들고 있다.

이와같은 기술은 재가보살에게 합당한 내용이다. 요약하면 정명은 뭇 생명있는 자들을 나의 몸과 같이 생각하며 동사섭(同事攝)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생활법이다. 남을 살리는 생화, 남을 살아나게 하는 생활, 한마디로 요약하면 활명(活命)이 바로 정명이다(日陀4, 1992: 124-126). 불교가 생산적인 직업에 종사하여 노력하는 것을 적극 장려한 것은 초기의 교단을 원조한 사람들이 당시의 신흥계급인 도시 상공업자들이었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Ⅳ. 현대의 경제문제와 불교적 대안


  1. 현대경제의 특징과 경제문제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에 따르면, “근대자본주의의 특징은 대중의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재화의 대량생산이다. 그 결과 일반적인 생활수준이 꾸준히 향상되었고, 다수가 점진적으로 부유해졌다. 자본주의는 서민의 프롤레타리아화를 막고 그들을 부르주아의 대열로 격상시켰다.”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에서는 서민이 가장 으뜸가는 소비자이며, 이들의 구매여부에 따라 궁극적으로 무엇이 생산되어야 하는가와 생산품의 양과 질이 결정된다. --- 이 과정에서 대기업은 언제나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대중에 봉사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일반 대중들이 과거에는 알지도 못했고, 따라서 아주 부유한 사람들마저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쾌적한 환경을 누리고 있다. 물론 자동차나 텔레비전 수상기나 냉장고 등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을 소유하는 그 순간, 인간은 그전보다 더 행복감(幸福感)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욕망(慾望)의 일부가  충족되자마자 새로운 욕망이 고개를 들기 마련이다. 이것이 곧 인간의 본성(本性)이다. 그러나 바로 이 강한 욕망이 인간을 경제적 향상의 길로 인도하는 추진력이 된다. 이러한 노력은 합목적적이어야 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 대부분이 옳지 못한 방향으로 나가는 이유는, 다양한 재화가 좀 더 공급되기를 열렬히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부적절한 수단(手段)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물질적 조건들을 향상시키기 위해 유용한 방도는 오직 하나 뿐이다. 인구증가에 대처하여 자본축적(資本蓄積)을 가속화하는 일이다. 노동자 1인당 투자자본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은 재화를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다(김진현 역, 1997: 153-154).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그의 저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The Crisis of Global Capitalism, 1998)에서 “법이나 의술 같은 전문분야, 정치, 교육, 학문, 예술 그리고 인간관계는 시장가치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이런 분야들까지 시장가치의 지배를 받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돈이 최고의 가치(價値)로 작용하고 있다. 돈에는 본질적 가치에 없는 속성이 있다. 돈은 측정할 수 있고, 계량화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돈이면 거의 무엇이든지 살 수 있다. 그러나 돈이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돈의 가치는 교환적 가치이다. 그래서 돈의 가치는 소비를 할 때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돈은 소비를 해야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돈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돈이 목적 자체가 되는 것은 부의 축적이 궁극적 목표가 될 때뿐이다(형선호 역, 1999: 286-287).

나가사키대학(長崎大學)의 나카무라 오사무(中村 修) 교수는, “기존 경제학은 인간의 존재를 노동력(勞動力)이라는 상품으로 취급하고 평가해왔다고 전제하고 있다. 기존의 경제학은 양적 평가만을 행함으로써 오히려 질적 상실을 촉진해왔다. 이는 상품과 노동 질의 상실이라는 형태로 현재 나타나고 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기본원리의 제시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사회를 건설하는 노동에 대해 평가하는 가치기준도 제시되어야 한다(전운성 역, 2000: 214-215). 


2. 선정(禪定)의 경제적 의미

금욕적인 정려(精勵)는 원시불교의 기본적인 생활태도이며, 이것이 곧 불교도의 에토스였음은 막스 베버가 지적한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와 유사하다. 그것은 생산, 유통, 소비, 분배의 모든 경제활동에서 작용하고 있는 경제윤리(經濟倫理)이며, 법(Dharma)을 근거로 하고, 법에서 유래하는 기본적인 태도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자율의 에토스는 근대사회의 고전적 자본주의의 생활태도였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절제(節制)의 덕을 경제윤리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유럽의 중세 또한 검약(儉約)이 경제윤리의 주체를 이루었다. 중세 기독교에서는 근면, 정직, 검약, 자선에다가 기독교 신학 특유의 덕인 믿음, 소망, 사랑을 더한 일곱가지 덕을 가르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불교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육바라밀이 있다. 여기서 보시는 시여, 지계는 절제, 인욕은 관용, 정진은 정려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절제는 재화의 관계에서 보면 검약의 덕이 된다. 이것을 밀의 경제 메카니즘에 맞추어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여래 편집부 역: 142).


생산 - 정진(정려), 근면의 덕

유통 - 인욕(관용), 인내의 덕

소비 - 지계(절제), 사회적 책임

분배 - 보시(시여), 서비스 정신


유통과정에서 정직의 덕과 분배과정에 공평의 덕을 원시불교에서는 진실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어, 오늘날에는 이들의 덕을 공정(公正)이나 정의(正義)라 부른다. 정직의 덕은 불교의 오계(五戒)나 십계(十戒) 가운데서 ‘불망어(不妄語)’에 해당된다. 분배의 공평 및 자원의 적정배분은 ‘불투도(不偸盜)’와 ‘불탐욕(不貪慾)’에 해당된다. 여기서 선정과 지혜는 출세간적인 근거인 교학적인 덕이 된다. 유럽의 중세 경제윤리의 확립에는 수도원의 역할이 컸다. 그 경제윤리는 수도서원(修道誓願)으로 규정되며, 이는 불교의 육바라밀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노동을 소중히 여기는 기독교 수도원의 경제윤리에서 보면 노동은 금욕의 수단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 불교에서는 이와 반대로 모든 노동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출가 수행자의 생활태도로 되어 있다. 이러한 생활태도는 재가불자의 생활에 어떤 규제를 가하는데 에 현실적인 효용성이 있다(위의책: 142-143).

원시불교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를 이루고 있는 근본은 바로 종교적인 금욕의 정신이다. 근면은 인간과 물질관계에서 나타나는 생산적인 측면에서, 물질에 대하여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노동력을 유효 적절하게 투입하기 위한 행위 내지는 행동양식이다. 검약은 소비생활의 측면에서 생산물자를 효율적으로 소비하기 위한 지침이다. 이러한 근면과 검약이 생산(生産)과 소비(消費)의 두 측면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역시 다른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원시불교에서 말하는, 잘못할 경우 ‘육도(六道;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생, 천상)에 떨어진다고 하는 종교적인 계고(戒告)는 현세적인 경제윤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경제윤리를 현실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물질적 욕망의 충족이라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결코 구할 수 없는 것이며, 다행히 어느 정도의 물질적 욕망이 충족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간의 본성이 담고 있는 전부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근면의 덕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본성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며, 인간의 본성으로서 구하는 물질적인 행복을 얻기 위한 행위에 대해서 유효적절한 방법이 될 뿐이다. 따라서 육바라밀 가운데 선정과 지혜는 인간 본성의 보다 심오하고 중요한 것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정신의 진정한 안정과 인간적으로 깊은 영지(靈智)에 눈을 뜨는 것이야말로 물질적인 생활만으로 구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본성을 요구하는 것이 된다. 이 과정에서 화엄경(華嚴經)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두 가지 측면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일편단심 게으름 피우지 않고 묵묵히 구도의 길을 선재동자의 행동이며, 둘째는 신분, 직업, 지위 고하를 묻지 않고 늘 겸손한 자세로 그 사람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는 자세가 그것이다. 경제윤리(經濟倫理)는 어디까지나 세속적 윤리이며, 선정과 지혜의 절대적인 마음의 평안이나 안심(安心)은 종교윤리의 문제이다.

3. 선사상을 통한 해결책


1) 보시(布施)의 경제적 역할

신자(信者)로서 수도의 제1조건은 삼보(三寶), 즉 불(佛), 법(法), 승(僧)에 대한 지극한 신뢰이며, 그것을 신구족(信具足, saddhāsampanna)이라한다. 삼보에 대한 귀의(歸依) 그 자체는 이미 수도의 실행 그 자체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제법(四諦法) 중에는 여덟 가지 정도(正道)를 행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가자들은 실제로는 욕망의 세계에 살면서 수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욕망을 절제하고 마음을 청정히 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재가생활의 표준이 될 수 있는 규정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을 계구족(戒具足, sīlasampanna)이라하며, 넓게는 일반도덕을 포함하지만 좁게는 오계(五戒, pańcasīla)와 지재(持齋, mah'uposatha)15)를 말한다. 이상의 삼보, 오계, 지재 등 세항목을 준수하고 남을 위해 선(善)을 행함과 동시에 심신(心身)을 정결히 하는 것이 재가신자로서의 표준적 수도이다.

또한 출가한 제자를 해탈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 입장에서 다양한 항목으로 분류하여 제시한 것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것이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이다. 삼학중에는 불제자가 닦아야 할 일체의 덕목이 포함되어 있으며, 동시에 모든 수도행 분류의 근본이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너무 포괄적이어서 부처님은 다시 오근(五根) 또는 팔정도(八正道)의 세목에 대하여 다른 입장에서 설하였지만, 그 덕목(德目)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朴京俊 譯: 300-304).

보살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육바라밀(六波羅蜜)를 행해야한다. 사섭법(四攝法)이나 육바라밀 등의 대승사상에 있어서 보시(布施)가 첫째 항목으로 꼽히는 것을 보면 대승사상에서 보시가 얼마나 필수요건이며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보시는 단나(檀那, Dāna)에서 온 말로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다. 유마경(維摩經)의 보시시보살정토(布施是菩薩淨土)라는 말처럼 보시는 곧 사회를 정화(淨化)하며 불국토(佛國土)로 만들려는 목적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이 단지 주는 형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줌으로 해서 상대방에게 그만큼 효과를 주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보시의 내용은 3보시, 4보시, 5보시 7보시 등 다양하고 각양각색이다16). 보시를 크게 두가지로 나누면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로 나누지만, 대승불교에서 종국의 목적은 법시가 되어야 한다. 재시는 그것이 오래 가지 않고 진정한 구제(救濟)가 될 수 없지만, 법시는 그것이 영원하여 완전 구제가 되기 때문이다. 금강경(金剛經)에도 그런 언급이 있으며, 법은 영원하지만 물질은 없어지고 마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보시를 행하는 자세 역시 금강경의 무주상(無住相) 보시라야 한다. 이것은 재시로 인해 법시로 이끌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며, 법보시의 몇배 효과적인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보시를 행하기 위해서는 그 힘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첫째로 법(法)을 줄 수 있는 힘을 갖지 않으면 안되고, 다음으로 물질도 갖추지 않고는 재시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는 보시는 단지 베푼다는 관념이외에 그 주는 힘까지도 겸비한 사상을 말한다. 그래야만 사회도 실질적이고 중생도 구제되기 때문이다(金雲學. 1982: 145-147). 보시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물(物)이 없는 자에게 물을,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보시의 의의이다. 원시불교에서 출가자에게는 재시(財施)를 행하고 재가자에게는 법시(法施)를 베풀어 대승에게로 전향시킨다고 하였다. 재시를 행할 수 있는 보살은 단순히 무소유(無所有)이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명백히 불교가 경제적 기반위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이 경우 재시보다 법시를 상위의 개념에 놓고 출가자들은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말고 오직 공양으로서 정진하라고 한 설교는, 육체노동(肉體勞動)과 정신노동(精神勞動)으로 비유될 수 있다. 오늘날 지식산업이니 정보화산업이니 하여 ‘인간자원(人間資源)’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음에 견주어 볼 때,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아니 하지 않을 수 없다.


2) 발전적 대안: 불교은행(Buddhist Banking)

원시불교나 대승불교에서는 승원은 일반적으로 부동산의 대부, 대출 등의 금융활동을 해왔다. 승원은 사회의 금융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중세 인도의 금융사업은 이와 같은 종교활동의 일단으로써 발전하였다(여래 편집부 역: 31). 한국 불교에서도 이러한 유래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계(契)의 전신으로 알려진 보(寶)는 처음에는 불교의 교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또는 사원의 기본 재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단체사업을 영위하는 식리적(殖利的) 기능을 가졌었는데, 그 후 보는 전제국가의 일반적인 지배체제를 지지하는 속성인 고리성(高利性)을 갖게 되었다. 보는 사원의 기본재원 성격으로부터 공적기관으로 확대되었으므로 민간에서도 이러한 고리성(高利性), 식리적(殖利的 공동체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고리성의 보(寶)와 병존하는 상호부조적인 계(契)가 성립, 발전하게 되었다. 일제시대에 식산계와 같은 것은 파행적으로 변화하여 금융의 하부기관으로서 보호 또는 조장되었으나, 무진계, 식리계, 작파계 등은 금지대상이 되거나 무진회사의 설립에 합류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현대사회에서 계는 사금융(私金融)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이밖에도 친목계나 동창계 같은 것은 아직도 자치적 기능을 유지하면서 존재하고 있다17).

타종교에도 한국의 보시와 유사한 헌금제도(獻金制度)가 있다. 기독교의 십일조와 이슬람의 자카트(Zakhat)18)가 대표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 내용이나 용도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아무튼 이슬람의 자카트는 무이자은행(無利子銀行, interest-free banking)이라는 형태로 발전하여 금융기관으로서 새롭게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이슬람은행은 약 800억 달러의 자금을 관리하고 있다. 이슬람은행의 고객은 무슬림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유럽, 미국 및 거리가 먼 타국가들에게로 확대되었다. 이슬람은행은 빠른 속도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이슬람 가치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이슬람은행은 무슬림뿐만 아니라 비무슬림들로 부터도 재원을 확보한다. 세련된 기술과 최근의 지식을 겸비한 이슬람 금융가들은 이윤(利潤)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동기(動機)를 갖춘 투자기법을 발전시켰다. 오늘날 150개 이상의 이슬람 금융기관이 수천명의 직원들과 함께 전세계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적으로 인정되는 금융기구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이슬람은행제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서구(西歐)를 포함하여 전통은행의 발전을 촉진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의 자카트보다 자율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 보시의 재원을 금융화하는 것이 하나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불교은행(佛敎銀行, Buddhist Banking)'과 같은 금융기관의 설립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의 포교나 불교계 전반에 걸쳐 있는 각종 사업에 기금을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일반 신도들에게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서민은행으로서의 기능도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구상이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보시는 명실상부하게 재시(財施)의 개념을 넘어 법시(法施)의 기능을 수행할 것이며, 경제에서 말하는 빈민구제(貧民救濟)의 개념을 넘어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불교의 참 뜻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육바라밀중 재가자가 실천해야 할 4바라밀에 덧붙여 선사상(禪思想)에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출가자들의 몫으로 남겨진 선정(禪定)과 지혜(知慧) 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이룩하는데 일조(一助)를 기하리라 생각된다.       


Ⅴ. 맺음말

현대 경제의 특징은 대중소비사회로 특징 지울 수 있으며, 시장은 공급자보다는 소비자가 주인이 되고 있다. 현실 세계 또한 ‘세계화(globalism)'라는 기치하에 가족단위의 공동체가 급속히 해체되면서 ‘핵가족화(核家族化)’되는 경향을 심화시킴과 동시에 전 우주(宇宙)를 하나의 가족으로 묶으면서 좁혀지고 있다. 특히 현대의 발전한 정보통신과 TV와 같은 매스 미디어는 이제 지구가 어느 특정 국가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제 나(我)라고 하는 존재가 단순히 독립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국경이나 인종을 초월하여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세계 공동체내에서 식량, 환경이나, 인권 등과 같은 공동 운명체의 틀 속에서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다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국제법의 범주를 초월한 범세계적인 사회윤리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며, 그에 대한 대안을 종교(宗敎)가 제시해야할 시기가 온 것이다. ‘나(我)’라는 자아(自我) 의식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시점에서 무아(無我)를 강조하는 선사상(禪思想)은 이 시대의 경제생활에 좋은 규범(規範)을 제공하리라 본다.

불교의 경제관은 한마디로 ‘중도의 경제관’라 할 수 있으며, 부(富)의 축적 자체를 인간생활 영위의 적절한 수단으로 보았고, 그 수단은 정당한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져야하며 공평한 분배(分配)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불교의 경제관은 자비(慈悲)의 정신에 의한 새로운 국가, 즉 복지국가(福祉國家) 건설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체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근본적으로는 자유주의 사상에 기초한 자본주의(資本主義) 요소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신앙은 자기라는 생각을 놓아버리고, 욕망(慾望)과 무엇인가를 얻는다는 생각을 떠나서 천지에 가득한 본래의 청정한 자성(自性)을 깨닫기 위해 무심(無心)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때문에 좌선(坐禪)을 하는 것이다. 경제생활 또한 인간의 생활이며, 삶의 한 부분을 포함하는 수단이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선(禪)과 경제(經濟)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선과 경제는 인간생활 그 자체에서 출발하여 반야(般若)의 지혜에서 그 귀결점을 찾아야한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재물을 천하게 생각하는 사상이 두드러진다고 생각되지만, 그 반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현세적 재물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출가자는 수행에 정진할 것을 권하였지만, 재가자(在家者)에게는 먼저 그 직업에 충실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직업에는 전혀 귀천의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처음에 기술(技術)을 배우고, 나중에 재물(財物)을 구해야 한다”고 설하고, 직업을 통해서 얻은 재물로 가정을 꾸려가며, 여력이 있으면 저축(貯蓄)하여 불시에 대비하는 것이 곧 건전한 가정생활의 기초가 된다고 설하였다. 부처님은 이처럼 저축을 장려하였지만, 지나치게 절약(節約)하여 수입에 비해 터무니없이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배척하였다.

선사상(禪思想)에서 특히 강조되는 대목은 출가자와 재가자의 경제적 역할을 분명히 함으로써 현실의 물질적인 경제와 정신적인 해결책에 대한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육바라밀 가운데 4바라밀은 재가자의 몫이고, 선정과 지혜는 출가자의 몫으로 돌려진다. 선사상에 있어서 선정과 지혜는 현실세계의 경제윤리를 뛰어넘어 사회윤리의 방향을 제시해줌으로서 물질세계에서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인간의 갈증(渴症)을 정신세계에서 해결하도록 하도록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선은 인간 생활 그 자체이며, 공(空)에 대한 수행으로 종교와 인간 생활 자체를 나누어진 삶으로 보지 않고, 인간생활속에서 선(禪)을 그리고 선속에서 인간생활을 찾으려 했다는 점은 현대의 경제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무튼 보살은 육바라밀을 구도(求道)의 실천행으로 삼아야 하며, 선사상에서 보시(布施)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다뤄진다. 타종교에도 불교의 보시와 유사한 헌금제도가 있다. 그 한 예로 이슬람의 자카트는 무이자은행(無利子銀行, interest-free banking)이라는 형태로 발전하여 금융기관으로 새롭게 자리잡고 있다. 이슬람의 자카트보다 자율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 보시(布施)의 재원을 금융화하는 것이 하나의 새로운 대안(代案)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일종의 ‘불교은행(佛敎銀行, Buddhist Banking)'과 같은 금융기관의 설립을 경제문제에 대한 하나의 실천적인 해결책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화엄경(華嚴經)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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