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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경제 이야기  The Middle Eastern Ec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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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자유무역협정(FTA)

 

홍성민(중동경제연구소장)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이란 국가 간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모든 무역장벽을 완화하거나 제거하는 협정이다. 국가 간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무역장벽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경제블록(Economic Block)이나 경제연합(Economic Union)과 같은 경제공동체가 필요하다. 대표적인 기구가 유럽연합(EU)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대표적인 경제블록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자유무역협정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에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연합국들은 세계경제 개편을 논의하였다. 그 골격은 자유무역체제였으며 관세인하와 무역제한의 철폐가 핵심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통화 질서안정의 기초가 된 IMF 체제와 함께 자유무역의 골격이 된 무역질서를 GATT체제라 한다.

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경제는 국제통화의 측면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 관세의 측면에서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주도적 역할을 해왔으며, 1995WTO 창설을 기점으로 국가 간 무역자유화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지역무역협정(RTA)이 큰 폭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따라서 FTA는 다자주의보다는 지역주의(Regionalism)에 중점을 둔 자유무역체제라 할 수 있다.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는 유럽지역의 경제통합을 위해 1958년 발족되었다.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통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1991년의 ‘마스트리흐트 조약으로 유럽 단일통화의 창출을 추진하고 1994EC EU 변경하여 공동체 통합에 진전을 이룩하였다. 경제협력에서 사장 중요한 변수는 단일통화 사용인데 대부분의 경제공동체가 이 단계까지 이행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 대부분 무역장벽이나 관세철폐에 목적을 두고 있어 최근 WTO체제하에서는 FTA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지역경제협력의 효시는 중동의 경제협력기구에서 찾을 수 있다. 중동에는 형식적 의미가 강하긴 하지만, 현재 1개의 비아랍 이슬람 경제협력기구와 3개의 아랍 경제협력기구가 있다. 중동의 경제협력기구는 1964년 터키, 이란, 파키스탄 간에 발족된 '지역개발협력기구(RCD; Regional Cooperation for Development)‘가 세계 최초로 결성되었다. RCD는 구()소련의 붕괴로 독립한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을 포함한 새로운 경제협력기구로 탈바꿈을 모색하여 1985'경제협력기구'(ECO)로 개편 및 확대되었다.

아랍국가들 간의 경제협력기구가 1981'걸프협력위원회(GCC)‘의 형태로 구체화되기는 했지만, 아랍국가들 간의 경제협력의 구상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아랍의 경제협력이 커다란 성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1980년대 초 석유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걸프만을 중심으로 한 아랍 경제통합의 일환으로 집단적 안보기구 성격이 강한 걸프협력위원회(Gulf Cooperation Council)라는 경제협력기구를 탄생시켰다. 이에 자극을 받은 다른 아랍국가들도 1989'아랍협력위원회'(ACC) '아랍마그레브연합'(AMU)을 각각 탄생시켰다. 하지만 GCC도 아직 통화통합은 이루지 못한 채 경제블럭이나 국가 간 FTA 체결에 주력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경제는 WTO체제하에서 다자주의(multilateralism)와 지역주의가 각축을 벌이고 있으며 강대국을 중심으로 경제블럭이 강화되면서 새로운 경제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19447월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서 체결된 브레턴우즈협정에 따라 194512월 설립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잡은 미국의 주도로 설립된 IMF는 무역거래에서는 자유무역의 안정적인 성장을 주장하며 GATT체제를 출범시켰고, 이러한 실물거래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국제 환 안정 및 국제 유동성확대 보장을 목적으로 IMF를 설립하였다. 한국은 1955826IMF58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IBRD(국제부흥개발은행)IMF의 자매기관으로 설립된 IBRD는 미국 워싱턴 DC에 본부를 두고 19473월부터 출범하였다. IBRD는 장기금융기관, IMF는 단기국제금융기관의 특징이 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여 1999520일까지 총 10차에 걸쳐 195억 달러를 차입하였다. 한국은 당초 상환기일인 20045월보다 빠른 2001823일에 차입금 전액을 상환함으로써 IMF체제를 조기 졸업했다.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으로 194710월 제네바에서 미국 등 23개국에 의해서 조인되어 1848년부터 실시되었다. GATT는 자유·무차별 원칙하에 관세나 수출입제한 등 무역장벽을 철폐하여 세계무역 및 고용의 확대를 목적으로 한다. “제네바 관세협정으로도 불리는 GATT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로 대체되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120여 개국이 가입하였으며, 한국은 196741일부터 정회원국이 되었다.

GATT는 창설 이후 제네바라운드, 안시라운드, 토키라운드, 딜런라운드, 케네디라운드, 도쿄라운드 등 다자간무역협상을 이끌어냈으며, 우루과이라운드를 마지막으로 19951월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GATT체제는 막을 내렸다.

WTO(국제무역기구, World Trade Organization)GATT 체제를 대신하여 국제무역질서를 바로 세우고 우루과이라운드(UR: Uruguay Round of Multinational Trade Negotiation) 협정의 이행을 감시하는 국제기구로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WTO1994415일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125개 국가의 통상대표에 의해 7년 반 동안 진행되어 온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의 종말과 마라케시선언이 공동 발표되면서 199511일부터 정식 출범하였다. 한국은 199511WTO 출범과 함께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WTO가 모든 회원국에게 최혜국대우를 보장해 주는 다자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세계무역체제인 반면, FTA는 양자주의 및 지역주의적인 특혜무역체제로 회원국에만 무관세나 낮은 관세를 적용한다. 1995WTO 창설을 기점으로 국가 간 무역자유화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RTA가 큰 폭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2차 세계대전이전 자유무역이란 협정(協定)이라기보다는 강대국의 통치권내에서 조공무역(朝貢貿易)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조공무역을 현대적 의미에서 해석하면 결국 관세무역이 된다. 큰 틀에서 보면 자유무역을 표방하는 현대의 무역질서도 결국은 보호주의와의 각축은 피할 수 없는 실정이며 그 질서는 강대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동에서의 자유무역의 역사는 이스라엘 솔로몬 왕과 (오늘날 예멘의 전신이었던) 시바의 여왕 간의 밀약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협정의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두 왕의 만남 이후에 시바왕국이 번성한 것을 보면 무역로의 보장은 오늘날 장벽 없는 무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솔로몬 왕과 (시바는 여왕의 이름이 아니라 시바왕국의 여왕을 말함) 시바의 여왕이 만났다는 사실은 구약, 신약 및 코란에 언급되고 있다(The Kings Chapter, 10: 1-13, Sura-The Ant (Al-Naml), 27: 22-24). 두 왕의 만남은 현대적 의미에서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일종의 밀약이며 국제적인 평화협상이었다.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화해는 상황을 순조롭게 해결했으며 그들 사이의 우호적인 정착은 시바왕국의 번영을 가져 왔다.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만남은 향료무역에 대한 교역로 보장을 위한 여왕의 과감한 결단이었다(Wikipedia)

 

그리스 시대에 예멘이 번영하는 행복한 나라라는 사실은 시바왕국을 통하여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부족국가시대에 통일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던 시바왕국은 향료무역을 통하여 국부를 축적하였다. 예멘 상인들은 몬순바람을 이용하여 향료무역에 있어서 육로를 해로로 전환하였다. 그 결과 예멘은 홍해의 무역중심지로서 부유한 나라로 발전하였다.

시바왕국은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후 275년 사이에 번성했던 (오늘날 예멘지역) 남아라비아의 왕국이었다. 시바왕국 존립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기원전 1200년 이전과 이후로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기원후 275년 멸망은 대부분 일치한다. 성서를 통해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이 만났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시바왕국의 존재는 기원전 1000년 이전의 왕국이 확실하다.

시바왕국(Kingdom of Sheba)은 전성기에 남아라비아와 지중해의 가자항구 사이의 항로를 따라 무역을 통해 부유하게 성장한 부유한 왕국이 되었다. 시바왕국은 사바(Saba) 왕국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본고에서는 시바로 통일하였다. 시바왕국은 아라비아 남부의 가자항구와 시바왕국의 지중해를 잇는 향료무역을 통해 풍요롭게 성장한 부유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1000년 아랍인페니키아인과 인도인들은 향료보석희귀동물들의 가죽흑단(黑檀), 진주와 같은 사치품을 교역하며 해상 및 육상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해상무역은 주로 홍해와 인도양에서 이루어졌다홍해에서 해상교역로는 ‘밥 엘 만데브(Bab-el-Mandeb)’로부터 ‘베레니크(Berenike)’로 이어지며 거기서부터는 육로로 나일 강으로 향하며 다시 보트로 알렉산드리아에 도달한다육상교역은 낙타를 이용하여 서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이루어졌다. 인도인들은 카타마란(Catamaran)이라는 보트를 이용하여 인도양에서 서풍(西風)의 도움으로 항해하며 동아프리카와 주로 계피와 계수나무의 향료무역에 종사했다.

시바인들은 무역을 활용함에 있어서 미네아인들을 대체하며 빠르게 남아라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이 되었다. 그 결과 물품은 시바왕국에서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과 우루크, 이집트의 멤피스, 레반트의 비블로스, 시돈, 티레, 그리고 가자항구에서 더 멀리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아시리아 왕 사르곤 2(기원전 722-705)의 통치 당시 무역로는 사르곤 왕의 영역에 제한되었고 아시리아 땅으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사르곤 왕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집트인들은 5대 왕조(기원전 2498~2345년경)부터 푼트 (현재의 소말리아 푼 트랜드 주)와 남부 이웃 누비아와 거래를 해왔지만 그 후 아라비아 남부와 거래를 시작했다. 누비아의 금은 북쪽으로 멤피스의 이집트 수도로 이동한 다음 동쪽과 남쪽으로 육로를 거쳐 시바왕국까지 이동했다.

기원전 1000년 후반기 남서아라비아의 아랍부족들은 남아라비아로부터 지중해로 가는 향료에 대한 육상무역을 통제하였다아랍부족들은 오늘날 예멘지역인 마인(M'ain), 까타반(Qataban), 하드라마우트(Hadhramaut), 사바(Saba), 힘야르(Himyarite) 등의 부족이었다이 시기에 북쪽에서는 나바트족(Nabatean)이 페트라에서 가자(Gaza)까지 네게브(Negev) 사막을 가로질러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역은 아랍인들을 매우 부유하게 만들었다남아라비아 지역은 그리스인들에 의해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라는 의미로 ‘유대몬 아라비아(Eudaemon Arabia)로 불렸으며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생전에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던 곳이다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은 함께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바왕국은 홍해에서 지중해 해상권을 확보하고 이 지역에서 무역로를 확대한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시바의 여왕은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커다란 모험과 함께 결단을 내린다. 시바의 여왕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종교를 확인하고 솔로몬과의 담판을 목적으로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한다.

성경과 코란에서의 해석이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단순한 예방차원의 방문이 아니라 지중해 무역활성화를 위한 일종의 조공을 바치며 무역로의 확보를 모색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시바왕국을 침공할 거라는 경고에 따른 방문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 당시 종교나 사랑을 위해 많은 선물을 가지고 먼 거리를 여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시바의 여왕은 왕국의 번영, 즉 안전한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방문이었을 것이다.

 

시바왕국은 유향의 원산지로 부의 커다란 원천이었다. 사진은 오만 남부 살랄라 지역의 사막에 자라는 유행나무.

 

향료길(Incense Route)은 남아라비아로부터 지중해로 가는 상인들에 의해 장악돼있었다. 이러한 무역은 기원전 7-8세기와 기원후 2세기 동안 가장 수익성이 있었지만 그 이전과 그 후에도 여전히 시바왕국에 의해 지배되었다. 향료길은 약1,931km의 거리로 편도만도 65일이 걸린다. 카라반들은 매일 저녁 다른 도시에 머무르며 상품을 교환하고 낙타도 쉬며 다음날 아침 다시 여행을 계속한다.

비록 많은 상품들이 이 교역로를 통과하지만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유향(frankincense)과 몰약(myrrh)이었다. 남아라비아의 항구는 나무수액에서 이러한 향료를 재배했지만, 인도인들도 (오늘날 예멘의 동쪽에 있는) 까니(Qani) 항구를 통해서 접근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품들은 해안왕국의 북쪽으로부터 마인(Ma’in)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가자항구로 운송되었다.

성경에 따르면, 시바의 여왕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기원전 965-931년경)의 지혜를 직접 실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여행했다. 성경 이야기에서 시바여왕은 다른 선물이외에 금화 120달란트 (3,600,000 달러가치)의 선물을 솔로몬 왕에게 가져왔다. (왕상 10:10). 여왕의 호화로운 선물은 전설적인 시바왕국의 부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아쉽게도 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기원전 8세기이전 남아라비아 지역의 무역은 마인왕국의 미네아인(Minean)들에 의해 통제되었지만, 기원전 950년경부터 시바인들이 이 지역을 통치했으며 하드라마우트, 카타반 및 카니(Qani)의 남부 이웃국가로부터 북쪽으로 향하는 재화에 세금을 징수하며 무역로를 장악하였다.

기원전 2세기말 그리스인들은 인도인들이 어떻게 아덴으로부터 몬순 바람을 이용하여 인도의 서쪽 해안으로 직접 항해할 수 있는지를 배웠고 그 후에 해상무역을 장악하였다기원후 1세기 로마인들은 유대몬에서 중개인을 피하는 새로운 진전을 이루었고아라비아 바다를 용기 있게 횡단하여 직접 인도의 해안으로 갈수 있는 무역로를 개척했다.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 사이에 이루어진 자유무역협정으로 시바왕국이 번성할 수 있었음은 시바왕국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시바왕국이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후 275년 사이에 번성했던 사실은 시바왕국이 솔로몬 왕과의 협상이후 향료의 길(Spice Road)”의 무역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멘의 마립댐은 세계 최초의 인공댐으로 당시 시바인들은 관개를 이용하여 농업은 물론 다른 산업분야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룩했다.

 

그 전형적인 예가 세계 최초의 인공댐인 마립댐(Ma'rib dam)의 건설이다. 마립댐은 농업개발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분야의 발전도 가져왔다. 그 결과 시바왕국은 주도적인 무역국가로 발전했으며 그 당시 그린 예멘(Green Yemen)”으로서 큰 명성을 누렸다. 이러한 농지의 관개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역사가 플리니우스(기원후 23-79)는 시바왕국을 행운의 아라비아(Eudaemon)”로 불렀고, 고대 역사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녹색 국가로 언급되었으며, 후에 로마인들에 의해 행운의 아라비아(Arabian Felix)”로 불려졌다. 고대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공학적 업적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이 댐은 시바왕국의 아마르 와타 1(Amar Watta I, 기원전 760-740년경) 통치하에 건설되었다.

기원전 1세기 행운의 아라비아에서 (오늘날 아덴항과 동일시되는유대몬의 아랍도시는 홍해무역에 있어서 교역품을 바꿔 싣는 환적항이었다유대몬은 1세기경 에르트리아의 필사본 문서(periplus)에 묘사돼있다필사본 문서에 나타난 유대몬 아라비아는 다음과 같다;

 

인도의 배들이 이집트로 가지 못하고 이집트의 배들이 더 이상 항해하지 못하고 이 지역까지 왔을 때 유대몬 아라비아는 한때 본격적인 상업도시였다.”

 

그러나 시바왕국의 무역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23-30)가 육로 대신 해로를 장려했을 때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시바의 명성은 이웃 힘야르 왕국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 쇠퇴하였다.

시바 왕국은 힘야르 왕국과의 빈번한 충돌로 인해 약화되었다. 570년 지진으로 마립댐이 무너지면서 예멘의 시바 왕국의 번영이 끝났다. 코란에서는 유일신을 섬겼기 때문에 죄를 받아 마립댐이 붕괴되었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통치하에서 예멘은 630년에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며 17세기에 오스만 통치하의 예멘은 커피의 요람이라는 명성을 이어갔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시바왕국의 여왕과의 만남은 단순한 종교적 차원의 화해나 그 과정에 담겨있는 사랑이야기로만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유적지나 이집트의 신전 더 나아가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의 벽화에 남아있는 각국 사절단들의 조공모습은 결국 자유무역을 위한 약소국들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오늘날의 의미로 본다면 일종의 관세(關稅)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만남도 향료의 길에서 무역로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친선사절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기록이 전하는 세계 최초의 자유무역협정(FTA)이 이스라엘과 시바왕국사이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근거가 위에서 제시한 두 왕의 만남이후 시바왕국이 이룩한 명성과 번영이다.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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